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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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사고를 위한 생각의 도구

생각의 탄생/로버트 루트번스타인/에코의 서재



‘논다’라는 단어에는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놀고 있네.”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의 경우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죠. 비아냥거리는 말에 기분 좋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노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요.

놀이는 신나기도 하지만 놀이가 주는 실용적 도움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아이들은 뛰고 솟구치고 물구나무 서는 놀이를 통해 육체를 단련하고 평형감각을 키우고, 전략을 필요로 하는 게임을 통해 사고력을 발달시키고, 협력을 요구하는 게임이나 룰의 준수를 요구하는 게임을 통해 사회성과 준법성을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놀이가 아이들의 발달과 성장에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이는 스위스의 아동발달 심리학자인 장 피아제(Jean Piaget)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하는 놀이는 정신적 , 신체적 발달. 사회적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놀이의 창조성을 장 피아제보다 더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이는『생각의 탄생』의 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국 미시간주립대 교수입니다. 2007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그는 한국기업이 저성장의 벽에 부딪힌 것은 창조성이 결여된 일 중심의 문화 때문이라고 말하며, “창조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시와 음악, 미술이나 공연 등에서 볼 수 있는 예술성을 사업에 가미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는 놀이는 곧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생리학자인 루트번스타인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떻게 나오는지 줄곧 의문을 품었죠. 그는 창의력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역사학자인 부인과 함께 천재들의 사고 구조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먼저 그는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리처드 파인만 등 창의성이 빛나는 천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천재들의 사고 회로에 존재하는 공통점에 주목했죠. 그 결과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의 도구’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었던 사람들이 사용한 생각의 도구들을 13개의 단계로 정리하는 야심찬 기획에 착수했고, 『생각의 탄생』이라는 저서는 바로 그 야심찬 기획의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창조적 사고의 결과로 나오는 개념은 공식적인 의사전달 시스템, 이를테면 말이나 방정식, 그림, 음악, 춤 등으로 변환될 수 있으며 그 변환의 과정은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13 가지의 생각의 도구, 즉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 인식, 패턴 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을 책을 통해 하나하나 소개합니다. 과연 이 도구들을 사용하면 누구나 창조의 대가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죠.


먼저 관찰입니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검다고 여기지만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은 까마귀는 “홀연 젖빛 금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공작석의 빛을 발하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죠. 사람들은 까마귀를 편견에 얽매여 까마귀를 무조건 검다고 말하지만 박지원은 ‘있는 그대로’의 까마귀를 사실적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 결과 까마귀는 햇빛 속에서 자주색이나 비취색으로 바뀌는, 풍부한 빛을 머금은 존재라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던 거죠.

관념적 편견에 사로잡혀서 ‘관념의 사물’을 볼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물의 원리를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관찰의 눈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늘이 파랗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지만 18세기의 물리학자 존 틴달은 하늘의 색깔이 대기 중의 먼지나 다른 입자들과 부딪혀 산란하는 햇빛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죠. 적극적인 관찰의 눈은 이렇게 발견이나 발명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도구는 ‘형상화’, 곧 상상 속에서 사물을 그려내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의 움직임을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곧 형상화의 능력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쓴 테네시 윌리엄스는 희곡을 써 나가면서 직접 연기한 탓에, 집주인으로부터 미쳤다는 오해까지 받았죠. 형상화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결과입니다.

저자는 형상화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옷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시각적으로 떠올려보라고 충고합니다. 시를 눈으로 보기보다는 직접 낭송해보거나 시 낭송을 들으라는 거죠. 저자는 아예 “예술을 하라”고 당부까지 합니다. 음악이나 춤, 회화나 요리에 관한 것을 배우기만 하지 말고 직접 그리고, 작곡하고, 시를 쓰고, 음식을 만들어 보라는 주문인 거죠.


세 번째 생각의 도구는 ‘추상화’입니다. 추상화는 일종의 단순화죠.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존재합니다. 그 각각의 생김새와 향기는 제각기 다르죠. 그러나 그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꽃들 간에는 다른 종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속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꽃들의 개별적 차이를 제거하고, 그 공통적인 속성을 뽑아내(철학용어로 말하자면‘추상抽象'해 내어) 우리는 '꽃’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추상화’는 복잡한 현상과 사물의 공통성을 간파해내는 민첩한 사고의 기술입니다.


패턴인식과 패턴형성도 유용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19세기의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는 유리를 붙였을 때 나오는 기상천외한 모양과 효과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벽지의 대리석 무늬가 수천 개의 신기한 형상, 혹은 석양의 구름, 거대한 양 우리로 변한다고 말했죠.

