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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사랑1)
            ―「쥐인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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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것은 사랑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네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없듯이, 내가 네 손을 잡아 줄 수 없음.
-이성복, 「그대에게 가는 먼길」

0. 시작하며

라깡은 스무 살 무렵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우리의 사랑의 관계는 욕망의 방식과 유사하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태가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깡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므로, 혹은 상징계라는 계약(질서, 법)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여된 존재이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기표)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 사물과 언어의 분리,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 아버지의 금지와 법에 의해서 모성적 만족 혹은 충만함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분리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자신의 분리를 결여로서 경험한다.2) 그리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환상 속에, 욕망 속에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환상으로 혹은 욕망으로 분리는 메울 수 있는 것인가? 물론 대답은 ‘아니오’이다.
만약 메울 수 있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이다.
욕망의 환유적 운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망의 은유적 고착을 통해서 ‘그래 바로 이것이야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것이야’라고 응답하는 순간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라는 뭔가 결여됨을 또다시 느낄 수밖에 없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욕망은 질문이며 욕망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말한 것일 게다.

사랑 또한 이러한 욕망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랑의 대상은 이러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존재로서 상상되며 우리는 우리의 결여를 메워줄 대상기표로서 남자, 혹은 여자를 선택한다. 거꾸로 우리가 어떤 대상(기표)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의 결여를 보여준다(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어떤 대상들을 원하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한 선택을 끊임없이 반복한다3). 상대방이 자신의 결여를 메우거나 혹은 상대방의 결여를 메우기를 바라면서. 자신(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해 주거나 혹은 자신(상대방)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온전히 사랑 받기를 환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원한다. 욕망 한다.
서로의 결여를 메우는 행복한 합일(혹은 완전한 합일감이 서로의 결여, 차이를 메우는)이야말로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 아닌가. 물론 고난과 장애가 그러한 합일을 위한 배경으로 드리워져야만 하지만.
그리고 이런 식의 합일, 충만함은 아닐 지라도 상대방을 자신의 거울, 또 하나의 자신으로 투사시키는 경우에, 즉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이상적 자아(자신이 되고 싶었던 완전한 모습)를 발견하고 이 이상적 자아에게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고 한다(자신이 아름답다던지, 착하다던지, 현명하다던지, 혹은 불행하다던지).
자신의 결여를 메우려는 환상이든, 혹은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는 환상이든 일단 사랑은 매혹에 근거한다. 실제 이런 매혹의 지점에서야 환상은 소급적으로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지도.
바로 이 매혹의 원인이 욕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그 무엇(대상 a)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은 언제나 그 사람과 내 속에 있는 것을 넘어서는 과잉이다. 그래서 이 무엇(대상 a)은 욕망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충동이 맴도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목소리, 응시 등은 욕망을 누비며 환상을 구성하지만 또한 그 환상을 넘어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구멍 속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사랑 혹은 욕망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치명적인 유혹 때문이리라.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을 통해서 불가능성(향락)의 한 복판에 서는 것이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무엇, 그 얼룩들, 구멍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사랑의 향락은  바로 이런 불가능성, 고통이지 않을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도 내 몸은 당신을 보고 있소. 당신의 벌거벗은 나체를.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나체를 말하려 하면, 당신의 몸은 다시금 ‘그리움’에서 ‘고통’으로 돌아오고 말아요. 당신의 몸은, 무어라 말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든, 그렇지 않든, 고통이오. 고통은, 그래요 고통은…… 편지를, 더 이상, 쓸수가 없소. 고통은…… 영원히 읽혀지지 않을 것이오.
-채호기의 「가벼운 편지」중(『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욕망의 회로 속에서 이 고통들을 보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자신의 욕망(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의 증상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지니…….


1.

사랑할 때 우리는 도착증자이고 강박증자이며 히스테리자이다. 왜냐면 우리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모든 시도,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들은 욕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강박증은 상대를 무화시키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는 그의 결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박증자냐, 히스테리자냐, 정신병자냐 등의 비하적인 낙인이나 두려운 의심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낙인이나 의심은 오히려 더 심각한 신경증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신경증자이며 정상/비정상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정신분석의 담론들은 좀 더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강박증자들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혹은 사랑의 방식이 어떻게 고착되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라깡주의자(특히 지젝)의 얘기들을 참조하면서 그의 사랑의 방식(혹은 욕망의 방식)과 그 증상 그리고 증상의 해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강박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랑과 미움, 존경과 비웃음 등의 양가감정을 기본 축으로 해서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될 수 있는 전치의 과정처럼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의 엉킨 실타래를 보여준다.
 강박증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의 혼란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증상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미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강박증에 있어서는 미움이 어쩌면 더 강한 본능일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프로이트는 그의 방식대로 과거,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원장면에서 강박증적 사랑의 방식은 고착되었다. 어떻게? 쥐인간의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자.


2. 아버지, 그리고 여자

프로이트에 의해서 ‘쥐인간’이라 명명된 어떤 남자가 그의 진료실에 찾아왔다. 그의 고통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쥐인간의 망상:
“돈을 갚으면 여자와 아버지에게 쥐를 이용한 벌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A중위에게 3.80크로넨을 갚아야 한다.”

쥐인간은 군대에 있을 때 한 중위(N중위)로부터 쥐를 이용한 끔찍한 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이상한 망상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망상에 대한 죄의식으로 수수께끼 같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우체국 아가씨에게 돈을 간접적으로 빌린 일이 있는데 이 아가씨는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음에 들어한 아가씨였다. N중위가 돈을 A중위에게 갚아야 한다라고 실수 한 것을 근거로 그는 사실은 우체국아가씨에게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A중위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는 맹세를 계속 지키려고 하며 심지어는 우체국아가씨에게 돈을 갚고 난 뒤에도 그 맹세를 실행하려는 유혹을 계속 받았다.
이 망상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과 여자에 대한 양가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쥐인간이 실수한 N중위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N중위와 아버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가 실수할 리 없어, 라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또 한편으로는 실수한 명령(불가능한 명령)을 따름으로써 아버지를 조롱하는 양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성적 만족(우체국여자를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죄의식은 성적 만족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방해자로 아버지와 자신의 연인4)을 증오함으로써 오는 죄의식이라 함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이런 죄의식5) 때문에 불가능한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제재를 가한다.

