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과 논문 이학문선 3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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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하는 현대의 기술

강연과 논문/ 마르틴 하이데거/미학사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사르트르는 시적인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사물과 도구의 개념을 빌어 설명합니다.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죠.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 이게 웬 뚱딴지같은 말일까요. 사르트르의 견해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도구는, 그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가령 진공청소기가 잘 작동할 때는 우리는 전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죠. 그러나 일단 고장이 나면 우리의 시선은 진공청소기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잘 작동하는 청소기는 나의 시선을 통과시켜버리는 투명한 것이지만, 고장난 진공청소기는 나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불투명한 사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도구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성질, 즉 용도성(用度性)을 갖고 있습니다. 옷은 사람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있고, 망치는 못을 박는 용도가 있습니다. 하나의 존재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용도성의 있고 없음에 따라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가 구별됩니다. 그런데 청소기처럼 용도성을 가지고 있는 도구적 존재가 그 도구성을 상실할 때, 즉 고장이 났을 때, 그때 비로소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물적 존재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고장난 도구는 비로소 우리의 눈에 띄고, 우리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도록 종용하고,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선에 부딪칩니다. 이것이 사물의 불투명성이지요.


여기에서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개념으로 도구적 언어와 사물의 언어를 규정해볼까요

우리가 하나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장미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시선은 장미를 통과하여 과거의 한 시점을 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때 장미는 보는 이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한 존재요,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려 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미 자체의 빛깔과 향기에 취한다면 우리는 장미는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는 ‘불투명한’이 사물이 됩니다. 이때 장미는 무엇을 상기시켜주거나 어떤 관념을 떠올리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사물인 셈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주는 기호에 불과합니다. 기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투명한 기호 너머의 의미를 지시해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어가 가리키는 언어 너머의 것만을 볼 뿐이지, 언어 자체를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도구로서의 언어의 투명성입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이와는 다르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견해입니다. 시의 리듬과 이미지와 어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의 언어를 사물로서 대하는 태도라는 것이지요. 만약에 시의 언어도 도구의 언어처럼 투명하다면 우리는 시의 언어가 갖는 아름다움을 간과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불투명한 시의 언어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게 됨으로써, 즉 시의 언어를 사물로 대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숲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한 사람은 숲의 자원을 어떻게 이용할까를 고민하는 산림학자요, 한 사람은 숲에서 생명의 경외감을 읽는 시인이라고 해봅시다. 산림학자의 관심은 자원으로서의 숲일 뿐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숲[도구]이 아니라, 숲의 경제적 가치[목적]입니다. 그가 숲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의 관심은 숲 ‘너머’의 목적입니다. ‘너머의 것’을 본다는 것은 숲을 투명한 도구로서 대하는 태도요, 숲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태도는 이와 다릅니다. 그의 시선은 숲의 표면에 가서 머뭅니다. 그는 나무의 결을 보고, 나무의 잎사귀를 보고, 나무에 깃들여 사는 생물들을 볼 것입니다. 자연에서 창조주의 경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숲의 표면을 봅니다. 숲에서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오직 숲을 분석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숲이 무수한 생명의 사슬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공생의 세계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과학자, 기술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요. 물론 평화를 주창했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나 ‘공생의 인간[호모 심비우스]'이 되어야 함을 힘주어 말하는 최재천 교수 같은 분은 예외지만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강연과 논문』이라는 책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은 자연을 도구적 존재로만 생각할 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연관되는, 이른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거대한 사슬체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공생의 터전으로서의 자연, 정서적 풍요로움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망각한다는 말입니다.


