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과 더러움 - 청결과 위생의 문화사
조르주 비가렐로 지음, 정재곤 옮김 / 돌베개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켜주는 책

깨끗함과 더러움/ 조르주 비가렐로/돌베개/2007


침은 더럽다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어떤 문화권에서건 침을 흘리는 행위는 결코 환영 받지 못한다. 식사 도중에 식탁에 기침을 하여 침을 튀는 것은 무례한 행위에 속한다. 의도적으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치욕으로 맹렬한 감정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침이 과연 더러운 것일까. 만약에 침이 더럽다면 사람들은 왜 침이 고일 때마다 외부로 배출하지 않는 것일까. 맛있는 음식을 보았을 때 침이 괸다면 뱉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침이 불결한 것이라면 키스는 매우 위험한 행위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침의 불결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을 주저하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입 밖으로 나와 타인의 얼굴에 튀거나 음식물에 묻은 침을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순수와 위험』의 저자, 메리 더글러스의 설명은 이렇다. “신발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더럽다. 음식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침식에 식사 용기를 놓는 것이 더럽거나 옷 위에 흘린 음식이 더럽다.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화장실 도구나 의자 위에 놓인 옷, 실내에 있는 실외 도구, 아래층에 놓인 위층 물건, 겉옷 위에 드러난 속옷 등등, 요컨대 우리들의 오염에 관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존중되어 온 분류를 혼란시키는 관념이나, 이것과 모순되는 일체의 대상에 대한 관념을 그른 것이라고 하는 반응이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고, 침이 입 속에 있을 때, 그것은 우리들의 분류 체계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발이 식탁 위에 놓이고, 침이 타인의 얼굴 위로 튈 때, 그것은 ‘장소에 맞지 않는 사물’이 된다. 특정의 물건은 특정의 장소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분류체계다. 가령 두루마리 화장지는 화장실에 걸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고급 레스토랑에 있을 때 사람들은 불결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이때 두루마리 화장지는 ‘장소에 맞지 않는 사물’이다. 이렇듯 사물의 더러움은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원효대사는 일찍이 ‘해골바가지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나서 “진(眞)과 속(俗)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다(眞俗一如 染淨不二).”라고 한 바 있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채근담(菜根譚)』의 저자, 홍자성(洪自誠)도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 속에서 나오고 밝음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생겨난다(潔常自汚出 明每從晦生也).”라고 말한 바 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개념을 무쪽 가르듯 구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순수함과 더러움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직물이라는 비단은 고작해야 누에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더럽다고 피하는 똥도 쇠똥구리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일터요 쉼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썩어가는 환부도 쉬파리에게는 알을 낳을 수 있는 더없이 아름다운 곳일 수 있다. 더러움은 상황과 문맥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청결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는 조르주 비가렐로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책은 인간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위생관념을 가졌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령 16세기 이전에만 해도 목욕탕은 청결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목욕탕은 매춘의 장소, 즉 쾌락을 위한 장소였다. 목욕탕은 놀이와 일탈의 장소였다. 그곳에 가서 병이라도 얻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청결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몸에 뚫린 구멍으로 물과 공기가 침투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목욕탕은 ‘즐거움’의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은 마른수건으로 건조한 세수를 하고 화려한 옷에 향수를 뿌려댔다. 이때 목욕탕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16세기에는 정기적으로 셔츠를 갈아입는 게 청결의 요건이었다. 셔츠가 더러워지는 것은 몸의 더러움을 빨아들이는 스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인식했다.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 흰 속옷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옷마저 깨끗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곧 ‘보이지 않는 신체부위까지 사회화하려는 노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중들은 이제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된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사회화된 시선’이란 쉽게 말해 나의 몸을 남들이 들여다보면 나를 더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면에 만들어진 타인들의 ‘가상의 시선’, 바로 그것이 사회화된 시선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귀족층들을 중심으로 더운 물 목욕이 섬세한 감각과 관능과 여유를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 부르주와들은 신체에 활력을 가져다주고 신체를 단련시킨다는 이유로 냉욕을 선호했다. 이후 19세기로 넘어와 물을 대규모로 공급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도시환경이 정비되면서 물로 피부를 깨끗이 하는 습관이 자리 잡게 된다. 미생물학의 발달로 청결과 건강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욕실은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된 사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일반대중들에게 청결관념을 퍼뜨린 것은 당시 정부가 위생과 질서를 강제화한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종찬의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라는 책은 동사시아에서의 근대의 국가권력이 위생관념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고, 최초의 비정부기구로서 1883년 5월에 일본사립위생회가 조직되어 위생개혁운동을 조직한다. 이 단체의 목표는 “일본 국민의 건강과 삶을 보존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토론하고 연구하며, 위생지식을 대중화하고, 위생행정을 지원하는 데”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개인의 몸을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파악하면서, 국가의 부를 증강하기 이해선 개인의 건강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위생은 개인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부국과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통치자들은 제국의 국민들에게 “질병은 더 이상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공공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강요하였다. 그래서 세균을 가진 환자들은 제국의 질서를 문란하게 할 위험인자이므로, 제국의 몸을 건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세균이 많은 비위생적인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자신은 중심이고 주변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위생적인 것과 비위생적인 것의 경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면 우리는 놀라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가래침처럼 끈적끈적한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끈적끈적한 성질, 즉 점착성을 왜 사람들은 ‘불결함’에 연결시키는지를 고민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였다. 물은 우리의 손에서 흘러가버린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것은 만지는 순간, 즉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순간 사물이 오히려 우리를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즉 사물에 의해 오히려 우리가 소유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끈적끈적한 것들에게는, 소유되는 것들이 소유하는 것들을 오히려 소유하려는 음험한 계책이 있다고 숨어있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내가 누군가를 소유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소유한 것이 끈끈이주걱처럼 끈적하게 나에게 달라붙으면, 그래서 아무리 떨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왈칵 겁이 나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로구나, 내가 소유하려고 했던 대상에게도 나를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물건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물이 아닌 사람은 자신의 욕망대로 소유할 수 없다. 바로 점착성 때문이다. 점착성은 곧 우리가 소유하려는 대상이 욕망을 가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끈적끈적한 점착성은 더럽고 불쾌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바로 그런 불쾌한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사람들은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대상도 나를 소유하려고 하는 끈적끈적한 욕망을 지닌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끈적끈적함의 불쾌한 경험은 곧 타인의 존재와 욕망을 깨닫게 되는 성숙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마음대로 가볍게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에게 욕망, 즉 점착성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끈적끈적한 점착성고 접했을 때의 불유쾌한 경험을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과학자’ 하면 혹시 흰 실험복 가운을 입은 학자를 떠올리지 않는가. 우리는 과학적인 것은 새롭고 진보적이고 깨끗한 것이지만 토속적인 것은 불결한 것, 검증되지 않은 믿지 못할 것,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은 서구세계에 연결시키고 토속적인 것은 제3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화학비료는 실험실에서 고안되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과학의 산물이지만 퇴비는 재래적이고 토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화학비료로 인해 대한민국의 땅은 몸살을 앓고 있다. 곡식은 땅에서 자란다. 땅이 죽으면 곡식도 죽고, 그 곡식을 먹고 자라는 몸도 죽는다. 그러므로 몸을 살리는 길은 땅을 살리는 길이고, 땅을 살리는 길은 그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렁이의 예를 들어보자. 지렁이 배설물에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 지렁이는 겨울철에 지하 3m 60cm까지 내려가 동면을 하고, 배설할 때는 지표 위에 배설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렁이가 움직이는 자리에는 작은 터널이 형성되는데, 이 터널은 공기와 수분의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미생물 등과 식물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지렁이는 더럽고 미천한 동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지렁이가 인간에게 주는 이익은 실로 막대하다.


