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종교는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영연방 최고의 랍비(유대교 성직자)로 꼽히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조너선 색스의 발언이다. “하느님의 유일성은 창조의 다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라는 발언은 이렇게도 변주된다.

“우리가 진심으로 경이를 느껴야할 대상은 잎사귀의 (플라톤적) 형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25만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잎사귀이며, 본질적인 새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9천종의 새이고, 다른 모든 언어를 포괄하는 초언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6천개의 언어이다.”

밑줄을 그으며 나는 그에게 별 네개를 준다.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과학적 논문처럼 엄정하다.

“하늘의 통일성이 지상의 다양성을 창조한다.” 그는 줄기차게 다양성의 가치, 차이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단호하고 명쾌하다. 강아지를 학대하고, 제 자식을 학대하는 휴머니스트는 위선일 뿐이다. 옳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뭣에든 돈이 관련되면 관계는 혼탁해지지 않던가.

“도덕은 우리를 경제 체제의 대체가능한 부속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타인들의 변덕과 덧없는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바라본다.” 대체 할 수 없는 것, 유일무이한 것, 그것이다. 바로 그것,

이사야 벌린이 한 말을 그는 재인용한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내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는 것, 이 이율배반을 감당할 능력이 과연 우리에겐 있을까. 종교인들은 어떨까. 정통유대교인이 인용한 이사야 벌린의 말은 두고두고 곱씹을 말이다.


“교환과 거래를 통해서 차이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다는 대단히 심오한 정신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은 시장이다.” 시장을 100프로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장의 원칙이 제 울타리를 넘어 공적인 영역의 모든 부분을 제패하는 것은 문제다.


“우리는 남을 희생하여 이득을 취하고 무지를 이용하고 피고용자를 냉담하게 대하게 하는 시장의 끊임없는 유혹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단순명쾌하다.

일체의 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박멸의 의지를 가진 곳보다는 차라리 쓰레기터가 더 살만한 곳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개미Z>>에서 벌레들의 천국, 인섹토피아는 다름아닌 쓰레기터였다.
쓰레기터에 산업폐기물 버리는 녀석들은 쓰레기터의 룰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버릴 만한 것을 버린다면 쓰레기터라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인터넷도 그런 곳은 아닐지.
잘 쓴 랍비의 책을 읽고서는 동문서답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란 무엇인가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199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라고들 하지만 좋은 것들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옮아가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통을 발로 차는 데서 유래했다는 축구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의 경우 14세기에 시작하여 빅토리아 시대에 명문사립학교에서 성행했지만 처음에는 골이 따로 없었고 라인 전체가 골 구실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적진에서 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반칙으로 삼는 오프사이드의 규칙이 들어섰고 단독 드리블을 보강하는 패스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경기의 규칙이 까다로워지면서 경기의 재미도 그 강도가 높아진다.


음악을 안다는 것, 문학을 안다는 것, 미술을 좀 안다는 것은 사실 섬세한 놀이의 규칙들을 배워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섬세함에 재미가 있다. 장기보다 바둑에 열성팬들이 많은 것도 바둑이 장기보다 훨씬 섬세한 규칙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을 모르는 자들에게 바둑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섬세함을 분별하는 것은 즐기기 위함이지 그것으로 해서 머리 아프자는 게 아니다.


이 글 저 글로 해서 뒷전에 미루어둔 시에 대한 글들을 다시 써보기로 마음 먹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섬세함, 뉘앙스에 대한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은 더욱 즐기기 위함이다.> 골치 좀 앓아봐야겠다. 즐겁기 위해서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낙이라곤 책읽기밖에 없는 이 소설의 화자가 맘에 든다.
무엇인가에 몰두하게 되면 다른 것에는 심드렁해지기 마련.
이 여자는 책읽기에 빠져 연애고 생활이곤 관심이 없다.
야망도 없다.
여자는 말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늘 안도한다.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삶이지만 그걸 굳이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럴듯한 애인도 없이 자랑할 만한 직업도 없이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책이 있다.......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나머지는 의미 없다고 여긴다.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미루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내게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이 여자는 하다못해 내가 꿈꾸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에도 관심이 없다.
책 이외엔 무감동이다.
박애주의, 그런 것은 모른다.
<내 몫만이라도 제대로 챙기면서 내 인생만이라도 제대로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여자의 소박한 이기주의는 격려받아야 할 것이 아닌지.
열정으로 채운 삶, 싸우고 분투하여 얻는 삶만이 고무되고 찬양받아야 하는 걸까.


주유원으로 일하는 이 여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검소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검소하거나 가난하거나 사실 그게 그거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난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족하다. 그렇다고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애써 폼 잡지 않고 설렁설렁 할 말 다하는 그 평이한 문체도 좋다.


<나는 가볍고 의미 없고 비생산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맘에 든다.>라고 말했을 때의 비생산도 나는 좋다. 생산, 효율...이제 이 지긋지긋한 단어들과 작별을 좀 하자. 거리를 두자는 이야기다.


내겐 이 책이 독서가들에 대한 권리선언쯤으로 보인다.
말해 놓고 보니 너무 거창하다.
그저 사랑스런 백수에 대한 이야기다.