1953년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기술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나무의 본질을 찾아 나설 때 개개의 나무를 나무로서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것(즉, 나무의 본질)은 흔히 보는 나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렇듯 기술도 기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해서 치열하게 묻고 답합니다. 『강연과 논문』은 바로 그 질문과 답의 치열한 기록입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기술이라는 낱말의 희랍어인 ‘테크네(techne)’에서 찾습니다. 테크네라는 낱말은 은세공인이 은덩이를 깎아서 은쟁반을 만들어내는 수공이기도 하고, 화가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예능이기도 합니다. 테크네의 본질은 가려져 있는 것, 은폐되어 있는 것을 끌어내 앞에 내놓는 것, 다시 말해 은폐성으로부터 비은폐성으로 끌고 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적 활동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 즉 ’은폐된 것‘을 형상을 통해 나타나게 하는 작업이며,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기술적 활동도 철광석이라는 재료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을 ’철‘로 나타나게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테크네는 곧 ’탈은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광석을 가만 두면 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가만히 두는 무위(無爲)의 존재였다면 철기문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에게서 무언가를 요청하고 주문하는 존재, 닦달하는 존재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를 주문하고, 철광석에서는 철을 닦달하지요. 여기에서 ‘닦달’은 은폐되어 있는 것을 드러나도록 하는 행위, 비유컨대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죠,

하이데거는 그의 강연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과거의 수공업적 기술과 현대의 기계적 기술을 대비시키면서 전통적인 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어우러지게 한 반면 현대적인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떼어놓고 인간을 통해 자연을 닦달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기술 속에 성(盛)하고 있는 탈은폐는 도발적 요청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채굴되어 저장될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에게 내놓으라고 무리하게 요청한다. 이것은 과거의 풍차에도 적용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풍차의 날개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며 바람에 전적으로 직접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이는 순풍을 안은 돛이 바람을 드러내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술은 이와 어떻게 다를까요? 하이데거는 현대의 기술이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놓으라고 무리하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낸다고 지적합니다. 하이데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농부들이 예전에 경작하던 밭은 그렇지 않았다 … 농부의 일이란 농토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나는 것을 그 생장력에 내맡기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이제는 그것도 자연을 도발적으로 닦아 세운다. 경작은 이제 기계화된 식품공업일 뿐이다.” 이런 발언들을 통해 하이데거는 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해서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려는 현대기술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하는 존재는 자연을 사르트르가 말하는 ‘사물’로서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수단으로서 자연을 대합니다. 자연을 부품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연을 부품으로 드러나도록 도발적으로 닦아세우는 담당자인 인간은 도구에 의해서 거꾸로 닦달당하기도 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 <모던타임즈>의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 보면 그 사실이 분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쉼 없이 도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하루 종일 부품의 나사를 조이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는 기계에 의해서 노동력을 닦달당하는 존재입니다. ‘인력자원’이란 말에는 현대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선의 온도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현대기술의 차가움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세계의 지배자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웁니다. 과학이 모든 불가능한 꿈을 이루게 할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볼 때, 우리 인류란 사유하지 않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류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본질을 대면하지 못함으로써 당면한 추락의 위험을 모르고 오히려 부품으로서 드러나는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지요.

모든 기술에는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더 멋진 곳, 더 나은 곳으로 우리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단지 물질의 풍부함만으로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려 보세요. 복제품인 클론들은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통제와 규율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행복의 땅, '아일랜드'를 꿈꾸지만 그들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구는 자신들의 욕망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도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인간의 필요를 위해 쓰여지고 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가 도구입니다. 클론 역시 마찬가지죠. 그들의 장기를 적출하여 인간에게 이식하고 나면 그것으로 클론의 생은 마감됩니다. 그러나 클론들은 왜 내가 죽어가야 하는가, 왜 내 몸으로 낳은 아이를 빼앗겨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클론이 제기하는 의문들은 바로 ‘닦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항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숲 속의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에게 클론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들을 닦달하지마. 제발 그만 좀 놔둬. Let It Be.”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위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자연을 닦달하고 인간을 닦아세우는 문명은 분명 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닦달은 피곤을 가중시킬 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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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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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각의 지도는 어떻게 다른가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김영사/2004


주변 상황에서 분리〮〮〮〮∙고립되어 있는 둥그런 구(球)에서 상하좌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상하좌우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한 거니까요. 동서남북의 방향 설정도 기준이 없이는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한 쪽은 동쪽이 되고 또 한 쪽은 서쪽이 되지요.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해가 뜨는 쪽에 있는 대한민국이 동쪽이 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해가 뜨는 태평양 저편에 있는 미국이 동쪽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기준이 없는 한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방향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명백하게도 동양이나 서양이나, 동구니 서구니 하는 방향을 전제로 한 개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서양이니 동양이니 하는 개념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보자면 대한민국은 동쪽 먼 끝에 있는 나라가 되는 거구요. 그래서 대한민국은 극동아시아의 한 국가가 되었던 거지요.