쥐인간은 어릴 적 자신의 성적 만족(리비도)을 억압하는 아버지에게 극단적인 미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쥐인간은 자신의 과도한 증오에 스스로 놀라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을 벌하거나 혹은 반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증오를 억압한다.
이후에도 쥐인간의 사랑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계속 흔들리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혹은 사랑) 때문에 그 여자를 미워한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이 부재한 곳에서만 정상적인 성관계가 가능하다.
연인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반복한다. 사랑과 미움, 특히 그 중에서 미움의 감정은 너무 과도해서 억압되지만 죄의식으로 혹은 과도한 애정으로 변화된다. 강렬한 미움과 강렬한 사랑이 한 쌍으로 붙어 있어 강박증자는 우유부단해지고 자신의 사랑조차 의심하게 된다.
길을 가다가 돌을 발견해도 쥐인간은 고뇌한다. 자신의 연인이 지나 다니는 이 길에서 그녀가 다치지 않게 돌을 치웠다가(과도한 사랑) 다시 돌아와 자신에 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돌을 되가져 놓는다(프로이트는 이것을 미움의 승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랑의 방해자는 모두 죽기를 바라는(애인이 돌보는 병든 가족, 그리고 애인과 친밀한 관계인 사촌)망상을 하고 또 한편 그러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쥐인간 사례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사랑의 방식이 결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쥐인간의 증례에서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어머니와의 결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위행위와 같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혹은 금지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6). 이러한 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쥐인간은 신경증자인 것이라고 라깡은 말했을 것이다7). 이제 여기에서 프로이트와는 강박증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차이가 있는 라깡은 강박증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쥐인간의 사례에서는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
라깡은 강박증자는 분리(결여)를 마찬가지로 환상 속에서 메우는데 그는 자신이 결여된 혹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고집하면서이다. 그는 자신에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그의 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에게 대상이란 자신의 결여를 메워 줄지도 모를 ‘대상 a’를 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화되는 순간(대표적으로 오르가즘)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대상과 거리를 두려한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스스로 교묘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을 한다.
라깡 식으로 보자면 쥐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방해자 아버지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방해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죄의식)으로 대체하여 자신의 사랑(혹은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가 죽었으면 했던 상상도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애인의 가족이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애인이 보고 싶은 그의 과도한 애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애정을 방어하기 위해 죄책감을 발동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가 길가의 돌과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애인을 미워하는 감정이 승리했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지만 라깡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그녀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혼란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전략. 음 이렇게 보니 놀라운 전략가로군.). 전반적으로 죄의식의 승리. 아니 방어의 승리인가?
그러나 스스로를 분리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강박증자가 금지와 억압의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은 이미 금지 당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 대상(혹은 대상 a)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면 아버지는 벌써 죽었다고 안심해서인가?
자신의 리비도를 억압했던 아버지(실제의 아버지가 그러했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단지 한 두 번의 가벼운 질책이 그에게 그러한 확신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를 미워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죄의식)으로 자신의 만족을 억압하려는 쥐인간.
그런 의미에서 쥐인간의 욕망의 원인을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목소리(초자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8) 그러나 실제 쥐인간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충실하다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욕망의 고착을 ‘아버지’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욕망의 환유적 흐름으로 이끄는 대상 a는 ‘쥐를 이용한 잔인한 벌(증오의 기표)’정도일 것이다. 이 증오의 기표를 통해 죄의식을 촉발시키고 결국에는 자신의 사랑,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증상은 타협형성이며 억압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타협이란 만족과 억압의 타협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증상은 만족을 유혹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쥐인간의 리비도적인 충동은 어디를 맴돌고 있을까? 아마도 신체대상으로서는 항문이며 정념은 미움, 가학적인 것이 아닐까한다. ‘쥐를 이용한 벌’이 항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쥐인간의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어떤 것(충동)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쥐인간은 제한적인 만족(향락)이라는 증상을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증환으로서의 증상9)).
왜 그것이 만족인가? 쥐인간은 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이미 그의 그런 망상자체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고, 암호 같은 메시지로 언어화하는 것(증상)에 성공함으로써 만족을 가능하게 했다. 비록 그것이 강박증자의 특징적인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강박증자는 생각하는 것 자체로 성적인 것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가 만족을 얻었다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 아닐까한다.


3. 신경증, 강박증의 해소

프로이트는 분석치료란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을 대체하는 일, 혹은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10)”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번역은 분석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하게 해야한다. 그러나 의식으로 떠오를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의식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전이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분석가는 먼저 ‘전이’가 가능하도록 해야 하며 억압이 이루어졌던 장면을 다시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반복하게 하고 “자신의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을 통해서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결말이 나도록 이끌어야11)”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모호하기도 하다. 특히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이라니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자아나 초자아를 지칭하는 것들이 아닐까한다. 다시 말해 금지와 억압의 잣대를 구성하는 이 심리적 힘들이 “좀 더 유화적이 되고 일정한 만족을 허용할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프로이트, 『강의』 645쪽)”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던 자아가 왜, 어떻게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는가? 프로이트는 여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신분석의 성과(정상이냐 비정상이냐의 구분은 상대적이며 인간은 누구나가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성욕을 가지고 있다. 등등)를 같이 공유함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 수 있는 과정12)을 자신의 분석치료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쥐인간의 분석치료 중에도 이러한 ‘전이’가 일어나며 쥐인간은 프로이트를 아버지의 위치에 갖다놓고 그를 과도하게 사랑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를 자극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미움을 폭발시켰다. 그리고는 프로이트(아버지)가 화가 나서 자신을 때리려 일어선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물론 프로이트는 일어섰을 뿐…….).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며 이해하게 된다(어 내가 왜 그랬지? 왜 일부러 프로이트를 화나게 만들려고 했을까? 내 무의식이 정말 원하는 것은 뭐지? 나는 정말 아버지를 미워했나 ).
이것을 라깡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그는 자신의 환상을 무대화하면서 자신의 환상을 해석하고 욕망의 타자성과 그 타자의 결여를 체험함으로써 횡단한다.
그러나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대리만족을 주는 자신의 증상(프로이트)’을 포기하려고 할 것인가?
지젝은 여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쥐인간의 사례에서처럼 증상은 ‘만족(향락)’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여된 주체에게 주어진 간헐적인 만족(향락)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이 만족이란 무엇인가? 물론 최초의 만족, 충만함은 아닐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실재계의 잔여물, 찌꺼기로서의 (잉여)향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또 이 실재계란 무엇인가? 실재계는 사후적으로 전제된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 상징화에 저항하는 상징계의 빈 구멍, 불가능성이다. 바로 이런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능성(외상적 중핵)으로 인해 (잉여)향락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회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만족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욕망 속에서 어떻게든 이러한 구멍, 결여를 메울 환상을 구축하며 환상-대상을 뒤좇는다. 그러나 모든 방해와 더불어  구멍, 결여, 불가능성, 향락은 증상을 통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증상은 억압과 만족, 봉합(환상)과 결여가 뒤엉켜 있는 고리이다.
이러한 증상의 해소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증상은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중핵(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 증상의 해소란 곧 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억압(상징계)이 없는 세계는 곧 정신병적 세계(죽음충동에 굴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상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 환자가 자기 증상의 실재 속에서 자기 존재의 유일한 실정물을 인정 할 수 있는 순간에 분석과정은 종결된다(지젝, 『숭고』 136쪽)”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0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랑이 서로의 결여를 메우려는 욕망이라면 오직 착각(나르시즘적인) 속에서만13) 두 사람의 합일,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 사랑은 역시 욕망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환상이야”라고 냉소적으로 코웃음치고 돌아서 버릴 것인가?
사랑(혹은 욕망)이 이런 식의 환상에 근거한다는 말은 단지 그것이 허위의식, 가짜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식의 환상을 통한 오인이나 착각은 필연적이며 이런 오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가 오히려 치명적인 착각이다.
진리는 환영을 통한 오인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사랑에 있어서도 유효하다14).
그러므로 돌아선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환상을 횡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실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부연하자면 환상은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상징계) 혹은 주체의 결여,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결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은 상징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공백을 중심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실재는 바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재하는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오인의 형식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환상(욕망)을 통해서만이 진실15)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을 횡단하기란 “라깡이 환상을 횡단하기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환상-대상에 대한 그러한 전도의 경험에 있다. 주체는 언제나 결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원인이 어떻게 그 자체로 결여를 객체화하고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를 체험”(지젝, 『숭고』, 329쪽)하는 것이다.

