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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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의 이중성을 해부하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을유문화사 
 

서양 군대의 경우 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이 보통 4대 1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전투가 벌어졌던 미얀마에서 생존자가 전병력의 20분의 1이었지만 일본인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된 미국의 눈으로 볼 때, 지금까지 싸워온 적중에서 일본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적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무부는 여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1887 ~1948)에게 일본인의 의식 구조를 연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연구의 결과 ‘일본인의 행동패턴’이라는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이 보고서에 인류학적 내용이 보태어져 1946년에 나온 책이 『국화(菊花)와 칼』이다.

베네딕트는 이 책을 일본과의 교전 중에 집필했다. 때문에 일본에서의 현지조사가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으로 책이나 논문, 영화와 신문, 그리고 미국에서 자란 일본인들과의 인터뷰만으로 책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라는 상황은 연구자로 하여금 감정적 동요에 들뜨게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는 냉정했다. “전쟁 중에 적을 나쁘다고 철저하게 깎아내리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인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는가에 있다. 나는 전시 중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부정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로서 그것을 이용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냉철한 눈으로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미국적 실용주의 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고 또 지키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 수치를 느끼고, 당혹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에 관해 기술한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분석하여,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과 관념의 유형[패턴]을 파악한다. 
 

저자는 먼저 일본인들의 행동 패턴의 원리로서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이 개념이 인간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각 계층이 가지는 알맞은 위치를 중시했고, 어느 누구도 그 선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대와 성별, 연령 등에 따라 계층 제도 속에서의 한 사람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학습된 계층 제도의 습관은 경제나 정치 등 넓은 영역의 생활에까지 적용된다. 일본 봉건 사회의 계층은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무사, 농민, 공인, 상인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계급에 따라 일일이 규정되어 있었고 그 정밀한 구도 안에서 안전과 심리적 보증을 얻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인 메이지 유신에서도 이 계층적 관습의 발판을 없애지 않고 단지 거기에 새로운 위치를 주어 그것을 존속시켜 나갔다. 일본은 철저하게 계층제도를 신뢰하고 있다. 

하층 무사 계급과 상인계급의 결탁 속에 키워져온 새로운 정치가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전 일본 땅에서 도저히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뤄냈다. 모든 계급적 차별을 철폐했고 학교를 설립하고 불교의 세력을 제한했으며, 단발령, 천민 해방과 같은 파격적인 과업들을 진행켰다. 근대적 헌법과 제국 의회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은 근본적으로 일본 사회를 지탱해온 계층 구조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쇼군[일본의 역대 무신정권의 막부(幕府)의 수장(首長)을 가리키는 칭호]을 제거하긴 했지만 분명 유신은 천황 중심제로의 복고가 그 기본목표였다. 천황 중심적인 국가관리의 영역과 기존 세력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정치, 사회, 종교 구조를 이원화해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들의 알맞은 위치와 자리'를 인식하며 살도록 했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이러한 계층 제도의 가치관이 적용된 예로 볼 수도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일정한 위치가 주어져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같은 달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와 자리'를 인식하고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계층제도의 가치관이 힘을 기준으로 모든 세계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식민주의의 논리로 귀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인의 관념 체계의 기저에는 ‘온[恩]'과 '기무[義務]'와 '기리[義理]'가 있다. 남으로 받은 은혜인 ‘온’은 갚아야 할 빚이다. 온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거운 짐이 된다. 따라서 남에게 온을 입히는 것은 그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남으로부터 필요 이상의 은혜를 입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온에 대한 보답의 의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먼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는 의무인 '기무[義務]'가 있다. 이것은 곤란한 요구라 하더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이다. 천황, 법률, 국가에 대한 의무인 주[忠], 양친과 조상에 대한 의무인 고[孝], 자기의 일에 대한 임무인 닌무[任務]등이 이에 속한다. 다음으로,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는 '기리[義理]'가 있다. 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야하는 것이 기리다. 내가 남으로부터 받은 만큼 그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가 바로 기리다. 기리를 지키지 않는 인간은 명예와 체면을 깎인다. 기리를 지키지 못하면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을 모르는 인간으로 폄하된다. 기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 일본인들은 극심한 우울증이나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심한 경우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채무일이 가까워오는 데도 갚을 길이 없어 자살을 하는  채무자도 있고, 교실에 걸려있는 천황의 사진이 타버렸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는 교장들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구겨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리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리란 가신이 그의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신이 주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갑자기 터무니없는 증오로 일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리를 중시하고, 명예를 더럽히는 치욕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2차 세계대전중의 포로수용소에서 보여주었던 일본인 포로들의 태도다. 일본인 포로들은 연합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름을 더럽히는 치욕을 그 무엇보다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본인들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포로가 되는 것은 곧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요,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가 됨으로써 생물학적 목숨은 붙어있을지라도 일본인으로서의 사회적 생명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본인으로서의 삶은 끝이 났으니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 기리의 이중성이다. 고참군인으로 오래도록 군대생활을 한 극단적인 국가주의자였던 한 일본인 포로는 미군들에게 탄약고의 위치와, 일본군의 병력 배치를 세밀히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항복 일주일 전만 해도 죽창을 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인들은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듣자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로 돌변하기도 한다.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런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매우 절제되고 온유한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호전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자기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게 되면 무장된 진영으로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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