어쨌든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이 어떤 속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임의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리처드 니스벳이 지은 『생각의 지도』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 과정에서 나타타는 차이를 섬세하게 분석하고 그 기원을 설명한 책입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도에 의존합니다. 서양과 동양이란 서로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동양과 서양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생각의 지도’ 가 필요하다는 것이 러처드 니스벳의 주장입니다. 니스벳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사고 체계에서 정말로 다르다면, 태도 신념 가치 선호와 같은 심리적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문화간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문화에 대해서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보편주의자들이 그들이죠. 그들은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인지과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이건 피그미족이건 지각과 기억, 인과분석과 범주화, 그리고 추론과정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문화권의 사람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신념 체계가 다르다면, 그것은 그들이 세상의 다른 측면을 모거나 아니면 단순히 다른 내용을 교육받았기 때문이지 서로 다른 인지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자 또한 한때는 보편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에 대한 철학자와 인문학자, 역사학자들의 저술을 탐독하기 시작하면서 보편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의 사고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각종 고전과 연구서, 행동양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임을 보여줍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말해보시오'라는 질문에 대해 미국과 캐나다인들은 주로 성격 형용사(친절하다, 근면하다 등)나 자신의 행동(우표수집을 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등)을 말하는 데 비해, 중국. 일본. 한국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을 동원하거나 사회적 역할을 많이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양은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고 동양인들은 사회적 맥락을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이러한 차이를 ‘저맥락(low context)' 사회와 ’고맥락(high context)' 사회의 언급을 통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지요.

다양한 색깔의 볼펜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를 고르게 하는 실험 결과 한국인들은 가장 흔한 색깔을, 미국인들은 가장 희귀한 색깔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개성을 중시하는 서양인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의 속담을 생각한다면 한국인들의 개성추구가 서양인에 비해 왜 소극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던가요. 자기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분명하다 보면 논쟁이 잦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논쟁은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인들은 어렸을 적부터 자기주장을 하는 훈련을 받지만 동양에서는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맥락을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고 자기를 억누르지만, 개성을 중시하는 서양인들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쟁을 좋아하는 서양에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지는 인식론으로서의 논리학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법적으로 가리기 위해서는 법적 분쟁도 잦습니다. 책은 재미있는 자료를 소개해줍니다. 바로 ‘엔지니어와 변호사에 대한 상대적 선호’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한 나라의 변호사의 수를 한 나라의 엔지니어의 수로 나눈 것이 ‘엔지니어와 변호사에 대한 상대적 선호’를 보여주는 지표인데, 그 지표에 따르자면 미국이 일본에 비해 41배 정도 엔지니어에 비해 변호사를 선호한다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미국과 같은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 간의 갈등이 법적 대결로 해결되지만, 일본과 같은 집합주의적 사회에서는 중재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법적 해결을 시도할 때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되며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기본전제로 하지만, 동양에서의 갈등의 해결 목적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쌍방간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의 해결수단으로서 타협이 중시된다는 것입니다.

책은 동양인의 맥락중시적 사고방식에 대한 실증적 경험들을 풍부하게 제시해줍니다. 일본과 미국 학생들에게 물고기가 중앙에 등장하는 물속 장면 애니메이션을 20초가량 보여줍니다. 양쪽 모두 중앙의 물고기를 비슷하게 기억했지만 물풀이나 개구리, 우렁이 등 배경 요소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이 미국 학생보다 60% 이상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 학생과 미국 학생에게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상황을 분석토록 했을 때, 중국 학생들은 72%가 문제의 원인을 쌍방에서 찾으려는 양비론적인 의견을 내거나 대립하는 견해를 절충하려고 노력한데 반해, 미국 학생들은 26%만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서양은 논리에 기반한 양자택일(Either/Or)을, 동양은 종합과 융화(Both/And)를 지향한다는 이야기죠.