똥은 어떤가. 조셉 젠킨스는 그의 저서 『똥 살리기 땅 살리기』에서 톱밥을 활용하여 인분을 위생적으로 퇴비화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태적으로 건강한 방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똥이 더럽다는 인식, 지렁이가 불결하다는 인식에 우리들이 매달려 있는 한 생태계는 건강할 수 없다.『조화로운 삶』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은 화학비료의 해로움과 유기농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떨어진 잎사귀를 지렁이가 먹고, 지렁이의 똥을 다시 곡물이 먹고, 그 곡물을 다시 인간이 먹는다. 똥과 인간이 섞이는 이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인간은 건강할 수 있다.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배타적인 이분법이 결국은 우리의 살림을 훼손한다.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우리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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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동 -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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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권력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요즘 영화 ‘디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직업적 평론가들은 대개 이 영화의 빈약한 서사구조와 출연자들의 연기력의 미흡함을 들어 박한 평가를 내린 반면 대중들은 할리우드에 맞먹는 컴퓨터그래픽이 연출하는 웅장한 스텍터클‘을 운운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직업적 평론가들마저 공격하고 있다. 과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중들은 수동적 감상자에 불과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직업적 평론가의 몫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런 권력관계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과거에 고객은 수동적인 구매자에 불과했지만 이제 소비자들은 적극적으로 제품의 기획단계에서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생산자의 프로듀서(Producer)와 소비자의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인 이른바 ‘프로슈머(Prosumer)’의 등장이 그것이다. 프로슈머는 권력의 흐름이 소수 엘리트에서 집단 대중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제 소비자는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구하고 세계의 누구와도 공유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창조활동을 통해 수익을 거두는 적극적인 경제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한 전자회사는 이 프로슈머들이 제안한 8천여 건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핸드폰으로 ‘대박’신화를 창조했다고도 한다. 단순소비자에서 기획자로의 이동, 바로 이것이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권력의 이동』을 통해서 말하는 힘의 이동이다.


