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파이브 - GPS 보물찾기가 연쇄 살인의 힌트로 이어진다면?

 어렸을 때 누구나 보물찾기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말이다. 어린이대공원 같은 유원지에 가서 미리 선생님들이 숨겨 놓은 쪽지를 찾는다. 보물이 대단할 필요는 없다. 연필이든, 공책이든, 그때는 보물이 적혀 있는 쪽지 한 개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이런 보물찾기를 어른들이 전세계적으로 하고 있다면? 민음사에서 최근 출간된 『파이브』는 이색 스포츠, 놀거리로 2000년부터 전세계적으로 퍼진 '지오캐싱'을 소재로한 스릴러 소설이다. 지오캐싱이란 보물찾기의 어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데, GPS(위성항법장치) 좌표를 토대로 보물을 찾는 것이다. 누구나 락앤락 같은 통에다가 물건을 숨겨놓고 지오캐싱 사이트에 좌표를 올려둔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 좌표를 GPS 기계로 찾아서 보물을 찾고 다시 다른 물건을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보물찾기는 무한히 이어지고 수 천번의 보물을 찾은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로써 GPS 좌표를 찾아 가면서 매번 색다른 장소도 가게 되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장소에도 도달하게 된다. 매일 비슷한 산에 오르는 것보다, 좀 더 게임 같은, 모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찾기 어렵게 숨겨놓은 경우도 있고,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말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찾은 상자 안에는 과연 어떤 물건이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 '지오캐싱'은 전세계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십 만원 상당의 GPS 기계를 사야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이 게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바뀌었다. 모든 스마트폰에는 GPS 모듈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GPS 좌표를 추적할 간편한 어플만 설치하면 된다. 평소 여행을 즐겨하지 않던 사람도 이 지오캐싱을 핑계로 다양한 곳을 여행할 수도 있고, 마침 지방에 가서 지오캐싱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추리/스릴러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이 '지오캐싱'이 어떤 미스터리 소재로 적절하다는 것도 바로 깨닫을 것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게임을 즐긴다는 점이나, 미스터리를 풀어서 좌표를 찾아가기도 하고, 그 좌표 안에 어떤 물건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점 등에서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 맞춤으로 만든 게임 같이도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반대로 이 지오캐싱이 먼저 있었고, 소설이 나왔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사를 끌어가는 힘은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에 있다. 게임의 룰을 하나씩 숙지하면서, 게임의 규칙 속에서 단서를 쫓아간다. 범인이 만들어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느 스릴러 소설처럼 이 소설에서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여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는데, 주인공인 베아트리체는 피해자의 발바닥에 이상한 숫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그녀는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사건 현장을 볼 때 '잠수' 하듯이 몰입해서 세세히 살핀다.) 그 숫자는 GPS 좌표다.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 피해자의 발에 GPS 좌표가 새겨져 있단 말인가. 범인은 보통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게임에 초대하는 숫자인 셈이다. 그 좌표를 통해 간 곳에는 락앤락 통이 있다. 그 안에는 잘린 손과 쪽지가 있다.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바야흐로 연쇄 살인의 시작이다. 어느덧 베아트리체는 범인의 게임에 말려든다. 이대로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건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쪽지에 적힌 대로 스테이지2로 가기 위해, 다음 좌표를 받기 위해 쪽지에서 수수께끼처럼 단서에 나온 사람을 추적한다.
 이 소설은 범인을 좇는 노력과, 범인이 남긴 지오캐시를 찾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범인에 대한 힌트가 전무하기 때문에 베아트리체와 동료인 플로린은 상당히 애를 먹는다. 이는 베아트리체 시점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명탐정이 나와서 재빨리, 활극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훨씬 사실적이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함께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그런 사실성과 심리 묘사에 있다. 스릴러 소설답게 연이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단서 등이 게임처럼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며, 정교하게 짜인 플롯이 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실제 있을 법한 배경과 심리 묘사가 독자를 이 소설 속 세계로 끌어들인다. 베아트리체는 이혼녀이고,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일을 한다. 새벽마다 전화하는 전남편이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두 아이에 대한 연민과 걱정, 남자 상사의 핀잔과 압박(그러면서도 남자 동료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는 점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동료에 대한 애정이 섞인 혼란스러운 마음, 문자까지 보내오는 정체불명의 범인에 대한 두려움. 이런 심리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런 약점 없는 히어로 같은 탐정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한 여성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헤어진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전남편의 괴롭힘과 애정을 쏟고 싶어도 직업상 쉽지 않아 복잡한 감정이 드는 두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번민하고 방황하고 좌절하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고, 갑갑하게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준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가 소설 내내 끌려다니기만 하고, 여러 상황들의 압박 속에 놓여 있기만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만약, 시리즈의 시작이라면, 점점 성장하는 베아트리체를 보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는 베아트리체가 큰 사건을 통해 좌절하고 앞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난 느낌이었다. 정당한 두뇌 대결이라기보다는 베아트리체는 어쩔 수 없이 범인보다 한 발 느리게 가고, 마지막까지 큰 반전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 점이 주인공의 활약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소설이지만, 그만큼 작가가 주인공을 활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설계한 대로 이야기를 밀고 나갔다는 소리도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의 활약에 포커싱을 맞춘 게 아니다. 죄의식, 죄책감. 살인의 동기와 범인이 소통하는 자로 베아트리체를 삼은 이유는 같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면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놀이. 만약 내가 뭘 했다면, 어쨌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것은 무한하고 한 번 벌어지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닌 이상 돌이킬 수 없으며, 시간을 역전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는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약'을 되풀이한다. 자신을 자책한다. 이 소설은 결국 이 '만약'이 만든 또 다른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의 동기와 베아트리체가 형사가 된 동기는 유사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 소설의 방점이 찍혀 있다.
