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반역이다 -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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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교수 임지현은 여러 매체를 통해 민족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발언해온 학자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한국일보. 2004.5.27)에서 ‘민족 기준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 동기’를 묻는 인터뷰어에게 “유럽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80년대에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시즘에 매달리면서도 왜 민족 문제는 모두 피해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르크시즘에 조금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민족은 영원한 실체’라거나‘단군 이래 5,000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등의 얘기에 당연히 의문을 느껴야 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한국 사회의 민족 담론이 세계사적 상식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민족 담론에 대한 세계사적 상식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하여 민족은 인종에서 유래하는 것도, 언어로 구분되는 것도, 종교로 결속되는 것도, 그리고 국경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민족이란 언제든지 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는 개념일 뿐임을 강조한다. 르낭은 민족보다는 인간 자체를 생각하자고 주장한다.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이 민족담론에 대한 세계사적 상식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명제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을 통해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위력이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만들어진 전통』의 저자, 에릭 홉스봄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민족주의는 더 이상 세계적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낮은 위치에 그 역할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민족주의를 평가절하하면서 민족이란 의심할 수 없는 가치처럼 보이지만 이도 실상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민족은 영원한 실체라거나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민족주의를 요란하게 장식한다. 그러나 임지현은 민족이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04년께부터 비로소 민족이란 말이 쓰였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네이션’(Nation)을 ‘민족’(民族)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했고, 그 말이 그대로 들어왔다. 혈연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동포’(同胞)라는 말도 외세의 압박이 시작된 구한말부터 쓰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란 개념은 애초에 없었으며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민족이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에릭 홉스봄의 주장과 상통한다. 임지현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정에서 나온 서구의 ‘네이션’은 혈통이나 문화전통의 공통성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주관적 의지를 중시했다.”고 말한다. 임지현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알사스 로렌 지방을 예로 든다. 프랑스혁명(1789~1794년) 당시만 해도 알사스 로렌 주민들은 독일어를 썼고, 문화 전통도 독일과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배경인 1870년 보불전쟁 때에 이르면 프랑스 민족의식이 뿌리내릴 정도로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프랑스 혁명직후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 국가를 결정했는데 독일을 선택하면 봉건제로 후퇴하고, 프랑스를 택하면 시민혁명의 성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 당연히 프랑스를 택했다는 것이다. 혈연적 공통성이 민족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주관적 의지가 민족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임지현은 민족의 개념이 주관적 의지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혈통ㆍ문화 공통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 ‘저항’과 ‘혈통’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야 했던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그는 민족주의는 늘 국가 권력이 민중을 동원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경제성장이란 목표 달성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족주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집권 후인 1963년 교육과정 개편에서 민족주체성, 민족교육 이야기가 나왔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나오면서 박정희 시대의 민족주의 교육은 절정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박정희 정권은 천마총 등 역사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이순신을 비롯한 역사 인물의 민족영웅화 작업을 통해 민족주의를 일층 강화했다는 것이다.


임지현은 민족의식에 근거한 역사 인식의 문제점은 역사를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이 5,000년 전부터 단일민족으로서 영구불변하는 실체라고 믿는 태도가 바로 역사를 신화로서 이해하는 태도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나가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편다. “너도 나도 통일을 ‘민족적 과제’라고 얘기하지만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상이 분명하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한반도 주민들의 행복한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통일이 그런 행복을 가져온다면 해야 하고, 어떤 통일이 거기에 적합한지를 논의해야 한다. 행복한 삶에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면 통일국가 구상 대신 탈대결, 평화공존, 좋은 이웃나라의 길을 모색하면 된다.”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책에서 철학자 탁석산이 보여준 태도와 일치한다. 탁석산도 임지현과 마찬가지로 통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무엇을 할 때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임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인종적 민족주의’로 정의한다. 혈연·지연·언어 등에 집착한 결과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는 폐쇄적이고 퇴행적인 가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한국사회도 이제 인종주의 문제를 차분히 짚어볼 시점이 됐다. 한국사회는 과연 동남아 등지로부터의 이민 근로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착취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냉정하게 물을 시점이 되었다. 한국인의 일상 속에 내면화된 파시즘(권위주의)을 임지현 교수는 그의 또 다른 저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다. 그는 개개인의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스며있는 내면화된 규율권력, 예를 들어 반공주의, 위계적 언어생활, 규율과 복종의 학교교육,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등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을 가리켜 이를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지칭한다. 그는 일상적 파시즘을, '너 뉘집 아들이야?'라는 말 속에 내재된 가부장적 혈통주의, 권위주의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건축문화에서도 찾고 있다.