엘빈 토플러는 세계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혁명으로 농업 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꼽는다. 이 중에서 현재진행형인 혁명은 바로 정보혁명이다. 이 정보혁명은 권력의 양상을 사뭇 다르게 변모시켰다. 과거에는 물리력 또는 토지나 자본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장악한 이들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지식과 정보를 가장 많이 차지한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신지식권력층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골드칼라’들을 보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컨설턴트와 같은 골드칼라들의 권력은 무형의 지식과 정보에서 온다. 자신의 지식과 창의력을 부와 권력의 창출로 연결시킨 빌 게이츠가 대표적인 경우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 이동』에서 권력의 세 가지 원천을 폭력(暴力), 부(富), 지식(知識)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저품질 권력, 부를 중품질 권력, 지식을 고품질 권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1세기의 전세계적 권력투쟁에서의 핵심문제는 지식의 장악이며, 이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지만 정보화시대의 권력은 지식과 정보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조인, CEO, 이들은 모두 이 고품질의 권력, 즉 지식을 기반으로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더라도 양질의 부동산 정보를 가진 업자들이 그 방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정보가 곧 자본이요, 자본이 곧 권력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보 사회로의 이행은 기술적 발전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심대한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예상된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산업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는 특징을 지니고, 정치적으로는 대중 정당과 의회를 골자로 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특징을 지닌다면,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된다. 물론 정보의 생산, 수집, 저장, 유통은 역사상 언제나 이루어져 온 것이지만, 정보 저장 기술과 전송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무제한의 정보를 순식간에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 보기만 하던 기존의 대중 매체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을 쌍방향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보의 쌍방향성이 대중들에게는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권력을 부여한다. 과거에는 단순한 소비자들이었던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특정제품의 안티사이를 개설하여 제품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집단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조직된 단체의 활동을 통해 대중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2002년의 ‘붉은 악마’의 활동이나 ‘노사모’의 활동이 그 대표적 예이다. 지금까지의 권력은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 또한 소위 사회지도급 인사로 인정되어 온 정치인, 학자, 언론인, 관료, 종교인 등이었고, 이들과 함께 여론을 이끌어온 기관은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언론 매체였다. 그러나 ‘붉은 악마’와 ‘노사모’의 성공적 사례들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앨빈 토플러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전문 지식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에 의한 지배 체제였으며, 그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급변하고 다원화하는 사회에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토플러는 정보 통신 기술을 통해 시민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림으로써, 대의 민주주의의 기술적 불가피성에 대한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수파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 결합을 유도해야 하며, 반(半)직접 민주주의(semi-democracy), 결정권의 분산 등을 그 해법으로 제안한다.

결국 앨빈 토플러는 정보 사회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정보 통신 기술을 매개로 한 직접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터넷과 같은 기술이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요인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정보화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기존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킨다. 산업혁명에 기초한 산업사회에서는 일국적 단위에서 토지와 창공에 대한 제한이 존재했지만 디지털 혁명에 기초한 디지털 경제 시대에는 사이버 공간에 의해 국가를 초월하여 지리적 공간적 제약이 없다. 산업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과정에서 낮과 밤이 존재했지만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1일 24시간이 항상 낮과 같이 활동할 수 있어 시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교통수단의 발달 정도에 의존하여 물체의 이동 속도가 제약을 받았지만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실시간 광속으로 문화 상품이 소비자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 그 결과 중간 유통업자의 몰락 및 택배산업의 발전이라는 형태로 유통체제가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또한 쌍방향 의사소통 구조로 말미암아 거래비용과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다.

디지털 경제하에서는 범세계적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등 신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더 이상 개별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체 역량만으로는 이러한 경쟁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제휴나 네트워크를 통해 기업 간 관계를 재조직화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산업계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네트워크를 통해 대규모 개발프로젝트에 따른 투자 재원을 분담하고 위험을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 간 학습이 촉진되고 효과적으로 지식 이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보화 혁명의 주도세력은 산업혁명을 초래한 시민혁명의 주도세력을 시민 혹은 부르주아와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디지털 혁명의 주도세력은 컴퓨터 네트워크의 가상공간에서 적극적 의사소통구조를 만드는 이른바 ‘네티즌(Netizen)’으로 표현될 수 있다. 붉은 악마, 노사모 등의 바로 이런 네티즌들의 활동을 대변해준다. 특히 이들은 산업혁명을 주도한 계층이 경제적 힘을 토대로 시민사회라는 정치적 공간을 형성하였다면, 네티즌들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적인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가상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이들은 가상공간 내에서 의사소통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권력관계의 변화를 직접 도모하여 정치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저지에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이 네티즌들이 큰 몫을 해 낸 바 있다.

