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문명 한길컬처북스 21
장 뒤비뇨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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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부르는 축제

축제와 문명/장 뒤비뇨/한길사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축제


축제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먼저 락밴드의 등장입니다. ‘노브레인’이나 ‘크라잉넛’과 같 펑키한 복장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이들의 괴성이 청중의 혼을 뺍니다. 관중들도 헤드벵잉을 하며 점점 축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어서 비보이들의 현란한 댄싱이 끝나면 이번엔 촌극 시간입니다. 평소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던 학생부장 선생님 역할을 맡은 학생이 무대에 등장하여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읊으면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가 됩니다. 역시 바보스럽게 분장한 교장선생님이 등장하면 객석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집니다. 이때 학생들은 선생님이 언짢아하시지는 않는지 선생님의 표정을 살핍니다. 그러나 선생님들도 학생들과 같이 연신 즐거워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남녀노소, 상하좌우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이른바 ‘대동(大同)’의 축제입니다. 이런 축제를 통해서 학교는 전에 없는 활기를 되찾게 되고 학생들은 면학의 에너지를 충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축제에서 목소리에 잔뜩 무게를 잡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와 같은 가곡이나 부르고,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이 근엄한 연극을 한다면 그것이 어디 축제겠습니까. 그것은 학예발표회나 솜씨자랑에 불과하겠지요. 축제는 모름지기 떠들썩함, 광기, 무질서, 일탈이 있어야 제격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시청 앞 광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곳이 무질서와 광기, 일탈의 장소였던 셈이지요. 여러 가지 물감으로 페이스 페인팅(face painting)을 한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노출을 감행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과감히 입을 맞추는 커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운행 중인 노선버스에 올라 함성을 질렀고, 어떤 이들은 도로를 점령하기도 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유치장 철창 신세를 져야 마땅했지만 누구 하나 그들의 무질서와 일탈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광기와 무질서와 일탈을 찬양해 마지않았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의 현장도 어느 정도 2002년의 시청 앞을 연상시킵니다. 평소에 다니던 도로의 중앙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함성을 질러대는 젊은이들은 질서를 흔들면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합니다.

축제는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먼저 매일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노동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노동이 요구하는 엄정한 규칙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넥타이를 풀고, 만화의 주인공처럼 분장을 하고, 놀이의 장소로 성큼 뛰어듦으로써 축제는 시작됩니다. 축제의 시간은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규범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놀이의 시간입니다. 평소에 근엄하기만 했던 교장 선생님이 상스러운 말을 내뱉기도 하고, 헤드벵잉을 하면서 샤우팅 창법으로 고래고래 목청을 돋우는 시간이 축제이지 않습니까. 교복을 입고, 우아하고 고상한 어조로, 학생 신분으로서 지켜야 할 것 다 지켜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촌극을 해봐야 관객들로부터 ‘집어 치워’ 소리 밖에 들을 것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축제는 위반이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조금은 불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축제는 위험을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시내를 가로지르며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황소떼가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비명과 탄성을 지르며 소에게 쫓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위험을 느끼는 자의 불안은 없습니다. 위험을 오히려 즐기겠다는 표정입니다. 심지어는 소의 뿔에 찔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목소리로 축제의 위험성을 말한다고 해서 이 축제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동물애호론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산 페르민 페스티벌’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다고 하네요.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 자신이 파괴할 수 있는 영역이면 어디나 점령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길, 운동장, 광장 등은 모두 조직된 집합체 내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길이나 버스 위가 춤판이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길은 평소에는 통행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축제는 바로 그런 일상의 규칙을 흔들고 위반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축제는 조화(cosmos)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축제가 지향하는 것은 혼돈(chaos)입니다.

