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동물 사이언스 클래식 1
로버트 라이트 지음, 박영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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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도덕감정의 진화론적 기원은 무엇인가?

도덕적 동물/로버트 라이트/사이언스북스/2003년



미(美)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


비너스 조각상을 보면 머리의 길이와 어깨~배꼽의 길이 비율이 1대 1.618입니다. 또 상반신(머리~배꼽)과 하반신(배꼽~발끝)의 비율, 하반신에서 무릎을 기준으로 한 양쪽 비율도 같은 수치죠. 바로 이 비율(1대 1.618)이 인간이 어떤 대상을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비율, 즉 '황금비'입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이 황금비는 2차방정식 ‘x²+x-1=0’의 근에 해당하는 무리수(약 1.618)죠. 파르테논 신전, 석굴암 본존불, 밀로의 비너스,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세계적 문화유산들은 제작 시기나 제작자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황금비'(1대1.618, 또는 5대8)’ 구조를 가진다고 합니다.

성형외과 의사들도 문명과 인종에 관계없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황금비를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왼쪽뺨 끝에서 오른쪽 뺨 끝까지의 거리를 A라고 하고 턱끝에서 머리끝까지의 비율을 B라고 할 때 A와 B의 비율이 1대 1.618이라는 거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대상이 이 황금비를 구현하고 있다면 그 대상은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서 아름답다는 인상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객관주의적 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느끼는 자’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대상이 갖는 객관적 성질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황금비를 구현하고 있는 소위 ‘팔등신’ 미녀만을 좋아할까요? 인기가 있는 할리우드 톱스타들도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1대 1.618일까요?

세상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도 각양각색입니다. 풍만함이 미의 기준이던 시대도 있었죠. 17~18세기 유럽의 바로크시대나 백제 시대의 경우 말입니다. 그 시대에는 늘씬한 여성들은 미인의 축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현대의 여성들은 바로크 시대의 미인의 몸매를 선사하겠다면 "No Thanks"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모든 여성들이 ‘롱다리’에 ‘삐쩍 마른’ 체형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만큼 미묘한 개인차를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미인대회나 광고 속의 여성들이 미인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는 거죠.


진화심리학자들이 바라보는 미(美)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종ㆍ세대ㆍ지리ㆍ문화적 차이와 관계없이 우리의 행동과 심리를 유사하게 만드는 본성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진화심리학은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진화의 산물이라고 간주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류의 조상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수십 만 년 전의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선택된 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거죠.

진화론의 핵심개념인 ‘적응’ 개념은 쉽게 말하면, ‘다 있을 만하니까 있는 것’이라는 점이죠. 가령 ‘아름다움’도 ‘다 있을 만하니까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면 다음의 예를 살펴볼까요.

텍사스 대학의 데벤드라 싱 교수에 따르면 골반에 대한 허리둘레의 비례(WHR= Waist Hip Ratio 허리/엉덩이 비)는 자식을 낳아 돌볼 능력과 질병 저항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성들에게는 WHR이 0.7 정도인 여성이 남성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거죠. WHR이 매우 크거나 작은 여성들은 짝짓기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비적응적’이지만, WHR이 0.7의 경우는 짝짓기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적응적’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0.7인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번식과 진화에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WHR이 0.7인 여성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미’에 대한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남자가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여성의 미를 다산성(多産性)의 척도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비너스와 같이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종족 보존 능력이 뛰어나므로 짝짓기에서 유리하다는 뜻이죠.