인터넷의 힘이 기존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전통적인 신문과 방송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의 지도를 바꿀 수도 있다. 인터넷 매체로서 여론형성을 주도해 온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언론매체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매체로 자리매김하였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인의 힘 또한 커진다. 블로그라고 하는 1인 미디어의 힘을 눈여겨보라. 직업적 평론가 못지않은 영화 지식을 뽐내는 블로그, 전자제품의 사용후기를 인터넷상에 올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블로그, 웹서비스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글들을 올리는 블로그 등, 개인 미디어의 힘은 날로 커지고 있다. 기존의 언론 권력이 가졌던 위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1인 미디어의 힘입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일방적인 뉴스 전달에서 “모두 말하고 모두 듣는다.”는 집단적인 뉴스 전달 체제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블로거들의 성장은 또 다른 언론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개인의 힘이 커지는 것과 함께, 기존의 조직문화도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와 같은 수직적인 위계구조가 더 이상 힘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으며, 보다 개개인에 대한 배려나 개인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조직문화가 제기되고 있다. 이전 세대들이 개인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조직을 생각했다면 디지털 세대는 조직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는 개인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신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 자기계발에 게을리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테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는 것도, 직장인들의 자기계발 열풍이 대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지식노동은 개인의 창의력을 극대화시켜주는 것에서 생산성이 더 높아질 수 있으므로 지식정보산업의 성장은 조직형 인간을 개인형 인간으로 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지만 정보의 활용도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상위 5%가 전체 인터넷 데이타의 50%를 차지하고, 하위 50%의 인터넷 데이터 사용량은 전체의 5%가 채 안 되는 극심한 정보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정보격차란 새로운 정보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는 현상을 이른다. 정보통신기술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한계,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보기술이 지닌 공간극복의 속성을 강조하여 정보기술이 그동안 지역 간의 경제적, 사회 문화적 격차를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이 기존의 지역 간 격차를 완화해 줄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기존의 중앙과 대도시 중심의 집중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국가 간의 정보격차는 서구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심화시킴은 물론 정치적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현재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통신 자원의 3/4 이상이 선진국에 집중되어있다. 정보화사회를 축복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소득층, 농어촌민, 장애인과 노인 등 정보소외계층이 인터넷 이용도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정부나 민간기구에서 강구해야 할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인터넷 선거였다면 2007년 대선은 UCC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이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올 대선이 UCC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측했다. 문제는 검증도 되지 않은 불법게시물이 건전한 토론 문화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시민들에게 준 권력을 새로운 참여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상의 게시판, 토론광장, 커뮤니티 등에서 성숙한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시민적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권력은 물리적인 도구에서도 나오는 것이지만 성숙한 인격에서도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시대의 네티즌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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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의 전략을 가르치는 게임의 법칙



힘도 세다, 똑똑하다, 게다가 돈도 많고, 든든한 배경, 소위 ‘빽’도 있고, 얼굴도 반반하고, 재주도 많다, 이런 사람은 게임에서 항상 이깁니다. 전략이고 뭐고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죠. 패배를 모르는 완벽한 인간은 싸구려 할리우드 영화 속에나 있는 법입니다. 정맥과 동맥에 피가 도는, 현실의 인간, 저자거리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부실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이렇게 부실한 인간들이라고 해서 항상 게임에 진다고 하면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닐 거예요. 미꾸라지들도 용과 싸워 한 번 이겨 봐야 살 맛 나는 세상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불리한 게임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요. 바로 좋은 전략을 짜면 될 것입니다. 저쪽에서 하나를 생각하면 이쪽에선 둘을 생각하면 되고, 저쪽에서 둘을 생각하면 이쪽에선 열을 생각하면 되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저쪽이 생각하지도 못할 예상외의 수를 두면 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소위 ‘무데뽀’로 가보는 거죠. 그것도 안 통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배수진(背水陣)’을 치면, 저쪽에선 기겁을 하고 꽁지를 내릴 수도 있겠죠. 바로 이런 것이 게임의 이론이고, 싸움의 기술입니다.

확실히 밟아놓아야 될 상황에서 적당히 밟아 놓으면 적은 다시 부활해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살려 보낸 관우는 덕에 있어서는 영웅일지 몰라도 조조의 끝장을 보고자 했던 제갈량보다는 전략에 있어서는 한수 아래죠. 동정심이나 연민은 윤리학자들에게는 금과옥조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를 위해 매진하는 자에게 그것은 금기에 속합니다.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눈앞의 목표물을 놓칠 수가 있죠. 냉정하라. 이것이 게임의 이론이 가르치는 법칙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이 말하는 게임이론이란,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전략적인 상황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쉽게 말해 ‘홀짝놀이’를 하는 상황이죠.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는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는가에 상관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응수하다가는 내 밑천을 다 까먹고 맙니다. 저쪽에서 어떤 수를 둘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렇게 상대방의 수에 따라 나의 수를 결정해야 하는 ‘전략적 상황’이 바로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상황’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자동차 게임이 이른바 ‘치킨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입니다. 핸들을 꺾은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려 명예롭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을 경우 게임에서는 둘 다 승자가 되지만, 결국 충돌함으로써 양쪽 모두 자멸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쪽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임이 바로 치킨게임입니다.

