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미래의 문학 2
고마츠 사쿄 지음, 이동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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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침몰](고마쓰 사쿄, 이성현 옮김, D&C미디어, 2006년 8월)의 작가로 유명한 코마츠 사쿄의 장편소설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가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코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와 츠즈이 야쓰타카와 함께 일본 3대 SF작가로 불린다. 이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상당한데, 1997년 SF매거진 500호 기념 특집 일본 올타임 베스트에 꼽혔고, 2001년 일본 SF작가 클럽 선정 일본 SF작품 1위로도 뽑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장편 SF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치면 필연적으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일본에서 여러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이 1966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13년인 지금의 눈으로는 아무래도 낡거나 유치한 면들이나 흔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없지 않다. 지금의 독자들까지 완벽하게 사로잡는 고전이라기에는 아쉬운 점 역시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놀라운 시간대와 초월을 거침없이 전개해나가는 그 이야기의 박력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공룡을 등장시키는 압도적인 장면에서 바위 틈새에 울리는 전화기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독자는 호기심을 자극받는다. 공룡과 휴대폰이라니? 이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장면은 장르소설의 매력이며, 이런 관습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수많은 시간 이동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또한, 이 장면이 나중에 다시 복기될 것임을 알고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시간이동 소설의 매력이라면 바로 이 시간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곳곳에 깔아둔 복선이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장에서는 중생대 지층에서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가 발견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0세기, 바로 책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시간대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처럼, '현실적 결말'은 짧게 끝이 난다.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를 발견한 사람들이 전부 실종되고,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 여자의 아련한 에필로그까지 읽다보면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숨겨진 내막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다.(또한, 이 에필로그가 두 번째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의 끝에는 이 에필로그에 앞선 첫 번째 에필로그가 마련되어 있다. 작가가 의도한 절묘한 배치는 소설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를 높이고 있다.)

 이제 3장부터는 '현실적 결말'이 아닌 모든 사건의 진상이 차례차례 드러난다. 이 간극은 독자에게 경이감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20세기 현대에서 한정되었던 2장과 달리 중생대, 25세기, 45세기 등 10억 년에 걸친 시공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확장 또는 초월이 이 소설의 근원이자 매력인데, 이를 위해서 불필요한 설명이나 감정적인 교류는 최대한 절제하고 오직 설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만 주력했다. 따라서 짧은 분량 안에서 놀라운 시간대를 다루는데, 이 서술시간과 서술되는 시간의 대비가 소설의 속도감과 스케일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스케일이며, 2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모든 내막이 밝혀지는 구조에서 오는 쾌감과 우주에 대한 장대한 물음이 독자의 뇌를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사유를 증진시킨다.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재미와 인류의 존재와 진화의 의미를 묻는 사유의 재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고, 앞에서 암시된 사건들이 설명되면서 구조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구조를 짜맞출 수록 한 번에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독자의 머리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기분좋은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구성을 완성시켰을 때 느낄 희열은 그 혼란을 느낀 것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장 '현실적 결말'로 보았을 때는 기다리는 한 여성의 시각에서 감동적인 한편의 미스터리한 단편소설이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장대한 시간을 넘나들며 초의식과 진화의 상관관계를 우주적 구조를 꿰뚫으면서 읽어나가는 과학소설이다. 과학소설은 인간의 호기심을 기초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재미를 줄만한 가설들을 자유롭게 제시한다. 이 소설은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곳곳에 도구를 숨겨놓았는데, 이를 따라가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작가가 유추해낸 우주의 본원을 응시하면서 압도된다. 독자의 우주관을 깨트리면서 작가의 우주관이 제시되고 자아와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우주에 대한 질문에서 그것을 초월한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나 이야기의 응집력이 떨어지며 급하게 결말까지 치닫는 느낌이 들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대한 시간과 설정을 짧은 분량 안에 속도감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보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경이와 일상과 비일상의 교차에서 오는 감동을 매력적으로 묶어냈고 구조적으로 장면 배치를 흐트러놓아서 전체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하는 재미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도 발생한 여러 미스터리를 이 소설 안에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재기있는 부분이었고, 자칫 이야기가 스케일에 묻혀서 무너질 수 있는 것을 구조적으로 잘 보완해서 결말에 계속 여운을 느낄 수 있게 장치한 점도 좋았던 작품이었다.(이런 장치가 없었다면 이 책은 소설이 되지 못하고 기성 작품의 설정을 빌려와 자기 발상을 표현해내는 패러디에 그쳤을 것이다. 결국 2차 계단, 20세기 일본의 무대 속 한 인물이, 이 책을 소설로 만드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 전개에만 집중하고 세부적인 묘사나 설정을 자세히 파고들지 않아 간결한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이야기 전개, 발상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느낌으로 몇 시간 만에 읽어내릴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흡인력이 있는 대신, 단번에 소설 전체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약간 버거운 느낌을 받았다. 막판에 갈수록 의식의 대화 밀도를 높이고 장면으로 처리했다면 더 근사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목에 맞게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뻗어나가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소재와 발상으로 적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시간이동이 나오고, 시간의 흐름, 우주의 끝을 소재로한 작품군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구입해서 만족스럽게 읽었다.(여러 SF 작가의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들도 재미있었다. [타임 패트롤](폴 앤더슨, 강수백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8년 9월), [영원의 끝](아이작 아시모프, 김창규 옮김, 뿔(웅진), 2012년 6월) 등) 정확하게 설명되거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 넣을 구석이 되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전체적으로 1960년대에 한 일본 작가가 SF를 읽고 쓰면서 당시 기발했던 발상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완성한 결과물을 이제서라도 2013년의 한국에서 체험할 수 있어서 즐거운 독서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작품이었을지, 그 당시 반응을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지금도 충분히 울림을 주는 감동적이고 아련한 정서의 에피소드나, 일상과의 간극이 클수록 경이롭고 뇌의 신선한 충격을 주는 듯한 시간선을 초월한 우주관, 초의식 너머의 초월, 초월의 초월을 거듭하는 끝없는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아무튼 우리는, 그러니까 오즈미나 저, 그리고 세계 도처에 있는 내 친구들은 현재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기묘한 사실을 모으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기묘한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모래가 갑자기 어던 모양을 그리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죠. 그게 어떤 모양을 그리려고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알아냈다고 해도 그 형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요.”(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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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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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추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고 불리며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작가다. 일본에서 나오키 상을 포함해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꾸준히 안정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 『화차』 가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되면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신작인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해 「장난감」, 「지요코」, 「돌베개」, 「성흔」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단편만을 모았는데, 분량상 소품들만 있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인상에 깊게 남았다. 공감 가는 구절도 제법 있어서 절로 감상을 남기고 싶어진 책이었다. 책이 얇은 만큼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흡인력 있는 간결한 문체와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물린 이야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분은 주의하길.