마음도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진화의 산물, 즉 적응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인류의 조상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선택된 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가령 스트레스를 더 잘 받는 사람이 생존경쟁에 더 잘 대처해서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추정입니다. 초기 인류 시대에 하나의 열매를 두고 이 열매가 먹어도 될 열매인지 먹지 말아야 할 열매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이 경우 의심이 많고, 공포를 잘 느끼고, 새로운 상황에 스트레스를 더 잘 받는 동물, 즉 ‘겁 많은 동물’이 ‘겁 없는 동물’보다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포를 더 잘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동물들이 그렇지 않은 동물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리는 인간의 공포심은 적응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가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직면한 여러 유형의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설계된 마음을 가진 개체가 진화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버트 라이트의 책, 『도덕적 동물』역시 이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언어에서 짝짓기에서부터 가족과 정치, 그리고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현대 진화생물학의 기본 원리에 의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심리는 ‘자연선택’의 무수한 누적에 의해 디자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진화적 관점에서 번식력이 떨어지는 짝을 고른 남성은 번식 가치가 높은 여성과 짝짓기를 한 남성에 비해 틀림없이 번식 성공도에서 뒤쳐졌을 것입니다. 또 자신과 그 자식들에게 자원을 투자할 수 없거나 투자하려는 의지가 적은 남성을 선택했던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번식 측면에서 덜 성공했겠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번식 가치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여성의 젊음과 외모가 남성들에게는 중요한 선택요인이 되었을 것이며, 여성에겐 남성의 자원, 야망, 재산, 헌신이 짝짓기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진회심리학자들은 성과 결혼의 문제를 이해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균형과 대칭의 미학도 진화심리학자들은 색다르게 설명합니다. 몸이 대칭적인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유전자는 그 사람의 우수한 저항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즉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사람은 자신의 짝을 고를 때 얼굴과 몸이 얼마나 대칭적인가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며 약간의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심리학자들의 연구실에서 밝혀진 바 있습니다. 미국 뉴멕시코대 심리학자인 갠지스테드와 생물학자인 손힐은 매력과 대칭성의 정도가 밀접한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왜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배우자의 외모를 따지지 않고, 배우자의 사회적 지위와 자산을 따지는 경향이 있을까요. 진회심리학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수컷은 무수히 많은 정자를 만들어내고, 자손을 돌보는 데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므로 가능한 한 많은 짝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암컷은 극소수의 난자를 만듭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뱃속에 태아를 담고 다녀야 하고, 출산 후에도 새끼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서 가급적이면 수컷에게 많은 투자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수컷이 자신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해줄 수 있는 수컷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컷은 자식 양육에 덜 투자하므로 짝의 양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암컷은 자식 양육에 더 투자하므로 짝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죠.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이타성의 기원

사람들은 생면부지인 타인을 위해 헌혈하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의 진화론적 기원은 무엇일까요?

『도덕적 동물』에서 저자는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혈연선택’과 상호 이타주의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혈연선택 이론에 따르면 혈연으로 맺어진 개체들은 구성원들이 공유한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가까운 친척에게 이타적인 혜택을 베풉니다. 혈연선택 가설은 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이 1963년 제기한 이론으로,혈연을 돕는 것이 내 유전자의 번성을 돕는다는 관점으로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죠.

혈연선택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이타적 행동이 굳이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만 국한되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이론을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까지 확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왜 생물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에도 이타적 행위를 하는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는 것이 상호 이타주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개체 사이에서 이타적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내가 도움을 주면 나도 너에게 도움을 준다.”는 식의 호혜적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혜주의는 당신이 어떤 이에게 도움을 받았어도 그에게 은혜를 갚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팃포탯(Tit-for-Tat) 전략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로 설명되는 팃포탯은 “처음에는 협력한다.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그전에 행동한 대로 따라서 한다”는 두 개의 규칙으로 구성됩니다. 팃포탯은 인정 많음(먼저 배반자가 되지 않음), 분개(상대방이 배반하면 따라서 배반함으로써 즉시 응징함), 관대(상대방이 배반한 적이 있더라도 다시 협력하면 따라 협력함으로써 협조 분위기를 복원시킴)의 특성을 갖고 있죠.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을 합쳐 놓은 전략이죠. 결론적으로 팃포탯은 상호 호혜주의에 의해 이기적인 개체들로부터 협력 관계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화론이 인간의 심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도덕적 동물』의 저자는 과연 일부일처제는 남자에게 유리한가, 아니면 여자에게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일부일처제는 인간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요, 남성들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154개의 사회 가운데 980곳에서 한명의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도록 허용해 왔다고 합니다. 일부일처제 아래에서는 남자는 다른 남성과 심한 경쟁을 할 필요가 없고,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이 능력 있는 한 남성에게 높은 수준의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는 능력이 없어 짝을 찾지 못할 위험이 있는 남성들을 위한 제도이며, 남녀 간의 평등이 아니라 남자들 간의 평등을 위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유전자가 인간 심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고집스럽게 말하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적 다양성은 동일한 인간 본성이 매우 다양한 환경에 반응한 결과다.” 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진화론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진화론이 기존의 세계관과 학문에 어떤 충격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궁금증이 있다면 이 책은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1994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도 이 책이 바로 그런 궁금증에 적절하게 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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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 - 양장본
앤서니 기든스 지음, 한상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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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활력 유지와 사회적 정의실현을 위한 제3의 길