 무려 52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만큼, 중간중간 늘어지거나, 지루한 듯한 느낌도 있다. 긴박하게 흘러가지만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많은 탓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미 수많은 소설에서 다룬 내용이지만, 그건 이미 이 장르의 축적된 역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지오캐싱'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인물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플롯의 완성도가 높은 점은 이 작품을 잘 만든 스릴러 소설로 추천할 수 있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섬뜩한 살인이 얽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오캐싱'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해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베아트리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베아트리체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찬찬히 쌓아올린 심리와 사건, 마침내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그 결말. 모든 사건이 끝나도 삶은 지속된다. 지오캐싱이 끊임없이 색다른 장소로, 색다른 물건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수많은 스릴러 소설들과 함께 독자를 유혹한다.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는 보물을 찾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GPS 좌표를 찾아 떠나듯, 책장 속으로 떠난다. 그 속에는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읽고 나면 읽었다는 흔적을 리뷰로 남기고, 다른 보물을 찾는다. 지오캐싱에는 여러 약어를 사용하는데, 보물을 숨긴 자는 오너라고 부르고, 보물을 남긴 곳에는 TFTH. Thanks for the hunt(찾아 줘서 고마워)라는 약어를 쓴다. 보물을 책으로 바꾸자면, 쓴 사람은 작가, 남기는 글에는 TFTR. Thank for the read가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일즈 보르코시건 : 남자의 나라 아토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6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최세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남자의 나라 아토스 – 마일즈가 없어도 재미있다는 것을 증명하다

 『남자의 나라 아토스』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의 대형 기획인 16권에 달하는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중 6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인 만큼, 시리즈의 핵심 주인공인 마일즈 보르코시건이 어느 정도 등장할 줄 알았으나, 이름만 언급되고 마는 시리즈의 외전이다. 그만큼 분량도 얇아서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외전이면 보통 본편보다 크게 재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고 염려할 수 있다. 그러나 웬걸, 이 책 충분히 재미있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16권이나 되는 시리즈이지만, 각 권이 단독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높고 그 자체로 다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과 단권 내에서 플롯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점 때문에 작가의 단편들도 수준급의 재미와 완성도를 지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분량으로 따지면 경장편이라고 할만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자들만 사는 아토스라는 행성의 에단 박사다. 미래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인공자궁을 통해 남자들만 태어나고 사는 행성이 가능하다. 아토스는 바로 그런 행성으로 그리스신화의 여성들만 사는 아마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곳은 굉장히 바르고 선한 사람들이 모인 행성처럼 비친다. 일종의 경쟁과 다툼, 싸움, 폭력이 없고 시골의 정다움만 느껴지는 곳처럼 묘사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또 남자들끼리의 관계도 굉장히 귀엽고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평화롭고 조용한 행성에서 난소배양조직들이 사멸되어가고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행성의 존립이 위험한 것이다. 외부와 단절되고 자기들만의 문화에 안주하고 있는 이 행성에서는 통신 판매로 난소 조직을 사지만, 그게 어이없게도 엉터리 물건이 도착한다.
 배송 사기를 당한 셈이다. 이 점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핵심 재미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예산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을 언제나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전사 견습』에서도 용병단을 말로 집어 삼키는 마일즈이지만, 용병들의 수당이나 보험 문제로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다. 보통 다른 데서라면 쉽게 넘어갔을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서 이야기의 질감을 부여하고 독특한 관점에서 오는 재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외전 역시 행성의 운명이 달린 난소 조직을 통신 판매로 구입하는데 배송 사기를 당해서 에단 박사가 직접 행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우면서 흥미롭고 재미를 주는 부분이었다.
 광활한 우주, 또 미래지만, 현실적인 돈 문제가 언제나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다. 에단 박사가 행성의 돈을 긁어모아서 클라인 우주정거장으로 나가는 것도 재미있고, 돈 때문에 벌벌 떨고, 또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받는 부분들은 역시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다.
 클라인 우주정거장에서 에단은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여러 소설에서 나오는 시골에 살다가 대도시에 나가서 경험하는 신문물의 충격 등이 재미있게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서 아토스 행성을 호모들의 행성으로 보고 핍박하는 부분에서는, 미래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편견과 박해가 있다는 점이 지금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들면서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진짜로 몇 세기가 지나도 인류는 변함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에단 박사를 돕는 인물은 바로 덴다리 용병대 중령, 엘리 퀸이다. 이전 작품에서 플라즈마 총에 얼굴이 녹아버렸지만 마일즈가 배타 개척지의 의술로 아름다운 얼굴을 갖게 된 인물이다. 덴다리 용병대에서 엘리 퀸 혼자만 단독으로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이야기가 처지는 곳 하나 없이 숨가쁘게 잘 전개되며, 엘리 퀸의 매력도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이 바로 전작인 『마일즈의 유혹』과 이어진 연계성이다. 『마일즈의 유혹』에서 마일즈는 대화를 하나 엿듣는데 거기서 나온 단어를 가지고 엘리 퀸을 투입시켜서 사건을 파헤치게 만든 것이다. 두 작품이 통신 대화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셈인데, 이런 점들이 시리즈의 연계성을 강화해서 재미있는 부분이다.