 눈의 아이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자연스레 어렸을 때 살해된 친구가 화제에 오른다. 목이 졸려 살해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해당한 아이의 이름은 유키코. 피부가 무척 희어서 눈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이십 년 전 그날 유키코의 시체가 전날 내린 폭설로 쌓인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랜만에 한 친구의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빨간 장화를 신은 꼬마 손님이 찾아온다. 꼬마 손님은 사라지고 발자국만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죽은 유키코가 왔다고 생각한다. 초현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동시에 살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다. 이런 종류의 글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플롯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을 줄 아는 작가가 쓴 단편에서는 끝까지 씁쓸한 여운을 전한다.

 장난감

 이 작품은 소문을 다루고 있다. ‘상가 모퉁이의 완구점 이층 창가에는 밤마다 교수형에 쓰는 올가미 밧줄이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고 그 소문은 점점 확장되면서 파국으로 이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헛소문이었고, 결국 비극을 초래한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처럼 또다른 초자연적인 현상을 드러내면서 끝맺는다. 이런 굴곡이 애잔한 정서를 전달하고 묘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할머니가 죽자 할아버지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할머니의 자식들과의 유산 싸움, 상가 사람들이 상가를 떠나고 싶어서 희생물을 찾는 심리가 얽혀서 소문은 증식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기심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지요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추억하는 인형을 쓴 모습으로 보인다는 설정 자체가 환상적이면서도 귀엽기 때문이다. 미미 여사가 “이번 낭독회에서는 인형탈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인형탈이 나오는 소설을 쓰면 되겠네, 그뿐입니다.”라고 밝혀서 썼다는 작품인데, 발상처럼 인형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의 환상적인 하루를 다룬 소품이다. 발상 자체가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귀여운 발상 안에서 주인공이 인형을 쓰지 않은 소년을 보면서 이 현상의 의미가 정의되면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앞의 단편들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 작품은 따스하다. 과연 나는 이 소설 속 아르바이트 생의 눈에는 어떤 인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돌베개

