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 - 인물과 건축 시리즈 2
승효상 / 서울포럼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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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건축가 승효상



  워싱턴 호수와 유니언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일명 ‘호수 위의 집’은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인 빌 게이츠의 저택.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연어들이 알을 낳는 호수가 집 안 어디에서나 한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1층 현관에 들어서면 1층 현관 오른쪽에 리셉션 홀이 있고,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극장이 나오고, 더 나가면 가로 5m, 세로 15m 규모의 수영장이 있다.

  이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누구나 전자핀을 옷깃에 꽂아야 한다. 이 핀은 방문객이 누구인가, 그가 지금 저택의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방문객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몇 발자국 앞에서 전등이 저절로 켜지고 꺼진다.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면 어디를 가든 그 음악이 귓가를 따라다닌다.

  저택 안의 도서실의 중앙에 빌 게이츠의 책상이 놓여있다. 도서실의 시스템은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집안에는 곳곳에 대형 비디오 모니터가 설치돼 있고, 집 안의 모든 컴퓨터에는 사무자동화용 소프트웨어가 깔려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집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내 목표는 편안하고 즐거우면서도 쾌적한 분위기로 창조성을 자극하는 집을 짓는 것이며 ‘집이란 미래의 비전을 만들고 사업구상을 위한 창조의 터’라는 집에 대한 철학을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컴퓨터라이프 잡지와 인텔이 주최한 ‘사이버홈(CyberHome) 2000’  전시회는 인텔, IBM, 컴팩, 휴렛팩커드 등 첨단기술을 이끄는 회사들이 참가해 사용자들의 생활을 보다 안락하게 해주는 PC 기술을 보여줬다.

  컴퓨터라이프 편집장 매기 캐논은 사이버홈 2000은 “단순히 미래의 가정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기술이 미래에 실현되는 현실적인 방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가령, 저녁 무렵 PC와 연결된 부엌의 평면 스크린은 음성 명령에 따라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온 비디오 메시지를 보여준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팩스나 전자메일, 전화 메시지도 들려준다. 

  귀가하면서 차에 있는 PC를 통해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주방 카운터에 있는 스캐너로 식품보관소에 들어 있는 몇 가지를 선택하고 PC로 접근하면 몇 가지 조리법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조리를 시작할 수 있다.

  사이버홈 2000에서는 PC로 아이들이 어떤 게임을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못된 동영상을 보았다가는 부모님께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부모들은 pc로 아이들이 영화를 보는지, 숙제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어떤 웹사이트를 검색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청결한 흰 침대에서 눈을 뜬 링컨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다. 이때 소변을 분석한 변기 내 장치가 말을 한다. “몸에 이상이 발견돼 주치의를 연결할 테니 만나보라” 이는 영화 <아일랜드>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최첨단 디지털 의료장비를 생활 속에서 마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바로 눈 앞의 현실이다. 이미 혈압이나 혈당 등 신체와 관련한 각종 정보가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이 시시각각으로 점검되는 시대다.


  이쯤 되면 가히 디지털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등을 발명했다는 에디슨이 살아난다 해도 이런 첨단기술에는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편리만이 능사일까.


『장자』의 <소요>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자공이 초나라를 유람하다 진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를 소개합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분연히 낯빛을 붉히며 이야기한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장자에 등장하는 노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산티아고라는 노인과 너무도 흡사하다. 노인은 엄청나게 거대한 청새치와의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에게 청새치를 빼앗기고 뼈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죽는 일은 있을 망정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고. 노인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물고기가 아니다. 만약에 그가 물고기를 원했다면 탁월한 성능을 가진 기계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티에고가 원한 것은 물고기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원한 것은 물고기를 잡는 분투의 과정이었다. 산티에고 노인이 기계를 사용했다면 그는 물고기라는 결과는 얻었을지언정 고통스런 과정은 잃어버렸을 것이다.