이 게임에서 확실히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머스 쎌링이라는 경제학자죠. 그는 말합니다. “상대 운전자가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의 핸들을 뽑아 창밖으로 던져라.” 이쪽에서 죽음을 각오했다면 상대방은 살기 위해서라면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필승의 전략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게임이론입니다.

‘게임의 법칙’을 말하는 전략의 고수들은 항상 냉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남의 사정도 봐주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는다고 충고합니다. 전략의 고수들은 내가 잡아먹지 않으면, 반대로 잡아먹히고 만다는 ‘밀림의 법칙’을 신봉합니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어설픈 인간적 신뢰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죠. 게임이론의 수읽기에서 어설픈 믿음은 망하는 지름길이며, 냉정하고 처절한 응징과 이에 대한 평판이 나의 생존과 이득을 보장합니다.

이솝우화의 <사자와 농부> 이야기를 게임 이론적으로 분석해볼까요.

인간 아가씨를 사랑했던 수사자가 농부에게 찾아가 딸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의 이빨과 발톱에 딸이 상처 입을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고, 이에 사자는 이빨과 발톱을 모두 뽑았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를 몽둥이로 패서 쫓아 버렸다는 줄거리가 바로 <사자와 농부>의 이야기죠.

게임이론가인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의 저자는 이 우화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사자는 이빨을 뽑거나 안 뽑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고, 사자의 선택에 따라 농부도 각각 수락과 거절의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행동을 하기 전에 사자는 먼저 각각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봤어야 한다. 만약 사자가 이빨을 뽑지 않고 계속 위협하여 청혼을 하였다면 농부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딸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서 상대가 정말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미리 예상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게임이론에서는 ‘백워드 인덕션(Backward Induction)’이라고 한다. 즉, 현재에서 미래의 순으로 생각해나가지 말고, 미래의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한 후 현재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역순의 사고방법이다.”

게임 이론가들은 자신의 이빨과 발톱에 딸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이빨과 발톱을 모두 뽑은 사자의 이타주의적 행동을 매우 비전략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합니다.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계속 으르렁거리면서 협박하라는 주문이죠. 이렇게 게임 이론은 매우 이기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출발점입니다. 경제학의 시조라는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양조업자,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이익추구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자신의 이익은 물론 사회나 국가전체의 이익도 증대시킨다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죠. 그러나 게임 이론가들은 ‘이기적인 인간’을 넘어서 냉정한 인간을 요구합니다. 심지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를 들어, ‘믿어라! 그러면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그 경고의 골자를 요약해볼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난공불락의 지형인 오사카성에 재화, 식량, 군대를 마련해 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서 도쿠가와 측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식량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쿠가와는 히데요리에게 난공불락의 주요인이었던 해자(垓字)를 메우는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한다. 히데요리는 앞의 사자처럼 제안을 받아들였고, 도쿠가와는 다시 오사카 성으로 진격하여 해자가 없어 무력해진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를 죽인다.

상대방이 어떻게 수를 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즉 전략이 필요한 상황에서 믿음이라는 ‘인격적 선택’을 했을 때는 철저히 응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충고입니다.

경제학의 한 분야인 게임 이론을 전공한 박찬희, 한순구 교수는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일부러 나쁜 평판을 쌓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합니다. 이른바 ‘악명(惡名) 효과’가 그것이죠. 이 전략은 자신이 객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히 써 볼만한 전략입니다. 불리한 상황일수록 상대에게 자신이 예측불허이며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필자는 이를 ‘또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책의 부제도 ‘또라이 게임이론’이다.)라는 인상을 주어야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미국이 북한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도 북한이 ‘또라이’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북한은 예측불허의 행보를 보이는가 하면 여차하면 ‘너 죽고 나 죽자’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합니다. 미국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실제 상황에서 상대가 악명 효과를 활용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스스로가 상대보다 더한 ‘막가파식’ 악당이 되면 됩니다. 문제는 둘 다 이판사판으로 맞서면 결국엔 한 명이 고개를 숙이거나 둘 다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죠. 패배를 불사하는 두 사람이 맞붙는 치킨 게임의 결과를 상상해보세요. 붉은 피만 낭자할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책의 저자들은 인간이 협동하는 이유는 배신의 경우에 따르는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보복 또는 복수를 아끼지 말고 마음껏 남발하는 것이 협동을 굳건히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보복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이를 나의 약점으로 알고 자주 배반하는 행위를 할 것이므로 결국 담합 또는 협동이 깨지게 된다는 거죠. 철저히 보복하라. 이것이 게임이론이 주는 교훈입니다.