 전작인 『마일즈의 유혹』이 하드보일드 추리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 첩보물이다. 원래 다양한 첩보물을 좋아하는 터라, 이렇게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첩보물은 신선하면서도 매우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다. 이처럼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작품마다 다른 장르가 느껴진다는 점도 장점이자 매력이다. 『명예의 조각들』은 로맨스 소설의 전형이었고, 『전사 견습』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재미와 성장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가진 작품이었다. 『남자의 나라 아토스』 같은 경우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첩보 소설이자, 아토스라는 행성에만 살아온 인간이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험을 겪는 소설로 여러 재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처음 단독 임무를 맡은 엘리 퀸의 실력과 또 성장을 엿보는 재미도 크다. 우주 정거장의 묘사는 이 시리즈가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써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SF적인 배경을 잘 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주정거장인 만큼 여러 행성의 세균이나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된 생태계를 지키는 생물통제국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설정 등은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배경 설정을 그냥 보여주고 마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전개 됨에 따라 적절한 복선으로 작용하여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는 부분은 절로 탄성이 나오게 하는 지점이다.
 앞에 5권이나 나왔지만, 하나도 읽지 않고 이 작품만 읽어도 충분히 SF소설로써, 장르소설로써, 모험소설로써, 첩보소설로써 등 다양한 재미를 가진 오락소설로 즐기기 충분하다. 외전이고 분량도 적기 때문에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처음부터 다른 책을 접하기에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면 얇은 이 책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새삼 엘리 퀸이라는 인물이나 몇몇 대사들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장르를 떠나서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언제나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그 시리즈의 첫 외전인 『남자의 나라 아토스』는 기분 좋은 모험을 떠나게 해주는 좋은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강력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일즈 보르코시건 : 마일즈의 유혹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5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마일즈의 유혹』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드디어 오랜 기간 기다려온 『보르 게임』 다음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 첫 번째 책이다. 이전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에서 『명예의 조각들』과 『바라야 내전』이 나왔지만, 일종의 프리퀄로써 마일즈 보르코시건이 주인공이 아니고, 그의 부모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맥마스터 부졸드 여사가 굳이 한국 내에서 출간 순서를 정해준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명예의 조각들』과 『바라야 내전』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은 『전사 견습』(구판 『마일즈의 전쟁』)은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이어 읽은 현재 전자책으로는 무료로 풀려 있는 『보르 게임』은 여전히 동일한 재미를 준다. 그리고 드디어 오랜 시간이 지나, 국내에서도 『보르 게임』 다음 이야기가 나왔다. 『보르 게임』까지 읽은 독자들이 애타게 기다린 다음 책. 사실 어느 정도 이전작보다 재미가 많이 떨어지면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전사 견습』이 시리즈의 최고 재미있는 작품이고 나머지는 그에 걸맞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걱정을 날려버릴 만큼, 『마일즈의 유혹』은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으며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야말로 부졸드 여사의 클래스를 증명하는 소설이었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똑같이 기대하게 만들 만큼, 완성도가 높았고 흥미로웠다.
 여기서 마일즈 보르코시건, 우리의 주인공은 우주에서 네이스미스 제독으로 함대를 지휘하고 누군가를 감언이설로 꾀지 않는다. 그보다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 역할에 가깝다. 이미 행복한책읽기 SF 무크지에 공개된 중편 「슬픔의 산맥」에서 탐정 역할을 선보인 적이 있는 마일즈이지만, 이 소설은 장편에서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다르다. 마일즈가 명탐정이며, 이를 우주 배경에서 다른 행성에서 추리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소재 설정이고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재미를 준다. 그래서 이 작품이 개성이 있고, 시리즈 전체에서 이 작품만의 독특한 재미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의자에 앉아서 사건을 꿰뚫어보는 안락의자형 탐정이라기보다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하드보일드형 탐정과 닮았다.
 눈에 띄는 엄청난 미인의 사건 의뢰, 계속되는 정체불명의 위협, 때로는 얻어맞고 목숨에 위협을 당한다는 점, 미스터리의 배후자가 여러 명이고 쉽게 밝혀지지 않는 것, 그럼에도 미인과 함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면서도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는 점. 그렇지만 결국 진실에 도달하는 것. 그렇지만 하드보일드 탐정은 적당한 보수를 받으며 미인과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미인은 홀연이 떠나고 탐정은 의연히 다른 사건으로 나아간다. 이런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상케 하는데,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점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 세타간다 행성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센타간다라는 행성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SF적 재미도 동시에 느끼면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야 하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세타간다'인데 일반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는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고 낯설어할 것을 염려해서 '마일즈의 유혹'으로 바꾼 듯이 보인다. 내용을 따지고 보면 '마일즈'가 미인에게 유혹을 당해 사건에 뛰어드는 느낌이다. 마일즈가 사건을 혼자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태도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가장 큰 심리적 이유는 미인에게 잘 보이고 보상 받으려는 태도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유혹당한 마일즈인 셈이다. 그렇지만 앞서 『전사 견습』과 『보르 게임』에서도 마일즈는 사랑을 얻지 못했듯이, 이번 권에서도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그게 이 소설의 구성상, 또 구도상 어울리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마일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일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쉽게 자랑할 수 있을 만한 공헌을 한 것도 아니다. 적국에서 벌인 모험과 적국에게 받은 훈장. 모험의 결과를 널리 알릴 수 없지만, 마일즈는 그 훈장이 자기자신을 증명하는 결과물이다. 아직 마일즈는 성장하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자기 증명이 필요했고, 이 모든 행동이 처음에는 유혹을 받아 진전되었다고 해도, 끝까지 돌파해나간 것은 자기 증명의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일즈에게 적국에게 받은 훈장이라고 해도 결코 우주 공간에 던져버릴 수 없다. 기형의 몸이라도, 작은 키에 쉽게 부서지는 뼈를 가졌더라도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미인에게 닥친 위험을 막고, 세타간다의 잘못된 야망을 막았다는 그 증거를 소중히 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일즈가 훈장을 보는 장면은 유독 마음에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그 감정이 이해될 뿐만 아니라, 마일즈라는 인물이 한층 더 이해되고 사랑스러워지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똑똑하지만 난쟁이 같은 소년이 바로 마일즈다. 마일즈가 키가 훤칠하고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 소설의 매력은 반의 반도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일즈는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마치 뛰어난 정신이 좁은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이 소설은 흥미진진하다. 끊임없이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고, 사랑에 실패하며,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마일즈를 보게 된다. 마일즈는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린다. 우리도 무언가 결여된 것들이 있고, 그것을 메꾸기 위해서 필사적이 되며, 매번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일즈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어떤 점을 보는 것 같기 때문에. 그래서 마일즈를 보면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보는 듯한 공감대가 느껴지기 때문에 쉽게 감정 이입을 하며 응원하는 시선으로 읽게 된다.