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생각의 나무/2000년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공익(共益)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다르게 부른다면 '가격'이다. 시장의 가격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조절되고, 생산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논리다. 가만 놓아두어도 가격이 거래를 성사시키니, 정부는 범죄 예방을 위해 치안유지 차원에서 야경꾼들로 하여금 순찰이나 돌게 하고 가급적이면 시장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 이른바 아담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국가는 소극적이어야지 적극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기적인 욕망을 앞세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시장의 가격, 즉 보이지 않는 손이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초기에 이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은 실로 막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은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만능이 아니었음을 일깨운다. 1929년 미국의 주식값 대폭락과 함께 폭발한 대공황은 공업 생산량의 추락과 농산물 가격 폭락, 유럽의 금융공황, 대량의 실업사태를 불러왔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방과 치안만 감당하면 될 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방임주의는 대공황이 야기한 충격 앞에서 무력했다. 먼저 독과점이라는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산량은 줄이고 가격은 비싸게 받는 독과점 기업들의 횡포는 고스란히 소비자들과 중소기업의 피해로 전가되었다. 둘째, 아담 스미스의 믿음과 달리 시장 가격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나타났다. ‘외부효과’의 발생이 그것이다. 외부효과란 어떤 한 사람이나 단체의 경제활동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에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산을 정비하여 골프장을 만든다면 그 사업자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골프장을 관리하는 데에 들어가는 맹독성 약물로 인해 산 아래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피해를 보게 된다. 결국 자유로운 사익 추구는 공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셋째,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기업들은 사회간접자본과 같은 공공재 생산을 외면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했으며 그 손의 힘도 생각한 것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보이는 손’, 즉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같은 극좌, 파시즘과 같은 극우가 확산됐다. 각국은 극단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당시 스웨덴의 사민당은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국가 계획의 안정성을 결합하려 했다. 그 결과 노동자, 자본가, 정부 삼자의 대타협으로 이른바 ‘스웨덴 모델’이 탄생했다. 대량실업 사태 속에서, 자본가는 일자리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양보했으며, 정부는 사회보장을 약속했다. 스웨덴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고 세계는 스웨덴에 주목했다. 그리고 지금은 좌파 정책의 상징으로 꼽히는 스웨덴 복지국가제도에 ‘중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도’가 서유럽에서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미국식 세계화가 ‘뜨거운 감자’였던 1990년대였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신자유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밀튼 프리드만, 하이예크 등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자유라는 가치를 극대화시켜야 정부개입으로 인한 비효율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아담스미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와 하이예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와는 달리 '자유'의 국제화, 세계화를 표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말로 시장개방을 주장한다.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용어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나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을 통한 시장개방의 압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경제적 윤택함을 누리고 있는 서구 선진국에서는 경제적 수준에 맞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경제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에서는 민주의가 정착되지 못하고 잘 운영되고 있지 못한 점을 근거로 들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개방, 공기업 민영화 등 자유경쟁이 사회적인 효율성을 높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2007년 10월 10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세계화의 3대 요소 중 기술과 외국자본이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최근 20년간 세계화가 소득 불균형에 미쳤던 영향을 분석한 이 보고서는 세계화로 전체적인 부가 증가했지만 저소득 노동자보다 숙련 노동자의 소득 증가율이 훨씬 높아 빈부 격차가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외국자본이 개발도상국의 기술집약적 산업에 투자를 선호함으로써 숙련노동자만이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1996년 11.6%였던 빈곤층이 2006년 20.1%로 늘었고 중간층은 55.5%에서 43.7%로 축소됐다. 빈곤층은 건강도 악화돼 하위 10%의 양호한 건강 비율이 98년 43.7%에서 2005년에는 24.1%로 내려갔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과 임시직이 늘어 노동자들의 고용의 질 또한 악화되었다. 생산, 교육, 고용, 주거, 소비 등 모든 부문에 있어서의 양극화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큰 사회적 문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음미해야 할 만한 책이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제3의 길』이다.