이쯤 되면 게임이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오직 승부에만 집착하는 냉혹한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모든 관계가 인간적인 관계로 묶이는 것 또한 위험한 것일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착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애정’은 ‘상호 이익’이라는 기초 위에 더해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무턱대고 사람을 좋게만 믿고 행동하다가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마저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저자들은 경제학자답게 “적어도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혹은 합리적 분석이 골격을 이루고 여기에 인간적․사회관계적 요소가 더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 필자들의 신념이다.”라고 말합니다.



고속도로를 시공하는 중에 선사시대 유적지가 나타났다고 가정해볼까요. 아마도 공사장 현장감독은 십중팔구 공사강행을 요구하겠죠. 도로개통을 바라는 지역주민들도 절반 이상이 공사강행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자재 확보와 원활한 물류이동을 바라는 자본가들도 도로개통을 바라겠죠. 그러나 도로의 시공을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이나 자본가들은 경제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도로의 강행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오직 이윤의 확보라는 차원에서의 합리성은 합리성에 대한 매우 협소한 해석일 뿐입니다. 효율성, 경제성, 수익성이라는 도구적 차원에서만 합리성을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생각입니다. 하버마스라면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들이 도로개통을 두고 서로 의견을 교환해서 가장 적절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으로서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온전한 의미에서의 합리성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합리성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효율성과 같은 개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협소하게 정의된 합리성은 자칫하면 공정해야할 게임에서 반칙을 유도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비롯된 멜라민 사태만 해도 그렇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합리성의 개념에서 보자면 반칙을 써도 무방하다는 것이 비뚤어진 자본가들의 논리일지도 모릅니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보다 큰 의미로서의 합리성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무엇이 진정한 합리성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례 하나를 음미해보죠.

백신 개발자 소크(Jonas Edward Salk)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하자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특허를 양도해달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양에 특허를 신청할 수 없다.”라고 주위의 권유를 물리쳤습니다. 지구상에서 소아마비를 ‘박멸’시킨 것은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제약회사의 합리성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비전략적인 마음’.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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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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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논리, 효율의 논리만이 능사인가



1970년대 후반 세계 굴지의 기업인 포드 자동차 회사는 서민을 겨냥한 주력 품목으로 ‘핀토(Pinto)’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 차는 충돌 시 연료탱크가 폭발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포드사는 이 차의 양산을 강행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포드사는 이 결함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드사는 왜 알면서도 ‘핀토’의 출시를 강행했을까. 결함을 가진 차를 회수해서 교정하는 비용, 즉 리콜 비용이 사고가 났을 때 보상에 소요되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계산이 이미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둘째로 치고 우선 이익을 남기고 보자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효율성의 논리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가장 막강한 논리가 이 효율성의 논리다. 경제학에서 비롯된 이 논리가 정치는 물론 종교, 교육, 의료와 복지의 울타리를 넘어 무한 확산되고 있다.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의 저자 이정전은 어느 한 영역이 비대해져서 다른 영역을 침범하면 여러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영역이 이상적으로 비대해져서 정치의 원칙인 평등의 원칙이 경제영역을 지배하게 된다면 경제는 엉망이 될 것이고, 반대로 시장의 원리인 효율성의 논리가 정치영역을 지배하게 된다면 이 사회는 정의롭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효율의 논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 거품을 만들고 있다.

『거꾸로 생각해 봐!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 걸』, 이 다소 긴 제목의 책은 효율성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가를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말해주는 책이다.

책이 가르치려고 하는 길은 효율성의 길이 아니라 사람됨의 길이요, 공생의 길이요, 정의의 길이다. 성장과 성공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불편해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경제적 거래는 오직 최대의 이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과학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과학만능주의자들, 인간의 생명보다는 이윤의 창출이 더 먼저라고 생각하는 의료자본가들, 소설과 시를 읽는 것을 낭만주의적 사치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나눈다는 것은 제 몫을 뺏기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세계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정치가들이 읽으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는 책이 바로 『거꾸로 생각해 봐!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 걸』이다.

책이 말하는 ‘거꾸로 생각해’보자는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창의적인 방식,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소위 ‘크리에이티브’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돈의 논리, 효율의 논리, 가진 자의 논리를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돈의 논리, 효율의 논리, 가진 자의 논리는 ‘함께’라는 부사를 기피한다. 승자를 찬양하고 약자를 능멸하며, 공생은 효율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작태라고 비난한다. 우석훈은 말한다.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작동원리를 이해’하자고. 그가 말하는 생태계의 작동원리란 곧 다양성의 길이다. 밀림의 세계처럼 다양한 생물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생태적 지위를 누리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길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고혈을 착취해 싼값으로 커피 한잔을 마시겠다는 약탈의 논리가 아니라 비록 한잔의 값을 비싼 돈으로 마시더라도 생산자에게 정당한 이익을 돌리고,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공존의 논리다.