  산악인들도 마찬가지다. 첨단의 기술에 의존하면 쉽게 정상을 정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겪어야 할 고통스런 과정은 사라진다. 그러나 산악인의 영광은 오히려 고통스런 과정에 있는 것이다. 똑같이 에베레스트를 올랐다고 할지라도 더 험한 시즌에, 더 힘든 코스를 택한 산악인에게 최고의 영광이 돌아간다. 최고의 영광은 가장 큰 고통을 이겨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노인에게 있어서나, 산티아고 노인에게 있어서나, 산악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고통은 당당히 맞서야할, 물리쳐야 할 초극의 대상일 따름이다. 장자의 노인이나 산티아고 노인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편리만이 인간적 진실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편리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불편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건축가가 있다. 승효상이 바로 그다. 그는 아름다운 집이란 어떤 집일까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우선 내 견해로는 다소 불편한 집이다. 소위 동선도 길어서 좀 걸어야 하고 대문도 나가서 열어줘야 하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를 훔치며 가족의 살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집이 건강한 집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다소 불편한 듯한 집에서의 삶이 궁리를 만들고 생각하게 하고 사유케 한다. 다시 말하면 사유할 수 있어 우리의 삶을 다시 관조하게 하는 집, 이 집이 아름다운 집이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집이다.”

  거실에 앉아서 리모컨 하나로 문도 열고 에어컨도 작동하고 밥도 짓고 창문도 여닫을 수 있는 것이 홈오토메이션일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자동화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살가운 관계를 방해한다는 것이 승효상의 생각이다. 기능성, 편리성이 다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승효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건축에서 배우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빈자의 미학’이다. 장식과 치장으로 집을 채우려만 하지 말고 담백하게 비우라는 것이 그가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빈자의 미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충고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공간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승려들이 지내는 검소한 방은 승려들로 하여금 검소한 태도를 몸에 지니게 한다. 엄숙한 분위기의 사원은 사람을 진중하게 한다. 채움의 미학보다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건물이 소박한 인간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승효상의 건축철학이다. 편리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첨단의 건축기술만이 다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는 『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집들은 홀로 서 있지 않으며 더불어 있고 밖으로 열려있다. 폐쇄회로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철조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으며 담장은 낮아서 바깥의 풍광이 넘나들고 골목소리가 쉽게 들리는 집이며 어떻게 보면 만만히 보여 쉽게 이웃하도록 만드는 집이다. 이런 집에서의 삶은 집 속에만 갇혀 있지 아니하고 이웃으로 이어져서 서로서로에 애정을 쏟아 결국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빌 게이츠의 저택은 그에게 ‘사업구상을 위한 창조의 터’일지는 몰라도 우리네 마당과 같이 혼례도 치르고, 같이 일도 하고, 잔치도 여는 그런 인간적인 터는 아닌 듯싶다. 첨단의 건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점점 인간적인 공간은 축소되어 간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살내음을 맡고, 때로는 고독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없을까. 일찍이 조선시대 유학자 송순은 이렇게 노래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여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멋과 낭만이란 곧 스스로를 비워낼 줄 아는 여유일 것이다. 정전이 되고 컴퓨터 시스템에 혼란이 생긴다면 이내 엉망이 되는 그런 집이 아니라 다소 불편하더라도 여유 있는 집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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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 다윈 의학의 새로운 세계
랜덜프 네스.조지 윌리엄즈 지음, 최재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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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물리쳐야만 하는 인간의 적인가?