 기대한 것보다 더 재미있었던 소설이다. 사건이 끝날 때까지 명확한 게 하나도 없어서 긴박감이 느껴졌다. 적국에서 움직이는 마일즈는 제약이 많기 때문에 더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마일즈가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범인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독자도 함께 마일즈의 시선으로 범인을 찾기 때문에 추리소설의 재미가 가득했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자체의 믿음을 가지게 만든 한 편이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 보르 게임 그 다음의 이야기를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도 마일즈의 다양한 모험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위험에 처하고, 또 어떤 꾀를 발휘하며 사건을 해결해나갈지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14-04-07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나온 것 모두 구입해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네요. 언제 날 잡아서 읽어야 할건데요.ㅎㅎㅎ

twinpix 2014-04-08 00:01   좋아요 0 | URL
진짜 재미있는 오락소설이라 큰 부담도 없고 해서, 몰아서 읽으셔도 좋고 하루에 한 권씩 읽으셔도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스트레스 쌓였을 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도 좋을 책이지요.
 
마일즈 보르코시건 : 보르 게임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4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이지연.김유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SF 중에서 세계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의 양대 산맥은, 아너 해링턴 시리즈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라고 한다. 아너 해링턴 시리즈는 텍스트 파일로만 십년 넘게 떠돌다가 최근에 현대문학 임프린트인 폴라북스에서 시리즈 첫 권인 『바실리스크 스테이션』(데이비드 웨버, 폴라북스, 2014년 3월)이 출간되었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행복한책읽기 SF 총서로 『마일즈의 전쟁』과 『보르 게임』이 소개 되었고, 『반지의 제왕』을 낸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에서 새롭게 16권 전권을 계약하고 『명예의 조각들』, 『바라야 내전』, 『전사 견습』, 『보르 게임』, 『마일즈의 유혹』, 『남자의 나라 아토스』 등 현재까지 6권을 냈다.

 이중 『전사 견습』은 『마일즈의 전쟁』에서 제목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보르 게임』은 행복한책읽기 판과 동일한 제목으로 나왔다. 『전사 견습』에 이어 마일즈의 활약을 보여주는 『보르 게임』은 역시 『전사 견습』만큼의 재미를 보장하며,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놀랍게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는 휴고상까지 받은 이 『보르 게임』을 전자책은 0원, 즉 무료로 공개했다.(YES24, 알라딘은 물론 리디북스에서 공짜로 받을 수 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어플을 런칭할 때, 『그리스인 조르바』를 무료로 공개한 것처럼, 시리즈 16권을 홍보하고 소개하는 목적이라고 한다. 즉, 아직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를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부담 없이 공짜로 먼저 『보르 게임』을 살펴보고 시리즈에 빠져도 좋을 듯하다. 물론 『보르 게임』만 읽고서는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이나 재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일단 시리즈의 첫 권 느낌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전사 견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 이 시리즈를 맛보려는 독자라면 『전사 견습』과 『보르 게임』을 함께 보고 난 뒤에 결정해도 좋을 것이다.
 『전사 견습』에서 마일즈는 뛰어난 화술로 몇 명이서 용병단 하나를 통째로 집어 삼켰고, 덴다리 용병대로 만들었다. 신체는 태아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독가스를 흡입한 탓에 기형이지만,(자세한 내용은 『바라야 내전』에서 묘사된다) 천재적인 두뇌와 재치, 화술로 사람들을 조정하는 능력은 이 시리즈에서 마일즈에 빠져드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마일즈의 뛰어난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만 하지만, 지휘관 적인 역할에 어울리는 마일즈에게 문제 있는 상관을 두면 트러블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이 『보르 게임』 전반에 걸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문제다. 마일즈는 사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우주선에 배치되지 못하고 척박한 외딴 곳에 기상 관측관으로 배치된다. 비유하자면 북극 기지에 배치된 셈이다. 마치 유배된 모양새다.
