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 현대사상의 모험 2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외 옮김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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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부추긴다

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민음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 몸에 수분을 공급해주어야겠지요. 이 일을 게을리 하면 유기체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증은 이 위험을 알려주는 표지요, 수분에 대한 욕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분에 대한 욕구에 직면하면 누구나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찬찬히 생각해볼까요. 과연 신체가 수분을 요구할 때 모두가 예외없이 물을 마실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종족들은 야자의 열매를 깨뜨려 그 즙을 마실 것이고, 어떤 이는 숭늉을, 또 어떤 이는 이온음료를 마실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아이스티를 마실 것이고, 어떤 이는 샤베트를 녹여 먹을지도 모릅니다. 목마름이라는 사태에 반응하는 양상은 이렇게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편차를 보여주지요.

여기 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엄마로부터 “물이 가장 깨끗한 액체야. 음료수는 이빨을 썩게 만들고 음료수는 해로운 성분이 들어있어서 몸을 망치기도 한단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물이야말로 가장 좋은 음료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집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집의 냉장고엔 물 이외의 어떤 음료도 없기 때문이죠. 문제는 집밖에서입니다. 아이가 물을 마실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그의 옆으로 와서 콜라나 사이더와 같은 음료수를 마시면 자꾸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나도 저 친구들이 욕망하는 대상, 즉 음료수를 마셔보고 싶은 걸,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참으면 참을수록 욕망은 더 강렬해지는 법, 결국 그 아이도 친구들을 따라서 음료수를 마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뚜렷한 자기의 주관이 없는 어린아이일수록 이 욕망의 바이러스에 취약하니까요. 욕망은 이렇게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욕망도 이 아이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요? 여러분들이 좋은 엠피쓰리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과연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온 것일까요? 아니면 바이러스처럼 타인의 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어온 것일까요.

욕망이란 주제를 평생 동안 연구해온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르네 지라르는 욕망은 ‘내’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이러스처럼 ‘내’ 밖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르네 지라르의 이 말을 쉽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든 한 아이의 예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아이의 욕망은 아이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욕망은 부모가 만들어 낸 것이거나, 친구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광고 속의 모델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음료수를 마시고 싶은 욕망도 친구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그 친구들도 누군가가 그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나서 나도 저 사람처럼 저 음료를 마셔 보고 싶다는 모방의 충동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필요 없다고 생각한 책들을 버리기 위해 아파트 앞 쓰레기장에다 책들을 쌓아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책들을 한아름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 책이 나에게 쓸모없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버리려고 쌓아놓은 책들을 유심히 살펴본 후 몇 권을 주섬주섬 챙겨서 다시 책꽂이에 쌓아두었습니다. 저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이론을 생각할 때마다 이때의 일을 떠올립니다. 버리려고 쌓아둔 책이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가게 만들었던, 나의 욕망은 과연 나의 진정한 욕망인가, 아니면 나의 헌책을 한아름 안고 가던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 욕망일까. 르네 지라르식의 욕망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답은 후자입니다.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 욕망이라는 말이지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지라르는 욕망이 주체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간접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욕망은 내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전염된다는 이야기죠.

그에 따르면 음식물과 섹스에 대한 본능은 아직 욕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모델을 모방에 하느냐에 따라 비로소 욕망이 된다는 것이지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이론대로라면 인간에게는 채소나 야채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욕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김치를 먹고 싶다거나 냉잇국을 먹고 싶다거나 샐러드를 먹고 싶은 구체적인 욕망만 있을 뿐이라는 거죠. 한국인은 김치를 먹는 모델을 모방하고, 미국인들은 샐러드를 먹는 모델을 모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치를 먹는 모델을 한국의 음식문화라고 하고, 샐러드를 먹는 모델을 미국의 음식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는 문화를 배우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욕망을 배웁니다. 바로 모방을 통해서 말입니다. 누구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문화를 전수받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김치를 먹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김치문화권에서 살아 가게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곧 욕망의 다양성입니다.