패턴인식이란 복잡한 사물의 모습에서 일정한 형상을 읽어내는 일이다. 우리가 음악에 사용하는 음계 역시 일정한 패턴이고, 혈액형 역시 일정한 패턴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ABO식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9번 염색체에 들어있고, 항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그 역할도 상당히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혈구가 만들어내는 항원까지 고려해서 혈액을 분류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ABO식을 포함해서 모두 29종류가 밝혀져 있고, 사람의 혈액형은 모두 600여 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혈액형에도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패턴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저자는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표현하고, 경계 짓고, 정의하기 위해 더 많은 패턴을 발명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실제 지식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이해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유용한 생각의 도구는 유추입니다. 유추란 둘, 혹은 그 이상의 현상들 사이에 기능적으로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내적 관련성을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김영정 교수는 주전자의 끓는 물을 보고 증기기관의 원리를 추론해내는 사고가 통합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주전자의 끓는 물은 구체적 현상이요, 증기기관의 원리는 추상적 원리입니다. 이렇게 이미 잘 알려진 현상을 바탕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원리를 발견해내는 기술이 유추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구체적 현상을 바탕으로 사고를 확장하여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내 마음 호수다’와 같은 문학적 비유도 마음의 평화와 호수의 잔잔함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유추입니다.


몸으로 생각하기도 유용한 생각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머리로 생각하면 금방 오타가 납니다. 오타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충실해야죠. 몸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바로 몸의 움직임 속에 행동을 각인시키라는 말입니다. 볼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백 번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플로어에 올라서 직접 공을 굴리는 것이 낫겠죠. 몸은 마음의 단순한 부속물이 아니거든요. 몸을 아끼지 마십시오. ‘몸으로 때우기’는 아주 좋은 학습의 방법입니다.


감정이입도 훌륭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영국 배우 데니얼 데이루이스는 자신이 맡은 역을 실제생활에서 ‘살아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극중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중의 인물이 되어 보라는 것이죠. 의사라면 환자가 되어보고, 교사라면 학생이 되어보고,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되어보는 것이 감정이입을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바로 이런 경험들이 상대방을 이해하게 해주는,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일깨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3차원적 공간을 2차원적으로 변형하기, 모형만들기도 유용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2차원적 지도를 3차원적으로 상상해보는 차원적 사고도 좋겠습니다. 종이접기는 2차원적 소재를 구부리고, 접고, 압착해서 3차원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좋은 훈련입니다.


놀이는 저자가 강조하는 아주 중요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저자는 놀이를 활용한 창조적 천재의 예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을 듭니다. 사격, 골프, 포커 등 각종 게임광이었던 플레밍에게 미생물 연구는 골치 아픈 과제가 아니라 박테리아와 함께하는 ‘놀이’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놀기 위해서는 좀더 과격해질 용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 말라고 교육받은 일도 가끔 해 보라는 것이죠. 음식을 가지고도 장난도 쳐보고, 진흙탕에서 뛰어다녀도 보라는 것입니다. 몸의 기하학적 마술사라고 불리는 필로볼러스 무용단은 비가 내린 뒤의 진흙탕 속에서 뛰어놀았던 경험에서 떠오른 영감을 이용해 새로운 안무, ‘데이 투(Day Two)’를 창작했다고 합니다. 놀이를 얕보아선 안 되겠지요.


변형도 유용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리차드 파인만은 많은 방정식을 소리로 변환시켰다고 합니다. 그 결과 등차수열은 꾸준히 연속적으로 상승하는 음계가 되었고, 등비수열은 점차 빨라지는외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지각하는 육체적 감각과 물리적 세계의 개념을 서로 결부시켰다고 합니다. 화가인 파울 클레는 음악을 이미지로 변형시키기도 했답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어떤 형상을 떠올려주는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변형의 좋은 연습이 되겠지요.


생각 도구의 완결은 통합입니다. 그는 “상상하면서 분석하고 화가인 동시에 과학자가 되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학문간 장벽에 따라 나뉘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창조적 사고의 발육이 저해된다고 말합니다. 수학자가 수식 안에서만 생각하고, 음악가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고, 소설가가 단어 안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말고, 느끼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로 하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입니다.


책을 읽었다면 그것을 말로써 직접 표현해보는 것, 머릿속에서 귓속에 흐르는 음악을 구체적 형상으로 떠올려보는 것, 바로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당장에 실천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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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성스러움 현대사상의 모험 2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외 옮김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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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부추긴다

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민음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 몸에 수분을 공급해주어야겠지요. 이 일을 게을리 하면 유기체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증은 이 위험을 알려주는 표지요, 수분에 대한 욕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분에 대한 욕구에 직면하면 누구나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찬찬히 생각해볼까요. 과연 신체가 수분을 요구할 때 모두가 예외없이 물을 마실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종족들은 야자의 열매를 깨뜨려 그 즙을 마실 것이고, 어떤 이는 숭늉을, 또 어떤 이는 이온음료를 마실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아이스티를 마실 것이고, 어떤 이는 샤베트를 녹여 먹을지도 모릅니다. 목마름이라는 사태에 반응하는 양상은 이렇게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편차를 보여주지요.

여기 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엄마로부터 “물이 가장 깨끗한 액체야. 음료수는 이빨을 썩게 만들고 음료수는 해로운 성분이 들어있어서 몸을 망치기도 한단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물이야말로 가장 좋은 음료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집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집의 냉장고엔 물 이외의 어떤 음료도 없기 때문이죠. 문제는 집밖에서입니다. 아이가 물을 마실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그의 옆으로 와서 콜라나 사이더와 같은 음료수를 마시면 자꾸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나도 저 친구들이 욕망하는 대상, 즉 음료수를 마셔보고 싶은 걸,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참으면 참을수록 욕망은 더 강렬해지는 법, 결국 그 아이도 친구들을 따라서 음료수를 마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뚜렷한 자기의 주관이 없는 어린아이일수록 이 욕망의 바이러스에 취약하니까요. 욕망은 이렇게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욕망도 이 아이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요? 여러분들이 좋은 엠피쓰리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과연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온 것일까요? 아니면 바이러스처럼 타인의 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어온 것일까요.