 6개월만 말썽 없이 지내면 다른 곳으로 배치해주겠다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일은 그렇게 순탄하게 흐르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계속 사건이 터지고, 이를 수습하는 주인공의 활약에 잘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이 뛰어나다는 소설, 이야기성이 강하다는 소설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평이하게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온갖 불행은 다 몰려든 것처럼, 연속으로 사고가 터지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사건과 맞닥뜨리게 한다. 흔히 주인공을 굴린다고 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마일즈 역시 심각하게 문제의 연속에 노출된다. 사병들의 장난에 목숨까지 뺏길 뻔하고, 이상한 성격의 상관 때문에 병사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기지를 발휘해서 사건을 해결한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마일즈 역시 징벌을 받게 되고 이번에는 다른 행성에 가게 되는데 여기서도 끊임없이 사건과 운명의 장난에 빠지게 된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연이 연속적이지만, 그 마일즈 특유의 사건을 불러오고 해결하는 행운이 이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속에서 마일즈의 빠른 상황 판단과 사건을 역전시키는 재치를 보는 것이다. 돌파구가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마일즈는 역시 심리적으로는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최선의 결과를 계산해내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의 역량을 끌어올리며 작전을 짠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독자들은 기형이면서도 능청스러운 구석도 있고, 불의에 저항하는, 지혜로운 마일즈를 절로 응원하게 된다. 마침내 사건이 해결되고 에필로그를 맞으면 같이 안심을 하면서 기쁨을 나누게 되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우주에서 펼쳐질 모험을 기대하고 읽는데, 마일즈가 소위로 임관되면서 기상 관측관으로 가게 되자 황당함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도 기대와는 달리 펼쳐지면서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우주로 배경이 넓어지면서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속도를 띄며 처음에 연관 없어 보이던 기상 관측관으로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가 후반에 다시 결합되면서 대단원으로 가는 장면은 이 이야기가 우연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잘 짜고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령관에게 명령 불복종을 하면서까지 병사들을 구하려고 했던 마일즈의 결단은 결코 젊은이의 치기 같은 게 아니었으며,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결정이었고, 또 마일즈의 판단이 옳았음은 결말부에 다시 확인된다. 그 척박한 기지에서의 일이 결국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다. 군대에서의 고문과 의문사 문제를 우주에서의 인연으로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의 장점은 사건이 부풀어오르는 점에 있다. 『전사 견습』에 이어 『보르 게임』도 마찬가지로 사건이 우주 전쟁으로까지 커지고 마일즈는 다시 네이스미스 제독을 부활시킨다. 기형의 몸을 가졌지만 그만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서 네이스미스 제독을 연기하는 부분에서는 역시 재미있다. 사람들을 선의의 거짓말로 속여서 덴다리 용병대를 재정비하는 부분, 결국 우주 전쟁에서 활약하는 지점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정이 가게 조형된 다양한 인물들도 이 소설의 매력이다. 강인하고 명석하지만 또 아들 걱정과 사랑이 가득한 아랄 보르코시건은 어떠한가. 소설 곳곳에서 인용되는 아랄 보르코시건의 말들은 모범적인 전략가로서 인상적이다.

 “문득 아버지가 내린 정의가 생각났다. 무기란 적의 마음을 바꾸는 도구이다. 마음이야말로 최초 최종의 전쟁터이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들은 그저 잡음일 뿐.”


 그렇기 때문에 텅 함장의 멘토 같은 역할을 차지하는 것일 테다. 섭정으로도 바라야를 잘 이끌어온 자고, 마일즈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아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여느 평범한 아버지와 똑같다. 그 갭이 아랄 보르코시건의 매력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조금만 언급되지만 언제나 현명하고 똑부러진 마일즈의 어머니인, 코델리아는 엘레나에게 전하는 대사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준다.

 “또 너를 만나면 이 이야길 꼭 전해 달라고 했어. 아, 코델리아 특유의 베타식 유머니 글자 그대로 정확히 말해야겠지. ‘고향이란, 네가 돌아가면 싫든 좋든 받아주는 장소야.’라고 하더군.”


 이런 통찰력과 또 그걸 전달해달라고 하는 배려심이 코델리아라는 캐릭터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 바라야라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우주에서 용병대로 활약하고 결혼하면서 주체적인 자아가 된, 보타리 중사의 딸 엘레나는 『전사 견습』의 첫모습을 생각해보면 한층 성장한 모습이 반갑다.(여기서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마일즈의 복잡한 심정 묘사도 흥미롭게 잘 그려져 있다) 또 아랄 보르코시건을 만날 것을 어린아이처럼 기대하는 텅 함정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며, 이 사건을 통과의례처럼 성장하는 황태자 그레고르의 모습은 이 소설이 『전사 견습』에 이어 청소년 성장 소설로 잘 어울리는 점을 보여준다.