환상을 횡단한 다음은 증상이 사라지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증상은 우리의 실정적 조건이며  횡단할 수 없는 향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 속에서 결여를, 분리를, 차이를 메우려는 환상, 욕망만이 아니라 바로 그 욕망(환상)속에서 ‘내 속에 있는 나 자신보다 더한 것’, ‘네 속에 있는 너 자신보다 더한 것’을 대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불가능이다.
사랑에 대한 얘기들은 문학 속에서, 영화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속에서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등장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열병이 우리를 인간, 자신, 타자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냉소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냉소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증상 속에서 보여지는 의미화할 수 없는 기표들을 아슬아슬하게 어떤 문형으로 포착해놓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사랑의 증상과의 동일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이 글에 잠정적인 마침표를 찍을까한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외디푸스가 아니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어떤 명백함이라는, 그런 지혜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있을 그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1) 사실 이 글은 사기에 가깝다. 라깡의 글을 간접적으로만 읽고 마음대로 혹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글도 다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지식을 모두는 아니겠지만 최대한  동원해서 해석한 잠정적 결론이다. 주로 참고한 텍스트는 프로이트의 「쥐인간」(『늑대인간』,열린책들), 『정신분석강의 하』(열린책들), 브루스 핑크의 『라깡과 정신의학』(민음사), 김상환․홍준기 『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삐딱하게 보기』(시각과 언어)

2) 이러한 결여는 전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자신은 결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컵은 컵이고 법은 법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배제/결여를 감추기 위한 베일/환상인 것이다. 환상은 자신의 결여를 감추는 형식,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 속에 자신의 결여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징계의 결여는 환상을 통해서 봉합되지만 바로 또 그 환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반복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고착이 일어나 한 대상만을 고집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대상을 찾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이지 않을까?

4) 여기에서 그의 연인은 위치는 다중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축에 서기도 하고 또 한편 아버지와 동일하게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5)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에서 양심, 죄의식이라 불리는 것들은 초자아의 명령에 의한 것인데, 초자아는 이드의 첫 번째 대상리비도 집중이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흔히 알고 있듯이 초자아가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초자아는 의식보다는 이드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 그런데 왜 초자아가 자신을 현시하는 것은 주로 죄의식을 통해서인가. 프로이트는 그것이 이드 안에 있는 파괴본능(죽음충동)때문이라고 한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6) 그래서 쥐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한밤중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망상, “내가 이런 짓을 하면 내세의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라는 죄의식, 제재에 의해서 중단된다.

7) “라깡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곧 (신경증)증상이라고까지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고(원인), 이것 때문에 주체가 신경증자가 된 것이 아니라(결과)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신경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홍준기,「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2002. 48쪽

8) ‘쥐 인간’의 환상이나 강박증적 관념 속에서 표현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 브루스 핑크의 지적처럼 쥐 인간의 욕망의 원인에 접근하는 데 용이할 것 같다. ‘아버지’라는 타자는 ‘쥐인간’에게 최초의 타자이면서 브루스 핑크에 의하면 바로 그의 아버지가 ‘쥐인간’에게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라는 것이다. 대상 a란 내가 어떤 남자에게 강하게 끌렸을 때. 여기서 말한 어떤 남자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남자 안에 바로 주체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 a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9) 증환으로서의 증상에 대해서 지젝은 “향락이 스며있는 기표물이며 사회적인 유대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될 수 없는 얼룩,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실정적 조건(지젝, 『숭고』, 137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재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기표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징적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음으로 그것은 주체에게 만족(향락)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만 상징계가 구조 지어짐으로 상징계의 실정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충동이라는 것도 증환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재계의 압력을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 프로이트,「전이」,『정신분석강의 하』,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15쪽

11) 프로이트, 「분석요법」, 『정신분석강의 하』, 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43쪽

12) 새로운 자아라는 것은 라깡 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상징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따라서 분석치료란 단순히 기존의 질서로 의식화하는, 혹은 언어화하는 의미라기보다 의식화와 언어화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3) 혹은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14)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자신의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증상에서 증환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17쪽.

15) 어떤 진실? 주체와 타자가 결여된, 분리된 존재라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분리가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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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사르트르의 미학 체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토대― 
 
서 문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40년대와 50년대에 사르트르를 일약 전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올려놓은 참여문학론의 이론서이다. 이 책의 제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예술의 현실참여는 문학에 국한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산문에 한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운문으로 되어있는 시는 차라리 음악이나 미술에 가까워서 참여문학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참여문학론 자체가 작금의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대변혁 이전부터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고, 저자 자신이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에서 이미 부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스물 다섯 페이지 밖에 안되는 제1장의 이 짧은 텍스트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말이 많다. 우선 미술이나 시가 순수예술이어서 현실참여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쓰여진 1947년에 이미 존재했던 멕시코의 화가 시케이로스의 혁명화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을 생각해 보면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도 선동적인 판화를 제작한 민중화가들, 그리고 격렬한 구호를 닮은 시를 쓴 민중시인들이 많이 있지 않았던가? 또 한편으로, 이 텍스트에 대한 평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 말이 있다. 그것은 산문과 시를 구분한 이 텍스트의 내용을, 시에 대한 비하 또는 단죄로 규정한 잘못된 해석이다. ) 물론 '순수예술은 공허한 예술과 동의어이며, 이러한 미학적 순수주의는, 착취자로 백안시되기보다는 차라리 속물로 비판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19세기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방어전략' )이라는 구절이 하나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참여문학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책의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기 위해 집어넣은 도입부의 단서일 뿐, 이것을 시에 대한 사르트르의 일방적인 비난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초기 철학서인「상상적인 것」이나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를 참조하여 읽는 독자라면 이같은 오해는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참여시, 혹은 참여미술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않다. 또 사르트르의 이 텍스트가 시를 형편없이 깎아 내리고 있다는 잘못된 독서법도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우리는 다만, 이 책의 1장에서 산문과 시를 구분할 때 그 근거로 제시한 사물과 도구성의 관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의 언어적 실패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히 하이데거의 체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아울러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 미학의 철학적 행로를 그리는 하나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자료체는 어디까지나「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1장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Ⅰ. 사물
무심한 독자가「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집어들고 무심하게 읽기 시작했을 때 그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事物'(chose)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사물이라면 돌멩이, 나무, 시계, 책상 등 무엇이든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가? 그런데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색깔, 꽃다발, 찻잔받침 위의 찻숟가락 소리 등이 모두 고도의 사물" )이라느니, "화가는 화폭 위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거니, 시인은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보는 사람" )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詩) 속에 표현된 시인의 "감정은 사물이 되어, 사물의 불투명성을 갖고 있다" )고도 하고, 랭보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여기서 의문형은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 )고도 했다. 불어에서 chose와 비슷한 단어로는 mati re(물질), objet(물체), substance(실체)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도 역시 사물의 범주에 넣어 생각할수 있겠다. 즉, "시인에게 말의 의미는 물질의 성질로서 주어진다" ), 또는 "시인은 문장을 하나 구성한 것 같지만 실은, 그는 물체를 창조한 것이다" ),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이다" ). 그런가 하면 '사물이 된 단어들'(mots―choses), '물체가 된 문장'(phrase―objet) ) 같은 합성어까지 눈에 띈다.