욕망이란 주제를 평생 동안 연구해온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르네 지라르는 욕망은 ‘내’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이러스처럼 ‘내’ 밖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르네 지라르의 이 말을 쉽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든 한 아이의 예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아이의 욕망은 아이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욕망은 부모가 만들어 낸 것이거나, 친구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광고 속의 모델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음료수를 마시고 싶은 욕망도 친구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그 친구들도 누군가가 그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나서 나도 저 사람처럼 저 음료를 마셔 보고 싶다는 모방의 충동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필요 없다고 생각한 책들을 버리기 위해 아파트 앞 쓰레기장에다 책들을 쌓아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책들을 한아름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 책이 나에게 쓸모없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버리려고 쌓아놓은 책들을 유심히 살펴본 후 몇 권을 주섬주섬 챙겨서 다시 책꽂이에 쌓아두었습니다. 저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이론을 생각할 때마다 이때의 일을 떠올립니다. 버리려고 쌓아둔 책이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가게 만들었던, 나의 욕망은 과연 나의 진정한 욕망인가, 아니면 나의 헌책을 한아름 안고 가던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 욕망일까. 르네 지라르식의 욕망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답은 후자입니다.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 욕망이라는 말이지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지라르는 욕망이 주체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간접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욕망은 내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전염된다는 이야기죠.

그에 따르면 음식물과 섹스에 대한 본능은 아직 욕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모델을 모방에 하느냐에 따라 비로소 욕망이 된다는 것이지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이론대로라면 인간에게는 채소나 야채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욕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김치를 먹고 싶다거나 냉잇국을 먹고 싶다거나 샐러드를 먹고 싶은 구체적인 욕망만 있을 뿐이라는 거죠. 한국인은 김치를 먹는 모델을 모방하고, 미국인들은 샐러드를 먹는 모델을 모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치를 먹는 모델을 한국의 음식문화라고 하고, 샐러드를 먹는 모델을 미국의 음식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는 문화를 배우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욕망을 배웁니다. 바로 모방을 통해서 말입니다. 누구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문화를 전수받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김치를 먹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김치문화권에서 살아 가게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곧 욕망의 다양성입니다.


세상에 자원이 무한정하다면 우리의 욕망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원의 희소성입니다. 이 희소한 자원을 두고 모든 사람의 욕망이 불꽃을 튕기며 다툰다면 살벌한 긴장관계가 조성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이 긴장관계는 한결 누그러지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사과 다섯 개를 두고 50명이 서로 먹으려고 대립한다면 사과를 획득하려는 경쟁과정은 살벌한 경쟁관계가 되겠지만 이 50명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경쟁은 한결 누그러질 것입니다. 화가는 걸작의 미술품 앞에서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운동선수는 더 뛰어난 운동선수에게 질투를 느끼는 법이니까요. 내 욕망의 영역이 아닌 영역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걸작의 미술품 앞에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와 화가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르니까요.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경쟁은 한결 누그러지겠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한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사람들의 욕망이 다양할까요. 좋은 집을 가지고 싶다, 좋은 핸드폰을 가지고 싶다, 좋은 차를 가지고 싶다, 좋은 음반을 가지고 싶다, 좋은 홈씨어터를 가지고 싶다. 그 외양은 천차만별인 것 같지만 잘 뜯어보면 사람들의 욕망은 매우 획일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욕망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르네 지라르는 이 욕망의 ‘차이 없음’, 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발생시킨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더 간단하게 생각해보죠. 진수성찬으로 차린 상에서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음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 앉아있을 때는 하나의 음식을 두고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겠지요. 바로 이 긴장은 욕망의 차이가 상실된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르네 지라르의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날의 문화를 생각해보세요. 세계화란 이름으로 이익추구의 욕망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이 이익추구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2007년 17대 대선을 생각해보세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한 후보자가 엄청난 표차로 여당의 후보를 누르지 않았습니까.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이윤의 극대화는 이제 세계인의 공통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치열한 이익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모두들 이윤의 극대화를 꿈꾸는 세상이 욕망의 차이가 상실된 시대지요. 바로 이 차이의 상실, 이익을 위한 욕망의 무한경쟁이 치명적인 위험을 부른다는 것이 르네 지라르의 설명입니다.