  원시인들은 굶주림과 항상 대결해야만 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사슴이라도 한 마리 사냥한다면 배불리 먹는 호사를 누렸겠지만 배부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작 한 나절이면 끝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먹이 속의 영양분을 체내에 축적해둘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남들은 먹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마음껏 먹고 체내에 지방으로 영양분을 축적시켜두고 필요할 때에 분해하여 쓸 수 있으니 생존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다윈의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바로 이 유전자가 수렵시대의 원시인들에게는 꼭 필요했던 유전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유전자의 이름은 무엇일까. 고마운 유전자? 영양축적 유전자? 답은 ‘비만유발 유전자’다. 대체 인간의 생존에 유리했던 이 고마운 유전자가 왜 ‘비만유발 유전자’라는 아름답지 않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다윈의학자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초콜릿, 햄버거, 콜라, 피자, 감자칩…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자 수만 년 동안 인간의 몸에 존재하면서 영양을 축적해주고, 필요한 때에 에너지를 꺼내어 쓰게 해주던 기능을 하던 이 '고마운 유전자'가 이제는 '뚱보 유전자'니 '비만유발유전자'니 '성인병 유발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기침이나 통증, 발열, 빈혈 등과 같은 증상들을 질병으로 여긴다. 그런데 다윈 의학은 이 증상들을 적응에 의해 진화된 우리 몸의 방어 체계라고 주장한다. 기침은 허파에서 이물질을 제거해 준다. 허파에서 이물질을 제거함으로써 자칫 폐렴으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예방한다.

 

  아픔을 느끼는 능력 역시 몸에 이롭다. 가령 자연계에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는 종과 고통에 민감한 종이 있다면 어떤 종이 선택될까를 생각해보라. 고통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빨간불, 일종의 경고요 신호인 셈이다. 고통에 민감한 사람은 그 신호를 빨리 알아차리지만 고통에 둔감한 사람은 그 신호를 간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일종의 방어체계였다.

 고열은 세균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체가 세균에 반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높은 체온은 면역 반응을 촉진하여 병원균의 파괴를 쉽게 한다. 차가운 피를 가진 도마뱀도 병에 걸리면 따뜻한 곳으로 가서 본래보다 높게 체온을 유지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도마뱀은 감염으로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빈혈은 세균으로 하여금 필요 영양분을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체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성적인 간염에 시달리는 환자는 병을 앓는 동안에 세균이 철분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혈액 내에 정상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철분의 많은 양을 회수하여 간장 안에 보관해 두기 때문에 빈혈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윈 의학의 주장대로 자연 선택이 신체의 방어 체계를 진화시켰다면 우리가 상용하는 약은 도리어 우리 몸의 방어 체계의 기능을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가령 이질에 걸려 설사를 멎게 하는 지사제를 먹은 환자는 합병증에 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종길의 시 <성탄제>에는 사경을 헤매는 아들에게 해열제인 산수유 열매를 찾아 한밤중에 눈길을 헤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깊은 밤 아버지는 어둠 속의 눈길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신다. 아들은 그 산수유 열매를 먹고 점차 열이 내린다. 간을 졸이시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피로하신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돈다.

 

 병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묶어준다. ‘아버지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 틀림이 없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박정하게 대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던 아들도 아버지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며 한밤중에 추위 속을 헤치고 약을 구해오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된다. 혈육이란 이렇게 같이 아파해주고, 아픔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존재임을 아들은 자신의 병을 통해 저절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은 아프면서 자란다고 말씀하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그만 증상이라도 엿보이면 당장에라도 병원에 가서 항생제나 해열제 주사라도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오늘날은 아이들이 제대로 아플 틈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No Pains, No Gains라는 말도 있고, 한 인간의 크기는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깊이에서 온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퇴치해야만 하는 부정적인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픔을 통해서 아이들은 세상을 보는 더 맑은 눈을 갖게 된다. 그것이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아봐야 그 병에 걸린 사람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는 법이다. 병은 퇴치해야만 할 적만은 아니다. 병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도 있다면 병은 타인에게로가는 사랑의 통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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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간의 동반자
제임스 서펠 지음, 윤영애 옮김 / 들녘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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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의 고통이 선택되다




피실험자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한 장의 사진은 정상적인 아기 사진이고, 또  한 장의 사진은 아기다운 특성이 의도적으로 과장된 ‘인공적인’ 사진이다. 성인 피실험자에게 실제 아기에 가장 가까운 사진을 고르라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실험의 결과, 대부분의 피실험자는 인공적인 사진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피실험자들이 생각하는 ‘아기다움’이란 어떤 특성들일까.