소와 닭과 풀이 그려진 3개의 그림 중에서 서로 관련된 2개를 묶는 과제를 주었을 때, 미국의 어린이들은 같은 분류 체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소와 닭을 하나로 묶지만 중국의 어린이들은 소와 풀을 묶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한쪽이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는 ‘범주’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 다른 한쪽은 서로의 ‘관계’에 근거한 방식을 사용한 까닭이지요. 소와 닭은 동물이라는 ‘동물’이라는 명사적 범주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소와 풀을 묶는 체계는 무엇일까요. 바로 ‘소가 풀을 먹는다’는 동사적 관계입니다. 서양인들에게 세상은 사물로 구성된 집합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물을 포함한 범주와 이를 지배하는 규칙을 밝히려 하죠. 서양 아이들이 명사를 먼저 배우는 것도, 범주는 명사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동양인은 수없이 많은 관련 요인과 전체 맥락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리고 사물들의 관계는 동사에 의해 표현됩니다. 중국어나 일본어, 한국어에서 동사가 문장의 처음이나 맨 마지막에 오는 것도 그 위치가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곳들이기 때문이죠. ‘차’를 마시고 있기에 동양인들은 ‘더 마실래?(Drink more?)’라고 묻지만 ‘마시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서양인들은 ‘차 더 할래?(More tea?)’라고 묻습니다. 명사를 중시하는 서양인과 동사를 중시하는 동양인의 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먼저 니스벳은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형태, 즉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구조와 공회정치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저항적인 지식인들은 한 도시를 피해 자유롭게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개인의 자유로운 지적탐구가 가능했었었다는 점입니다. 또 고대 그리스가 해안가에 있었기 때문에 무역을 중심으로 삼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 다른 관습, 다른 사고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 다른 정치적 체계와의 접촉은 자연히 그들의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했고, 서로 다른 차이, 즉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중국의 자연환경은 대체로 평탄한 농지와, 낮은 산들과 강들로 이루어져 농경에 적합하였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에 유리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쌀농사와 같은 공동작업은 서로간의 화합이 매우 중요하였고, 쌀농사를 위한 관개공사는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필요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해안까지 산으로 연결되어 농업보다는 사냥과 수렵, 목축이나 무역에 적합했던 그리스의 자연환경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악어나 도마뱀과 같이 일부 파충류가 낳는 알은 주변의 기온에 따라 암수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도마뱀의 경우는 33℃ 이상의 기온에서 알이 부화되면 대부분 수컷 도마뱀이 태어나고, 30℃ 이하에서는 거의 대부분 암컷 도마뱀으로 태어나고, 30~33℃ 사이에서는 암수의 비율이 고르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파충류에 있어서는 환경의 차이가 성별까지도 결정지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니스벳의 견해입니다. 내가 아무리 독립적인 사고를 하고 싶다 하여도 내가 속한 문화, 즉 내가 속한 공동체의 체제를 완벽하게 벗어나기란 어렵다는 것입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니스벳은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라고 말합니다. 차이와 다름을 알고 그것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함께 어울려 사는 공생의 지혜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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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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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정치적 삶이다

희망의 인문학/ 얼 쇼리스/ 이매진/ 2006



가난한 계층일수록 이혼율이 높고 가난한 집일수록 가정 폭력이 빈번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집은 사실상 동화 속의 현실이다.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 City Of God>를 보라. 그곳은 행복의 땅이 아니다. 아이들이 어른처럼 시가를 물고 총질을 한다. 마약과 술에 찌든 곳, 절도와 폭력이 빈번한 곳이 슬럼가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예절도 형이상학도 배고픔의 해결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