인간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창고와 흡사합니다. 잠재된 폭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고 있지요. 지라르는 인간이 어떻게 폭력을 잠재우고 사회를 이끌어 왔는가를 살펴보다가 <희생제의>라는 종교제도에 착안하게 됩니다. 지라르는 이 희생제의가 명백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는 폭력의 예방책이었다는 것을 밝혀 보입니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볼까요. 너무도 이기고 싶은 축구게임에서 졌다고 해볼까요. 모두들 속이 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분노의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 붓고 싶을 때 우리는 이른바 ‘왕따’의 대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들 중에서 대항할 여지가 없는 다소 무기력한 친구를 골라 “너 때문에 우리가 축구를 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죠. 그렇게 되면 우리를 이긴 팀과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친구들 중의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꼴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이든 지배적인 문화적 관습과는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 동시에 비난의 화살과 폭력을 피해나갈 수 없는 무력한 경우라면 희생양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께 드리는 제사에 사람을 바치는 것을 인신공희(人身供犧)라고 합니다. 산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이런 끔찍한 일이 종교적인 제사의식에서 어떻게 벌어질 수 있을까요. 르네 지라르는 폭력은 은폐되지 않으면 그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폭력이 은폐되면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도 그 희생을 믿는 자도 폭력이 행하는 역할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희생양이 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신공희, 즉 희생양은 신의 분노를 달래려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야만 집단의 죄책감이 훨씬 달래지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폭력성이 누그러질 수가 있겠죠.



무한한 경쟁으로 야기되는 폭력의 가능성에 집단 전체가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이때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집단이 하나가 되어 희생양을 찾아내고, 그 희생양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라르는 말합니다. 군중은 잠재적인 박해자라고. 우리도 능히 박해자의 무리에 가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녀사냥, 반유대주의 등 역사 속에서 인류는 수많은 희생양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일단 희생양이 되면 단죄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나오게 마련입니다. 폭력을 동반하는 희생제의는 희생자 처지에서 보면 비합리적 광기에서 나오는 집단폭력에 불과하지만, 가해자의 처지에서 보면 성스러운 행위가 되죠.

모든 학살에는 명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이른바 여론재판도 사회적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에서 이루어집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분은 집단의 가치를 옹호하는 성스러운 가치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는 정신, 내것만이 옳다는 확신, 내가 도달한 단계가 지고지순의 단계라고 하는 확신이 바로 테러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 생각만이 옳은 것인가를 의심하는 회의의 정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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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 문명 한길컬처북스 21
장 뒤비뇨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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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부르는 축제

축제와 문명/장 뒤비뇨/한길사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축제


축제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먼저 락밴드의 등장입니다. ‘노브레인’이나 ‘크라잉넛’과 같 펑키한 복장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이들의 괴성이 청중의 혼을 뺍니다. 관중들도 헤드벵잉을 하며 점점 축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어서 비보이들의 현란한 댄싱이 끝나면 이번엔 촌극 시간입니다. 평소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던 학생부장 선생님 역할을 맡은 학생이 무대에 등장하여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읊으면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가 됩니다. 역시 바보스럽게 분장한 교장선생님이 등장하면 객석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집니다. 이때 학생들은 선생님이 언짢아하시지는 않는지 선생님의 표정을 살핍니다. 그러나 선생님들도 학생들과 같이 연신 즐거워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남녀노소, 상하좌우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이른바 ‘대동(大同)’의 축제입니다. 이런 축제를 통해서 학교는 전에 없는 활기를 되찾게 되고 학생들은 면학의 에너지를 충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축제에서 목소리에 잔뜩 무게를 잡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와 같은 가곡이나 부르고,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이 근엄한 연극을 한다면 그것이 어디 축제겠습니까. 그것은 학예발표회나 솜씨자랑에 불과하겠지요. 축제는 모름지기 떠들썩함, 광기, 무질서, 일탈이 있어야 제격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시청 앞 광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곳이 무질서와 광기, 일탈의 장소였던 셈이지요. 여러 가지 물감으로 페이스 페인팅(face painting)을 한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노출을 감행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과감히 입을 맞추는 커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운행 중인 노선버스에 올라 함성을 질렀고, 어떤 이들은 도로를 점령하기도 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유치장 철창 신세를 져야 마땅했지만 누구 하나 그들의 무질서와 일탈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광기와 무질서와 일탈을 찬양해 마지않았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의 현장도 어느 정도 2002년의 시청 앞을 연상시킵니다. 평소에 다니던 도로의 중앙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함성을 질러대는 젊은이들은 질서를 흔들면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합니다.

축제는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먼저 매일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노동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노동이 요구하는 엄정한 규칙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넥타이를 풀고, 만화의 주인공처럼 분장을 하고, 놀이의 장소로 성큼 뛰어듦으로써 축제는 시작됩니다. 축제의 시간은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규범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놀이의 시간입니다. 평소에 근엄하기만 했던 교장 선생님이 상스러운 말을 내뱉기도 하고, 헤드벵잉을 하면서 샤우팅 창법으로 고래고래 목청을 돋우는 시간이 축제이지 않습니까. 교복을 입고, 우아하고 고상한 어조로, 학생 신분으로서 지켜야 할 것 다 지켜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촌극을 해봐야 관객들로부터 ‘집어 치워’ 소리 밖에 들을 것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축제는 위반이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조금은 불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축제는 위험을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시내를 가로지르며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황소떼가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비명과 탄성을 지르며 소에게 쫓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위험을 느끼는 자의 불안은 없습니다. 위험을 오히려 즐기겠다는 표정입니다. 심지어는 소의 뿔에 찔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목소리로 축제의 위험성을 말한다고 해서 이 축제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동물애호론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산 페르민 페스티벌’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다고 하네요.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 자신이 파괴할 수 있는 영역이면 어디나 점령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길, 운동장, 광장 등은 모두 조직된 집합체 내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길이나 버스 위가 춤판이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길은 평소에는 통행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축제는 바로 그런 일상의 규칙을 흔들고 위반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축제는 조화(cosmos)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축제가 지향하는 것은 혼돈(chaos)입니다.