세상에 자원이 무한정하다면 우리의 욕망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원의 희소성입니다. 이 희소한 자원을 두고 모든 사람의 욕망이 불꽃을 튕기며 다툰다면 살벌한 긴장관계가 조성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이 긴장관계는 한결 누그러지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사과 다섯 개를 두고 50명이 서로 먹으려고 대립한다면 사과를 획득하려는 경쟁과정은 살벌한 경쟁관계가 되겠지만 이 50명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경쟁은 한결 누그러질 것입니다. 화가는 걸작의 미술품 앞에서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운동선수는 더 뛰어난 운동선수에게 질투를 느끼는 법이니까요. 내 욕망의 영역이 아닌 영역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걸작의 미술품 앞에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와 화가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르니까요.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이 다양하다면 경쟁은 한결 누그러지겠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한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사람들의 욕망이 다양할까요. 좋은 집을 가지고 싶다, 좋은 핸드폰을 가지고 싶다, 좋은 차를 가지고 싶다, 좋은 음반을 가지고 싶다, 좋은 홈씨어터를 가지고 싶다. 그 외양은 천차만별인 것 같지만 잘 뜯어보면 사람들의 욕망은 매우 획일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욕망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르네 지라르는 이 욕망의 ‘차이 없음’, 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발생시킨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더 간단하게 생각해보죠. 진수성찬으로 차린 상에서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음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 앉아있을 때는 하나의 음식을 두고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겠지요. 바로 이 긴장은 욕망의 차이가 상실된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의 상실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르네 지라르의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날의 문화를 생각해보세요. 세계화란 이름으로 이익추구의 욕망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이 이익추구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2007년 17대 대선을 생각해보세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한 후보자가 엄청난 표차로 여당의 후보를 누르지 않았습니까.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이윤의 극대화는 이제 세계인의 공통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치열한 이익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모두들 이윤의 극대화를 꿈꾸는 세상이 욕망의 차이가 상실된 시대지요. 바로 이 차이의 상실, 이익을 위한 욕망의 무한경쟁이 치명적인 위험을 부른다는 것이 르네 지라르의 설명입니다.


인간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창고와 흡사합니다. 잠재된 폭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고 있지요. 지라르는 인간이 어떻게 폭력을 잠재우고 사회를 이끌어 왔는가를 살펴보다가 <희생제의>라는 종교제도에 착안하게 됩니다. 지라르는 이 희생제의가 명백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는 폭력의 예방책이었다는 것을 밝혀 보입니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볼까요. 너무도 이기고 싶은 축구게임에서 졌다고 해볼까요. 모두들 속이 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분노의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 붓고 싶을 때 우리는 이른바 ‘왕따’의 대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들 중에서 대항할 여지가 없는 다소 무기력한 친구를 골라 “너 때문에 우리가 축구를 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죠. 그렇게 되면 우리를 이긴 팀과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친구들 중의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꼴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이든 지배적인 문화적 관습과는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 동시에 비난의 화살과 폭력을 피해나갈 수 없는 무력한 경우라면 희생양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께 드리는 제사에 사람을 바치는 것을 인신공희(人身供犧)라고 합니다. 산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이런 끔찍한 일이 종교적인 제사의식에서 어떻게 벌어질 수 있을까요. 르네 지라르는 폭력은 은폐되지 않으면 그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폭력이 은폐되면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도 그 희생을 믿는 자도 폭력이 행하는 역할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희생양이 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신공희, 즉 희생양은 신의 분노를 달래려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야만 집단의 죄책감이 훨씬 달래지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폭력성이 누그러질 수가 있겠죠.



무한한 경쟁으로 야기되는 폭력의 가능성에 집단 전체가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이때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집단이 하나가 되어 희생양을 찾아내고, 그 희생양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라르는 말합니다. 군중은 잠재적인 박해자라고. 우리도 능히 박해자의 무리에 가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녀사냥, 반유대주의 등 역사 속에서 인류는 수많은 희생양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일단 희생양이 되면 단죄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나오게 마련입니다. 폭력을 동반하는 희생제의는 희생자 처지에서 보면 비합리적 광기에서 나오는 집단폭력에 불과하지만, 가해자의 처지에서 보면 성스러운 행위가 되죠.

모든 학살에는 명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이른바 여론재판도 사회적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에서 이루어집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분은 집단의 가치를 옹호하는 성스러운 가치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는 정신, 내것만이 옳다는 확신, 내가 도달한 단계가 지고지순의 단계라고 하는 확신이 바로 테러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 생각만이 옳은 것인가를 의심하는 회의의 정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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