노숙자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를 가르친다면 어떨까. 얼빠진 짓이라고 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에게 빵과 우유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며,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지, 자선과 기부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반박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문학이 가난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믿었다. 『희망의 인문학』은 그런 믿음에 관한 기록이다.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인 빈곤 상태로 묶어두는 메커니즘을 ‘무력(force)의 포위’라고 분석한다. 굶주림, 범죄, 소외, 타인의 시선 등의 무력은 이들을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생존에만 급급한 ‘사적인 세계’로 내몬다. 가난은 자신을 성찰할 기회도 앗아가며 남들과 연대할 공적인 삶의 기회도 앗아간다. 사적인 세계에만 매몰되어 있는 ‘무력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찰적 사고가 필요하다. 저자는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라고 말한다. 이 인문학의 힘이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연 민주주의와 인문학이 서로 관련이 있을까. 그는 이 가설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1995년 노숙자, 빈민, 죄수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프로그램 ‘클레멘트 코스’의 개설이 그것이다. 뉴욕타임즈의 예술 칼럼니스트, 메사스추세츠공대의 논리학 교수 등 클레멘트 코스에는 이 취지에 공감하는 최고 수준의 교수진이 모였다. 가히 ‘백만 달러 교수진’이었다. 최고 수준의 교수진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철학과 문학과 미술을 강의했다.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여했고 졸업 후 6개월이 지났을 때 16명이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었다. 이 코스에 참여했던 이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시험은 성공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미국,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호주, 한국 등 6개국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클레멘트 코스가 운영되고 있다. 성공회대가 운영하는 성프란시스코 대학은 2005년 9월 첫 입학식을 열어 12월 가을학기를 마쳤다. 20명 중 17명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광명시 평생학습원이 운영하는 광명시민대학에서도 2005년 인문학 강좌가 운영됐다. 16명의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창업 강좌와 더불어 ‘동양고전을 통한 삶 읽기’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강좌에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를 구상한 것은 교도소에서 만난 한 여죄수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사람들이 왜 가난할까요?"라는 쇼리스의 질문에 할렘가 출신의 비니스 워커라는 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 워커가 말한 ‘정신적 삶’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신적 삶이라고 해서 형이상학적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삶은 사적인 세계에만 매몰되어 있는 ‘무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공적인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적 삶을 의미한다.


『희망의 인문학』에서 저자가 말하는 빈곤계층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약자만을 일컫지 않고,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사회적 소수를 일컫는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이 같은 편견을 바탕으로 빈민을 위한 복지정책은 ‘교육’이 아닌 ‘훈련’에만 의존해왔다고 비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훈련은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순종적인 사람들로 묶어놓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성찰적 사고를 통해 가족에서 이웃과 지역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지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정치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가난이 계속되는 이유는 빈민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만들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저자는 정치적 삶은 빈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대안이고 인문학은 정치적 삶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시민적 자유와 책임과 권리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가난한 사람은 비로소 기존체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얼 쇼리스는 단적으로 윤리적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짐으로써 위험한 존재가 되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수동적인 존재에서 능동적인 존재로 변모시킴으로써 그들을 '위험한 시민'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쇼리스는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가 됨으로써 획득된다.”라고 말한다. 위험이란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지불해야할 비용인 셈이다.


빈곤 퇴치에 대해 얼 쇼리스와 다른 입장을 견지한 학자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그라민 은행의 총재인 무하마드 유누스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나서, 대학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누스는 귀국하여 한 대학 인근의 ‘조브라’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당시 조브라 마을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대나무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여성들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돈이 고작 50페이샤 우리 돈으로 20원 정도였다. 시장에 직접 내다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나 대나무 의자를 만드는 재료 구입비 200원이 없어 고리대금업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누스는 조사 결과 마을의 42명에게 27달러만 대출해 준다면 고리대업자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누스는 이들에게 27달러를 돈이 생기면 갚으라는 조건으로 빌려 주었다. 이것이 그라민 은행의 출발이었다. 확실한 빈민구제책이었던 셈이다.


『희망의 인문학』이 말하는 ‘부’는 유누스가 말하는 ‘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의 원래 제목은 ‘Riches for the Poor(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이다. 과연 가난한 자에게 ‘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자는 말한다.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쇼리스가 말하는 ‘부’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창조하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멕시코 원주민 1400명이 거주하는 히스토키 마을에서 1997년부터 2년 코스로 운영된 클레멘트 코스가 어떻게 그들을 변모시켰는지를 보라. 주민들은 스페인어 대신 마야어를 쓰게 되었고, 지역 정치인과 교사도 배출했다. 변화된 이들의 의식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들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속단일지도 모른다.


