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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묘점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평점 :
- 두 명의 편집자가 푸는 미스터리 그리고 로맨스
총 1억부를 넘게 판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푸른 묘점]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집은 아시는 분은 다들 아시다시피 두 출판사가 연합으로 함께하는 기획입니다. ‘세이초 월드’라 하여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하나의 통일된 장정으로 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연대를 통해 독자들이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북스피어에서는 [짐승의 길](상, 하), [미스터리의 계보]를 냈고, 모비딕에서는 [D의 복합], [잠복], [점과 선], [일본의 검은 안개](상, 하), 등이 나왔습니다. 앞으로도 북스피어에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이, 모비딕에서는 [시간의 습속](점과 선 2탄) 등이 나올 예정입니다.
[푸른 묘점]은 일단 독특한 추리소설입니다. 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 남녀가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번 형사나 탐정이 주로 나오는 추리소설이 아닌 조금 신선한 추리소설을 찾는다면 [푸른 묘점]은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문예지 편집자인 남녀가 사건을 추리해나가고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신선한 재미로 느껴졌습니다. 출판사나 편집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꼭 편집자가 아니라도 직장에 다니는 분들이 읽어도 공감을 하면서 읽어나갈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을 반납하고 계속 휴가를 쓰면서 사건 추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노리코’는 작년에 여대를 졸업하고 요코샤에 입사한 신입 사원입니다. 요코샤는 문예 작품을 출판하는 곳이면서 《신생 문학》이라는 잡지도 간행하고 있습니다. 노리코는 바로 이 잡지의 편집부에 배치되었습니다. 반년 간 교정과 레이아웃을 배우고 나서 외부 활동인 작가를 찾아가 원고 청탁을 하고 독촉을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이메일이 있어서 보통 직접 찾아가서 원고를 달라고 매달리고 작가가 여관에 숙박하면 바로 옆 여관에 숙박해서 기다렸다가 친필 원고를 받아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발표된 작품은 그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문학 잡지의 신입 편집자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도, 그 디테일들도 이 소설의 장점이었습니다.
편집장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하코네의 스기노야 호텔 프런트를 통해 무라타니 아사코와 연결되자, “무라타니 선생님이십니까? 이거 큰일 났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이달은 벌서 여름을 타서 다른 괜찮은 원고가 없어요. 선생님 작품이 메인이라고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오늘 밤 그쪽으로 시이하라를 보낼 테니 내일 저녁까지 어떻게든 꼭 좀 써 주세요. 네? 무리라고요? 무리라면 모레 오후까지 최대한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원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달엔 잡지를 내도 의미가 없어요”하고 비위를 맞추며 애원했다.(10쪽)
이야기의 시작도 이러한 편집자의 설정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노리코가 담당하는 작가 ‘무라타니 아사코’의 원고가 기한보다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자택에 갔지만 문이 잠겨 있고 하코네의 미야노시타, 스기노야 호텔로 갔다고 편지를 남겨놓았습니다. 편집장은 호텔로 전화를 걸어 노리코를 보낼 테니 어떻게든 원고를 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노리코는 잡지에 실릴 원고를 받기 위해 외부 출장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코네를 무대로 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추리소설의 단골 손님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다쿠라 요시조라는 인물이 벼랑에 추락해서 죽습니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하지만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저급한 기획 기사를 써서 정보를 여러 잡지에 강매하러 돌아다니는 저널리스트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옆에는 바로 노리코가 기다리던 무라타니 아사코가 묵고 있었습니다. 다쿠라가 죽었을 당시 아사코 여사의 가족도 모두 외출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라타니 아사코가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정확히 열세 개네.”
사키노는 노리코에게 적은 내용을 다시 보여 줬다.
“더 자세히 열거할 수도 있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자.”
노리코는 대충 읽어 보았다. 죽 읽어 보자, 일관된 굵은 선이 내 앞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다쿠라 씨의 죽음에 무라타니 선생님이 연관돼 있는 걸까?”
전부터 느꼈던 희미한 의문이 조금 확실해졌다.
“응.”