동물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여러 척추동물의 새끼들을 비교해보면 이들이 모두 일정한 물리적 특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척추동물의 새끼들은 성인과 비교해볼 때, 머리가 몸통에 비해 훨씬 크고, 사지는 짧고 통통하고, 눈이 크고, 턱, 입, 코는 더 작다. 전체적으로 살집이 많고 통통한 외형을 지녔으며, 피부나 껍질과 털은 더 부드럽고, 움직임은 더 서툴다. 이런 특성을 지닌 동물들은 귀엽다는 느낌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귀엽다는 느낌은 보호하고 돌봐주려는 욕망마저 불러일으킨다. 로렌츠는 이런 반응은 인간이 자기 자식의 모습과 소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도록 진화된 탓이라고 설명한다.


할리우드의 만화가들은 바로 이런 특성을 극대화하여 만화의 캐릭터들을 만든다. ‘아기유령 캐스퍼’를 떠올려보라. 오동통한 볼과 커다란 눈과 머리는 로렌츠가 말하는 ‘아기다움’의 특성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런 아기다운 특성을 가진 강아지를 보면 사람들은 대개 활짝 미소를 짓는다. 길을 가다가도 그런 개를 품에 안고 가는 사람을 보면 “한 번 만져볼 수 있을까요?”  대범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뺨에 부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개는 자연 속에서 스스로 진화된 동물이 아니다. 1만 2천 년 전부터 개는 인간에게 사육되어 왔다. 모든 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의 개들은 작고 귀엽고 어려 보이는 동물들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인간의 속성이 반영되어 그 크기와 생김새가 변화했다고 『동물, 인간의 동반자』의 저자 제임스 서펠은 말한다.  턱과 코는 납작해지고, 눈은 비교적 커지고 돌출되었으며, 이마가 넓어진 경우가 이런 변화라는 것이다. 불독, 치와와, 시츄를 떠올려 보라. 이런 동물들의 얼굴 표정은 사람들에게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반응을 유발하도록 맞춰진 듯한 여러 외형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시츄의 커다란 눈은 인간으로 하여금 귀여움을 느끼게 할지 모르지만 시츄 본인에게는 썩 달가운 것이 아니다. 시츄를 길러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시츄는 늘 눈에 눈꼽이 끼고, 눈과 관련한 질환을 자주 앓는다. 진화론의 논리대로라면 눈과 관련한 질환을 유발하는 커다란 눈은 시츄의 생존에 불리하므로 도태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애완동물의 역사에서 진화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애완동물의 역사를 이끈 것은 진화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은 개체의 복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개가 눈병을 앓건 말건 관심이 없다. 오직 큰 눈이 귀엽게 보이면 기꺼이 그 개를 애완용으로 선택한다. 납작한 코와 툭 튀어나온 눈이 개의 삶에서는 불리한 조건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조건이라면 인간은 기꺼이 그 종을 선택한다.


제임스 서펠은 우리가 애완동물들에게 요구한 온갖 매력적인 특성들로 인해서 수많은 동물들은 신체적 기형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불독과 킹 찰스 스패니얼의 튀어나온 눈은 건조해지기 쉽고 다치기 쉽다. 이들의 납작한 얼굴은 호흡곤란과 치아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재미있고 사랑스런 표정을 갖게 해주는 얼굴의 주름 속에는 박테리아가 자리잡기 쉬워 심각한 전염병에 걸리기도 한다. 결국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의 고통이 선택된 셈이다.