빈곤에 대한 해독제로서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꼽는다. 일하지 않고서는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얼 쇼리스도 “노동은 지갑을 채우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영혼에 위안을 주고 정신을 안정시켜 준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만으로는 가난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가난이 구조적인 문제요,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하의 농민들이, 1970년대의 노동자들의 가난은 결코 그들의 무능 탓이 아니다. 얼 쇼리스는 미시시피 그린빌이라는 마을에 사는 위든(Weeden)씨의 가족을 예로 들면서 왜 그들은 밤을 새워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주마저 해결하기 힘드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노동이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노동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특성을 시급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얼 쇼리스는 미국 사회에서 부자와 빈민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사우스 브롱크스 빈민 지역에 테니스 코트가 하나 있다. 청소년가족 서비스 프로그램에서 나온 사회복지사가 이 들을 데리고 코트로 갔다. 아이들은 서로 라켓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줄은 흐트러졌고 질서를 잡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북쪽의 교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고. 질서를 지켰으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기를 진행시켰다. 얼 쇼리스는 이를 두고 말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들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중도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그들은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무력이라도 행사하려고 했다. 테니스 배우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무력의 무질서 속에서 잃어버렸다. 가난한 아이들은 테니스 코트에 자신들의 상황을 비추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한 자신들의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정치적 규칙보다는 무력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얼 쇼리스는 빈민들의 삶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치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빵’으로 상징되는 ‘필요’의 지배를 받게 되면 정치적 삶을 살 수 있는 시간도, 열정도 사라지게 되며, 그 결과 ‘힘 있는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진다. 빈민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필요‘의 지배를 받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쇼리스는 직업훈련을 바람직한 빈민구제책으로 보지 않는다.


진정한 힘은 공적인 삶, 정치적인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반성적 사유에서 온다. 공적인 삶은 합법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가난한 자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 또 정치적인 삶은 시민권이 가져다주는 명예를 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명예란 나는 이제 더 이상 무력하고 소외된 자가 아니라 내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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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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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몰두하는 선비들의 세계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정민/휴머니스트/2007년




어떤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일까? 답은 간단하다. 스프링에 물리적 압력을 주었을 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능력, 즉 복원력이 뛰어난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이다. 일반적으로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건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젊고 싱싱한’ 스프링은 원상회복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자주 사용해서 탄성을 잃은 ‘노후한’ 스프링은 눌러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려도 원래의 상태로 이내 돌아간다. 술을 많이 마셔도 하루쯤 끙끙댈 뿐, 고통을 이틀이고 사흘이고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하루 밤을 새고 나면 며칠이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과음을 하면 그 후유증이 며칠을 간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원래상태로의 복구력이 현저하게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건강은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복구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복구력으로서의 건강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건강에 한해서일 뿐이다. 정신적 건강은 원상 복구력만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가령 A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자. 누구나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A가 이내 평상심을 회복하고 아무런 동요 없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답은 NO다. 그는 배은망덕한 호로 자식이란 말을 듣기 십상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애통해야 할 만큼 애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정신적 건강함은 그 인간의 도리를 빼놓고서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아파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마련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이런 헛갈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선학들이 고민을 한 바 있다. 동양에서는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말했다. “즐거워하되 음란함에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상심에 빠지지 말라”라는 것이 그것. 쉽게 말하면 오버(over)하지 말고 적당히 해두라는 것. 나아갈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동양의 고전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충고다.


중용의 미덕을 <<중용>>에서는 ‘시중(時中)’의 개념을 들어 말한다. ‘시중’은 무조건 가운데를 취하는 행동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 왼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처신하라는 것이 시중의 진리이기도 하다. 한용운이 일본식으로 개명을 한 후배들의 뺨따귀를 후려쳤지만 정작 한용운이 세상을 떴을 때, 뺨을 맞은 이들이 오히려 ‘이제는 누가 우리의 뺨을 후려쳐주겠느냐.“라며 통곡하지 않았던가. 상황에 따라 호통이 필요할 때는 호통을 치고 뺨따귀를 갈겨야 할 때는 뺨따귀를 갈기고, 칼을 뽑아들어야 할 때는 칼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늘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평균적으로 행동하고,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거주하는 것이 시중의 지혜는 아니다.