대한민국이 단일민족 국가라는 환상도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임지현의 주장이다. 인종과 문화는 섞일 수밖에 없고 섞일수록 강하다는 것이 생물학에서의 이른바 ‘잡종강세’의 원리다. 백인을 제외한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의 뿌리는 단일민족의 신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이냐고 유전학적으로 묻는 질문에 학계의 답은 “아니오.”이다. 2006년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S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60%의 북방계와 40%의 남방계 여러 민족의 유전자가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결국 한민족은 ‘복합민족’이라는 것이다.


위의 주장과는 달리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민족주의를 크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로 구별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 제국과 일본처럼 다른 약소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고 억압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인 유형화를 소홀히 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이지현 교수와 신용하 교수의 주장이 최근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최근의 큰 두 줄기를 대변한다. 어떻든 두 교수의 주장의 내용과 겉모습은 달라도 두 주장 모두 민족주의가 맹목적인 애국심과 결부되어 타자(他者)를 배쳑하는 배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적 신념 위에 세워져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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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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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성장만이 마치 인류의 최종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타이타닉 현실주의’라 이름 붙이면서  지금의 생산방식과 소비방식을 고수한다면 언젠가 지구는 타이타닉처럼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한바 있다. 이런 근본적인 생태주의자들의 입장은 명백히 경쟁을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러미스는 성장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대항발전 counter-development)’을 주장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대항발전의 첫째 목표는 ’줄이는 것‘이다. 소비를 줄이고, 경제활동에 쓰고 있는 시간을 줄이고,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이자는 것이다. 둘째,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 활동,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들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러미스는 말한다. “자본주의와 경제발전 이데올로기 속에는 경제성장이야말로 진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것을 대항발전의 과정으로 전환하면, 진보하는 대상이 바뀝니다. 진보에 따라 바뀌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이나 사회나 문화가 바뀌는 것을 진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강수돌 교수의 저서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또한 러미스의 대항발전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강수돌은 경제학자답게 경제에서 말하는 ‘효율성’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경제학에서의 효율성이란 투입량 대비 산출량의 비율을 말한다. 동일한 투입량이라면 산출량이 늘어야 효율이 향상되고, 또 동일한 산출량이라면 투입량이 줄어야 효율이 올라간다. 투입이 줄면서 동시에 산출이 늘어나면 효율성은 극대화된다. 이러한 효율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가 바로 ‘생산성’이다. 투입을 줄이고 산출을 늘리자면 인간을 단순한 생산요소로 환원시켜야 통제해야만 하고, 건강과 인격은 무시되기 일쑤다. 바로 여기에 효율성과 생산성이 만능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강수돌은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가  ‘합리적인 선택’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이 효율성의 개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돈과 권력이 대부분의 의사를 좌우하는 사회에서의 선택이란 계급적으로 계층적으로 이미 ‘불평등한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기업에서 노사분규가 심각할 경우 그 경영진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없는 농촌지역이나 후진국으로 공장을 쉽게 옮길 수 있지만, 노동자들은 그 노동력을 ‘합리적’으로 팔기 위해 쉽사리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때의 합리성이란 ‘가진 자’를 위한 것이지 ‘못 가진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고등학교 ‘공통사회’가 “경쟁을 통해 경제는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라고 쓰고 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적용되는 말이라고 비판한다. 경쟁이 일정 한계를 넘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질 경쟁이 아니라 파괴경쟁이 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대량실업 현상과 일2반 상품 시장에서의 과잉생산, 과잉소비 등은 인간파괴, 자연파괴를 낳고 있는 것이 그 예라는 주장이다.


