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외 감독, 잭 니콜슨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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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룩(Overlook) 호텔
먼저 그곳은 자폐적인 공간,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공간, 원초적 욕망의 공간,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공간, 대화가 없는 공간이다. 아메리카는 바로 그 공간에서, 검둥이와 인디안등 숱한 유색인종들의 주검 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간과하고(overlook) 살아간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 그러나 민감한 영혼들은 본다. 번쩍거리는 문명 뒤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지를. 큐브릭은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에 이 영화를 기획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보아라. 피의 얼룩 위에 세워진 너희들의 문명을. 이렇게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있기에 아메리카는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거장은, 자신의 내부를 쏘아보는 시선이다.

작가?
그는 중앙에서 글을 쓴다. 캐릭터를 설정하고, 성격을 부여하고, 사건을 기획한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당연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는 열심히 한다. 그러나 문득 화가 치민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 가장으로서의 책무감 때문이 아닌가. 내 어깨 위에 지워진 무거운 짐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무도 나를 몰라 주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작가는 무자비한 창조주다, 그는 어떤 악도 감행할 수 있다. 호러의 불씨가 이미 한 사람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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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 - 할인판
도미니크 몰 감독, 로랑 뤼카스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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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올 때가 있다.
누구나 균열의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균열은 좀처럼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삶에서 깨끗하게 설명되는 부분보다는 흐릿한 부분이 더 많다.
왜,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것들이 허다하다.


왜 나무들은 자랄까.
왜 사과는 땅으로 떨어질까.
중력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대답 같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왜, 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이성은 역부족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이성적인 광기가 존재를 휩싸더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는 있다.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자유는 끝이 나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 질문에 두루뭉수리하게 대답하는 예술이 있다면 폼이야 아무리 그럴싸해도 결국 공허한 개폼이다.


<레밍>의 도미니크 몰은 과연 진정성과 개폼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선뜻 수작이라고 내밀 수가 없지만 어쨌든 베베 꼬이는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놓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럭저럭 Sucess! 샬롯 렘플링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줬다는 점에서도 그럭저럭 Sucess! 그러나 대충 성공했다는 말은 대충 실패했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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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 할인행사
랜달 클레이저 감독, 올리비아 뉴튼존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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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그리스>, 대니 주코(존 트라볼타)와 샌디 올슨(올리비아 뉴튼 존)은 여름방학 때 해변에서 우연히 알게 된다. 샌디는 대니가 분위기를 아는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한다. 바캉스 시즌이 끝나자 기약 없이 둘은 작별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의 재미는 여기서부터다. 드디어 대니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다.


대니의 고뇌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샌디 앞에서 로맨티스트처럼 진지해질 수 없다는 거다.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서다. 그들의 시선이 곧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날라리’ 혹은 ‘날건달’이라는 정체성. 조금이라도 진지해질라치면 친구들은 너 같은 건달이 웬일이야 하고 놀린다. 그 놀림이 무서워 그는 여전히 날건달 행세를 한다. 타인의 시선이 규정하는 ‘날건달’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의 속마음 속에는 한 여자 앞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로맨티스트가 살고 있는데 말이다. 친구들의 시선이 무서워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로맨티스트는 죽을 맛이다. 그는 터프가이를 흉내내고 있지만 대책없는 겁장이인 셈이다. 날건달이라는 정체성을 찢어버리고 또 하나의 정체성인 로맨티스트를 들이대면 그만이다. 성장이란 찢김이 아니던가. 벗어던져버림이 아니던가. 왜 굳이 옛것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려는 것인지. Seize the day! 지금을 살아라.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 영화만큼 양질의 통찰력을 제공해준 영화도 없다.


수많은 모드의 내가 있다. 어떤 날은 캐쥬얼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스타벅스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어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로맨틱하고 드래머틱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덕수궁의 돌담을 거닐어 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저질의 상상력으로 ‘찐한’ 농담을 쏟아내며 왁자하게 떠들어 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근엄하고 엄숙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성당에서 성모송을 읊조려 보기도 한다. 문제는 그 수많은 모드의 내가 나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알아온 친한 친구 같으면야 그 잡다한 모드의 나를 나로서 인정해주겠지만 대개는 '지극히 일부분일 수 있는 나'를 '나의 오롯한 정체성'으로 착각한다. 피곤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어떻게 당신처럼 낭만적인 사람이 그렇게 저속한 말들을 뱉어낼 수 있냐는 등, 어떻게 당신처럼 조신한 사람이 그렇게 상스러운 놈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냐는 등..... 당신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분 역시 나의 일부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인식은 이렇게 고집스레 기득권을 주장한다. 꽤나 이기적일 뿐더러 보수적인 셈이다. 자아라는 것이 분열된 인격의 총합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 지극히 고귀하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저속할 수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 피로는 여기에서 가중된다.(피로가 쌓이면 병이 된다. 억압한 것은 사라지지않는다. I will be back! 반드시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법이다. 불쌍한 목사님들, 일부의 선생님들!)