물기가 있는 대변을 피하기 위해 애완동물들에게 변비에 가까운 대변을 유발하는 먹이를 주는 인간들에게도 애완동물들은 꼬리를 흔든다. 자신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었든 말든 치와와는 커다란 눈으로 인간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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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나탈리 앤지어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해나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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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대지의 청소부 쇠똥구리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이라는 한문단편소설에는 ‘똥선생’이라는 뜻을 가진 '예덕선생(穢德先生)'이 등장한다. 예덕선생의 본명은 엄행수다. 그는 도성의 똥을 수거해 근교의 채소 농가에 거름으로 내다 파는 일을 한다. 선귤자의 제자가 자기 스승이 엄행수를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며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하려고 하자 부끄럽다며  그의 문하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선귤자가 제자에게 말한다. 선귤자의 말을 간추리면 이렇다.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주마. 모든 사람들이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엄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당시의 선비들이라면 똥을 치는 일은 더럽고 천한  일이라 하여 고개를 내저었겠지만 박지원은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이렇게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가 많다. 자연계의 존재들을 대할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가축이나 곡물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인간들은 짧은 안목으로 무엇이 진정으로 쓸모가 있는 존재인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쇠똥구리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쇠똥구리와 예덕선생은 흡사한 데가 있다. 먼저 그들은 더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감하게 더러움 속으로 뛰어든다. 사실 더러움이란 인간이 자연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쇠똥구리에게는 똥무더기는 먹이를 마련해주는 일터다. 굳이 더러움이란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쇠똥구리는 예덕선 못지않게 부지런하다. 그들은 동물이 버린 오물 위로 달려가 잽싸게 그것을 땅에 묻는다. 똥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은 어디든 간다. 그들은 날마다 소, 말, 코끼리, 원숭이, 그리고 인간과 같은 덩치 큰 포유류에게서 나오는 수백만 톤의 똥을 열심히 먹어치운다. 서아프리카에서 쇠똥구리는 ㏊당 연간 1t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청나게 부지런한 청소부인 셈이다. 쇠똥구리의 이런 탁월한 청소능력을 활용하는 나라들도 있다.


나탈리 엔지어는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라는 책을 통해 쇠똥구리의 덕을 찬양해 마지 않는다. 나탈리 엔지어의 말대로라면 쇠똥구리는 동물계의 ‘예덕선생’이다. 책에 의하면 쇠똥구리는 당장 먹지 않을 똥을 땅에 묻어둠으로써 대기중으로 날아가 버릴 질소를 흙 속에 보존하여 땅을 기름지게 한다. 또 지렁이처럼 땅을 파헤쳐 공기를 잘 통하게 하여 식물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쇠똥구리의 유충은 기생충과 구더기를 잡아먹어서 질병을 퍼뜨리는 미생물의 수를 줄여준다.


나탈레 엔지어는 쇠똥구리가 생태계에서 얼마나 건강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쇠똥구리가 없었다면 덩치 큰 포유동물이 아프리카의 초원지대 같은 곳에서 대규모로 밀집해서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쇠똥구리가 초식동물의 배설물을 먹어치움으로써 초식동물의 먹이인 식물들이 자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쇠똥구리의 생태학적 가치와 관련해 흥미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소와 양은 약 2백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처음 들어왔는데, 그곳의 토종 쇠똥구리들은 캥거루나 코알라가 내놓는 한 입 크기밖에 안 되는 배설물에 익숙해진 탓에 외국에서 들어온 동물의 엄청난 배설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동물의 배설물 문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배설물 속에서 자라는 똥파리가 극성을 부렸다. 지금도 목축을 많이 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하루 약 2억 개의 똥무더기가 생긴다고 한다. 냄새도 냄새지만 이 똥무더기가 햇볕에 말라붙으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풀도 자라기 힘들게 된다. 이래저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때 호주 정부가 덤불파리 퇴치를 위해 묘안을 짜낸 것이 쇠똥구리다. 호주정부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서 24종의 쇠똥구리를 수입하면서 배설물 문제는 해결되었다.