시중의 지혜를 체현하기 위해서는 도저한 열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열정으로 뱅샹 고호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예술적 에너지를 자신의 작품에 온통 쏟아 붓는 삶을 살았고, 베토벤은 들리지 않는 귀로 불후의 교향곡을 작곡했는지도 모른다. 예술적 천재를 완성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근엄한 도학자들이나 이성주의자들은 열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토아학파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정념에서 벗어나기를 주문했다. 동양에서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취미에 몰입하면 뜻을 잃어버린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도학자들에게 우주의 궁극을 따지는 철학적 사변은 옳은 것이었지만 난초를 즐기고 기예에 빠지는 것은 그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매니아들처럼 ‘비틀즈’ 구성원들의 생일이나 혈액형 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파고드는 태도를 고루한 선비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달랐다. 18세기 지식인들이 과거의 선비들과 얼마나 달랐느냐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민의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을 펴보는 것이 좋다.


18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를 벽(癖)이라 한다. 도벽, 노름벽, 주벽이란 단어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벽(癖)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또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를 치(癡)라고 한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이란 글에 정민이 소개하고 있는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면서 벽(癖)이나 치(癡)로 평가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책의 저자 정민은 ‘그들은 편집광적인 정리 벽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이 동지적 결속 아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고 평가한다. 책을 통해 18세기 지식인들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화장실을 가든 나들이를 가든 평생 <옥해(玉海)>란 백과사전을 끼고 살던 이의준은 집에 불이 나자 책을 구하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또 판서 윤양래는 탈상(脫喪)한 집을 찾아가 상복과 두건을 모아오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석치(石癡)라는 호를 가진 정철조는 보이는 대로 돌을 파서 벼루로 만들었고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癡)라는 호를 가진 이덕무는 밀랍으로 매화까지 만드느라 열심이었다. 꽃에 미쳐 수백여 종의 꽃을 세밀하게 그린 김덕형, 기석(奇石)에 탐닉했던 이유신, 앵무새를 관찰한 내용과 관련자료를 모아 ’녹앵무경‘을 낸 이서구, 비둘기의 품종과 교배, 성질 등의 내용을 담은 ’발함경‘을 낸 유득공의 기이한 면모를 책은 보여준다. 이옥이 친필로 쓴 『연경(烟經)』은 담배에 관한 책이다. 장절을 나눠 담배 농사의 단계별 주의 사항을 적었고, 담배의 문화사적 정리까지 시도했다. 가짜 담배 식별법에서 담배에 얽힌 전설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법까지 소개했다. 담배 피울 때 쓰이는 12종의 도구도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독한 편집증이다. 특히 이들은 앵무새와 같은 미물과 관련된 책에도 경(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격물(格物)’이란 사물들을 밑바닥까지 살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유가 양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편지를 띄운다. “기왕에 닭을 치기로 했다면 닭에 관한 기록으로 ’계경(鷄經)‘을” 지으라고 당부한다. 성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들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경(經)‘이란 말을 미물에게까지 붙인 데에서 실제를 중시하는 실학자들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18세기에 나타났을까. 저자는 그 원인으로 새로운 문물의 경험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북벌을 주장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청나라 연경에서 느꼈던 문화적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방으로 뻗은 도로, 으리으리한 건축물,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과 산더미와 같은 서책,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문물․․․. 더 이상 그들은 미천한 오랑캐가 아니었으며,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던가. 청나라를 통해 수많은 책들이 들어오고, 한성의 서적 유통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자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겼던 주자학이란 학문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 바로 여기에서 ‘실제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전에서 찾을 수 있는 이상적 가치보다는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진실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또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의 시를 짓겠다.“라고 천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쪽‘보다는 ’이곳‘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책의 저자는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된 세계관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정은 시대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열정이 뜨거울수록 이들을 불온시하는 보수적 지배층의 감시도 커져만 갔다. 정조는 이들의 문체를 불온하다고 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정의 칼날을 빼들었다. 그것이 18세기의 한계였고 시대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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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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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 집단은 넷이다. 먼저 승려, 다음은 죄수, 그리고 군인, 마지막으로 학생이다. 승려는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는다. 삭발은 속세와의 절연을 의미한다. 욕망에 이끌리는 속세와의 삶을 단호히 청산하겠다는 의미다. 군대와 교도소에서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일제히 짧게 자르는 것은 효과적인 억압과 지배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할까. 『감시와 처벌』의 저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 푸코에 의하면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이 푸코의 대답이다.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학생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그 이유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는 강령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력한 믿음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두발에 있어서 개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학교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두발자유화’만큼 찬반의 논란이 분분한 소재도 없다.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학교현장에서 두발 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 사태가 곧잘 신문지상에 보도되곤 한다.