돌발 질문하나: 책 읽는 사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 뻔한 답: 책과 시간과 구석이다.
시간 나면 책 하나 달랑 들고 구석만 잘 찾으면 된다.
(안경 하나 추가해도 무방)

밑의 글은 예전에 쓴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의 리뷰의 한 대목.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는 키냐르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독서는 끊임없이 ‘이곳’을 벗어나는 행위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결핍이 없으면 독서도 없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독서는 <사회의 그리고 시간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기. 이 세계의 모퉁이에서 살아가기>다. 그것은 <자신 밖으로 떨어져 나가기>이다. <결코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 >라고 키냐르는 말한다. 사랑은 나를 벗어나 너로 귀환하겠다는 망아와 몰아의 체험이다. 독서 역시 나를 벗어나는 망아의 체험이다. <독서하다. 사고하다. 독서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사고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에서 오는데, 거기에는 일체의 경쟁관계나 정신의 기능을 종속시킬 일체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다. 타인이 파악한 것을 함께 나눌 뿐이다. 독서는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고하는 기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는 재밌는 행사가 열렸단다. 내용인즉슨 <프루스트 요약경연대회>! 프루스트가 얼마나 장황하게 글을 썼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삶이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다니, 웃기는 소리 마라'는 생각을 가진 이 작가는 대단히 긴 문장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요약을 일삼는 저널리즘의 뻔뻔스러움에 대해 이렇게 빈정댔다.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이 책에 의하면 프루스트는 우울하고, 질투심이 강하고 불만에 빠진 청년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 주기 위해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고 한다. 프루스트는 이 청년에게 박물관 순회방식을 조금만 바꾼다면 그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프루스트는 청년에게 박물관에서 모네의 그림이 걸려있는 곳으로 가는 대신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뎅의 그림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샤르뎅은 항구, 군주, 궁전 같은 것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는 과일 그릇, 단지, 커피 주전자, 빵 덩어리, 나이프, 와인 잔, 두텁게 썰어 놓은 고기 같은 것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는 예쁜 초콜릿 병뿐 아니라 소금 그릇과 체 등의 부엌도구를 그리길 좋아했다.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샤르댕의 그림 속 인물들은 영웅적인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 한 명은 책을 읽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카드로 집을 짓고 있으며, 한 여인은 시장에서 빵 두 덩어리를 사들고 집에 방금 도착하였고, 어머니는 딸에게 바느질을 잘 못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재의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샤르뎅의 그림은 특별히 매혹적이고 감동적이다. 그가 그린 복숭아는 벌거벗은 아기천사만큼이나 분홍빛이고 토실토실한 느낌으며, 굴 한 접시 또는 레몬 한 조각은 대식과 관능의 유혹적인 상징이었다.

드 보통은 '프루스트는 샤르뎅의 작품을 감상한 후에는 부모 소유의 아파트의 가장 초라한 방들도 그를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약속한다'며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했다'고 덧붙인다.

다시 프루스트는 말한다.

로마의 평야와 베네치아의 장관과 말에 걸터앉은 샤를 1세의 오만한 모습 같은 것들만 보지 말고 찬장 위의 밥그릇, 부엌의 생선과 식당의 딱딱한 빵 덩어리 같은 것들도 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한 군중
데이비드 리스먼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너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라

 

구식 휴대전화 이용자는 가끔 유행을 따르지 않은 게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당당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마음에 드는 옷 앞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망설이며 ‘이 옷을 남들이 과연 어떻게 볼까’ 하고 고민한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남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확인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가 어느 시대보다 강하다.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에 대해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즈먼(1909~2002)은 그의 역작 '고독한 군중'에서 ‘타인지향성’이란 이름을 붙였다.

 리즈먼은 전통사회ㆍ초기 자본주의ㆍ자본주의 고도화 단계에서 군중들의 사회적 성격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통찰했다. 리즈먼이 말하는 ‘사회적 성격’이란 예의범절처럼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양식, 이른바 ‘동조성의 양식’이다. 저자는 이 사회적 성격을 전통지향형ㆍ내적지향형ㆍ타인지향형으로 구분했다.

 조선시대 같은 전통지향형 사회 구성원은 관습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지신’보다는 ‘온고’에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의 창의력이나 전통에 어긋나는 이질적 목표 추구는 환영받지 못한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같은 존재가 껄끄러운 ‘이단아’로 받아들여진다.

 '타인 지향성'을 지닌 현대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그래픽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은 살피지 않은 채 남들의 욕망을 모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상징한 것.

한편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전통은 느슨해지고 분업과 계층화는 증가했다. 더불어 개인의 선택 폭도 넓어진다. 이때 등장한 것이 내적지향형 사회다. 내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행동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원천이 인생 초기에 주입돼 내면화한다는 뜻이다. 부모나 권위 있는 연장자가 초기 주입을 담당한다. ‘성실함으로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자’와 같은 문구가 ‘내적지향성’의 시대를 대변한다. 근면검소를 강조하며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이끈 청교도 정신이 대표적이다.

타인지향형’은 대중소비 사회로 넘어오면서 나타난다. 대중소비 사회는 자신의 주체적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남들의 욕망을 모방한다. 이 같은 모방 심리를 부추기는 것이 대중매체가 쏟아 내는 광고 메시지다. 광고들은 ‘당신은 뒤떨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심리를 자극한다. 군중들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유행을 소비하며 타인의 욕망을 지향한다.

 타인지향형 사회 구성원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촉각을 세운다. 남들과 다르면 집단에서 배제되고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이들을 지배한다. 주변의 신호를 포착하는 레이더마냥 현대인은 다른 사람의 동향을 주도면밀히 관찰하는 데 주의를 집중한다. 대중소비 사회의 도래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고독한 군중'을 통해 리즈먼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말고 진정한 너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