그렇다면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에게서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하이데거의「사물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해보기로 한다. 우선 사물(chose)이란 좁은 의미로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이다. 돌, 나뭇조각, 가위, 시계, 사과 빵부스러기 등 무생물도 사물이고, 장미, 소관목, 너도밤나무, 전나무, 도마뱀, 말벌 등의 생물도 사물이다. 그런가하면, 넓은 의미로는 사실, 사건 등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무슨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Il se passe l des choses tranges.)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Les choses ne marchent pas comme il faudrait.)라고 할 때나, "사태를 분명하게 밝힌다"(tirer les choses au clair)라고 말할 때 모두 chose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사물의 두 번째 의미는 어떤 계획, 결정, 고찰, 정신상태, 역사적인 사건 또는 대화 중에 앞에서 열거된 것 등 모든 추상적인 상태나 국면이다. 우리말에서도 물건을 표시하는 '것'(이것, 그것, 저것)이 동시에 모든 추상적인 상태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앞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外延들을 종합해 보면 사물이란 "무엇 무엇이라고 명명된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어떤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제 그러면 우리는 사물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사르트르가 숟가락 소리도 사물이고, 색깔도 사물이고, 우리의 말이나 감정도 사물이라고 했을 때의 그 사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런 것들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이 예술적인 태도, 시적인 태도가 되는가를 알아보자. 우선 사르트르가 정의한 사물의 성질을 텍스트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는 골고다에서의 예수의 고뇌를 형상화한 틴토레토의 그림을 예로 들며 골고다의 위에 마치 찢겨 내비치는 듯한 노란 색의 하늘은 고뇌를 '의미하는 것(signifier)'이 아니라 '사물이 된 고뇌'(c'est une angoisse faite chose) )라고 했다. 즉 고뇌는 노란 색으로 찢어진 하늘이 되었으며,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성격인 비삼투성, 확장성, 맹목적, 영속성, 외재성,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의 그 영원성"을 띠게 되었다고 했다. 이 정의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확장성(擴張性)(extention)은 물체적인 것의 고유성을 규정한 데카르트의 용어이다. 데카르트는 도대체 물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길이, 너비, 깊이에 있어서의 확장(擴張)이 물체적 실체의 본성을 구성하고 있다"(「철학의 원리」제2부 4절)라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물건이란 앞, 뒤, 위, 아래로 얼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을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사르트르가 말하는 사물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구체적인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맹목적 영속성(permanence aveugle)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으로서의 사물은 항상 "매번 이것"인 것이다.(une chose est toujours un〈chaque fois ceci〉.) ) 분필은 아침에 보아도 분필이고 저녁에 보아도 분필이며, 이 교실에 있어도 분필이고, 저 교실에 있어도 분필이다. 내가 거기서 눈길을 떼었다가 언제라도 다시 보기만 하면 그것은 매번 분필이다. 여기 있는 책상도 마찬가지이다. 언제 와 봐도 그것은 매번 책상이다. 그것은 우직하게 언제나 그것이다. 그래서 사물은 맹목적인 영속성을 갖고 있다. 사물은 또한 다른 사물들과 한결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방안에 나란히 놓여있는 책상과 책꽂이는 언제나 한결같이 무심하게 나란히 서있다. 만일 두 인간이 방 안에 함께 있다면 그들의 관계는 증오일 수도, 사랑일 수도, 무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건 간에 결코 돌멩이 같은 단단한 지속적인 관계는 아니며,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섬세한 변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다른 사물들과 맺는 영원한 관계(cette infinit de relations qu'elles entretiennent avec les autres choses;)는 사물의 속성이다. 비삼투성(imperm abilit )이라는 말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가령 인간의 의식은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처럼 다른 인간의 의식 속에 스며들기도 하고, 또는 다른 인간의 의식에 침투 당하기도 한다. 두 의식의 대면은 삼투적이다. 그러나 방안에 놓인 두 개의 돌멩이는 그저 무심하게 각자가 돌멩이일 뿐 거기에는 서로 침투하고 침투 당하는 삼투작용이 없다. 따라서 비삼투성은 사물의 속성이다. '다른 사물과 맺는 영원한 관계', 또는 '비삼투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벌써 은연중에 실존철학의 용어를 언급한 셈이다. 실존철학에서는 모든 존재자를 대자적 존재와 즉자적 존재의 두 존재양식으로 가른다. 이때 대자(對自)(pour-soi)는 인간의 의식을, 즉자(卽自)(en-soi)는 사물의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보자면 대자는 인간의 의식과 비슷한 존재양식을, 그리고 즉자는 사물의 성질과 비슷한 존재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 실존철학에서 인간의 의식이란 항상 의식 밖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므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無(n ant)의 상태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은, 다른 대상이 있건 없건 무심하게 '그 자체로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림 속의 색깔도 사물이라는 다음 문장 '그저 단지 초록색이 있고, 빨간색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사물이다. 그 색깔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에서 '그것들은 사물이다'(ce sont des choses)와 '그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elles existent par elles-m mes)는 결국 동의어 반복이며, 뒤의 문장은 앞에 나온 chose의 성질을 설명하는 술어에 불과하다. 외재성(外在性)(ext riorit )이라는 것도 사물, 즉 즉자의 존재양식을 가리키는 실존주의적 용어이다. 그것은 의식의 밖에, 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예문을 보자. 단어의 의미가 단어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사물로 굳어졌다는 다음의 설명에서도 사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나온다. "단어 속에 흘러 들어가, 그 단어의 소리와 시각적 형상에 흡수되어, 두터워지고, 추락한 이 의미는 그 역시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하나의 사물이다." ) 여기서 '창조되지 않은'(incr e)이란 말은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고 원래부터 있는"이란 뜻으로 역시 사물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추락한'(d grad e)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체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추락(d gradation), 하강(retomb e), 전락(chute )은 모두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앞에서 인간의 의식이 대자존재이고, 사물이 즉자존재라고 말했거니와 대자존재가 사물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 그것이 추락, 하강, 전락이다.「존재와 무」에서 그는, 인간이 즉자존재로 떨어져 타인의 시선 앞에 하나의 대상(물체)으로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졌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하고, 이것을 기독교의 원죄(chute originelle)에 비교했다 ). 이때 "추락한 존재의 내 모습을 본다"(me reconna tre dans cet tre d grad ), 또는 "이 세계, 사물의 한가운데에 떨어져서"(je suis tomb dans le monde, au milieu des choses)라는 문장 속에 추락과 하강의 이미지가 사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기만(mauvaise foi)의 분석에서도 즉자존재와 추락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자기기만이란, 원래 끊임없는 無化작용(n antisation)에 의해 자신의 企圖(projet)를 앞으로 투사하는 존재인 대자(對自)(즉 인간의 의식)가, 죽음 이전에는 결코 사물의 상태로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심리상태가 사물처럼 견고한 즉자존재가 된것인양 스스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존재와 무에는, "심리학자들은 원래 脫自的인 이 실존의 추락한 모습을 제시한다" )거나, 또는 "심리적 대상은…추락한 형태로서의 의식의 성격들을 간직하고 있다." )라는 문장들이 나온다. 이때 추락한 형태라는 것은, 원래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대자적 존재인 우리의 심리상태를 마치 사물처럼 굳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대자가 아래로 추락했을 때 즉자존재가 된다. 이것은 대자가 끊임없는 무화작용의 운동성을 갖고 있는 반면 즉자는 부동의 사물적 타성(inertie)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움직이려면 서 있어야하고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는 바닥에 길게 눕지 않는가? 그런데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더군다나 그것이 기계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순간의 선택을 통한 자유의 행사일진대, 그것은 엄청난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긴장은 피곤하고 불안한 것이다. 추운 겨울밤에 길을 잃고 황야나 산 속을 헤매는 여행자를 생각해보라. 쏟아지는 졸음과 아픈 다리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편안히 눕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혹에 굴복하면 그는 얼어죽고, 그의 몸은 한갓 딱딱한 사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대자와 즉자의 관계이다. 대자는 즉자를, 즉 사물의 상태를 원한다. ) 대자의 초월성(대상을 향해 자신을 무화시키는 성질) 자체가 원래 즉자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래서 대자는 끊임없이 즉자에게 이끌리고(hant ), 불리움을 받는다(appel ).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양식인 無의 상태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사물의 상태로 떨어졌을 때, 그는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즉자에게 덥석 물리거나, 즉자의 끈끈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하면 사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대자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니까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대자는 팽팽한 긴장(tension)이며, 즉자는 느슨한 이완(d tente)이다. 그러나 사르트르 이전에 베르크송도 이미 인간의 심리와 물질을 긴장과 이완, 도약과 추락의 관계로 보았다. 그는 심리적인 긴장을 '생의 도약'( lan vital)으로 보고, 도약이 하강하여 추락한 상태를 물질로 규정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플로베르의 성 앙트완느의 유혹 마지막 구절 '물질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싶다. '물질이 되고 싶다.' )에서도 물질이 하강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다시 정리를 해보면, 우리의 텍스트에서 사르트르가 정의한 사물의 성질은 '비삼투성', '맹목적 영속성', '외재성', '다른 사물들과 맺는 영원한 관계', '창조되지 않은 것', '추락한 것'등이다. 그리고 이 용어의 대부분이 은연중에 실존주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음악 속에 표현된 작곡가의 고통이 사물화한 고통이라는 대목에서 자신의 용어들이 실존철학의 그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즉, "실존주의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고통은 더 이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 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실존주의에서 실존(exister)과 존재( tre)는 각기 대자적 존재양식과 즉자적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c'est une douleur qui n'existe plus, qui est.라는 문장은 고통이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물로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의미하는 사물은 우리 주위의 구체적인 물체였다. 그렇다면 고통이나 감정, 말이나 색깔, 소리까지도 사물이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추상적인 것들이 사물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를테면 비유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사물과 도구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앞에서 한번 인용한(주 7을 참조)문장에서 사르트르는 '사물의 불투명성'(l'opacit des choses)이라는 말을 썼다. 불투명성, 이것이야말로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중요한 열쇠의 말이다. 원래 이것은 실존철학에서 즉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 중의 하나였다. 對自는 속이 텅비고, 실체가 없고, 無이므로 투명한데 반해. 즉자는 속이 단단히 차있는 충만한 존재로 우리의 시선이 거기에 가 탁 부딪친다. 그런데 이 불투명성이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Ⅱ. 사물과 도구
사물은 불투명하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 그리고 사르트르에게서 사물은 도구와 대립되는 존재양식이다. 따라서 도구는 투명함일 것이다.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물이고, 무엇이 도구인가? 하이데거는 사물의 성질을 '눈에 띈다' )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그것이 다른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가령 취사용의 가스 레인지나 진공 청소기를 사용할 때 우리는 전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를 돌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청소기를 작동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이 고장이 났을 때 우리의 시선은 드디어 그 기계 자체에 머무른다. 청소기를 오래 써서 많이 낡았고 여기저기 긁히고 때가 끼어 더럽다는 것도 처음으로 '눈에 띈다'. 작동이 잘 되었을 때 그 기계는 마치 투명한 물체인양 전혀 우리 눈에 띄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던 그 물체가 갑자기 집안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게 거추장스럽고, 빨리 치워 버려야 속시원할 것 같고, 나의 시선에, 또는 집안의 질서에 방해가 된다. 그것은 나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성이 아니라 내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치는 불투명성이다. 다시 말해서, 고장난 기계는 사물이 되었다. 이제 사물과 도구의 성질이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도구는 '무엇을 위하여'(wozu)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구두는 사람의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있고, 청소기는 청소를 하기 '위하여' 있다. '무엇을 위하여'라는 용도성이 있고 없고에 따라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가 구별된다. 그런데 이처럼 '무엇을 위하여'를 갖고 있는 도구적 존재가 도구성을 상실할 때, 그때 비로소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물적 존재성이 나타난다.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그것의 존재를 새삼 눈에 띄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눈에 띔', '강제성', '저항성' )이라고 말했다. 고장난 도구는 갑자기 눈에 띄고, 우리에게 빨리 무슨 행동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완강히 저항한다. 이것이 사물의 불투명성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도구적 존재성은 '눈에 안 띔, 재촉하지 않음, 방해되지 않음'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투명하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가 사용불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 도구가 전혀 지장 없이 기능을 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의 형태나 상태 등을 알게되고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과 그것을 주시하며 인식한다는 것은 정반대의 행동이다. "인식함은 어떤 것을 다루며 사용하는 양상의 결여태이다." ) 반대로 도구가, 그 도구적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속에서이다. 망치를 손에 들고 사용할 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형태와 성질을 멀건히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것의 도구적 존재성과 만나게 된다. 이러 저런 사물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망치질을 함 자체가 망치의 독특한 유용성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물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며, 도구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사물과 도구가 따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해 있는가? 우선 도구란 무엇인가?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이때 만년필은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다. 벽에 못을 치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때 망치는 못을 치기 위한 연장이다. 이처럼 도구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도구는 결코 어느 하나만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무엇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물인데, "수단성이라는 구조 속에는 이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시(指示)(renvoyer)가 숨겨져 있다" ). 이 말은, 어떤 수단의 목표가 또 다른 목표의 수단이며, 이런 무수한 목표와 수단의 고리들이 연결되어 도구연관성의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책꽂이는 책을 꼽기 위한 수단이다. 이때 책꽂이의 목적은 책이다. 그러나 한편, 책은 방 주인의 독서를 위해 놓여져 있으므로 그것은 독서행위라는 목적의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지시(指示)한다. 그러나 또, 독서는 방 주인이 어떤 학문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 이번에는,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최종 목표인가? 그것은 또, 어느 연구소의 연구를 위한다던가, 또는 그의 생계비의 소득원이라든가 하는 다른 목표의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도구 복합체의 영원한 지시성(指示性)'(renvoi l'infini des complexes d'ustensilit )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이 도구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물간의 근본적인 관계, 그것은 도구적 관계이다." ) 그렇다면 사물과 도구는 어떤 것이 먼저인가? 먼저 사물이다가 나중에 도구가 되는가, 아니면 먼저 도구이던 것이 나중에 사물로 드러나는가? 하이데거가 먼저, 그리고 사르트르도 나중에 이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사물은 언제나 동시에 도구인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와 무』에 나오는 '사물-도구'(chose-ustensile) )라는 합성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그와 비슷한 다른 합성어들(mots-choses, phrase-objet)과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사물이 된 도구가 아니고, 사물과 도구가 서로 등가적인 관계이다. 모든 사물은, 그리고 모든 도구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도구이다. 땅 위의 돌멩이를 집어 벽에 못을 쳤다면 이때 돌멩이는 훌륭한 연장이 된 것이다.
 
