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요지경 속에 사는 우리들
과연 '진상(眞相)' 그 자체도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많은 시사점을 준다는 점에서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7&aid=0000005233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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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천 교수는 “2007년 발행된 한국은행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실린 겸재 정선의 1746년작 ‘계상정거도’(맨 위)는 진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한권의 책이 한국 고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800장의 희귀도판이 수록된 ‘진상(眞相)’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진상은 ‘사물의 참된 모습’이라는 뜻. 책 분량만 해도 무려 541쪽에 달한다.
‘미술품 진위감정의 비밀’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그동안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비기(秘技)로 알려졌던 ‘고미술 감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감정전문서다.
우리나라 고미술 시장은 깊고도 넓다. 반만년 역사에 걸맞게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단원 김홍도, 흥선대원군 같은 불세출의 예술혼들을 탄생시킨 미술의 나라였다. 어디 그뿐인가? 급속한 경제성장과 재벌가문들의 수집욕에 발맞춰 연간 수천억원대의 미술품이 거래될 뿐 아니라, 매주 공영방송에서는 ‘진품 명품’이라는 미명 아래 수십억원짜리 진품감정서가 전 국민에게 공개되는 나라다.
“1000원 지폐 속 ‘계상정거도’ 등 보물급 작품도 위작 수두룩”
그런데 끊임없이 진품이 탄생하는 세태를 한 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작품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판가름 나는 것일까? 작가는 이미 사라진 뒤고 이를 모방한 위작들이 끊임없이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상황. 그런데 만일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시킨다면, 아니 고의가 아니라 부족한 식견으로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어떨까?
30년 넘게 한학과 고미술 감정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이동천(44) 교수는 바로 이 ‘진상’이라는 첫 저작을 통해 대중에게 “진본이라 알려진 모든 작품을 의심하라”며 충격적인 위작 실태를 공개했다. 그는 지난 3년간 540여 점의 국내 대표작을 감정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인들의 대표작 상당수(약 200점)가 ‘위작’ 또는 그에 상응하는 가짜라고 했다. 나아가 우리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인 ‘기록 없는 다수결 투표에 의한 감정’ 현실까지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미술품 위작을 폭로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품 전문가 양성을 위한 ‘감정학습서’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책의 중심 내용은 ‘위조된 작품’을 감식하는 방법론이다. 몇몇 전문가가 “이 책을 위조전문가가 보면 큰일”이라고 할 정도로 진품과 모조품의 차이를 치밀하게 분석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저작이 한국 고미술계의 나태함과 이른바 전문가로 불리는 몇몇 허명(虛名)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인사동 학고재 패밀리로 알려진 유홍준(명지대 교수) 전 문화재청장과 이태호(명지대 박물관장) 교수가 대표적인 타깃이다. 이들이 지난 십수 년간 국내 최고의 고미술 전문가로 군림하며 각종 저서와 전시회를 통해 여러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시킨 장본인들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진상’이란 책이 시중에 깔리기도 전에 이 책을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대한민국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인쇄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작론’이다.
71세의 겸재가 퇴계의 계상서원을 보고 그렸다는 이 작품은 그동안 전문가들에게서 “노년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붓질이 힘차고 거침없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미 1971년 문화재청으로 진품 판정을 받았고, 문화재청은 이 작품이 삽입된 화첩 ‘퇴우이선생진적’을 보물 제585호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를 임본위작(臨本僞作·원본을 보면서 베낀 작품)이라고 단호하게 평가했다.
“원숙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느린 붓놀림에 졸렬한 화풍과 어색한 구도까지, 계상정거도는 정선 화풍과 어떤 일치점도 없는 심각한 상태의 위작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존 전문가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출처의 정확성(정선의 아들 정만수의 기록)을 들어 진본임을 주장하는데, 특히 이태호 교수는 “진품을 보지도 않고 위작이라 주장하는 것은 감정의 기본이 돼 있지 않은 행태”라고 반박한다.
“실물을 보지 않고도 필선의 차이와 물감의 변한 정도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동천 교수와 기존 미술계의 논쟁은 앞으로도 치열하게 전개될 예정이다.
감정위원 전문성 떨어지고 과학적 근거도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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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전북 전주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사진이나 영인본(影印本), 목판수인본(木版水印本) 등 정교한 복제본이 원작으로 오인되는 일은 미술품 유통시장에서 흔하다. 2007년 국내 모 경매에서 추정가 8000만~9000만원에 출품된 ‘북산 김수철, 우봉 조희룡, 대산 강진의 ‘산수도’는 원작이 아니라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다. 2005년에 추정가 3000만~4000만원에 출품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역시 마찬가지.