과학전문기자인 강양구는 <과학기술만 발전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라는 글에서 과학에 대한 우리들의 장밋빛 낙관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논파하고 있다. 가령 녹색혁명이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개량된 씨앗을 공급하는 다국적 기업의 영업이익을 보장해주고, 그 개량 씨앗에 알맞은 비료, 살충제, 농기계를 파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할 뿐, 농민들은 오히려 녹색혁명과 개량 씨앗 때문에 경제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또 캘진(Calgene)이라난 회사가 개발한 유전자조작 토마토는 익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쉽게 문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토마토를 보존하고, 진열할 수 있게 되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이 토마토는 먹을거리 생산량을 늘리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과학기술이 모든 이의 편의와 행복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부를 증식시켜주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책은 이렇게 구체적 예,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실례들을 통해서 논의에 재미와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독서량도 많지 않고, 세상의 경험도 짧은 청소년들은 아무래도 세상에 뿌리내리지 않은 관념들이 낯설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이 갖는 구체성은 청소년 책이 가져야 할 중요한 미덕임에 틀림이 없다.

우석균은 돈의 논리, 효율의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거꾸로’ 행동했던 사례를 말해준다. 바로 백신 개발자 소크(Jonas Edward Salk) 박사의 이야기다. 그가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하자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특허를 양도해달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태양에 특허를 신청할 수 없다.”라고 주위의 권유를 물리쳤다. 간단히 말해 ‘거꾸로’의 논리란 바로 이런 논리다. 돈의 길을 따라가는 논리가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가는 논리다. 바로 이런 ‘거꾸로’의 논리가 지구상에서 소아마비를 ‘박멸’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살벌한 입시경쟁에서 시와 소설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와 소설을 통해 우리의 이웃의 삶을 돌아보고 내 삶과 의식의 건전성을 성찰해보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는가. 한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나’와 세계를 성찰해보는 시간이지 않은가.

책은 나눔의 가치를 역설하고, 평화의 가치를 주장하지만 그 주장은 공소하게 들리지 않는다. ‘기차길옆작은학교’라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김수연, ‘인간방패’가 되어서라도 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신념으로 이라크에 들어가 이라크인들과 생활을 함께 했던 동화작가 박기범 등, 저자들의 실천적 삶이 그들의 담론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머리로만 읽을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몸으로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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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없다 - 사회과학신서 22
다이애너 기틴스 / 일신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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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광고 속에 흔히 등장하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 볼까요. 사랑스런 눈빛을 교환하는 30대의 부부, 6살 정도의 아들과 10살 정도의 딸이 벽난로 주변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눕니다. 거실은 청결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광고의 카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Man makes house, Woman makes home. 남자는 집을 만들고, 여자는 가정을 만든다? 남자는 밖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집을 꾸려갈 돈을 벌고, 여성은 특유의 감성으로서 집안을 화목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겠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형적인 가족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광고가 말하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열거해 볼까요.

첫째, 가족은 한 공간에 같이 거주하는 거주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음식을 같이 먹는 경제적 공동체라는 것, 부부는 사랑으로 묶여진 애정의 관계라는 것, 부부는 사랑의 결실로서 자녀를 두어야 한다는 것, 남자는 가족 부양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여자는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가정은 휴식과 평화의 정서적 공간이라는 것 등이 가족 이데올로기에 추가될 항목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가족’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에서 열거한 사항들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이런 이상적인 조건들을 모두 갖춘 가족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가족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상기해보세요. 현실의 가족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가정법원의 판사는 가장 바쁜 법조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정도로 가족은 불화와 상처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일본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는 아주 이상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해서 낳은 차남, ‘하루’의 출생의 비밀을 하루의 형에게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내 자식이다. 나의 차남이고, 너의 동생이지. 우리는 최강의 가족이야.”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말하면 범죄의 결과인 차남을 자신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지는 노릇이죠.