“아주 고유한 의미로 축제는 사육제(carnaval)이다. 우리들의 슬픈 사육제가 아니라 휩쓸어 가며 파괴하는 축제를 말한다. 축제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 바로 전날에 벌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그럴듯하게 말해서 카니발(carneleva)-'살덩이를 걷어내기‘-희귀해지기 번에 전부 소비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소비이고 탕진입니다. 그러나 소비와 탕진은 자본주의의 일상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근검과 저축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규칙인 셈이지요. 축제는 이 규칙을 흔들어 버립니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감성의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시와 축제는 모두 일탈의 언어다


장 뒤비뇨는 신화학자인 멀치아 엘리아데의 견해를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축제란 대단히 강렬한 비사회적 삶을 공동의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며 집단적인 실체의 표현양식으로서 사회적인 것이다.”라고. 감성의 삶, 본능의 삶, 유희의 삶이 곧 비사회적 삶이겠지요. 특히 유희의 삶은 매우 비사회적입니다. 일터에서 노는 태도는 금물입니다. ‘놀고 있네.’라는 말은 분명 칭찬의 언어가 아니라 비난의 언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엄숙한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놀아보지 않으면 대동단결(大同團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원 야유회를 통해서 사장과 말단직원이 하나로 어울립니다. 기마전을 한다면 사장이 말이 되고, 말단직원이 사장 위에 올라탄다고 해도 흠이 될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그와 같은 축제의 장에서는 평소의 질서가 역전되면 역전될수록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라고. 왁자지껄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나면 한번 잘 해보자는 식의 굳센 단결 의식이 고조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놀이와 축제가 아주 무용한 것도 아닙니다. 떠들썩하게 소비하고 탕진하는 것이 축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효용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축제가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라고 하는 장르와도 매우 흡사합니다. 시는 일상의 문법으로부터의 일탈인 셈이니까요.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진부한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관념의 영역, 즉 비물질의 영역이요, 호수는 물질의 영역입니다. 관념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인데도 시인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상상력으로 연결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는 이런 비약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영역에서 ‘그해 겨울은 봄보다 따스했네.’라는 시적인 역설(paradox)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지요. 일상의 언어로는 이렇게 말해야 논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해 겨울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은 따뜻했다. 그러나 봄이 되어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내 마음은 그 어떤 겨울보다 추웠다.” 정확성 면에서 볼 때 일상의 언어가 시적인 언어보다 그 효용성이 크지만 그러나 시적인 언어만큼 재미는 없습니다. 시적인 언어에는 리듬이 있고, 비약이 있고, 놀이의 정신이 있으니까요.

장 뒤비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조화로운 영역을 고취시키는 방법을 예술가들이 가진 상상의 산물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세상에 혼란스러운 종말이 오지 않도록 한다.” 축제가 혼돈 속에서 진행되지만 축제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어서 축제의 끝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언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우리는 새롭게 구축된 언어를 통해 사물과 삶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겠지요.


계급적 대립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는 축제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바보들의 축제』에서 일상에서 억압되고 간과된 감정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기회를 축제로 정의하면서 축제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리켜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라 부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축제는 유사 이래 본능적인 욕구와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였습니다. ‘욕구와 감정의 발산`이라는 본질 때문에 축제에는 늘 정치적 저항의 동기가 숨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축제에는 기존의 기득권적 질서에 대한 반발, 풍자와 역설이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저항을 할 때는 자신의 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맨 얼굴을 드러내놓고서는 뻔뻔해질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축제에는 가면이 등장합니다. 가면을 씀으로써 인간은 좀더 대범하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고, 일상의 규칙을 좀더 수월하게 흔들어댈 수 있는 것이지요.

<봉산탈춤>에서 탈을 쓴 말뚝이가 양반 삼형제를 끌고 다니면서 그들을 골리고 조롱합니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알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이렇게 버릇없이 촐싹대다가는 평소에는 따귀라도 맞겠지만 축제는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시간입니다. 비록 눈꼴이 시지만 아랫것들의 무례를 적당히 눈감아 줌으로써 더 큰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로 양반들은 자신들이 희화화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대범하고 관대한 척, 겉으로는 껄껄 웃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축제는 날카로운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에서도 탈춤이 공연되는 마을의 축제에 양반들이 기금을 출연했다는 것이 추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층집단이 지배계층에 가지는 불만의 물꼬를 적당히 터줌으로써 장차 야기될지도 모르는 대립의 날카로움을 무마해보자는 의도를 가진 양반측에서 보자면 축제는 체제유지에 꽤 도움이 되는 이벤트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흥성한 축제도 끝이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무미건조한 일상의 공간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허무와 고독만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노동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력과 규칙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더 크고 비범한 존재임을 축제는 떠들썩한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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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산업적 논리에 의해 차려지는 죽음의 식탁