 
Ⅲ. 예술적 질료의 사물성
여기 탐스러운 흰 장미꽃 다발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장미를 보고 한 사람이 "이 장미의 꽃말은 '정숙'이야. 그래서 나는 이 꽃을 좋아해"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때 이 사람은 이 장미를 장미로서 보기를 그친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장미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정숙함'이라는 추상적 덕성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흰 장미의 소담스러운 모습이나 은은한 향내에는 관심조차 없다. 마치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내다 볼 때 우리의 시선은 유리를 통과하지만 그 유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때 장미는 마치 유리창과도 같은 투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정숙함'이라는 덕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옆에서, 이 장미의 꽃말에는 아랑곳없이 꽃 자체의 고운 자태와 향기에 감탄했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 즉 목적은 장미꽃일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장미꽃은 그의 시선을 가로막는 불투명성이다. 그의 눈길은, 마치 단단한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 그렇게 그 장미꽃에 가서 탁 부딪친다. 그 장미꽃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춰 선다(il s'arr te). ) 이때 장미꽃은 그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장미는 사물이 된 것이다. 장미는 원래 사물이지 않은가, 라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의 예를 들어보자. 커피나 홍차를 저은 후 찻숟가락을 찻잔 받침에 내려놓을 때 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늘 무심히 지나쳐 버렸던 이 소리가 유난히 마음에 파고들며 뭔가 알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나는 머리 속에서 아까 들었던 그 소리를 자꾸만 반추해본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소리에 자꾸만 다시 돌아와, 그 소리의 성질 앞에 멈춰 서서(il s'arr te la qualit du son) ), 그 소리 자체에 매료된다. 평소에 투명했던 그 소리는 지금 불투명하게 되었고, 그것은 사물이 되었다. 이번에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생각해 보자. 추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구상화의 경우에도 화가가 초록, 빨강, 노랑 등의 색깔을 칠하는 것은 단순히 나뭇잎이 초록색이니까, 또는 꽃이 빨간색이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마티스의 빨간 카페트는, 그가 그린 방의 카페트가 실제로 빨간색이어서가 아니다. 만일 그가 현실 속의 어느 방을 그대로 딴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면, 화폭 위의 그 방은 현실의 어느 방을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화폭 위의 색깔은 전혀 그런 의도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 색깔 자체에 매혹된 사람이다(il y revient sans cesse et s'en enchante). )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 그 색깔을 내기 위해 고심하며 색배합을 하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이때 색깔은 사물이 되었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앞에 와서 머무르는 불투명의 사물이 된 것이다. '물체가 된 색깔'(couleur-objet) )이라는 합성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색깔만이 아니다. 형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화가는 날아가는 새, 접시 위의 물고기, 또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을 화폭 위에 그릴 수 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새나 물고기 또는 집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기 위해 그것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모델로 삼은 새나 물고기 혹은 집이 실제로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그림은 그대로 그것들을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그 대상들을 그대로 옮겨 그린것이라면 사진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 말은 물론 이 그림들이 사실 속의 물건과 닮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닮고 아니고가 무의미하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을 그림으로 나타내려는 것이 화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화가가 종이 위에 선을 그린 새나 물고기나 집은, 새를, 물고기를, 또는 집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다. 만일 새를 지시하기 위해 새의 그림을 그렸다면 우리는 그 화폭 앞에서 화폭을 유리창처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어떤 새의 모습을 연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화폭을 통과하지 않고 그 앞에 머물러 그 새의 순수한 형태와 색깔에 한없이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새의 형태는 사물이 되었다.
 
