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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 할인행사
랜달 클레이저 감독, 올리비아 뉴튼존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 <그리스>, 대니 주코(존 트라볼타)와 샌디 올슨(올리비아 뉴튼 존)은 여름방학 때 해변에서 우연히 알게 된다. 샌디는 대니가 분위기를 아는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한다. 바캉스 시즌이 끝나자 기약 없이 둘은 작별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의 재미는 여기서부터다. 드디어 대니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다.
대니의 고뇌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샌디 앞에서 로맨티스트처럼 진지해질 수 없다는 거다.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서다. 그들의 시선이 곧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날라리’ 혹은 ‘날건달’이라는 정체성. 조금이라도 진지해질라치면 친구들은 너 같은 건달이 웬일이야 하고 놀린다. 그 놀림이 무서워 그는 여전히 날건달 행세를 한다. 타인의 시선이 규정하는 ‘날건달’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의 속마음 속에는 한 여자 앞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로맨티스트가 살고 있는데 말이다. 친구들의 시선이 무서워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로맨티스트는 죽을 맛이다. 그는 터프가이를 흉내내고 있지만 대책없는 겁장이인 셈이다. 날건달이라는 정체성을 찢어버리고 또 하나의 정체성인 로맨티스트를 들이대면 그만이다. 성장이란 찢김이 아니던가. 벗어던져버림이 아니던가. 왜 굳이 옛것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려는 것인지. Seize the day! 지금을 살아라.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 영화만큼 양질의 통찰력을 제공해준 영화도 없다.
수많은 모드의 내가 있다. 어떤 날은 캐쥬얼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스타벅스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어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로맨틱하고 드래머틱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덕수궁의 돌담을 거닐어 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저질의 상상력으로 ‘찐한’ 농담을 쏟아내며 왁자하게 떠들어 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근엄하고 엄숙한 모드의 나를 뒤집어쓰고 성당에서 성모송을 읊조려 보기도 한다. 문제는 그 수많은 모드의 내가 나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알아온 친한 친구 같으면야 그 잡다한 모드의 나를 나로서 인정해주겠지만 대개는 '지극히 일부분일 수 있는 나'를 '나의 오롯한 정체성'으로 착각한다. 피곤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어떻게 당신처럼 낭만적인 사람이 그렇게 저속한 말들을 뱉어낼 수 있냐는 등, 어떻게 당신처럼 조신한 사람이 그렇게 상스러운 놈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냐는 등..... 당신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분 역시 나의 일부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인식은 이렇게 고집스레 기득권을 주장한다. 꽤나 이기적일 뿐더러 보수적인 셈이다. 자아라는 것이 분열된 인격의 총합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 지극히 고귀하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저속할 수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 피로는 여기에서 가중된다.(피로가 쌓이면 병이 된다. 억압한 것은 사라지지않는다. I will be back! 반드시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법이다. 불쌍한 목사님들, 일부의 선생님들!)
라이더 가죽 자켓을 입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로를 질주하다가도 말러를 들으며 심오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우스울 것은 없다. 플러스가 마이너스를 온몸으로 잡아당기듯 인격이란 어쩌면 상이한 것들의 조합일 수도 있겠다. 날건달은 날건달 행세만 해야 하고 로맨틱 가이는 로맨티스트 행세만 해야 한다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는 것을 내게 최초로 가르쳐준 영화가 <그리스>다. 고등학교 3학년때였던가 보다.
하지만 시대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강요했다. 이른바 ‘투사’의 정체성, 엄숙의 정체성, 진지의 정체성.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모드의 나를 억압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런 게 마뜩치 않았다. 마뜩치 않은 나의 표정마저도 선배들은 마뜩찮게 생각했다.(어떡하라구)
신비주의가 다른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모드의 나를 억압하고 하나의 ‘기획된 나’를 내세우는 전략이다. 방귀도 끼지 말고 재채기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김치를 찍찍 찢어 먹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보여지고 싶은 나’만을 선별해서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이다. (그러고 싶을까) 방송에서만 이런 전략이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블로그에 ‘백설공주’들과 ‘피터팬’이 우글거린다. 그들이 피곤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라리 여러 개의 가면을 비치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분위기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하나의 가면을 골라 쓰는 것이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효리는 이런 전략적 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붕어빵장사를 해도, 와인바 마담을 해도, 가래침을 타악 아무 데나 뱉어내는 일수쟁이를 해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로 성장한 듯하다.(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