그러나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접하게 되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가족의 개념을 너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책이 소개하는 한 구절을 볼까요. “타히티에서는 젊은 여성이 공인되고 안정된 혈연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거나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한두 명의 아이를 가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젊은 여성의 아이들을 그녀의 부모나 근친자에게 입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임’이 강요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 책은 시종일관 “가족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묶여진 정서적 공동체, 혈연의 공동체, 경제적 공동체라는 가족의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유형의 대안가족에 억압적일뿐더러,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실에는 수많은 가족의 유형이 존재합니다. 이혼 가족, 재혼 가족, 별거 가족, 주말 가족, 기러기 가족, 입양 가족, 국제결혼 가족, 1인 가족, 공동체 가족, 남매 가족, 조손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이 그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 ‘정상 가족’이 대다수가 되는 사회로 돌려놓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도 새로운 가족 형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난자를 제공한 어머니, 정자를 제공한 아버지, 자궁을 제공한 어머니, 그리고 길러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것이죠. 만약 가족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정상가족’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가족의 변이형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볼까요. 통계적으로 보면 3쌍이 결혼해 1쌍이 이혼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2006년의 통계를 보면 혼인 남자의 재혼비율이 16.7-18.9%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성의 재혼 비율은 이보다 조금 더 큰 18.0-21.1%. 해마다 10만 이상의 남녀가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 1인 가구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죠. 결혼을 아예 할 의도가 없는 비혼 가구까지 치면 그 비율은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가족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를 좀 더 세세하게 살펴, 이 책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1장은 ‘가족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입니다. 한 가지 유형의 가족만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가족들을 항상 단수로만 인식하고 가족을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일하는 아버지, 가정을 꾸리는 어머니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도 따지고 보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의 2장은 ‘가부장제는 가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가?’입니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경제적, 사회적, 성적 통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이런 틀 밖에 놓인 여성들은 종종 마녀란 혐의로 박해받았으며, 일부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억압의 틀 밖에 놓여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3장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보편적인가?'에서는 친족이 반드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듯 가족 또한 반드시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화인류학적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인류의 보편적 정서라고 여겨 왔던 '어머니'와 '모정'조차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이를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일종의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 말고도 가족에 대한 또 다른 대안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흑인노예 가정이 그 예죠. 당시에 노예 부부들은 다른 농장에 살며 일주일에 한두 번, 몇 시간 정도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과는 너무도 다르죠. 어쨌든 흑인노예들을 가족이라고 묶어주는 것은 어떤 정해진 개념이나 사회적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일단의 무리를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성일 것입니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서 아버지가 아내의 강간사고로 낳은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이 주관성입니다. 비록 피가 다르고 염색체가 달라도 타인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없었다면 입양가족도, 동성애 가족도 있을 수 없었겠죠. 미국사회사업가협회(NASW)가 ‘자신들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전형적인 가족 임무를 수행하는 2인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가족을 정의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꽤 의미심장합니다.

4장,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가?'에서는 결혼의 이유가 부유층에게는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동맹을 맺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국가로 볼 때는 빈민 구제의 결정적인 수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5장, '사람들은 왜 자녀를 갖는가?’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1-2명의 자녀를 갖게 됨으로써 자녀들에게 더 무거운 정서적∙부양적 요구를 하게 되고, 이런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를 벗어나기 위해 자식들은 자신의 가족을 만듦으로써 독립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지적을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자식들을 낳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에게 거는 기대의 몫이 적었지만 자식들이 줄어듦으로써 한 명의 자식에게 부가되는 책임의 무게가 그만큼 커졌죠. 핵가족 시대의 자식들이 져야할 부담감이 이해되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6장, '여성의 일은 왜 끝이 없는가?'에서는 가전제품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노동량은 줄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진공청소기에 의해 해방된 일인 마루 청소는 일주일에 1번에서 점차 하루에 1-2번 하는 일로 되었다는 거죠. 가전제품의 발달과 함께 여성이ㅡ 고유임무라 할 수 있는 청결에 대한 압박도 커진 것입니다. 또 가전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유급노동과 가내작업이라는 이중부담을 여성들은 져야만 했습니다. 남자들의 가사 노동은 자발적일 수 있지만 자녀 양육과 가사일에 대한 책임은 여성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7장과 8장의 질문은 '국가: 가족 연대의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가족은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가?'입니다. 국가와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성장이 실질적으로 가족의 위치와 가족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보다 견고한 가족 연대와 가족 보호를 더욱 쇠퇴시키고 침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에 있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노후를 대비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죠. 그러나 국민들의 복지가 향상되면 생계와 노후에 대한 불안이 없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경제적 이유와 노후보장 차원에서 선택했던 가족의 기능이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의 견해고. 복지가 향상되면 결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꾸려가려는 욕망이 실현될 수 있으므로 가족의 연대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 또 다른 견해입니다.

저자는 아동보건과 아동복지를 위한 입법, 세금공제의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습니다. 아동보건과 아동복지의 입법은 국가의 미래의 노동력과 병력의 질을 증대하려는 특수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고, 세금공제는 아동의 양육의 재정적 책임을 국가가 맡기보다는 가족들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라고 말합니다.

9장, ‘가족은 위기 상태에 처해 있는가?‘에서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수입만으로 음식, 안락함, 넉넉한 공간, 그리고 소비재 등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2008년의 한국의 경제를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정책으로 고용의 질은 매우 낮아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동산 경기의 하락에 따른 자산가치의 저하로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나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임금구조에서 말단을 차지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임을 상기해보십시오.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의 임금노동과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이라는 3중의 책임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입니다. 슈퍼우먼이 아닌 이상 여성들에게 3중의 책임을 완벽하게 이행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런 여성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가정을 요구하기 이전에 과연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존재하는 유사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이상적인 가족에게 돌렸던 책무를 국가에게 돌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것이 2008년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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