화가는 자기 화폭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le peintre ne veut pas tracer des signes sur sa toile, il veut cr er une chose;) )
 
물론 이렇게 창조된 '색깔-물체'가 화가의 은밀한 경향을 반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말이나 표정이 우리의 분노나 고통, 또는 기쁨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듯이 그렇게 그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호는 아니다. 틴토레토의 그림을 예로 든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골고다 언덕 위의 하늘을 노란색으로 칠한 틴토레토는 예수의 고뇌를 의미하기(signifier)위해, 또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고뇌를 야기하기 위해 이 색깔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고뇌를 느끼며 이 색깔을 칠했다 해도 이 노란색은 고뇌의 기호는 아니고 차라리 '사물로 굳어진 고뇌'일 뿐이다. 만일 화가가, 또는 음악가가 자신의 어떤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했다면 이때 색과 소리는 완전히 언어와 똑같은 기능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예술은 아니고 도로 표지판이나 광고 차원의 실용적인 기술일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말해본다면 예술가는 색깔이나 소리를 언어로 보지 않고 ) 사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럼 언어 자체를 재료로 예술작품을 만든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도망치자, 저리로 도망치자, 새들이 취한 것 같다.
하지만, 오, 내 마음이여 수부(水夫)들의 노래 소리를 듣자.
(Fuir, l -bas fuir, je sens que des oiseaux sont ivres.
Mais mon coeur entends le chant des matelots.) )
 
여기서 둘째 연의 '하지만'(Mais)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연결해 주는 기능이 전혀 없다. 그저, 마치 마을 입구에 우뚝 서있는 거석처럼 문자의 앞에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말은 사물을 지시하는 대표적인 기호이지만, 시에서는 말조차 기호가 아닌 사물이 되고 있다. 또 한편을 더 보기로 하자.
 