그는 단적으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경쟁이란, 인간의 살아 숨 쉬는 노동을 흡입함으로써 자기 몸을 무한정 불려나가는 자본의 지배적 논리가 눈에 띄게 관철되는 사회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경쟁의 논리, 즉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는 생산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생산과정에서 파괴되는 인간과 자연의 건강성은 문제로 포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생태주의적 입장에서 경쟁의 논리를 파괴의 논리로 규정한다. 또 이익의 무한확장을 추구하는 경쟁의 논리는 세계평화나 홍익인간과 같은 보편성의 논리보다는 제국주의와 맞닿게 된다는 점에서 그는 경쟁의 논리를 파괴의 논리로 규정한다.


우리가 국가경쟁력의 논리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공간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수돌은 말한다. 경쟁의 논리 안에서는 모두가 더불어 살고자 하는 진정한 내면의 욕구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밟히지 않으려면 밟으라’는 명령만이 냉혹하게 현실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쟁의 논리가 흔히 ‘대박’으로 일컬어지는 한탕주의의 심리를 키우고,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자를 따돌림하는 ‘왕따’의 심리적 기초가 된다고 그는 우려를 표명한다. 바로 이런 한탕주의 사회에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같은 책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고, 『한국의 부자들』이란 책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란 돈벌이, 이윤추구, 부자 되기가 아니라 건강한 살림살이 즉 건강하게 먹고사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못 박으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는 ‘내면’이 충실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내면을 충실하게 하는 데 교육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 기능적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입시교육 위주의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사실이다. 세상에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오직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하는 교사가 과연 몇이 있을까. 어떤 시련이 올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좇아서 자신의 삶을 설계하라고 말하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영어 못하면 나중에 후회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많아도 “독서 안하면 마음이 거지가 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설령 독서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수능 문제 풀이와 논술고사 향상을 위한 사고력 향상의 재료로서만 협소하게 ‘책’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독서 현실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주도했던 ‘신지식인’ 논의도 생산성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신지식인의 성공은 결국 생산성이나 부가가치, 매출액, 수출액이나 특허권 등 주로 경제적 가치의 잣대에 의해 평가된다. 게다가 과정보다도 결과를 보고 사후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학문 세계에서 돈이 안 되는 인문학이나 기초 과학은 도외시될 위험이 크다.’라고 그는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 시대와 다음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새로운 사람들이란, 지식이나 기능을 넘어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필요하고 절박한지’를 분별있게 가릴 줄 아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사람,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새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강수돌은 역설한다.


강수돌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사관계 분야를 공부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한경쟁 속에서 괴로워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고 그 원인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일류대에 입학하려고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도 겨우 절반만이 취업하는 현실은 분명히 모순이죠. 내가 찾은 결론에는 잘못된 학교교육과 학부모들의 왜곡된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라고 말한 바 있다. 강수돌은 교육?노동?경제 전반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며 그러기 위해선 가정에서부터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들이야 어떻든 ‘나부터’라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 강수돌의 주장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하나의 삽화(揷話)는 우리 시대의 교육이 무엇을 결하고 있는가를 따끔하게 말해준다. 경쟁이 아닌 협력, 효율성의 논리가 아닌 상생의 논리.


미국의 어느 학교에 인디언 아이들이 전학을 왔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 여러분 이제 시험을 칠 터이니 준비하세요" 했다. 백인 아이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필기 도구를 꺼내고 책상 가운데에 책가방을 올려 짝꿍이 엿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시험 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인디언 아이들은 마치 게임이라도 하려는 듯 책상을 돌려 둥그렇게 모여 앉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생님은 "얘들아, 시험 칠 준비하라고 그랬잖니?"하고 화를 냈다. 이에 인디언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예전부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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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외 지음, 모주희 옮김 / 아이디오(IDO)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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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의 편지


  아인슈타인은 1939년 당시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원자폭탄을 빨리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독일이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바로 이 사건으로 아인슈타인의 평생 괴로워하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후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 확산을 강하게 성토했고, 1955년 4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인류라는 생물의 씨앗을 근절시켜 버릴 사태를 불러일으킬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단돼야 한다."고 호소한 후 이틀 뒤에 숨을 거둔다. 반핵이 그의 유언이 된 셈이다.