문제는 이 같은 초보적인 오류가 권위 있는 미술품 경매장에서까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는 점. 감정위원들의 전문성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다른 나라의 위작이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돌변(중위작)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2003년 미술품 경매에서 이상적의 ‘시고대련’이란 작품에는 어이없게도 청나라 강희 황제의 낙관이 찍혀 있었다. 그럼에도 감정인들과 경매 참가자들은 이 가격을 최초 낙찰가의 3.5배까지 뻥튀기시켰다.
이 교수의 책 ‘진상’에 따르면 더 큰 문제는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과 대학박물관 등에 소장된 위작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고미술 시장의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위조는 명성만큼이나 심각해 보인다. 예산의 김정희 종가에서 가지고 있는 ‘김정희의 칠언시-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호)를 비롯해 제주특별자치도가 소장하고 있는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2호), 유홍준 전 청장이 제주시에 기증한 ‘김정희 편지 모음집’, ‘시의정’, ‘자화상’(선문대 박물관), ‘예서’(간송미술관) 등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
수준 이하의 작품을 칭송하는 고고미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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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천 교수가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는 신윤복의 ‘아기 업은 여인’, 정선의 ‘금강내산’,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가운데 ‘주막’(왼쪽부터).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인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고려대 박물관), ‘독서여가’(간송미술관), ‘설평기려’(간송미술관), ‘산수도’(서울대 박물관) 등도 가짜다. 심지어 풍속화의 최고 경지인 단원의 ‘단원풍속화첩’(보물 527호)도 전체 25점 중 19점이 위작이라는 결론이 났다.
작품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은 감정의 절대 목표다. 문제는 그동안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위원들과 민간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익명 뒤에 숨어 인상비평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교수는 재료의 성질 분석을 통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료의 특징만으로도 위작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림에 하얀색 색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연분(鉛粉) 안료’를 보자.
조선시대 작품을 보면 19세기 중기까지는 주로 조개껍데기로 제작한 합분(蛤粉)을 백색 안료로 사용했고, 19세기 후기 장승업을 전후해서는 납 성분이 들어간 연분이 사용됐다. 이 납 성분은 시간이 지나면 짙은 갈색(반연현상)으로 변한다.
이 같은 현상을 통해 확인 가능한 대표적인 위작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는 김홍도의 ‘단원절세보첩’(보물 제782호)이다. 이 그림의 꽃과 새를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다. 결국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것. 이와 함께 김홍도의 ‘섭쉬쌍부도’, 김정희의 ‘팔곡병’,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병’ 중 ‘맨드라미와 쇠똥벌레’(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의 ‘설제화정’(雪霽和制·간송미술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랑이 무늬라 해서 ‘호피선지(虎皮宣紙)’로 알려진 종이를 통해 작품의 진위를 확인할 수도 있다. 호피선지는 국내에 그 연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교수는 “20세기 초 중국에서 수입됐으므로 1856년 사망한 김정희의 호피선지 서첩인 ‘연식첩(淵植帖)’은 위작”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동안 우리 문화재 감정이 비과학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이 교수는 여기서 유 전 청장이 그의 저서에서 ‘완당의 종이 사랑’이라고 칭송한 부분을 거론한다.
“완당은 종이의 선택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썼다. 자신의 작품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이를 고르기도 했고 (…) 완당이 중국제 화전지를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그의 ‘연식첩’이라는 작품만 봐도 알 수 있다.”
유 전 청장의 말대로라면 김정희가 생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이를 사랑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그간 비전문가들이 고미술 감정을 해왔다는 비판이다.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국내 전문가들의 작품 감정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조자가 작품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이 위조하고,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되레 칭찬하는 감정전문가들의 사례를 접할 때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의 ‘묘길상’은 서화 창작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위조자가 당시 수요에 맞게 제작한 것이다. 작품에 작가 명관(名款)도 없고, 인장은 붓으로 무슨 글자인지 모르게 그려진 것. 그럼에도 국내 한 고고미술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린 듯한 불상의 선묘와 공양 드리는 두 선승 표현, 선묘를 쌓은 암준법과 특징적인 수묘법 등 역시 김홍도의 능숙한 수묵담채의 구사와 필치다.”
이 같은 방식으로 비전문가에 의한 진품 둔갑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져왔지만 아직도 우리 미술계는 선대가 진품으로 평가한 작품을 재평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엇보다 감정에 참여한 모든 전문위원들의 진위 판단에 대한 구체적 근거와 진위감정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것을 출판물로 공시해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 이를 공개하면, 언제든지 잘못한 곳을 찾아 올바르게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