오 계절! 오 城들이여!
결점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O saisons! O ch teaux!
Quelle me est sans d faut?) )
 
이 시의 둘째 연은 의문형으로 되어있으나,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누구이고, 또 질문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이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대답인 듯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 질문이며, 사물이 된 질문이다(주8을 참조할 것). 독자는 이 질문을 넘어서서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지 이 문장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을 소리내어 읽을 때의 아름다운 울림과, 그것이 주는 어떤 이미지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산문에서 말들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 다시 말해서 기호이지만, 시에서의 말들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사물이 된 단어들'(mot-chose), '물체가 된 문장'(phrase-objet)이라고 썼던 것이다. 시 속에서 단어들은 마치 사물처럼 서로 끌어 잡아 다니거나 밀치기도 하고, 혹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이처럼 사물이 된 단어들이 모여 이루어진 문장은 그 역시 '물체화한 문장'일 수 밖에 없다.
 
 
Ⅳ. 언어의 도구성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색깔이나 소리 같은 추상적인 것도 사물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는 대자존재의 의식의 소산이므로 그 자체가 현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호이다. 기호는 도구이며, 그 도구의 성격은 표시성이다. 도로표지, 경계석, 항해용폭풍우표지, 신호, 깃발, 상장(喪章)등이 모두 기호이다. 행사장에 표시된 화살표는 사람들을 그리로 안내하기 위한 표시이다. 그 화살표는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지시(renvoyer)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도 무엇을 지시한다. '책상'이라는 말(그것을 음성으로 말했건, 종이 위에 글로 썼건 간에)은 책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이지, 그 자체로 무슨 물건은 아니다. 우리는 매번 무거운 책상을 대화 상대방 앞에 들고 나오지 않기 위해 '책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바로 윗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시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한다는 말을 썼다. '위하여', 또는 '편리하게 사용'은 무엇을 상기시키는가? 바로 도구성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기호는 '가리킴의 목적'을 갖고 있는 도구이며, 기호의 존재론적인 근원은 지시성(指示性)에 있다. ) 그런데 언어는 과연 기호인가, 만일 그렇다면 기호로서의 언어는 도구인가 아니면 현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하이데거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가 사물을 동시에 도구적 존재로 규정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물성과 도구성으로 파악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뭔가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든다. 위험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아까 집어든 물건이 망치인지 나무 막대기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 신체의 연장(延張)이라도 된다는 듯이, 여섯 번째 손가락, 또는 세 번째 다리라도 된다는 듯이 그것을 전혀 대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타인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주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마치 우리 감각의 연장같기만 하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 뒤의 다른 목표를 향해가느라고 (en le d passant vers d'autres fins) ) 언어 자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언어 앞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며, 이 도구의 목적은 의사소통이다(la fin du langage est de communiquer). ) 언어가 이처럼 도구인 것은 근원적으로 그것이 사물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직 동물적 상태로 살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말을 한 두 마디씩 만들어 내던 때를 한번 상상해 보자. 매번 꽃을 꺾어 상대방 앞에 들고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언젠가 누구인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앞으로는 이것을 꽃이라고 부르자. 내가 꽃이라고 말하면 언제나 그것은 이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꽃'이라는 말은 빨간색의 어떤 예쁜 형태를 가진 물건을 가리킬 뿐(指示) 그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을 이름 지을 때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헤겔이 말했듯이, 본질적인 사물 앞에서 그 사물의 이름은 비본질적이다. ) 그러니까 '꽃'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빨갛고 예쁜 어떤 형태의 실체, 그것이 중요하지 '꽃'이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시선은 마치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말을 통과해,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현실 속의 어떤 사물을 향해간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이 언어도 투명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다른 누구에게 전할 때 그 사람의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지 못하면서 그 내용은 정확히 옮길 수 있는 것, 이것이 언어의 투명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벽에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사용하듯이, 우리는 머리 속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는 세계 속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텍스트에서 사르트르가 '사용한다'(utiliser, 또는 se servir de)라는 말을 이탤릭체로 쓴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라는 도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Ⅴ. 산문과 시
언어는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 불투명하기도 하다. 어떤 말이나 글 앞에서 내용보다 언어 자체에서 문득 마음이 빼앗겨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언어가 도구 아닌 사물로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물질성에 매료된 사람, 그는 아무리 예술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 순간에 이미 예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참여예술의 경계를 설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구분에서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영역구분이 무의미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그는 단지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는데, 그것은 오로지 예술의 질료를 사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도구로 생각하느냐의 기준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산문과 똑같이 말이라는 질료를 사용하는 시가 오히려 음악, 미술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 미술, 시를 예술이라고 지칭하고, 소설, 에세이, 팜플렛등 말을 사용하는 모든 글을 산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실참여는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장르, 즉, 산문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문으로 된 소설이 반드시 언어의 도구성에만 의존하고 그 사물적 측면은 도외시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이와 같은 단순한 이분법이 그의 문학론을 좀더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게 했으며, 나중에『집안의 백치』에서 그 자신도 이것을 부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작가는, 만일 그가 원한다면, 누추한 집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이 사회의 불의의 상징으로 삼아 독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회 비판적인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시는 어떠한가? 산문도, 시도 똑같이 언어를 질료로 사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소설가도 손에 힘을 주어 원고지 위에 글씨를 쓰고, 시인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거기에서 그친다. 작가는 자기 머리 속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색깔을 이것저것 골라 합성을 하듯이, 또 음악가가 이런저런 높낮이의 음을 합성하여 노래를 만들 듯이, 그렇게 단어를 이리저리 합하여 '시'라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산문이 의미작용의 작업이라면 시는 낱말이라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천진난만한 유희이다. 언어를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는 차라리 미술이나 음악의 영역과 가깝다.
 
기호의 왕국, 그것은 산문이다. 시는 회화, 조각, 음악의 편이다.
(l'empire des signes, c'est la prose; la po sie est du c t de la peinture, de la sculpture, de la musique.) )
 