『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와 주고받은 편지를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편지를 주고받게 된 계기는 1932년 국제연맹이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선택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문제를 물어보고 싶은 상대도 선택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안을 하고서였다. 아인슈타인은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제로 ‘전쟁’을 들었고, 그 질문에 답해줄 상대로는 세계적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지목했다.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모든 나라가 일치 협력하여 하나의 기관을 만들고, 이 기관에 국가 간의 문제에 관한 입법과 사법의 권한을 주고, 국제적인 분쟁 발생 시엔 이 기관에 해결을 맡기고, 그 결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자” 제의한다. 또 전쟁을 반대한다는 목표 아래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한데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

 『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가 소개하는 아인슈타인의 서신은 프로이트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인간의 마음을 증오와 파괴라는 마음의 병에서 시달리게 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인간의 공격성은 본능적이고 그 공격성은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기에 사실상 제거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을 곧바로 근절할 수는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그는 심리학자다운 답변을 준비한다.

  인간에게는 유지하고 통일하려는 충동, 즉 사랑의 충동인 에로스적 충동이 있는가 하면, 파괴하고 살해하려는 공격본능인 타나토스적 충동이 있다면서 전쟁은 바로 이 타나토스적 충동의 발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이단(異端)을 심문할 때의 잔혹함을 보면 겉으로는 이상과 이념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괴충동이 무의식층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파괴적 공격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힘들므로 그 공격성의 방향을 타인에게 돌리기보다는 자신의 내부로 돌림으로써 공격성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진실을 찾아 노력하는 뛰어난 지도자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지성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면 그만큼 본능적인 욕망에 덜 이끌리게 되므로 인간의 지성을 강화하고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전쟁 방지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는 말한다.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이 곧 파괴행동이라면 그 반대의 충동, 즉 에로스를 불러일으키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과 마음의 유대감을 만들면 모든 전쟁을 막게 될 것입니다." 타인을 볼모로 나의 욕망을 달성하지 않겠다는 마음, 타인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 프로이트의 처방의 핵심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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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낚시를 하는가? - 낚시의 기원과 낚시꾼의 심리학
폴 퀸네트 지음, 황정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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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대부분을 심리학자와 낚시꾼으로 살아온 폴 퀸네트는 ‘진정한 낚시꾼은 낙관주의자’라고 말한다. 더 큰 물고기가 내 낚시 바늘을 덥썩 물어주리라는 희망이 그의 행동을 추동시킨다. 낚시가방을 챙기면서 그는 희망을 반드시 챙겨 넣는다. 그 희망이 그로 하여금 낚시대를 드리우게 하고 침묵 속에서 그를 기다리게 한다. 희망만이 침묵에 깊이를 불어넣어줄 수 있다. 희망이 없는 침묵은 불안이고 절망이다.


낚시 바늘에서 버둥거리는 물고기를 떼어내 물고기를 다시 강으로 돌려보내주는 낚시꾼이 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 기쁨이다. 에피큐로스 학파가 말하는 쾌락도 낚시꾼의 쾌락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진정한 낚시꾼이 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의 어떤 형태다. 살아서 펄떡이는 물질을 좇는 정신주의자의 여유.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 낚시꾼의 너그러움을 배우기에 이 소인배의 하루는 번잡스럽기 그지없다. 방하착이란 말을 쓰기에도 염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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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동물학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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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존중하는 것이 곧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능적이고 동물은 본능적이라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야생』의 저자인 신디 엥겔은 자연계에서 이런 상식을 깨는 풍부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쥐는 동료 쥐에게서 독에 대해 배우는 능력이 탁월하다. 쥐는 보통 낯선 먹이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조심성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쥐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쥐는 낯선 먹이는 아주 조금만 맛보고 일정 시간을 기다린다.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때서야 쥐는 나머지를 모두 먹어치운다. 설사 그 먹이가 유독성 물질이라 해도 처음에 조금만 먹기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또 쥐들은 다른 쥐가 낯선 음식을 적은 양 먹었을 때 아무 해가 없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먹는 양을 네 배로 늘린다고 한다. 