 한 번 펼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페이지 터너. 엔터테인먼트 소설. 오락소설. 십대부터 이삼십대, SF를 잘 읽지 않은 독자라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려운 과학 이론이 나오지도 않고, 유치한 활극에 그치지도 않는다. 그보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쉴틈을 안 주는 이야기 전개가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잘 쓰인 대중소설로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며, 라이트노벨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도 모험소설이자 라이트노벨의 원형으로 접할 만한 즐거운 소설이다. 그만큼 캐릭터가 살아있고, 전개는 빠르고 가벼우며, 한 권마다 단권 완결성을 지니고 있고, 내용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가볍다. 라이트노벨이 십대, 이십대가 많이 읽고 청소년 소설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듯이, 이에 걸맞는 성장 소설이자, 청소년 소설로 각광받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인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언제나 후회 없는 선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각인 온우주 단편선 10
박애진 지음 / 온우주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애진 작가의 단편집 [각인]에서는 1인극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모든 단편소설이 1인칭 화자에 중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각인]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은 다르다. 마치 한 명의 목소리가 9번 반복되는 것처럼, 내면으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독자에게 새겨지는 것만 같다.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의 울림이 있다. 단지, 강렬한 플롯이나 잔혹한 장면만으로 이런 느낌이 조성되는 게 아니라, 단편집을 이룬 단편의 배치와 단편들의 구성과 인물들이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우리 안에 어떤 심연에 닿으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화자들이 닿으려는 건, 외부와의 누군가가 아니다. 이 소설들에는 다른 작품들처럼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서사’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배제에서 벌어지는 ‘심리’와 ‘이미지’의 집중이 돋보인다. 세계관이 치밀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세계관은 무대 위에 놓인 소품처럼 다뤄진다. 연극으로 치자면 독백조차도 적다. 상황과 행위만으로 글을 이끌어간다. 모노극처럼 느껴진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심연 속에 잠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심연이 어떤 해답이 될 수도, 다른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연은 불가해한 장소이며, 정체불명의 내면이다. 영원히 해석할 수 없는 문제다. 자기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풀어낼 수 없는 신비다. 우리 안에는 각자 심연이 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흔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건 자신도 몰랐던 재능일 수도, 욕망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성이나, 죽음의 욕구일 수도 있다. 세계를 파괴하려는 행위나 세계를 구원하려는 행위 역시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심연에 닿으려는 건 곧 세상의 근원에 가닿는 행위와 흡사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들은 이질적이다. 보통 외부의 전형적인 서사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배경을 드러내고 인물을 설명하고,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하는 구조가 아니다. 해결해야 할 사건은 없다. 해결할 수도 없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질문도 응답도 없다.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심연에 닿으려는 여러 시선들. 우리는 자신의 심연 속에 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들 속에 그려지는 시선들은 낯설기 짝이 없다. 그게 이 소설의 낯선 면을 만든다. 그 시선은 무엇일까. 진실에서부터 영원히 회피하려는 시선. 타인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자신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그러나 이 여러 갈래의 시선들은 걸핏하면 길을 잃는다. 외부를 바라보고 관조하다가 때론 무심한 척하고 침묵하며 좌절한다. 시선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해 결국에는 어둠에 잠식되고 만다.
 시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상처를 풀어헤쳐 놓거나, 상처를 내거나, 혹은 봉합하는 행위가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제목들은 바로 그 일련의 흐름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나 사이에 놓인 횡단보도를 지나 심연에 닿으려는 행위. 누군가에게 존재로서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심연에 닿으려는 행위를 무대에서 펼쳐 보일 수도 있으며, 집사의 시선으로, 학교에서, 또 자기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내서, 무간지옥 같은 불멸자의 일상에서, 뒤바뀌어버린 세계, 단절된 세계에 빠져버린 아이들로 제시된다.
 시선은 외부(세계)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 점으로 수축한다. 그때 세계가 한 점으로 응축되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된다. 이 소설은 이런 시선의 각인들이 모여 있다.

 물과 유리 조각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물에 젖어 더 거치적거릴 조각들을 치우고 닦을 생각을 하다보니 이제 다치는 게 지겨워졌다. 그런데 언제는 다치고 싶어서 다쳤던가.(46쪽)


 화자는 끊임없이 과거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면서, 회상하면서 외부의 세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화자의 시선으로 우리도 화자를 구성한 지리멸렬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를 둘러싼 거리감 있는 타인들을, 상처 입고 입히는 관계들을 바라본다. 그 외부 세계는 이내 마지막에는 발바닥에 밟히는 조각들로 수렴된다. 앞서 보여준, 시선들이 한 점으로 모여서 발바닥에 조각들로 밟히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 시선들을 밟고 가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새벽 6시였다. 식구들은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수간을 챙겨 들고 욕실로 갔다. 아직 냉수 목욕을 할 때는 아니지만 샤워기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렸다. 벽을 짚고 서서 몇 번이고 호흡을 확인했다. 샤워기에서 물줄기를 맞는 동안 숨을 멈추고 있어도 좋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오래도록 심호흡을 한 후에야 수도를 열었다. 차가운 물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온몸을 벌벌 떨며 주먹을 굳게 쥐고 몸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개수구로 흘러 나가는걸 바라보았다.(75쪽)


 우리 내면을 비유하는 듯한, 세상의 중심부로 한없이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편 「심연」. 이 단편에서는 이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바다와 잠수의 색다른 경험을 디테일 있는 묘사로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는데, 마지막 장면은 익숙한 풍경이다. 새벽 6시, 식구들이 자고 있을 시간에 샤워기에서 물을 튼다. 물이 개수구로 흘러 나가는 걸 바라보는 마지막 시선은 그런데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자장 안에서 이 장면은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앞에 화자가 경험한 외부 세계가, 느꼈던 모든 감정이,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이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물이라는 상징으로 전유되어 무중력의 바다 속에 빠져들었던 기분, 죽음의 감각이 다시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개수구에 빨려드는 물을 예사롭지 않게 보게 만든다. 앞서 있던 경험들이 새로운 환상적인 설정으로 세계관을 만들지 않아도, 새로운 세계를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이 전이의 충격, 이미지의 간극에서 오는 느낌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게 만든다.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세계를 천연덕스럽게 그려낸 「선물」은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찾아 만나게 되면서 묘한 울림을 준다. 매혹 능력이 없어서, 사람을 기절시키기 위해 고생하는 여자 뱀파이어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남자가 어울려 합을 이루는 과정은 소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아 가는 느낌을 주면서 안정적이면서도, 위안을 주는 글이다. 사람은 결국 타인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제대로 이해받지도, 무리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 비슷한 내면을 가졌다는 것. 그 어울림이 주는 무게감이 소설의 원동력이다. 환상과 현실이 적절하게 배합되면서 주는 묘한 느낌과 적나라한 타인들의 시선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은, 이 소설이 뱀파이어가 등장함에도 붕 뜨지 않고 현실적인 세계로 느껴지게끔 한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의 대화도 여느 남매처럼 처리한다든지, 뱀파이어 여자 친구인지 모르고, 일반적인 여자 친구가 생긴 걸로 오해하며 던지는 타인들의 말들이 사실적이고, 남자 화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는 부분 역시 일상과 환상 사이에 적절히 걸쳐져 있어서, 어느 쪽으로도 말이 되게 그럴 듯한 해석이 나온다는 점은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소설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수록된 「무대」 역시 실제 희곡 같은 구성을 차용하면서 소설에 낯선 형식이 주는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소설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지만, 한편으로 이 화자의 사고는 끊임없이 배역을 설정하고, 세계를 무대로 보는 한 사람의 내면을 촘촘히 파고들어간 소설로서 형식과 내용이 맞물리며 완성도를 높인 글이다.