이때 우리는 시인의 말을 이 세계의 어떤 양상을 가리키는 기호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속에서 이미지만을 본다. 시인이 버드나무, 또는 물푸레나무라고 했을 때 그 말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실재하는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을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들이 가진 의미마저 완전히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미가 없었다면 말들은 그저 소리와 철자로 모래알처럼 흩어졌을 것이다. '보라빛'이라는 세 글자가 하나의 통일성으로 단단히 묶일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의 색깔을 지칭하는 그 말의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시인이 그 말을 썼을 때는 현실 속의 진짜 보라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가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시어는 사물이다. 이처럼 언어를 사물로 보는 태도를 사르트르는 '시적(詩的) 태도'라고 부른다.
시인은 단숨에 도구-언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보는 시적인 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했다.
(le po te s'est retir d'un seul coup du langage-instrument; il a choisi une fois pour toutes l'attitude po tique qui consid re les mots comme des choses et non comme des signes.) )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공식이 세워졌다. 소설가 또는 산문가는 말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시인은 말을 도구가 아니라 사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일'(contempler les mots de fa on d sint ress e) )일 뿐이다. '바라보다'라는 것은 그대로 하이데거의 인식과 도구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위이며, 단지 그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르트르를 앞질러서, 시인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Ⅵ. 언어의 실패로서의 시
언어가 1차적으로 도구임에 틀림없다면, 그것을 사물로 관조한다는 것은 언어의 도구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도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언어 본래의 목적인 의사소통이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실패( chee)가 사르트르 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 위에서 솟아오른다"(le langage po tique surgit sur les ruines de la prose.) )라는 문장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진해서 언어의 도구성을 거부한 사람이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실패가 그대로 구원이 된다. 애당초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와 같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아닐까? 예술이 아닌 현실 생활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어떤 목적의 수단이다. 내가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잡으려고 손을 뻗칠 때, 손을 앞으로 내뻗는 행동은 연필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도구성의 고찰에서 보았듯이 모든 수단은 투명하여 우리 눈에 안 띄고, 우리의 관심도 끌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연필일 뿐,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치는 행동은 부차적이고, 덜 중요하고, 비본질적인 가치일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목표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 관계를 전도시킨다. 원래의 목표가 흐릿해지고 중간 단계의 수단만이 남은 것, 그것이 그 옛날의 무훈담이나 춤이 아니었던가? 시(詩)야말로 이러한 전도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라면, 항아리는 물긷는 처녀가 그 속에 물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지만, 시에서는 그것이 물긷는 처녀의 우아한 자태를 위해 존재한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가 용감하게 싸웠겠지만, 시(詩)에서는 헥토르나 아킬레우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킨 시인에게 있어서 말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망가진 연장이다. 도구에서 도구성이 벗겨지면 거기에는 사물이 남는다. 유용성이 우리 행동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무용지물은 우리 행동의 실패를 뜻한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그것의 실재성과 개별성을 되찾고, 이번에는 인간의 실패의 도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말의 의미는 그 자체가 순수한 소통불능성이 된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말에 대한 순수직관으로 대치되고, 오히려 실패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이 생긴다. 사르트르 미학의 또 하나의 주요 개념인 '지는 자가 이기리라'(Qui perd gagne.)의 의미가 그것이다.
시는 '지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죽일 정도로 패한다.
(La po sie, c'est qui perd gagne. Et le po te authentique choisit de perdre jusqu' mourir.) )
이 개념은 나중에 플로베르를 다룬『집안의 백치』에서 좀더 심화되고 확대되어, 19C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9C의 예술만이 아니라 산문과 대비된 시 전체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시인은 예술에서의 승리를 위해 실제 인생에서는 패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시인은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실제의 인생에서 실패한다고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현실에서의 실패가 시인의 원초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를 망가진 도구로 간주하는 행위가 어떻게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도구연관의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책꽂이는 책을, 책은 독서를, 독서는 연구를, 이런 식으로 이 세계는 촘촘한 망상(網狀)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구연관의 세계이다. 그 어느 것도 고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시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란 결국 모두가 나에 의해 행해져야할 어떤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책은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빗자루는 내가 쓰레질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계의 도구성의 전체는 정확히 나의 가능성과 일치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대자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가능성의 총화이다. 그렇다면 도구란, 사물에 투사된 내 가능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 다시 말하면 사물 속에 각인된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도구연관의 거대한 사슬로 이어져 있으므로 그 중의 어느 고리 하나만을 끊어도 전체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이 세계의 도구적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인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세계 안에서의 내 인생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가 결코 완벽하게 쓸모 있는 연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는 매체이다. ) 일상언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섬세한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문학 작품에서 시인의 머리 속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언어 이전의 어떤 생각을, 시인은 언어라는 기성품의 주물 속에 집어넣어 시를 만든다. ) 따라서 그의 시 작업은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실패( chec)라는 말은 도구연관의 세계 속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 뿐, 시인이 추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美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불운'(Guignon)이나 '저주'(mal diction)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집안의 백치』를 읽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던「문학이란 무엇인가?」제1장의 주(註)4번의 마지막 문장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산문의 이의제기는 좀더 성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면, 시의 이의제기는 패배의 이름으로 행해 진다. 그러나 그 패배는 모든 승리를 은닉하고 있는, 숨겨진 패배일 뿐이다.
(Mais la contestation de la prose se fait au nom d'une plus grande r ussite et celle de la po sie au nom de la d faite cach e que rec le toute victoire.) )
 
이 문장을, 산문은 문학의 성공이고, 시는 문학의 실패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구적 측면과 사물적 측면에서 고찰한 언어의식의 결과이며, 또, 열렬한 참여문학의 외피로도 감추지 못했던 사르트르의 은밀한 미의식의 내비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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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전시에나 평상시에나, 나는 책을 안 가지고 여행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책 한 장 읽지 않은 채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나가기 일쑤이다."라고 말하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사려 깊은 한 인간의 성찰의 기록이다. 몽테뉴에게 성찰은 고독의 시간 속에서 숙성되었다. "나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는 것보다는, 늘 혼자 있는 것이 어쩐지 더 견디기 쉬울 것만 같이 여겨진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깨침을 위해 잠을 자지도 않고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는 선사(禪師)의 면모를 풍긴다. "사는 위치가 외지다는 것은 사실인즉 오히려 나를 밖으로 더욱 확산 확대시킨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즐겨 나라일, 세상일에 골몰한다. 루우브르궁이나 군중 속에서는, 나는 나의 껍질 속으로 도사려 든다. 군중은 나를 나 자신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몽테뉴의 고독은 협소한 자아를 넘어 세계의 한 가운데에 몽테뉴를 위치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재판하기 위해, 나 자신의 법률, 나 자신의 법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혹하리만치 준열한 자기심판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솔직하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정한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 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라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천상의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지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엄숙한 권위나 이론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때론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다. 치열한 반성은 곧 반성하는 자신의 자리까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몽테뉴의 반성은 깊다. 몽테뉴는 때론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고백한다.

 수상록의 '독자에게'의 마지막 구절은 상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여,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시시한 주제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함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안녕"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 바보가 필요하다. 실용과 이익과 계산만이라면 세상은 너무 건조하다. 때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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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은 『바람은 담는 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연두색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그것 자체로서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단순한 것은 무엇이나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연두색의 싹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싹은 조금 더 자라고 있고 그 연두색은 어느새 조금 더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두색은 수직의 솟아오름의 시작의 색깔이다. 이 수직의 말 없는, 그러나 생명에 찬 솟아오름이 '구슬을 꿰는(통사적인)' 저 수평적이고 산문적인 수고의 가치와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연두색이지표를 떠밀고 솟아오는 그 순간의 주위에는 투명한 침묵이 가득하다. 지혜의 침묵이다.(P.49)

 

나는 그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의 겉표지를 떠올렸다. 모네의 <수련>이 파스텔빛 연초록에 녹아있는 아름다운 표지다. 15년 전에 나온(1989) 책이지만 겉표지만은 항상 싱그럽다. 아마도 연초록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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