쥐는 다른 쥐의 실수에서도 배운다. 실험 결과 쥐는 다른 쥐가 이미 먹어본 유독물질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몽고황무지쥐는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오직 가까운 친척이 먹어본 먹이만 신뢰한다고 한다. 낯선 쥐가 먹어서 아무 문제가 없던 먹이라도 그들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전략일 수 있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해독 능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먹이에 독이 있는 경우, 그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물질과 함께 먹으면 독성이 중화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쥐들도 있다. 예를 들어 떫은맛이 나는 타닌과 사포닌은 따로 먹거나 다른 비율로 먹으면 서로의 독성이 중화된다. 쥐는 타닌과 사포닌을 정확히 해롭지 않은 비율로 먹는다고 한다. 쥐가 어떻게 그 정확한 비율을 알고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양도 도토리에 있는 떫은 맛 성분인 타닌의 함유량이 높은 먹이를 먹을 때 타닌을 중화하는 폴리에틸렌글리콜이라는 물질을 주면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안다고 한다.

중남미의 한 개미는 나뭇잎을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서 저장해서 진균류를 번식시킨 후에 먹는다고 한다. 진균류는 나뭇잎에 들어있는 유독성 화학물질을 분해해 개미가 먹기 좋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쥐는 염화리튬에 중독되면 평소에 먹지 않던 점토를 먹는다. 염화리튬을 몸 밖으로 토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점토를 먹고 싶게 만든다고 한다. 만약 염화리튬을 단맛이 나는 사카린과 함께 주면 쥐는 사카린을 염화리튬과 연결시켜 단맛이 나는 사카린을 구토의 느낌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에 사카린만 주어도 토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서 점토를 먹고 싶어 한다. 이런 실험 결과로 과학자들은 쥐들이 자신이 중독되었다고 생각만 해도 점토를 먹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투스 B. 드뢰셔의 『휴머니즘의 동물학』은 동물들의 행동양식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풍부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책에 의하면 동물들도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습득하며, 새끼들을 교육시키고 수치심을 느낀다. 또 동물들도 무리의 질서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타적 행동을 할 줄 안다. 물론 동물의 세계라고 해서 힘의 논리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힘의 논리로만 동물의 세계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책에 의하면 아프리카 초원지대의 ''사바나 개코원숭이'' 무리는 소수의 수컷 동맹이 지배층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연구결과 그 무리가 모계사회라는 것이 사바나개코원숭이와 15년간 함께 생활한 여성 동물학자 셜리 스트럼에 의해 밝혀졌다. 통념을 완전히 뒤집고 할머니, 어린 새끼, 성인 암컷, 성인 수컷 순서로 위계질서가 잡혀 있었다. 젊고 힘센 수컷이 폭력적으로 나오면 암컷들이 집단으로 징계하고 교미에서도 왕따를 시켰다. 사바나개코원숭이의 사회는 폭력 질서 대신 사회적인 전략이나 목표를 추구하는 현명함과 우정이 지배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l7세기에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론을 제창하여, 동물체를 태엽을 감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바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데카르트는 사유 능력이 없는 동물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기계나 마찬가지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거나 도축할 때 동물이 내는 비명은 기계에서 나는 삐걱거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본능에 끌려 다니는 동물의 행동은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유사성의 인식이 평등의 근거가 된다. 나도 바늘에 찔리면 아프듯 남도 바늘에 찔리면 아프다는 유사성의 인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고통처럼 느낀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는 것이 인간의 공감 능력이다. 인간에 대한 평등이 인간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는 것처럼 동물이 인간과 유사한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피터 싱어다. 그는 동물 권리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자신의 이론이 인권 운동의 근거 또한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동물 권리 운동은 인권 운동의 한 부분이라고 역설한다. 동물을 존중하는 것이 곧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자는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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