토니 블레어는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기치로 내걸고 영국의 노동당을 현대화함으로써 1997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때 세계적인 석학인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제3의 길'을 제창해,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의 개혁 노선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을 풍미했던 ‘제1의 길’과 ‘제2의 길’을 넘어서려는 정치적인 시도다. 기본적으로 제3의 길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제1의 길’이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라면, ‘제2의 길’은 시장에서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모델이다. 한쪽은 좌파의 길이라면, 또 한 쪽은 우파의 길이다. ‘제3의 길’은 북유럽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모델, 즉 좌파의 모델에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미국과 같은 신자유주의 국가의 모델, 즉 우파의 모델에는 사회적 평등을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제1의 길’과 ‘제2의 길’에 대한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제3의 길』에서 저자는 ‘제1의 길’의 성공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네덜란드 모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6년 전 바쎄나르에서 체결된 협약*(1982년의 바쎄나르 협약, Wassenaar Agreement은 노사간에 이루어진 임금안정과 근로시간단축을 중심으로 한 합의이다.)에서 네덜란드 노동조합들은 작업 시간의 점진적인 축소와 교환하여 임금의 경감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노동 임금은 과거 10년 동안 30퍼센트 이상 감소한 반면에 경제는 번영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1997년 6퍼센트 이하라는 낮은 실업률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네덜란드 모델은 적어도 일의 창출과 복지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인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사회투자국가’와 적극적 복지에서 잘 나타난다. 앤서니 기든스가 언급한 사회투자국가는 경제가 잘 작동하려면 교육, 직업훈련, 주거, 의료 등 사회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보육 등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공투자를 늘려서 단기적으로는 여성노동력 확보, 중장기적으로는 인적자본 유지 및 빈곤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복지의 투자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실업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대신 직업 훈련과 교육 개혁 등의 적극적 복지 정책 시행으로 이들이 사회에 재편입되는 것을 도와야 한다. 빈민지역의 대규모 재개발도 범죄 예방, 빈민에 대한 기회균등과 사회적 배제를 막기 위한 중요한 사회투자 정책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일생 동안 지속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인 ‘평생교육’도 일종의 사회투자라 할 수 있다.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여 직장에 부설되어 있는 탁아소에 맡길 수 있는 이른바 ‘가족 친화적 작업장’ 또한 여성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투자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복지를 근로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근로연계복지’라고도 이름할 수 있다. 근로연계복지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은 전통적 복지국가와 구분되고, 경제성장과 사회정책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노선과도 구분된다. ‘제3의 길’의 핵심은 복지를 생산요소, 투자로 본다는 데 있다. 사회투자 전략은 노동시장 정책과 실업, 빈곤 정책의 적극적 연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기존 모델과 상이하다. 청장년 실업자와 빈민, 그리고 편부모 가정에 현금을 지급하는 고전적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취약계층을 노동시장 안으로 적극적으로 통합하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사회투자국가론은 신자유주의와 뚜렷이 구분된다. 신자유주의 노선이 사회복지 지출을 비생산적이고 경제에 부담을 주는 상충적 관계로 인식하지만 사회투자국가에서는 사회정책의 생산적 기능이 강조되고 경제성장과 사회정책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다. 현대 경제, 특히 지식기반 경제가 잘 작동하려면 교육, 직업훈련, 주거, 의료 등 사회정책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제3의 길』의 주제는 ‘사회민주주의의 갱신,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평등’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서구의 빈곤층은 가난 때문에 사회 중심에서 강제적으로 배제되는 한편 부유층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배제시킨다. 이 분열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통합의 과제가 국가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복지보다는 성장을 우선시하는 국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단체들은 대선후보들에게 “성장 중시 경제 발전을 차기 정부의 핵심 전략으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개발제한구역 폐지, 토지거래 허가제도 폐지, 분양가 상한제 폐지, 분양원가 공개 폐지, 은행의 비금융회사 출자 제한 완화, 법인세 인하 등이 그 구체적 내용이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김연명 교수는 ‘사회투자국가론’을 한국 사회에 적극 수용하자고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경제사회구조가 오늘날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 등의 새로운 상황과 위험을 맞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월급 격차(2003년 1.53배)가 해마다 늘고 있고, 10가구 중 1가구가 절대빈곤 상태에 빠져 있을 정도로 소득분배가 악화하고 있다. 2005년 현재 4829만명이던 인구는 2050년에는 4234만명으로 줄어드는 데 비해 65살 이상의 노인은 2005년 전체 인구의 9.1%에서 2050년에는 37.3%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는 이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사회경제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사회투자국가론’이라는 것이다.


우파들은 ‘제3의 길’이 복지국가의 환상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좌파들은 ‘제3의 길’이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제3의 길』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회투자국가는 사회복지정책이 경제발전에 순기능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만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접근과 큰 차이를 보이진 않는다고 하면서 ‘사회투자국가론’은 시장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혼란과 불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들어 약점으로 든다. 성장과 고용창출을 위해 평등, 분배 등의 가치를 너무나 희생하고 있다는 점, 또한 비판론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 서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중도좌파 정권들이 실각하고 우파 정권들이 재등장한 것은 ‘제3의 길’의 한계를 드러내는 징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비판들에 대해 앤서니 기든스는 정부와 국가 개혁, 불평등의 해소, 세계화에의 대응이라는 시각에서 ‘제3의 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장의 활력 유지와 사회적 정의실현, 성장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제3의 길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의 길의 한국적 수용을 위해 학계의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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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의 행복을 위한다면 지구에서 손을 떼라

인간없는 세상/앨런 와이즈먼/랜덤하우스/2007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유학은 인간의 고귀성을 인간의 윤리성에서 찾고 있다. 충효와 같은 윤리, 즉 인륜이 없기 때문에 금수는 인간처럼 고귀할 수 없으며, 오직 윤리적 분별력을 가진 인간만이 고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어떤 책에선가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자들로서는 펄쩍 뛸 말씀이시다. 그러나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므로 인류의 멸망은 본래의 지구 질서로의 복귀일 뿐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지 않은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학대해온 인류의 소행으로 본다면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에도 나름대로의 진정성이 있다고 하겠다.