잡식동물의 딜레마/마이클 폴란/다른세상


먹을 것에 대한 잡식동물의 딜레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딜레마 상황’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자주 딜레마 상황과 만나게 되죠. 가령 숲에서 길을 잃었다고 가정해볼까요. 여러분의 배낭 속의 식량은 이미 동이 났습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먹거리를 숲속에서 직접 구할 수밖에 없겠죠. 수렵채취인의 후예답게 능숙하게 먹거리를 구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대개 탐스러운 열매를 눈앞에 두고도 이 열매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버섯을 눈앞에 두고도 이런 고민은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소개할 책 제목과 같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입니다.

코알라는 유칼리 나무 잎사귀만 먹고, 팬더는 대나무 잎사귀만 먹는다고 하지요. 제왕나비는 아스클레피아스라는 식물만 먹는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특정한 먹이감만을 먹는 동물들은 먹이감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기도 먹고, 나물도 먹는 잡식성 동물인 인간은 먹이감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눈앞의 먹거리가 병을 일으키거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이 있을 때는 이런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겠죠.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크고 복잡하게 발달한 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서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인간은 보다 복잡하고 발달한 뇌의 구조를 필요로 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코알라는 유칼리 나무 잎사귀라는 한정된 먹이를 먹게 되면서 뇌의 크기도 작아졌다고 하더군요.

이것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입니다. 가정에서 엄마들의 고민도 그런 종류의 것이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해야 할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코알라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유칼리 나무 잎사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때면 모르지만 만약에 유칼리 나무를 병들게 하는 전염병이라도 돌게 된다면 코알라는 절박한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최근에 많은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오직 한 우물을 파는 이들의 진화론적 특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아스라는 식물이 멸종하는 순간이 곧 제왕나비가 멸종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슈퍼마킷에는 엄청난 먹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먹거리들이 우리를 다시 딜레마 상황에 빠뜨립니다. 먹거리를 앞에 두고 ‘저지방’, ‘고단백’, ‘저칼로리’, ‘트랜스지방’, ‘유전자조작식품(GMO)' 등의 문구를 확인하기에 바쁘죠. 대체 왜 이와 같은 일이 생겼을까요?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저자 마이클 폴란은 우리가 음식에서 너무 멀어져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먹는 소가 어떻게 길러졌고, 우리가 먹는 옥수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식탁에 올라왔는지, 또 우리가 마시는 음료수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정보가 너무 빈약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자는 대체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통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음식사슬‘을 추적해보기로 결심을 합니다. 저자는 거대 농업기업을 비롯해 유기농 산업 등을 추적해보고 직접 수렵도 하고 채집도 해보게 됩니다. 이렇게 발로 뛰고 이론서를 뒤적이면서 부지런하게 쓴 책이 『잡식동물의 딜레마』입니다.


옥수수, 음식 사슬의 출발점

우리의 식탁에서 끝이 나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출발점은 ‘옥수수’입니다. 소는 원래 풀을 먹는 초식동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소에게 곡물인 옥수루로 만든 사료를 먹이죠. 소뿐만이 아닙니다. 닭, 돼지, 칠면조, 양, 메기, 연어도 옥수수를 주원료로 만든 사료를 먹이로 합니다. 물론 소에게 닭의 내장을 먹이기도 합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나물을 먹이는 격이죠.

저자는 놀랍게도 치킨 너깃은 닭이 아니라 옥수수 덩어리라고 말합니다. 너깃에 쓰인 닭은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랐고, 반죽의 접착제로는 옥수수 전분, 코팅제로는 옥수수 가루가 쓰이기 때문입니다. 너깃을 튀기는 기름도 옥수수로 만든 것이고, 너깃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는 금빛 착색제, 신선도를 유지시켜 주는 구연산도 모두 옥수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량음료도 역시 옥수수 덩어리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1980년대 이후 거의 모든 탄산음료와 과일주스는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단맛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맥주 역시 옥수수에서 정제한 포도당으로 발효시킨다고 합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치킨 너깃을 먹으며 콜라를 마시고 있다면 우리는 옥수수에다 옥수수를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옥수수가 엄청난 규모로 재배되면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 심지어 사람들까지 농촌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또 옥수수가 대규모로 재배되면 엄청난 양의 합성비료가 뿌려져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킵니다.

또 풀만 먹던 소들이 곡물을 먹기 시작하면서 소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점이 생기게 되었죠. 소가 전분이 너무 많고 섬유질이 적은 먹이를 먹으면 되새김질이 중단돼 가스를 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위에 거품이 나고 점액질층이 형성돼 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폐를 압박합니다. 이때 가스를 제때에 빼주지 않으면 소가 질식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중성이어야 할 위가 산성이 되면서 소에게 속쓰림과 같은 질병도 생깁니다.