이렇게 민감한 소재인 ‘두발자유화’를 본격적인 문학의 소재로 다룬 소설이 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열 일곱 살의 털』이다. 자칫 지레짐작으로 이 책이 ‘두발자유화’의 주장을 외치는 생경한 고발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은 문학이 어떠한 주장을 말하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를 보여준다. ‘머리털’을 둘러싼 풍성한 담론과 작가의 녹록치 않은 성찰은 이 소설을 한낱 ‘소재주의적인 소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한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년 송일호다. (‘일호’라고 하니 ‘일호(一毫)’가 연상된다. 한 터럭이라는 뜻이겠다. 재미있는 명명이다. ‘쪼잔’하고 물컹했던 범생이 일호가 학교의 강압적인 두발규제에 맞서 정학을 당하고 1인 시위를 벌이면서 나와 가족과 세계에 대해 눈을 뜨며 ‘야물딱지게’ 커가는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다. 두발단속에 저장하는 주인공 송일호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이발소인 태성이발소의 3대 이발사다. 고조 할아버지는 고종황제 시절 단발령을 따르지 않는 백성들의 상투를 자르는 관직, 체두관이었다. 머리칼을 자르는 가업으로 삼는 집의 손자가 머리칼을 자르는 것에 저항한다는,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이 소설에서 시종 긴장과 흥미를 이끌어낸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믿고 살아온 할아버지의 ‘세상의 모든 머리털은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고, 아이들의 머리털은 부모의 동의를 얻고, 어른은 스스로 허용해야 이발사가 가위를 든다.’라는 ‘두발 철학’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발사 가족이라는 특수한 일호의 가족사다.

할아버지가 보름마다 해주는 '삼삼삼'(앞머리, 뒷머리, 옆머리 모두 3㎝) 이발 때문에 입학식 날부터 '모범생 1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은 일호는 체육선생이 두발 규정을 어긴 아이의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것을 보고 돌변한다. 이 과정에서 일호는 ‘열일곱 살의 털’은 단순한 ‘털’이 아니라 인격과 인권의 문제임을 깨닫고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마포구 도원동 일대의 재개발을 놓고 주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나뉘자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반대를 해야 쓰겠습니까? 우리가 따라야지요.”라며 찬성파로서 주민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게 되면 개발 이익은 건설업체가 챙기고, 영세한 주민들은 살던 집마저 빼앗겨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손자, 일호의 1인 시위 사실을 알게 되자, 교내 이발소에서 학생들 머리를 별 모양으로 깎으며 손자에게 힘을 보탠다

일호가 체육교사의 라이터를 빼앗아 내던진 바로 그 날. 17년 전 원양어선을 탄 이래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다음날 학교 상담실로 불려간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바리캉으로 머리를 미는 행위는 반인권적”이라며 맞선다. 1980년대 운동권 세대를 상징하는 듯한 일호의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거의 준비된 연설문에 가까운 훈계를 늘어놓는다. “ 아이들의 반대의견을 군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묵살하고 제재를 가하다 보면 올바른 교육을 해칠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은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대한민국의 경직된 교육현실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는 점에서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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