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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가장 훌륭한 방법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부르는 숲> 속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간다.
빌 브라이슨의 유머에 대책없이 키득거리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따라가다가
안되겠다 싶어
휴일에는 북한산에라도 가야겠다고 혼자 다짐해본다.
몸을 근질거리게 하여
떠남을 부추기는 책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간다.
파스칼 키냐르는 독서는 ‘엑소더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빌 브라이슨은 모세?
어쨌든 이 책은 여기가 아닌 곳으로 나를 이끈다.
그곳이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필요는 없다.
숲과 바람과 계곡의 물소리와 홍방울새의 울음소리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만만한 곳은 아니다.
끊임없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
나란 존재가 사실 별볼일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곳,
기쁨은 멀쩡한 사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
그래, 위험도 없으니 기쁨이 있을 턱이 있나.
오늘날 여행은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관광'이 되었다.
'패키지투어'는 최악의 관광인 셈이다.
패키지 투어는 자본의 논리가 이끄는 대로 가는 길이다.
몸이 요구하고, 위험이 부추기는 길
겨울이 오기 전에 그런 길을 가보고 싶다.
P.S
420 페이지는 약간 부담스럽지만 저자가 갔던 3천 360킬로미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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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백두대간이라는 애팔래치아 3천 360킬로의 트레일을 걷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를 부르는 숲>의 빌 브라이슨은 그 기분을 아주 명료하게 요약한다.
“아주 오래, 또 아주아주 멀리 걸었어도 당신은 항상 같은 시간과 장소네 놓인 존재일 뿐이다, 숲이다! 어제도 거기에 있었고, 내일도 거기에 있다.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하나의 단일성이 길모퉁이를 돌아도 지나쳐온 곳과 구별이 안 되고, 나무를 쳐다보아도 똑같이 엉켜 있는 한 덩어리다. 결국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당신이 걷는 길은 매우 크고 출구가 없는 하나의 원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
광대무변한 단일성, 그 거대한 단순성을 좇아서, 중세 최고의 여행가라고 하는 이븐 바투타는 사막의 길을 따라 12만 킬로미터를 여행했었던 것일까.
재작년인가 속초에서 강릉까지 하루 종일 걸은 적이 있다.(고백하자면 오분의 사 지점까지 와서 히치하이킹을 했지만...) 주위의 풍광은 별다를 게 없었다. 길, 산, 가끔 보이는 바다가 전부였다. 입이 떡 벌려지는 절경도 없었다.
애팔래치아는 오죽 하랴.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것은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나무들의 숲과 하늘 뿐. 그러나 그 밋밋함과 단순성은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자고 이 닦고, 아침 먹고 점심 먹고 하품하고 이 쑤시는 우리들의 일상의 밋밋함과는 다른 것이리라.
호흡을 내쉴 때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 몸의 감각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비가 올지 눈이 올지, 하늘의 구름을 비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밤이 되면 곰들의 습격을 우려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야말로 모든 감각이 전방위로 깨어있는 시간들일 것이다. 이런 시간들을 향해 설레는 마음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시야를 가리는 파티션의 숲 안에서 차라도 한잔! 음악이라도 한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