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반역이다 -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임지현은 여러 매체를 통해 민족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발언해온 학자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한국일보. 2004.5.27)에서 ‘민족 기준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 동기’를 묻는 인터뷰어에게 “유럽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80년대에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시즘에 매달리면서도 왜 민족 문제는 모두 피해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르크시즘에 조금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민족은 영원한 실체’라거나‘단군 이래 5,000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등의 얘기에 당연히 의문을 느껴야 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한국 사회의 민족 담론이 세계사적 상식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민족 담론에 대한 세계사적 상식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하여 민족은 인종에서 유래하는 것도, 언어로 구분되는 것도, 종교로 결속되는 것도, 그리고 국경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민족이란 언제든지 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는 개념일 뿐임을 강조한다. 르낭은 민족보다는 인간 자체를 생각하자고 주장한다.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이 민족담론에 대한 세계사적 상식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명제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을 통해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위력이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만들어진 전통』의 저자, 에릭 홉스봄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민족주의는 더 이상 세계적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낮은 위치에 그 역할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민족주의를 평가절하하면서 민족이란 의심할 수 없는 가치처럼 보이지만 이도 실상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민족은 영원한 실체라거나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민족주의를 요란하게 장식한다. 그러나 임지현은 민족이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04년께부터 비로소 민족이란 말이 쓰였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네이션’(Nation)을 ‘민족’(民族)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했고, 그 말이 그대로 들어왔다. 혈연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동포’(同胞)라는 말도 외세의 압박이 시작된 구한말부터 쓰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란 개념은 애초에 없었으며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민족이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에릭 홉스봄의 주장과 상통한다. 임지현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정에서 나온 서구의 ‘네이션’은 혈통이나 문화전통의 공통성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주관적 의지를 중시했다.”고 말한다. 임지현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알사스 로렌 지방을 예로 든다. 프랑스혁명(1789~1794년) 당시만 해도 알사스 로렌 주민들은 독일어를 썼고, 문화 전통도 독일과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배경인 1870년 보불전쟁 때에 이르면 프랑스 민족의식이 뿌리내릴 정도로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프랑스 혁명직후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 국가를 결정했는데 독일을 선택하면 봉건제로 후퇴하고, 프랑스를 택하면 시민혁명의 성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 당연히 프랑스를 택했다는 것이다. 혈연적 공통성이 민족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주관적 의지가 민족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임지현은 민족의 개념이 주관적 의지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혈통ㆍ문화 공통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 ‘저항’과 ‘혈통’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야 했던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그는 민족주의는 늘 국가 권력이 민중을 동원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경제성장이란 목표 달성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족주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집권 후인 1963년 교육과정 개편에서 민족주체성, 민족교육 이야기가 나왔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나오면서 박정희 시대의 민족주의 교육은 절정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박정희 정권은 천마총 등 역사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이순신을 비롯한 역사 인물의 민족영웅화 작업을 통해 민족주의를 일층 강화했다는 것이다.


임지현은 민족의식에 근거한 역사 인식의 문제점은 역사를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이 5,000년 전부터 단일민족으로서 영구불변하는 실체라고 믿는 태도가 바로 역사를 신화로서 이해하는 태도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나가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편다. “너도 나도 통일을 ‘민족적 과제’라고 얘기하지만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상이 분명하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한반도 주민들의 행복한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통일이 그런 행복을 가져온다면 해야 하고, 어떤 통일이 거기에 적합한지를 논의해야 한다. 행복한 삶에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면 통일국가 구상 대신 탈대결, 평화공존, 좋은 이웃나라의 길을 모색하면 된다.”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책에서 철학자 탁석산이 보여준 태도와 일치한다. 탁석산도 임지현과 마찬가지로 통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무엇을 할 때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임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인종적 민족주의’로 정의한다. 혈연·지연·언어 등에 집착한 결과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는 폐쇄적이고 퇴행적인 가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한국사회도 이제 인종주의 문제를 차분히 짚어볼 시점이 됐다. 한국사회는 과연 동남아 등지로부터의 이민 근로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착취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냉정하게 물을 시점이 되었다. 한국인의 일상 속에 내면화된 파시즘(권위주의)을 임지현 교수는 그의 또 다른 저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다. 그는 개개인의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스며있는 내면화된 규율권력, 예를 들어 반공주의, 위계적 언어생활, 규율과 복종의 학교교육,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등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을 가리켜 이를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지칭한다. 그는 일상적 파시즘을, '너 뉘집 아들이야?'라는 말 속에 내재된 가부장적 혈통주의, 권위주의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건축문화에서도 찾고 있다.


대한민국이 단일민족 국가라는 환상도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임지현의 주장이다. 인종과 문화는 섞일 수밖에 없고 섞일수록 강하다는 것이 생물학에서의 이른바 ‘잡종강세’의 원리다. 백인을 제외한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의 뿌리는 단일민족의 신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이냐고 유전학적으로 묻는 질문에 학계의 답은 “아니오.”이다. 2006년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S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60%의 북방계와 40%의 남방계 여러 민족의 유전자가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결국 한민족은 ‘복합민족’이라는 것이다.


위의 주장과는 달리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민족주의를 크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로 구별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 제국과 일본처럼 다른 약소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고 억압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인 유형화를 소홀히 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이지현 교수와 신용하 교수의 주장이 최근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최근의 큰 두 줄기를 대변한다. 어떻든 두 교수의 주장의 내용과 겉모습은 달라도 두 주장 모두 민족주의가 맹목적인 애국심과 결부되어 타자(他者)를 배쳑하는 배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적 신념 위에 세워져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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