원효대사도 “예토(똥처럼 더러운 땅)와 정토(깨끗한 땅)는 본래 일심이요, 생사와 열반도 궁극에는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것이 마음에 달린 문제다.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배설물을 청소해주는 쇠똥구리에게 인간은 고약한 선물로 은혜를 대신했다. 바로 소에게 먹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항생제다. 이제 대한민국의 어디에서도 쇠똥구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소의 똥에 섞인 항생제가 쇠똥구리에게 몹쓸 짓을 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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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질병을 만들어서 판다고?



  이 세상 사람들의 병을 모두 없애주시고 그들을 질병과 고통의 근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소서, 라는 어떤 종교지도자의 간절한 기도를 전능한 조물주께서 들어주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해방시켜주신 신이여, 감사합니다. 당연히 환자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울상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병원이나 약국의 경영자이다.

  질병이 있기 때문에 병원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어떨까. 병원의 경영자들로서 보면 이 또한 골칫거리다. 오히려 질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단한 병에라도 걸린 양 호들갑을 떠는 건강염려증 환자들 때문에 병원은 북적거릴 수 있는 것이다.


  래이 모이니헌과 앨런 커셀스가 공동 저술한 『질병판매학』은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다.  제약 회사들이 '병을 만들어서 약을 판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흰머리를 질병으로 분류한다면 제약회사들로서는 많은 양의 염색약을 팔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몸에 적당히 살이 붙는 것도 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조사에 의하면 어떤 대학교의 여대생 10명중 4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자 신입생 절반 이상이 운동으로 살을 빼고 있다고 한다. 물론 게 중에는 생활에 불편을 줄 정도의 과체중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적당한 몸무게를 가진 여학생들마저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다이어트 사업은 날로 번창해간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라. 이것이 제약회사의 판매 전략이다. 병(病)의 사전적 의미는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고, 약(藥)의 사전적 의미는 '병이나 상처 따위를 고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먹거나 바르거나 주사하는 물질'을 말한다. 그러나 제약회사들로서는 병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경영상 이익을 가져다준다. 당연히 그들은 질병이 아닌 것을 질병으로, 정상인 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폐경도 여성호르몬을 주사하면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는 점을 소비자들에게 강조한다. 뿐만이 아니다. 우울증처럼 환자의 환경이나 정서나 마음의 문제도 결국 뇌의 문제로 귀결시켜 약물치료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처럼 병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일상적인 증상을 약물치료가 필요한 질환임을 강조하여 약물복용이 필요 없는 환자들까지 약물복용에 대한 유혹을 갖게 한다. 월경 전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여러 증상을 ‘월경 전 불쾌장애’라는 새로운 진단명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또 아이들이 주의가 산만한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아동주의력결핍장애’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면 이 또한 치료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또 여러 사람 앞에서 무엇인가를 발표하는 일이 생기면 약간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것도 보통 사람들이 겪는 흔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에 ‘불안장애’라는 병명을 붙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약을 제시한다다면 멀쩡한 사람들도 그 약을 복용할 것이다. 제약회사로서는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다.


  아무리 강철의 심장을 가진 부모라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라는 속담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찢어지는 심정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만약 어떤 제약회사의 영업자가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다가가 “당신의 슬픔은 우리 회사의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를 상상해보라. 십중팔구는 뺨을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식이 살아있을 때 내가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조금 더 친밀하게 자식과 대화하지 못했을까, 두고두고 후회하고 아파하는 것이 어쩌면 슬픔을 진정으로 치료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별로 인한 상실감, 실패로 인한 좌절감 등을 우리는 삶에서 숱하게 만나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국면들이다. 바로 그런 국면들에 부딪혀 극복해가는 과정이 성장이요 성숙의 과정이다. 그러나 약물을 통해 고통의 과정을 생략하겠다는 것은 성장과 성숙을 멀리하겠다는 자폐적인 태도다. 고통에 직면하는 것은 시련과 대면함으로써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새겨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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