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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ㅣ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의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2007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된 무인 단속카메라 중 20퍼센트가 가짜라고 한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운전자는 무인 단속 카메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다. 결국 무인 단속카메라 앞에서는 스스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운전자의 이런 자기 통제 행위는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1791년에 만든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에서도 나타난다. 판옵티콘은 한 지점에서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는 감옥구조다. 중앙에 원형의 감시탑을 세우고, 바깥의 원둘레를 따라 감방을 만들면 감독관이 머물고 있는 중앙의 감시탑 안에서는 감옥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죄수들은 감독관을 볼 수 없다. 시선은 불평등하다. 한쪽은 볼 수 있지만 한쪽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는 판옵티콘의 이러한 불평등한 시선의 구조에서 예기치 않은 권력의 권력효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감독관이 자리에 없더라도 죄수들은 감독관이 있다고 여겨 실제로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죄수 스스로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감시의 내면화, 이것이 판옵티콘의 강력한 효과다.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의 부도덕한 행동이 의심스럽다면 사장은 간단하게 계산대에 감시카메라를 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절도범도 막고 직원의 행동까지 감시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계산대 직원이 사장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사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좀더 유연하고 고상한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소위 ‘정신교육’이 한 방편이다.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와 같은 강령들을 피고용인에게 끊임없이 내면에 주입시키는 교육이나 해병대 캠프와 같은 집체교육 프로그램을 동원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좋다. 그 결과 권력자의 뜻에 따라 잘 교육받은 피고용인은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푸코는 학교나 군대는 권력자의 뜻대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훈육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학교나 군대에서 가르치는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도 결국은 권력자의 이익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단지 권력이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흥과 쾌락이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근검과 절제는 정상으로 분류되는 식이다. 그러나 권력이 매기는 가치의 등급이 절대적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과거의 권력은 총칼을 내세웠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인 권력은 물리적인 폭력을 앞세우는 무자비한 권력이 아니다. 군대와 교육과 병원과 같은 문화적인 외피를 걸친 권력이다. 근대적 권력은 군대를 총칼을 동원하지 않고 권력의 뜻에 맞게 사람들을 길들인다. 채찍을 동원하지 않고 판옵티콘이나 감시카메라와 같은 감시체계를 이용해 스스로를 감시하게도 하고, 권력에 의해 내면화된 이념을 통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가령,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과 교육과 군대를 통해 내면화된 충효의 이데올로기는 애국심을 절대화하여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죄악시하게 만든다. 국가에 반항하는 자를 고문하고 처단하는 것보다 이런 간접적인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고 문화적으로 보인다. 보다 세련되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 바로 그것이 이성을 표방하는 근대의 권력이다. 첨단정보기기의 발달은 권력에 엄청난 권능을 부여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감시의 눈을 제 몸 속에 이식하며 순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그의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면대에 난 구멍만큼밖에 생명력이 없다.” 거부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