영국의 대기과학자 러브록(1919~ )은 그의 저서 『가이아』에서 지구를 자기 조절의 기능을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서 지구생명체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러브록은 지난 30억 년 동안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항상성의 비밀을 생물의 존재에서 찾았다. 그는 탄소, 질소, 인, 황, 규소 등 지구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오가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메커니즘이 전적으로 생물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다. 바닷물의 염분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의 작용이라는 얘기다. 이런 실례들을 들어 저자는 지구 차원에서 균형 조절 시스템의 존재를 확신해 이를 '가이아'라고 이름 붙인다


가이아의 세계에서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관리인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지구라는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많은 생물 종이 멸종하는 상황에서 인류의 숫자가 60억을 넘는다면 인류는 분명 정상 세포가 아니다. 비유컨대 인간은 비정상정으로 불어나면서 건강한 세포들을 희생시키는 암세포다. 이 인간이라는 암세포는 건물을 짓고, 도로와 공장을 건설하고 엄청난 탄소를 공중에 내뿜는다. 인간이라는 암세포의 활동의 결과가 곧 환경오염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주역인 인간이 당장 지구상에서 퇴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리조나 대학의 언론학 부교수이자 과학저술가인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의『인간 없는 세상』바로 이런 발칙한 상상을 구체화한 책이다. 이 책은 지구의 주인이라는 교만에 빠져 끊임없이 ‘가이아’를 괴롭혀 온 인간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뉴스위크로부터 ‘21세기 인류에게 계시록으로 남을 책’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사는 이 책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인간이 사라진 바로 다음날 자연은 인간의 흔적들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자연의 청소 수단은 물이다. 물은 단순한 것 같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진 청소 수단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이 사라진 뒤, 기계를 믿고 더욱 오만해진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자연의 복수는 물을 타고 온다. 그것은 선진국에서 가장 널리 이용되는 목조 건축에서부터 시작된다. 빗물은 먼저 아스팔트나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 외피를 타고 든다.(중략) 지붕 이음매나 모서리 부분에 방수용 철판을 대준다고 하지만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은 어느새 외피 아래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결국 지붕에서는 나무가 계속 썩으면서 지붕틀이 서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결국 벽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겨울철엔 배관이 얼어터지고, 다람쥐와 너구리 같은 야생동물들이 벽에 구멍을 낸다. 나무는 썩고, 시멘트는 조금씩 부스러져 가루가 된다. 수영장이 있는 집은 거대한 화분이 되고, 지하실은 흙과 식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만든 도시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미국의 맨해튼을 예로 들고 있다. 맨해튼 청소 작업의 최고의 주역 역시 물이다. 매일 5,000만 리터의 물을 퍼내는 뉴욕의 지하철역과 통로에는 인간이 사라진 이틀 후에 물이 들어찬다. 비가 오지 않아도 지하철 펌프만 가동을 멈추면 며칠 안에 도시는 물바다가 된다. 도로는 갈라지고 터지기 시작한다. 도로 포장에 틈이 벌어지면 여러 식물들이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난다. 수십 년 안에 인간이 만든 아스팔트 도로와 철근 고가도로 등 도시건조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풀과 숲이 뒤덮는다. 도시에 줄지어 서 있는 건물들은 화재로 무너질 확률이 크다. 20년이면 피뢰침이 삭아 꺾이기 때문에, 벼락이라도 한번 치면 화재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운행을 멈추면 중금속의 폐해로부터 식물들은 점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인당 매연 한 개 이상의 타이어를 버린다고 하니, 세계적으로 버려지는 폐타이어의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자동차의 운행정지로 중금속을 함유한 배기가스가 현저히 줄어들고, 폐타이어가 사라짐으로써 폐타이어에서 나오는 엄청난 오염물질도 사라지게 된다. 이로 인해 지구는 훨씬 더 건강하게 숨쉴 수 있다.