이런 질병에 대한 대안으로 항생제가 남용됩니다. 더구나 항생제는 성장촉진의 효과까지 있지요. 사료에 들어간 항생제가 동물의 몸에 쌓이면 각종 세균들은 오히려 내성이 강해집니다. 인체에 이런 세균들에 감염되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항생제를 복용해도 전혀 듣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가축에게 투여된 항생제는 결국 살코기가 되어 인간의 식탁에도 오르게 됩니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윤리학자 피터싱어가 오늘 우리의 밥상을 두고 ‘죽음의 밥상’이라고 명명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음식에 스며있는 산업의 논리

저자는 음식의 사슬을 추적해보기 위해 음식 사실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옥수수농장도 방문하고, 유기농 제품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버지니아 주의 유기농 농장을 방문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풀을 베고, 닭을 도살하는 경험까지 하며 진정한 유기농 제품에 대해 탐색을 하기 됩니다.

수천 마리의 젖소가 울타리 처진 농장에서 사육되는데도 여기서 나온 유제품에 ‘유기농’이라는 라벨이 붙어있는 것은 유기농 인증 곡물을 사료로 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뿐임을 저자는 확인합니다. 또 ‘방목해서 기른’ 닭의 고기라며 제품을 내놓는 농장에선 닭들이 생후 6주까지 닫힌 공간에서 자란다는 사실도 확인합니다.

저자는 무엇보다 유기농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산업적 규모의 ‘산업화된 유기농법’을 비판합니다. 유기농도 농업 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원래 자신이 대체하고자 했던 산업시스템을 똑같이 닮게 됐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입니다. 푸른 들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닭과 소의 모습은 제품포장에나 인쇄되어 있는 ‘슈퍼마켓 목가극’이라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아예 ‘산업 유기농’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우리의 문명과 음식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의 논리’입니다. 산업의 논리는 균일성, 효율성, 교환 가능성, 생산성 등이 중시됩니다. 대량으로 옥수수를 재배하게 되면 그만큼 식량 생산의 효율성은 높아지지만 자연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그만큼 훼손되겠죠. 산업의 논리에는 다양성, 복잡성, 공생 같은 생태학적 가치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산업적 논리는 소의 행복이나 인간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산업적 논리가 중시하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소떼가 집단가축사육시설에서 대량으로 사육되는 것도 바로 그런 산업적 논리 때문이죠.

이 산업의 논리는 끊임없이 화석 에너지를 고갈시켜야 합니다. 과거에는 태양에너지와 빗물만 있으면 옥수수가 저절로 자랐지만 지금은 엄청난 양의 비료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 비료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바로 화석연료를 고갈시키면서 만들어진 비료공업에서 온 것입니다. 대규모 유기농산업이 이 화석연료의 바탕 위에 서있다면 그것은 결국 지구를 망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은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굴러가는 순환적 질서입니다. 저자가 일주일간 일했던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초유기농 농장이 바로 순환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농장에 가깝습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은 장거리 수송을 하지 않고,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팔지도 않으며, 도매로 물건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산업적 논리를 무시합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에서는 소들을 방목합니다. 소들은 초원에서 태양광을 흡수한 풀을 먹고, 닭들은 소들을 따라 다니며 소들이 배설한 배설물에서 기생충들을 먹게 됩니다. 또 소들과 닭들이 배설한 배설물 중에 포함된 질소는 풀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합니다. 악취가 나는 비좁은 사육장에서 길러진 닭들이나 소들에 비해서 폴리페이스 농장에서 길러진 닭들이나 소들이 훨씬 건강할 것은 물론이고, 그런 동물의 고기가 인간의 건강에도 이롭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의 생태계도 건강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저자는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바로 국가와 군부(軍部)와 방위산업체 사이의 연합인 군산공동체(軍産共同體)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옥수수가 산업적 음식사슬의 근간이 된 것은 1947년 앨라배마에 있는 군수품 공장이 화학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지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정부는 폭발물을 만드는 주요 성분인 질산암모늄이 엄청나게 남아돈다는 사실을 알았고, 질산암모늄을 비료로 만들어 농지에 뿌리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농업의 산업화가 가속화됐고, 정부는 효율이란 명목 아래 옥수수단일재배를 미국 전역으로 퍼트렸습니다. 살충제를 만드는 다우나 몬산토 같은 기업은 네이팜탄과 고엽제를 만들었던 군산업체였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즐겨 먹는 패스트푸드의 가격은 싼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확한 비용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패스트푸드를 만들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환경문제를 생각해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패스트푸드의 정확한 비용은 자연이나 공중 보건, 공적 자금, 미래가 부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패스트푸드는 산업적 논리에 의해 생산되지만 슬로푸드는 자연의 다양성을 반영합니다. 건강하게 자란 소고기에는 태양광선에 의해 길러진 싱싱한 풀들이 있지만, 사육장에서 길러지고 도축장에서 도축된 소들의 고기에는 공생의 논리를 무시하는 산업의 논리와 동물들의 고통이 있습니다.