사키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담배를 피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사키노의 옆얼굴이 노리코는 왠지 마음에 들었다.(73쪽)
이야기는 여기서 다양한 질문들을 발생시켜 놓습니다. 다쿠라 요시조는 왜 죽었을까? 사고사일까? 자살일까? 타살일까? 어째서 수면제를 먹은 채 외출을 했을까? 죽였다면 누구 죽인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는 단순히 다쿠라 요시조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문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무라타니 아사코가 여관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다쿠라가 여관을 이어 바군 이유는 무엇인가? 전날 다쿠라 요시조를 찾은 부인은 왜 자살일 거라고 증언했는가? 아사코 작가의 남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런 의문점들을 노리코는 편집부에 같이 일하는 사키노 다쓰오에게 털어놓습니다. 이제 노리코와 사키노는 팀처럼 이 사건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편집장도 관심을 보이고 추적해 나가라고 하고, 사키노는 명탐정처럼 추리를 거듭하며 증거를 수집합니다. 사건의 의문점을 처음 접근한 노리코는 사키노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때로는 놀라운 발상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사키노가 주로 추리를 하고, 노리코는 조력자 역할에 머물러서 홈즈와 왓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노리코의 역할이 작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는 두 개의 플롯이 진행되는데, 사건을 추리하는 것과 함께 노리코와 사키노의 연애 전선도 점점 발전해 나갑니다. 사건의 추리는 이 두 사람의 유대 관계를 진전시키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두 사람의 데이트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이 관계를 주목하고 읽으면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어서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노리코가 사키노가 더러운 수건을 쓰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 관심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귀엽게 보이는 것이지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도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달달한 로맨스와는 다른, 막 관계를 시작하려는 남녀의 감정이 은근히 비쳐와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엿보이는 소설이었죠.
상당히 두툼한 책입니다. 578쪽에 달하는 본문을 보자면 의문점이 많은 만큼 그것들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편이라 전개가 상당히 느릿느릿 진행됩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많은 페이지가 주인공과 작가를 설명하느라 사용되었고,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작가의 표절 의혹이나,(이 표절 의혹에서 작가의 허영심이나 한 작품이 성공하고 이후에 작품이 없는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중요 인물들이 사라지는 등으로 해서 아마츄어 탐정인 두 편집자의 추적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형사가 아닌 편집자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건도 추적해 나가기 때문에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주로 노리코의 시선으로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면이 있습니다. 혼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추리해나가는 사키노의 시점이었다면 소설의 분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리코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은근한 연애 감정과 추리를 하는 재미를 동시에 내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추리는 치밀하거나 정교한 편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형사가 추리해나가고, 전문적인 범인이 범인을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에 가까운 편집자가 일반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쫓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야기는 우연의 연속이며 산만한 전개로 진행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세계와 달리 현실 속 범죄들은 여러 우연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런 우연이 사건의 진상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소설은 합리적이지 않고 우연이 많을수록 허술한 소설이 됩니다. 사키노와 노리코가 단번에 범인을 지목하고 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건이 추리 소설 속 사건에서 벗어난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 속 사건이라면 정교하게 짜인 범죄를 사키노와 노리코가 오히려 헷갈리지 않고 빨리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범죄처럼 [푸른 묘점]의 사건은 ‘우연’이 겹쳐져 있고 이는 추리소설의 원칙에서는 어긋나는지 모르나, 오히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독자와 사키노와 노리코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 데 성공합니다. 즉, 작가가 모르고 실수로 한 것이 아니고, 어설프고 쉽게 범죄 방식을 설정하게 아니라, 일부러 느슨한 범죄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정교하고 치밀한 범죄 수법과 위배되게 하여 여러 의문점들을 증폭시키는 방법으로 활용합니다. 이 소설이 분량이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연성’을 트릭으로 사용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의 거장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답게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안에 다 읽어내려 갈 만큼 가독성 높은 문장과 흡인력이 일품인 소설입니다.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작가의 작품답게 정말 잘 읽히고 재미있습니다. 왜 4차례나 드라마화가 될 정도로 사랑받는 이야기인지 작품을 직접 읽고 알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로 하기 정말 좋은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상한 만남과 살인사건 이어서 작가의 표절의혹 등 의문이 의문을 낳는 구성도 페이지를 계속 넘길 수밖에 없게 만들고 관찰자 시점의 중심인물인 노리코의 행동이나 묘사도 생동감이 있습니다. 당시 출판계 모습은 물론이고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쫓지만 무겁지만은 않고 적당히 전개에 리듬이 있고 경쾌한 느낌이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빨리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꽤나 까다로운 작가였다. 작가 중에는 편집자를 옆방에서 기다리게 해 놓고 하룻밤 만에 소설 한 편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소를 나누면서 원고지 위에서 펜을 굴리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한낮에도 덧문을 닫은 채 완전히 홀로 있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작가도 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리 원고가 늦어져도 편집자를 집 안에 들여놓고 기다리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다른 사람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도저히 못 쓴다니까요.”
무라타니 아사코는 살찐 얼굴을 저으며 눈썹을 찡그리고 이렇게 말한다.(11~12쪽)
마침 여사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야. 하지만 후속작이 잘 써지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었지. 인간은 누구나 한두 가지의 소재는 가지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글재주가 있으면 그런대로 현상 공모전에 입상해서 인정받을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좋은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면 또 그런대로 끝나 버리고 말아. 특히 무라타니 씨는 아버지가 문학자로도 식견이 있는 시시도 간지 박사였기에 언론도 그 점을 주목하여 처녀작에 대해 얼마간 후하게 평가해 준 면이 있지.(5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