“아주 고유한 의미로 축제는 사육제(carnaval)이다. 우리들의 슬픈 사육제가 아니라 휩쓸어 가며 파괴하는 축제를 말한다. 축제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 바로 전날에 벌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그럴듯하게 말해서 카니발(carneleva)-'살덩이를 걷어내기‘-희귀해지기 번에 전부 소비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소비이고 탕진입니다. 그러나 소비와 탕진은 자본주의의 일상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근검과 저축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규칙인 셈이지요. 축제는 이 규칙을 흔들어 버립니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감성의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시와 축제는 모두 일탈의 언어다


장 뒤비뇨는 신화학자인 멀치아 엘리아데의 견해를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축제란 대단히 강렬한 비사회적 삶을 공동의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며 집단적인 실체의 표현양식으로서 사회적인 것이다.”라고. 감성의 삶, 본능의 삶, 유희의 삶이 곧 비사회적 삶이겠지요. 특히 유희의 삶은 매우 비사회적입니다. 일터에서 노는 태도는 금물입니다. ‘놀고 있네.’라는 말은 분명 칭찬의 언어가 아니라 비난의 언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엄숙한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놀아보지 않으면 대동단결(大同團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원 야유회를 통해서 사장과 말단직원이 하나로 어울립니다. 기마전을 한다면 사장이 말이 되고, 말단직원이 사장 위에 올라탄다고 해도 흠이 될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그와 같은 축제의 장에서는 평소의 질서가 역전되면 역전될수록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라고. 왁자지껄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나면 한번 잘 해보자는 식의 굳센 단결 의식이 고조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놀이와 축제가 아주 무용한 것도 아닙니다. 떠들썩하게 소비하고 탕진하는 것이 축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효용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축제가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라고 하는 장르와도 매우 흡사합니다. 시는 일상의 문법으로부터의 일탈인 셈이니까요.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진부한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관념의 영역, 즉 비물질의 영역이요, 호수는 물질의 영역입니다. 관념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인데도 시인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상상력으로 연결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는 이런 비약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영역에서 ‘그해 겨울은 봄보다 따스했네.’라는 시적인 역설(paradox)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지요. 일상의 언어로는 이렇게 말해야 논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해 겨울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은 따뜻했다. 그러나 봄이 되어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내 마음은 그 어떤 겨울보다 추웠다.” 정확성 면에서 볼 때 일상의 언어가 시적인 언어보다 그 효용성이 크지만 그러나 시적인 언어만큼 재미는 없습니다. 시적인 언어에는 리듬이 있고, 비약이 있고, 놀이의 정신이 있으니까요.

장 뒤비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조화로운 영역을 고취시키는 방법을 예술가들이 가진 상상의 산물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세상에 혼란스러운 종말이 오지 않도록 한다.” 축제가 혼돈 속에서 진행되지만 축제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어서 축제의 끝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언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우리는 새롭게 구축된 언어를 통해 사물과 삶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겠지요.


계급적 대립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는 축제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바보들의 축제』에서 일상에서 억압되고 간과된 감정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기회를 축제로 정의하면서 축제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리켜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라 부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축제는 유사 이래 본능적인 욕구와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였습니다. ‘욕구와 감정의 발산`이라는 본질 때문에 축제에는 늘 정치적 저항의 동기가 숨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축제에는 기존의 기득권적 질서에 대한 반발, 풍자와 역설이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저항을 할 때는 자신의 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맨 얼굴을 드러내놓고서는 뻔뻔해질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축제에는 가면이 등장합니다. 가면을 씀으로써 인간은 좀더 대범하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고, 일상의 규칙을 좀더 수월하게 흔들어댈 수 있는 것이지요.

<봉산탈춤>에서 탈을 쓴 말뚝이가 양반 삼형제를 끌고 다니면서 그들을 골리고 조롱합니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알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이렇게 버릇없이 촐싹대다가는 평소에는 따귀라도 맞겠지만 축제는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시간입니다. 비록 눈꼴이 시지만 아랫것들의 무례를 적당히 눈감아 줌으로써 더 큰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로 양반들은 자신들이 희화화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대범하고 관대한 척, 겉으로는 껄껄 웃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축제는 날카로운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에서도 탈춤이 공연되는 마을의 축제에 양반들이 기금을 출연했다는 것이 추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층집단이 지배계층에 가지는 불만의 물꼬를 적당히 터줌으로써 장차 야기될지도 모르는 대립의 날카로움을 무마해보자는 의도를 가진 양반측에서 보자면 축제는 체제유지에 꽤 도움이 되는 이벤트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흥성한 축제도 끝이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무미건조한 일상의 공간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허무와 고독만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노동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력과 규칙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더 크고 비범한 존재임을 축제는 떠들썩한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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