저자는 음식은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 모든 가치의 강력한 상징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건강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산업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상실한 모든 문화적 가치들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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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넘어서 -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2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문화 시대에 문화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책

문화를 넘어서/에드워드 홀/한길사


나의 문화만이 절대적인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문화라는 자각 없이도 수많은 문화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말을 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행위들을 ‘문화’라고 자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행할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엄연히 문화에 속합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음력 8월 15일이나 동짓날도 그저 평범한 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상기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왜 너희들은 건방지게 부모에게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를 설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설득의 답을 마련하는 책이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입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드 홀은 “다른 문화에 자신의 문화를 투영시키는 방법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이 저마다 다르고,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르고, 그들이 사는 환경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의 기준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가 일쑤라는 것이죠.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 이라고 불리는 티벳의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티벳인들은 윤회사상을 깊이 믿기 때문에, 죽은 후 자기의 시신(屍身)을 신성한 독수리가 먹어 치우면, 바로 승천하거나 아니면 부귀한 집안에 잉태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지 어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칼로 도막내 새들에게 던져줄 수 있느냐, 당신들은 미개인이라고 비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집단의 문화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조장에는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이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건조한 티벳의 자연환경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쉽지 않은 건조한 기후에서 화장(火葬)을 하기 위한 나무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기에 충분할 나무를 구입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장(水葬)도 문제입니다. 건조기후에서는 물은 희귀한 자원에 속합니다. 수장은 이 희귀한 자원을 오염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겠죠. 또 흘 속에 묻는 토장(土葬)도 문제가 많습니다. 티벳의 메마른 땅에서는 시체가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티벳이라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조장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화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화를 절대시하는 태도를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가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 문화를 야만적인 짓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태도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멘트가 있는 TV 광고가 있었는데, 우리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태도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이유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는 침묵의 언어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 의견과는 다르더라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원활한 의사교환, 즉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면 대화는 단순한 의견교환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성숙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를 넘어서』의 저자 또한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언어입니다. 언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문화에도 언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처럼 소리가 있고, 소리에 따른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 ’침묵‘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드워드 홀은 침묵은 먼저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똑같은 감각기관과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공통의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령 일본인들은 방 가장자리를 비워두는 반면 서구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며 가장자리를 채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감각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패턴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상이한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벽과 가구 그리고 실내 공간을 일본인들은 반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중심부를 채우는 반면 서구인들은 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동부나 서부가 발달하고 중심부의 문화가 텅빈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문화를 황량하다고 생각하지요. 일본인들이 미국의 방을 보고는 중심부가 비었기 때문에 황량해 보인다고 평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문화에서 형성된 다른 감각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화권마다 공간 사용방식이 다릅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볼까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학생이 미국인 친구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서면 미국 학생들은 놀라는 듯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라틴계학생들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가면 그들은 태연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바로 미국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공간의 사용방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한국인이나 라틴계 사람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라틴계 사람들이나 한국인들이 허용하는 접근기준보다 훨씬 더 관대합니다.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 콧등을 부비기도 합니다. 만약 미국 사람들에게 이런 인사를 했다가는 ‘성희롱’이라는 달갑지 않는 모욕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문화에 따라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용방식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개념으로 저자는 각국의 공간사용방식을 말합니다. 문화권마다 개인마다 공간의 사용방식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근접한 거리를 편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적정한 거리감각을 갖게 하고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프로세믹스에 관한 섬세한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는 이 ‘프로세믹스’를 충분히 고려한 것일까요.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설 곳조차 마땅하지 않은 출근길의 전철 안은 어떨까요. 상품의 진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람들의 동선에는 관심이 없는 대형마트는 어떨까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각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도시의 건물과 도로와 교통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사무실의 배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극심한 소외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요. 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간의 사용방식을 존중한다는 것이니까요.


저자는 현대적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 건강과 질병, 문화적 격차, 인종 간 갈등 등의 위기들이 바로 우리의 '공간'에 대한 감각이 획일화하여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회의 소통양식으로서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란 개념도 문화의 이해에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고맥락 문화는 어떤 행위가 어떤 문맥에서 결정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훈련 중에 물 한 통이 생겼다고 해볼까요. 과연 누가 먼저 마셔야 할까요. ‘장유유서’와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고맥락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당연히 고참자나 연장자가 물을 먼저 마실 것입니다. 누가 먼저 마실까 토론이 필요없죠. 그러나 유교적 문화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토론이 필요 없으니 효율적 사회요, 미국은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하니 비효율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토론에 의존하지 않고 나이나 직위와 같은 권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권위적 문제해결방식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유럽 전통의 모노크로닉(monochronic)한 시간관과 라틴아메리카나 중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폴리크로닉(polychronic)한 시간관도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문화의 이해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개념입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선형적(線形的)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개 한 번에 하나씩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스케줄, 시간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은 사회생활, 경제생활이 철저하게 시간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은 비선형적 사고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의 특징은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이 체계에 속한 사람은 미리 계획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기보다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는 관계나 일 처리 과정에서의 성취도에 역점을 둡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간섭합니다. 이들이 시간표에 맞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체계가 없었다면, 인간에게서 공업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홀은 말합니다. 그런데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장점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특정 개인, 기껏해야 두세 사람과 관련 맺는 관계를 강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문화재를 이해한다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의 사람들이 행동을 결정짓는 복잡다단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화, 즉 침묵의 문화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문화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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