라이더 가죽 자켓을 입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로를 질주하다가도 말러를 들으며 심오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우스울 것은 없다. 플러스가 마이너스를 온몸으로 잡아당기듯 인격이란 어쩌면 상이한 것들의 조합일 수도 있겠다. 날건달은 날건달 행세만 해야 하고 로맨틱 가이는 로맨티스트 행세만 해야 한다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는 것을 내게 최초로 가르쳐준 영화가 <그리스>다. 고등학교 3학년때였던가 보다.


하지만 시대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강요했다. 이른바 ‘투사’의 정체성, 엄숙의 정체성, 진지의 정체성.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모드의 나를 억압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런 게 마뜩치 않았다. 마뜩치 않은 나의 표정마저도 선배들은 마뜩찮게 생각했다.(어떡하라구)


신비주의가 다른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모드의 나를 억압하고 하나의 ‘기획된 나’를 내세우는 전략이다. 방귀도 끼지 말고 재채기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김치를 찍찍 찢어 먹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보여지고 싶은 나’만을 선별해서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이다. (그러고 싶을까) 방송에서만 이런 전략이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블로그에 ‘백설공주’들과 ‘피터팬’이 우글거린다. 그들이 피곤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라리 여러 개의 가면을 비치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분위기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하나의 가면을 골라 쓰는 것이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효리는 이런 전략적 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붕어빵장사를 해도, 와인바 마담을 해도, 가래침을 타악 아무 데나 뱉어내는 일수쟁이를 해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로 성장한 듯하다.(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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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 풍수와 함께 하는 잡동사니 청소
캐런 킹스턴 지음, 최이정 옮김 / 도솔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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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좁은 집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책을 정리할 겸 광명에 사는 후배에게 갔다. 아이들이 쓰던 블록과 책들을 후 배에게 주면서 후배의 책장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왔다. 제목인즉슨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캐런 킹스턴| 최이정 역| 도솔)이다. 이번 이사를 기회로 대대적으로 살림을 떨구어낸지라 책 제목이 퍼뜩 눈에 띄었다.

집에 돌아와 이 책을 읽다보니 어이쿠나 더 덜어내야겠구나, 한방을 먹는다.더 내려놓으라고 책이 내게 죽비를 내려친다. 아래의 구절들이 내게 떠르르르 혈관을 파고들어 왔다. 깨우침의 한방~

우리가 좋아하고 늘 사용하며 감사하는 물건들은 강하고 활기차고 즐거운 에너지를 가진다. 더불어 이들은 주변의 공간 에너지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든다. 인생에서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주변을 이처럼 자유로운 에너지로 채운다면, 우리의 인생 역시 덩달아 행복하고 즐거우며 자유로워진다. 역으로 뭔가 무시당하고, 잊혀지고, 버려진,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용되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그 주변의 에너지의 흐름은 둔화되고 정체되며, 마침내 우리의 인생 또한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집안 가득히 내가 사랑하고 즐겁게 사용하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면 이것이 나를 위한 자원과 양분의 근원이 된다.

모양이나 재질, 재단된 모습, 옷감의 재료, 그밖의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의 있다면 미련없이 던져 버리자. 내가 사랑하는 옷들로만 옷장을 꾸미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예의다. 그래야만 옷가지로 미어터질 듯한 옷장 문을 열고도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라며 탄식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가지 결심을 하자. 바로 이거다라는 확신이 없다면, 절대로 옷을 사지 말자. 어차피 사봤자 그 옷은 80퍼센트의 옷더미에 파묻히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헛돈을 쓴 것이 될 뿐이다.

50권 전집 1질을 주고 한 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내일 아침, 벽 한면의 책들을 더 정리해야겠다. 더 좋은 것, 더 행복한 것으로 내 주위를 채우기 위해서~ 행복한 것만으로 나를 채워도 모자랄 지경인데, 쓰잘데 없는 것까지 끌고 갈 수는 없다. 방하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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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와 파스칼 -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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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20년간 좁은 탑 속에 유폐되다시피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스스로 성의 탑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몽테뉴는 허름한 석벽 창고를 그대로 서재와 거처로 사용했다. 탑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몽테뉴의 기도실, 침실과 서재가 있는 거처였다. 몽테뉴는 그 서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재까지 가기에 좀 힘이 드는 것과 위치가 외지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드는데, 운동의 실효를 위해서도 좋고, 사람 북새를 피하기 위해서 좋기 때문이다. 그곳이야말로 나의 본집이다. 나는 그곳의 지배를 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단지 하나 이 구석만은 부부간이건, 부자이건, 일반인의 것이건, 일체 공동생활에서 제외시켜 놓고자 한다."


몽테뉴는 그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몽테뉴는 <에세: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자신의 집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있으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갖지 않은 사람은 비참하다."

오직 자신만을 의한 공간,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숨 쉴 수 있는 곳. 그곳은 단순한 독서의 장소만은 아니리라. 그곳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되며 자신을 숨길 장소'이다.


그러나 그는 은둔을 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은둔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지도 않았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은거와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저 담대함.


"나의 생각으로는 자기 집에 자기로 돌아가 있는 곳, 자기 한 사람만의 궁전을 차릴 곳, 몸을 감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신세가 참으로 비참하다"라고 몽테뉴는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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