 「학교」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환상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글이다. 그렇지만 역시 현실을 비튼 해석으로, 즉 세계의 은유로 보아도 무리 없게 만든 작품임은 물론이며, 동시에 환상성이 주는 그로테스크하면서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격과 파격적인 설정이 주는 당혹감이 재미로 느껴지게 만든 소설이다. 오직 수능만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벗어나는 청소년은 낙오자처럼 만드는 이 사회를 이전의 『배틀로얄』 같은 여러 소설이 그러하듯 충격적인 설정으로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점이 직접적인 비유처럼 작용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소설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함과 동시에 사실적인 심리 묘사 등이 핍진성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늘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언제나 다른 아이들이 날 찾아내 당선시킬까봐 숨 죽여 살았다. 전보다 더 납작 엎드려 숨어 다녀야 했다. 절대 저 아이들에게 발각되어선 안 되었다. 나는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텅 빈 운동장에 홀로 서 있었다.(211쪽)


 주인공인 ‘나’는 매번 죽을 아이를 뽑는 ‘당선’이 되지 않으려고 평균 점수만을 받아왔다. 이런 잔혹한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로 살아가기 위한 행동은 언뜻 보면 당연하고, 영리한 처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들 사이에 일어날 법한 어그러짐을 치밀하게 그려내면서 ‘나’를 학교 밖으로 쫓아낸다.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사는 숲. 그곳에는 ‘아기’가 사람이 되기 전 괴물인 곳이고, 아이들끼리 몰려 살고 있다. 이곳도 학교와 같은 ‘당선’ 제도만 없을 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유사하며 이 소설집에 실린 비슷한 영혼을 가진 주인공들처럼 ‘나’는 세상에 유리된 단절감을 맛본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텨내려고 하지만, 세상의 무정함, 부조리성에 마주하게 된다. ‘나’가 학교에서 타인을 관찰하는 시선, 주목을 받는 시선, 학교 밖 숲에서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등은 세계와의 불화를 지닌 자아의 몸부림이다. ‘나’는 자기 내면에 닿을 수도, 욕망에 충실할 수도 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 떠밀리고 맞부딪치고 헤매다 파국을 맞는다. 그건 세계라는 시스템이 이미 파국으로 운영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아가 끝내 세계와 불화를 했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포착하는 지점은 이 자아의 내면, 그 심연의 몸짓이다. 세계와의 불화 속에 부유하는 ‘나’의 시선이 각각 학교와 학교 밖 숲,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마침내는 어둠에 잠식되는 순간, 이 소설은 다시금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만들고, 그 생각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어디서부터 이 흐름이 시작되었는지, 누가 시작했는지, 부조리를 생각하고 낱낱이 파헤치게 된다. 소설은 다시금 우리 자신과 소설과 이 세계에 대해서 묻게 만든다. 세계에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끝없이 파국을 맞고 있는 사람들, 자신을, 이 ‘나’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은유로만 이 소설을 판단하는 것은 작품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려는 태도에 그치는 것일 수 있다. 그보다는 이 화자의 사고가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세계와의 불화와 그 관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연역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이 가진 힘과 문제의식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을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면,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과,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것, 환상성이 깃든 배경으로 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집사」와 「클론」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설정된 작품으로, SF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도 크로스로드에 실린 이 두 편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주로 공간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이며, 로봇 기술이나 클론 기술 등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사에서는 집사 로봇의 시선으로만 소설이 진행되는데, 로봇의 시선으로 관찰되는 화자의 내면을 행동과 대사만으로 추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별다른 큰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로봇을 넣어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관찰 대상인 주인공 역시 남들과 다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은 다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 문제적 인물들인데, 세계와 유리된 느낌이 크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이 세계와의 거리감에서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행동을 취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집사의 주인공은 달로 떠남으로써 일종의 회피를 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집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점에서 단순 도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려 하거나, 심연에 직접 닿으려는 행위로도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 사람이랑 헤어졌을 때, 하나도 안 슬펐어. 그 사람 집도 이 근처고, 회사도 여기서 안 멀어. 만약에 그 사람이랑 끝까지 잘 되었다면, 영원히 여기서 살았겠지.”(191쪽)