인간이 사리지고 1년 뒤. 무전 송수신탑의 경고등이 꺼지고 고압전선에 전류가 차단되면 고압전선에 부딪혀 매년 10억 마리씩 희생되던 새들에게는 살맛나는 세상이 온다 새들만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이 사라짐으로써 상아를 뺏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코끼리의 개체수는 20배로 늘어나게 된다. 모기도 살맛나는 세상과 만난다. 여러 생물이 나타나 다양한 동물의 피를 시식할 수 있다. 살충제도 사라졌고, 습지가 복구되니 모기뿐 아니라 여러 곤충들도 살맛나는 세상이다. 꽃이 만발해 꿀도 넉넉해지니 벌도 즐거워질 수밖에 없다. 양봉업자에게 꿀을 약탈당할 염려도 없다. 물론 인간의 도움을 받던 애완동물들의 처지는 막막해진다. 인간의 원조가 끊기니 인간이 개량한 동식물들은 도태된다. 살기 위해서는 야생상태로 돌아가 야생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개체가 늘어나고 생물의 멸종이 중지되느니만큼 지구 전체의 생명들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애완동물이나 가축들이 입는 피해는 실로 미미하다.


저자는 책의 한국판 서문에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5천 년 간 논이었던 비무장지대 일대는 50여 년이 지나면서 예전의 습지로 돌아갔다. 50여 년 동안 인적이 없었던 이곳은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고라니 등 야생동물들의 천국이 되었다. ‘인간이 사라지면’이라는 저자의 시나리오가 현실로서 나타난 곳이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야생의 천국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이 하나둘 자신의 땀으로 건설한 도시가 붕괴되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으로 보자면 즐거운 일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문명의 파괴가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초적인 자연으로의 복귀인 셈이다. 그러나 그 복귀의 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18세기부터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 수준으로 떨어지려면 10만년이 걸린다. 태평양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는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데는 몇 천 년, 몇 만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납이 토양에서 전부 씻겨나가려면 3만 5000년, 카드뮴은 7만5000년이 걸린다. 조리기구의 플라스틱 손잡이는 500년이 지나도 멀쩡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라디오와 TV 방송 전파는 계속해서 외계를 떠돈다. 지구인이 멸망해도 지구인이 쏘아올린 TV 전파를 수신한다면 수 천 만년 뒤에도 인간들이 공을 차고 달리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외계에서 청취할 수 있다는 슬프고도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핵의 위협은 자못 심각하다. 3만 여개의 핵탄두와 441개의 핵발전소가 골칫거리로 남는다. 다행하게도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에서 핵탄두가 폭발할 위험은 없다. 대신 포탄의 외피가 부식해 내용물이 노출된다.”고 말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 속에 들어있는 플루토늄의 양은 4∼9㎏. 그 방사능의 강도가 자연 상태로 줄어들려면 무려 35만년 쯤 걸린다. 그러나 와이즈먼은 “생명체가 방사능에 대한 내성이 강해지는 쪽으로 진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그 지역에 사는 들쥐들이 다른 지역 들쥐들보다 수명은 훨씬 짧아졌지만 성적(性的)으로 일찍 성숙해 새끼를 빨리 낳음으로써 개체 수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와이즈먼은 인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연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겠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에너지 절약, 녹색 에너지 개발, 숲 파괴 중지, 산아제한 등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한 해법으로 제안한다. 숫자 부담이 줄어들면 우리의 존재를 계속해서 제어하기 위해 우리가 이룬 발전과 지혜를 유리하게 동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는 점을 들어 와이즈먼은 “모든 가임여성이 아이를 하나만 낳는다면, 현재 65억인 세계인구가 2100년이면 16억으로 줄어들어 세상이 나날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최고로 귀한 존재라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자신을 주인으로서 자처하면서 자연이 자신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자연의 무제한한 정복과 자기중심적 약탈을 정당화해 왔다. 생태계의 피해가 어떠하든 인간은 자연정복의 과정을 진보로 믿어왔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단순한 도구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독선적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습지가 사라지고 곤충과 새들이 사라져도 인간의 문명만 발달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인간의 이기주의, 즉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과의 공존을 거부한다. 그러나 자연은 단순히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욕망의 대상만은 아니다.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해야하는 이유는 거창한 도덕적 요청 때문이 아니라 생존의 요청 때문이다. 우리가 없어도 지구는 남는다. 하지만 지구가 없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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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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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묵직하고도 즐거운 실용서

글쓰기 생각쓰기/윌리엄진서/이한중 옮김/돌베개


『글쓰기 생각쓰기』(원제 On Writing Well) 는 글다운 글이 어떤 글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저자, 윌리엄 진서(William Zinsser)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오랫동안 여러 잡지에 글을 쓰고 예일 대학 등에서 글쓰기를 강의해 왔다. 350페이지 남짓한 책이 묵직하게 읽히는 것도 저자의 풍부한 실전 경험이 녹아들어갔기 때문이다.

