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넘어서 -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2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문화 시대에 문화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책

문화를 넘어서/에드워드 홀/한길사


나의 문화만이 절대적인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문화라는 자각 없이도 수많은 문화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말을 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행위들을 ‘문화’라고 자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행할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엄연히 문화에 속합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음력 8월 15일이나 동짓날도 그저 평범한 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상기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왜 너희들은 건방지게 부모에게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를 설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설득의 답을 마련하는 책이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입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드 홀은 “다른 문화에 자신의 문화를 투영시키는 방법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이 저마다 다르고,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르고, 그들이 사는 환경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의 기준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가 일쑤라는 것이죠.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 이라고 불리는 티벳의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티벳인들은 윤회사상을 깊이 믿기 때문에, 죽은 후 자기의 시신(屍身)을 신성한 독수리가 먹어 치우면, 바로 승천하거나 아니면 부귀한 집안에 잉태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지 어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칼로 도막내 새들에게 던져줄 수 있느냐, 당신들은 미개인이라고 비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집단의 문화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조장에는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이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건조한 티벳의 자연환경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쉽지 않은 건조한 기후에서 화장(火葬)을 하기 위한 나무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기에 충분할 나무를 구입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장(水葬)도 문제입니다. 건조기후에서는 물은 희귀한 자원에 속합니다. 수장은 이 희귀한 자원을 오염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겠죠. 또 흘 속에 묻는 토장(土葬)도 문제가 많습니다. 티벳의 메마른 땅에서는 시체가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티벳이라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조장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화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화를 절대시하는 태도를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가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 문화를 야만적인 짓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태도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멘트가 있는 TV 광고가 있었는데, 우리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태도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이유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는 침묵의 언어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 의견과는 다르더라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원활한 의사교환, 즉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면 대화는 단순한 의견교환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성숙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를 넘어서』의 저자 또한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언어입니다. 언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문화에도 언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처럼 소리가 있고, 소리에 따른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 ’침묵‘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드워드 홀은 침묵은 먼저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똑같은 감각기관과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공통의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령 일본인들은 방 가장자리를 비워두는 반면 서구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며 가장자리를 채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감각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패턴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상이한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벽과 가구 그리고 실내 공간을 일본인들은 반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중심부를 채우는 반면 서구인들은 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동부나 서부가 발달하고 중심부의 문화가 텅빈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문화를 황량하다고 생각하지요. 일본인들이 미국의 방을 보고는 중심부가 비었기 때문에 황량해 보인다고 평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문화에서 형성된 다른 감각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화권마다 공간 사용방식이 다릅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볼까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학생이 미국인 친구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서면 미국 학생들은 놀라는 듯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라틴계학생들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가면 그들은 태연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바로 미국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공간의 사용방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한국인이나 라틴계 사람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라틴계 사람들이나 한국인들이 허용하는 접근기준보다 훨씬 더 관대합니다.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 콧등을 부비기도 합니다. 만약 미국 사람들에게 이런 인사를 했다가는 ‘성희롱’이라는 달갑지 않는 모욕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문화에 따라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용방식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개념으로 저자는 각국의 공간사용방식을 말합니다. 문화권마다 개인마다 공간의 사용방식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근접한 거리를 편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적정한 거리감각을 갖게 하고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프로세믹스에 관한 섬세한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는 이 ‘프로세믹스’를 충분히 고려한 것일까요.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설 곳조차 마땅하지 않은 출근길의 전철 안은 어떨까요. 상품의 진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람들의 동선에는 관심이 없는 대형마트는 어떨까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각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도시의 건물과 도로와 교통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사무실의 배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극심한 소외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요. 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간의 사용방식을 존중한다는 것이니까요.


저자는 현대적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 건강과 질병, 문화적 격차, 인종 간 갈등 등의 위기들이 바로 우리의 '공간'에 대한 감각이 획일화하여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회의 소통양식으로서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란 개념도 문화의 이해에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고맥락 문화는 어떤 행위가 어떤 문맥에서 결정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훈련 중에 물 한 통이 생겼다고 해볼까요. 과연 누가 먼저 마셔야 할까요. ‘장유유서’와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고맥락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당연히 고참자나 연장자가 물을 먼저 마실 것입니다. 누가 먼저 마실까 토론이 필요없죠. 그러나 유교적 문화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토론이 필요 없으니 효율적 사회요, 미국은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하니 비효율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토론에 의존하지 않고 나이나 직위와 같은 권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권위적 문제해결방식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유럽 전통의 모노크로닉(monochronic)한 시간관과 라틴아메리카나 중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폴리크로닉(polychronic)한 시간관도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문화의 이해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개념입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선형적(線形的)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개 한 번에 하나씩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스케줄, 시간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은 사회생활, 경제생활이 철저하게 시간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은 비선형적 사고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의 특징은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이 체계에 속한 사람은 미리 계획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기보다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는 관계나 일 처리 과정에서의 성취도에 역점을 둡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간섭합니다. 이들이 시간표에 맞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체계가 없었다면, 인간에게서 공업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홀은 말합니다. 그런데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장점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특정 개인, 기껏해야 두세 사람과 관련 맺는 관계를 강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문화재를 이해한다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의 사람들이 행동을 결정짓는 복잡다단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화, 즉 침묵의 문화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문화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