 ‘마님’에게 집사 로봇은 헤어진 남자 친구의 물건으로 느껴지고, 지구 자체가 남자 친구가 있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때는 마님에게 세계는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불광’이었고, 부모님이 내려간 ‘시골’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곳 같아서 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집사 로봇과 사는 공간이 또한 마님의 세계였지만, 영원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다시금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를 떠나 달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택한다. 우리가 때때로 내리는 결정들과 닿아있는데, 결국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공간의 전환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심연에 닿으려면, 태국으로 떠나 깊은 심해 속에 들어가보든가, 학교 밖 숲 속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정답이 예정된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대표적인 작품이 환상성이 두드러지는 작품 중 하나인 「살아남은 아이들」에서 드러난다. 그림을 그려서 자신이 성공한 세계를 찾아보았던 ‘아빠’는 결국 어디서도 그런 세계를 찾아내지 못하며, 아이러니하게 그림을 포기해서야 잘 사는 자신을 발견하고 뒤바꾼다. 그러고 나서 하는 행위는 또다시 그림 그리기이다. 결국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 자체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엄마와 아빠가 서슴없이 세계를 건너가고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일상적인 행위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 점이 이 작품이 독창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지점이다. 예술에 대한 집착이 비틀린 것처럼, 광기처럼, 절망처럼 느껴진다. 절망을 추구하는 욕망이 무한히 펼쳐지는 세계 속에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광기의 희생자인 아이들은 처음에는 미스터리한 구성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지면서도 끝내는 폭력 속에 부서진 또 다른 현실과 세계의 부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능과 그림으로 잇는 평행세계를 잇는 환상적인 장치가 많아 유독 과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면서도, 죽은 희재가 그림으로 희철의 곁을 서성이고, 희선이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운명에 속박된 듯한 엄마아빠에게 욕을 하며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리 시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이 한 편의 기묘한 연극을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시시포스를 연상케 하는 끊임없이 죽음을 구하고 살아나고, 또다시 삶이 벗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세계처럼 느끼는 영생자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은 소재에 비해 클라이맥스는 카페 매니저를 붙잡는다는 아주 소박한 사건에 있다. 이 소설집의 상당수가 그렇다. 단편이라는 장르의 특성도 있지만, 사건이 없거나, 혹은 스케일이 작은 소박한 사건들로 이루어지면서, 이야기가 결말을 맺는다. 횡단보도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조각을 밟는 것이며, 심연에서는 개수구의 빨려드는 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큰 사건은 중간에 잠수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인데, 일상에서 이야기하면 소소한 체험담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집사에서도 집사 로봇은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할 따름이며, 마님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달로 떠날 뿐이다. 애인과 헤어지고 이사를 가는 한 여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에서도 평행세계가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술 취한 아빠를 무시한 채 그림만 거는 작은 행위로 이야기를 일단락 짓는다. 학교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아직 사람이 되지 않은 괴물 같은 아기가 이탈해서 덮치면서 ‘나’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할 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결국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굵직한 서사 중심의 소설들이 아니며, 외부를 관조하는 시선과 세계와의 불화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들이 가닿으려는 내면을 조명하고 있다. 소설들이 갖는 개성도 거기에 있으며, 절절한 문장이나, 선명한 묘사 없이도 상황과 서술 중심으로도 관찰하는 시선만으로도 시선의 교차와 전환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인물을 그려내며,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학교, 수중, 가상의 무대라는 공간으로 혹은 영생의 삶, 복제된 자기 자신인 클론, 집사 로봇 등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드러내고 비춤으로써 그 각인을 드러내고, 독자의 마음에도 하나의 응축된 이미지로 각인을 남기는 소설집인 것이다.
 비정하고 부조리하면서도 불합리한 외부 세계들, 인간들, 타인을 섬뜩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환상적인 장치를 적절히 섞는다. 그래서 그 교차점에서 독특한 이미지들이 생성되고 독자를 끌어들이며, 새로운 세계를 선보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차원적인 알레고리를 형상화한 것 같은 배경을 가진 이야기들도,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으면서도 독특한 시선을 견지하여 이야기의 겹을 두텁게 만든다. 세계를 읽고, 서사를 읽으면서 자아의 형태를 독자가 구성하고, 이해하고, 각인을 어루만지는 과정이,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심연으로 다이빙하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돌아오자면, 9명으로 분화된 한 상처 입은 거인의 내면 속을 다이빙 했다가 천천히 올라온 기분이다. 어쩌면 섣불리 독서를 한다면 잠수병 에 걸려 머리가 얼얼하고 여운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 때로 나는 무대 위의 인물처럼, 배역을 바꿔가며 연기했고, 새로운 배역을 찾고, 이 세상을 벗어나려고 죽음을 시도하다가도, 살기 위해서 학교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지만, 사람이 되지 못한 아기에게 공격당하고 타인과의 거리감만큼 불길 속에 시선이 끊긴다. 집사는 산책을 가지 못하고,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자아를 표백 당했지만, 또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새 주인을 맞아 목소리를 되찾는다. 이들은 세계를 바라보고 또 타인에게 목격 당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심연은 어둡고 무한하게만 보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며, 때로 자신의 각인을 어루만져주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세계의 냉혹함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고, 자신보다 더 자신 같은 자신이, 잊힌 인연이, 헤어진 연인이, 살해당한 형이, 헤어나올 길이 없는 영생이란 저주가, 새로운 연인이, 새로운 주인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속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들의 삶과 사고는 상처 입어도 때로는 움직여야 하고,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상처 입은 개들이 서로를 핥는 행위처럼, 아련하게 읽힌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아 줄 수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지 않은가. 시선은 그 자체로 상처를 드러내지만, 시선이 없이는 상처를 인지할 수도 없다.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우리는 결핍과 상처를 드러낸다. 그것을 읽는다. 또다시 쓴다. 그게 심연을 어루만지는 행위이고, 각인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