저자는 논리와 감성이 잘 조화를 이룬 글이 좋은 글이라는 식의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논리는 풍부한 예시를 거느리고 있어 알차고 공연히 문자 써가며 현학적인 체를 하지 않기에 직설적이고 명쾌하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글의 요건은 먼저 간소함이다. 그는 ‘나’를 글쓰기의 주체로 내세울 수 있을 때 글이 간결해질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경험, 나의 생각,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글쓰기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애써 꾸미고 포장하려다가는 자기 자신을 잃고 만다. 저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 아직 숙성되지 못한 생각과 소화해내지도 못한 타인의 생각을 글로 풀어놓을 때, 글은 장황해지고 난삽해지기 마련이다.

난삽함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은 통일성이다. 대명사와 분위기, 시제를 통일해야 글은 일관성을 갖는다. 통일성을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하다. 절제를 위해서는 언제나 써야할 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모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꼭 필요한 것만을 쓰고 나머지는 버리기 위해서다. 메뉴와 카탈로그와 정기간행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보고 경험하는 세상의 풍경과 일상 또한 글쓰기의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는 해석의 힘일 뿐이다.

‘다른 작가를 모방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걸작을 닮고 싶은 모방의 충동이 결국 걸작을 만들어내는 법. 저자의 말대로 관심 있는 분야의 최고의 작가를 골라서 큰 소리로 읽어보며, 그것을 쓴 작가의 언어에 대한 태도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귀로 받아들여보자.

문학적인 글이 우월한 글이요, 비문학적인 글이 열등한 글이라는 사고방식도 버리자.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글과 나쁜 글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시라. 비록 논픽션이라 할지라도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그 자체로 명문이 아니던가. 이런 글들 앞에서 장르에 대한 위계의식은 어쭙잖고 천박할 뿐이다.

‘여러분이 유머를 쓰려고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모두 진지할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독서를 하는 동안 시종일관 윌리엄 진서의 유머와 낙천적 기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실용서도 이만하면 월척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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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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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풍요 속에서 왜 인간은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진보의 역설/ 그레이그 이스터브룩/ 에코리브르/ 2007


200년 전, 조선의 한 청년이 2000년대로 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너무나도 달라진 한양의 풍경에 우선 놀랄 것이고, 대형마트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랄 것이다. 당시에 목마름은 한 그릇의 냉수나 숭늉으로 간단히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음료수 판매대를 보라. 콜라, 사이다, 이온음료 등등 수십 종의 음료들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음료가 광고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겨울에도 싱싱한 딸기와 야채가 진열되어 있는 모습은 또 어떤가. 한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나오는 에어컨에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다. 잔치나 축제일에만 먹을 수 있었던 쇠고기가 즐비하게 걸려 있는 모습에서 조선의 청년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물질적 삶은 200년 전에 비해 비교해질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뿐만이 아니다. 소아마비, 천연두, 홍역과 같이 인간을 괴롭혔던 전염병은 거의 퇴치되었다. 항생제의 개발로 감염증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초의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31세였지만 지금은 78세로 두 배 이상이 늘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연애를 가로막던 반상의 구별도 사라졌다. 백정의 자식 임꺽정이도 능력만 있다면 벼슬을 할 수 있다. 첩의 자식이었던 홍길동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적서차별 제도도 사라졌다. “우리 조상 세대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우리 시대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는 간디의 말처럼 예전에는 상층계급의 전유물이던 냉장고나 자동차는 이제 필수품이 되어 버렸다. 휴가 시간은 늘었고, 전화 한 통이면 자정 무렵에도 피자가 배달되고, 홈쇼핑으로 집에서도 옷을 주문할 수 있다. 의지와 돈만 있다면, 자유와 풍요를 누구라도 손 안에 넣을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그렇소!”라고 긍정의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우줄증 환자가 50년 전보다 10배나 많아졌다고 하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왜 더 잘 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부제를 단, 그레이그 이스터브룩의 『진보의 역설』은 물질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사람들은 삶이 행복하기는커녕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과연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선택형벌’이 그 하나의 이유다. 관습과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선택해야 할 사항이 많아졌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 때문에 과거보다 사람들은 더 많이 우울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특히 과거에 비해 선택권이 넓어진 여성들에게 우울증이 남성들에게서 보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도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온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와 힘이 없는 자에게 자유는 곧 불안인 셈이다.

이웃에게 지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관계 불안(reference anxiety)'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또 다른 이유다.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집이 우리 가족에게 적당한가?‘ 하는 생각을 접고, ’내 집이 이웃집보다 더 좋은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이나 스위스의 절반 이하지만 행복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붕괴에 대한 불안도 또 하나의 이유다. 경제가 붕괴되지 않을까, 자연자원이 고갈되지 않을까,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도는 환경적 재난이 덮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현대인들은 가장 행복한 현재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것에 대한 기대 또한 불만의 핵심 요소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연봉이 연간 5만 달러지만 연간 5천 달러씩 인상하는 조건과 인상 없이 연봉 25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경우, 전자를 선택할 때 행복해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보통 수준이지만 해마다 소득이 증가하면 매년 삶이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소득이 높아도 매년 삶이 정체되어 있으면 삶이 작년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매스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매스컴은 긍정적인 면은 부정하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뉴스란 원래 대중들이 가장 위급하게 알 필요가 있든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엘리트 집단 또 나쁜 뉴스를 더 좋아한다. 엘리트 집단들은 만약 나쁜 일이 발생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단언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거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가 위기로 부풀려져야 엘리트 집단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도 엘리트 집단이 나쁜 뉴스를 선호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카탈로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설명한다. 과거에는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고급 잡지나 카탈로그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병이라던가.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카탈로그는 보통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불안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심리적 매카니즘이 인간의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진화심리학적인 설명도 이채롭다. 웃으며 꽃향기를 맡던 조상들은 맹수에 잡아먹힌 반면,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불안하고 걱정이 많던 조상들은 생존가능성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아무리 식량을 많이 쌓아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며 항상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애쓰던 초기 인간은 살아남고 번식하여 그들의 유전자를 우리에게 물려준 결과 우리는 불만족이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공하거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인 코티솔을 더 많이 분비한다는 연구결과도 저자는 소개한다.


저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수준이란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지만 삶에서 의미가 결핍되었다고 느낌에 따라 우리 사회는 ‘물질적 욕구’에서 ‘의미의 욕구’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

저자는 최근의 심리학 연구주제인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그 대안으로 소개한다. 긍정심리학은 정신이상의 원인을 찾는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어떻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은 바이올린처럼 연습을 통해 가능해진다.”라는 영국의 평론가 존 러벅의 말처럼 행복은 삶에 긍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 긍정심리학의 핵심이다.

긍정심리학의 대가인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교수는 조지메이슨대학에서 행복론 강좌를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험해보라’, ‘다른 사람을 위한 친절 베풀기를 경험해 보라.’라는 2가지 숙제를 제시했다. 첫 번째 숙제에 대해서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바다 속에서 남자 친구와 섹스하기’,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 마시기’ 등의 답변이 나왔다. 두 번째 숙제에서는 ‘헌혈하기’, ‘여성보호소에 기증할 의복을 수집하기’,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50달러 팁 주기’ 등이 나왔다. 참여한 학생 대부분은 이기인 행동에서보다는 이타적인 선행에서 더 장기적인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진보의 역설』의 저자 그레이그 이스터브룩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용서’와 ‘감사’가 행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명한다. 이타적인 행동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긴요하다는 주장이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한 사람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저자는 하나의 예화를 든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유학을 가 반(反)인종분리정책 운동을 돕던 딸, 에이미가 현지에서 두 흑인 청년에게 살해되자, 부부는 딸이 살해당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자신의 딸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딸을 죽인 두 청년을 만나, 그들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친구로 맞이하고, 장학재단에서 봉사하게 하였다. 2년 동안 청년들은 부부를 도왔고, 그들은 서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런 예화를 통해서 저자는 용서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한때 세계적으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의 탐욕과 부도덕을 폭로하기도 한다. 2001년 젝 웰치가 GE를 떠날 때 회사는 그에게 매년 900만 달러의 연금과 초호화 아파트, 평생 동안 제트기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마신 술값을 회사가 낸다는 약속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이혼 소송 자료로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의하면 순자산이 4억 5000만 달러(이 금액은 보수적으로 투자해도 매년 약 2000만 달러의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한다.)이지만 매년 자선단체에 단지 300만 달러만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 인류의 행복감은 증진될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는 세계 인구의 5퍼센트인 미국이 세계자원의 25퍼센트를 소비한다는 통계는 미국인이 자원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삶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자원이 더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이 세계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미국과 유럽연합은 역사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그 혜택을 제3세계에 돌려야 하다는 것이다. 또 미국과 유럽 연합이 세계의 빈곤 타파를 위해 헌신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 일이 옳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할지라도 소유에 비례해서 욕망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면 인간은 좀처럼 소유를 통해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설령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후손들은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겠지만 빈곤을 타파하고, 온실가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끌어들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세계화는 모든 지구인에게 유익하다는 저자의 주장 또한 비판적인 검토를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데 『진보의 역설』은 충분히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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