 분량이 대폭 늘어난 작품으로 그만큼 앞의 작품들이 소품에 가까웠다면, 「돌베개」는 호흡이 길고 본격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여고생이 마을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연못에 빠졌고, 연못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은 상태로 한 겨울 차가운 물 속에서 동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경찰 수사로 일주일 만에 범인이 밝혀진다. 여고생이 헤어지자고 해서 홧김에 저지른 범행.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이 여고생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을 해대면서 살이 불어난다. 여고생을 둘러싸고 원조를 했다느니, 약을 했다느니, 나이를 속여 술집에서 일했다느니 하는 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 딸 아사코에게 듣는다. 여기서 여중생인 아사코가 말하는 소문의 심리가 예리하다. 이 소설집에서, 아니 미미 여사의 글에서 가끔씩 번뜩이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화차』에서도 전화 통화에서 남의 불행을 확인하여 자신의 행복을 검증하려는 심리를 읽어낸 것처럼, 여기서도 아사코가 읽어낸 사람들의 심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런 여자애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야지만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불량 소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살해 당한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그 언니가 우등생에 주위 평판도 좋았다면 그런 아이가 집착이 강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됐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나, 자기 딸도 남자를 잘못 사귀면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면 모두들 두려워지겠지.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그런 짓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해.”(89)

 이런 인식은 비단 이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은 부분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여중생인 아사코가 지적한 심리가 엿보일 때가 있다. ‘왕따’ 같은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왕따를 당할 여지를 준 쪽도 잘못이다, 내가 보니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식으로 피해자에게 문제점을 만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도 왕따 피해자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단점인 것처럼 과장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왕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역시 위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자기나, 자기 자식도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였기 때문에 이유를 만들어낸다.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런 짓을 당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도입부에 나온 이런 아사코의 인식에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그 뒤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여고생의 소문을 해소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사건과 연결된다. 따라서 플롯이 약간 산만하다고 느껴지는 단점이 있지만, ‘돌베개’라는 설화를 삽입해서 아사코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고 중심을 잃지 않는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서,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서와 돌베개에서 나타는 인과응보의 벡터 문제, 현대 범죄의 죄악감 등 여러 방향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아진다.

 성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소설이며, 그만큼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소설이었다. 구조가 잘 짜여져 완성도가 높게 느껴졌고,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은 센카와 조사사무소를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자 유일한 조사원인 여자다. 이 사무소에 한 남자가 자기 아들에 관련된 조사를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연성이 많이 겹쳐진 소설이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테마로 한 소설집의 이야기에도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심축이기 때문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남자가 어떤 조사를 부탁하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하는데 전부 사용된다. 그만큼 사건이 복잡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또한 후반부 이야기 전개에 앞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설명이다. 과거에 의뢰인의 아들 시바노 가즈미는 ‘소년A’로 불렸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존속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소년A가 감별소에서 자살했다는 글이 올라온다. 또한, 소년A를 추종하는 인터넷 세력이 생겨난다.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부모에게 학대받는 사람들이 소년A와 동질감을 느끼고, 자살한 소년A가 구세주가 되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게 다 증거는 없지만 ‘데루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과거 오보로 밝혀진 기사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충고하거나 야유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자살은 그를 감별소에 처넣은 국가 권력의 패배이므로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진실은 항상 이렇게 감춰진다”(163)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 혹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유사하다. 항상 국가가 숨긴다, 더 큰 세력이 정보를 조작하고, 진실은 항상 감춰지며 자기가 하는 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인터넷 루머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예언자의 역할을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등장하여 ‘희생되는 어린양’들 앞에 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사이트의 세력은 공고해진다. 이건 마치 인터넷에서 소문의 증식을 보는 것과 같으며,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연상시킨다.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들, 안티들의 생성과도 같고, 몇몇 사이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너희 중 누구라도 좋아. 시바노 가즈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본 녀석 있어?」”(167)라는 핵심을 찌르는 방문자의 공세에도 사이트를 이용하고 추종하는 ‘어린양’들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묘사나 “지금은 어린양들이 자신들의 공상을 ‘교의’로서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소년A가 자살한 것과 사후에 다시 태어나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은 그들에겐 확고한 사실이었다.”(168)는 문장에서 현실에서의 사건들과 사이트가 겹쳐보였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을 누구도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이 없으면서 그것들을 퍼트리고 누가 공격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연예인들이 자살을 해도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너무나 현실적으로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자기들만이 진실을 안다고, 정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구요.”(181)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악플러, 안티, 루머를 생산하는 자들, 자기들 말만이 사실이고 진리며 진실이고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남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자기들만이 정의를 실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잘못’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설화와 달리 인과응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초자연적인 형상을 배합해서 독특한 정서와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인터넷 현상의 한 단면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로 묶어내어서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되고,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생각에 잠겨야 했다.

 전체적으로 다섯 편의 단편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책도 얇은 편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흡인력이 있고, 이야기들도 마치 연작소설처럼 공통적인 요소들도 존재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다. 살인, 죄악감, 이기심 같은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따스한 시선도 있다. 「지요코」에서 어릴 때 잊어버렸던 인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돌베개」에서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장난감」에서 완구점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구미코의 마음에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섯 편의 단편만으로도 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예리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감을 느끼고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완성도 높은 플롯, 개성 있는 인물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이야기가 결합된 근사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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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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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명의 편집자가 푸는 미스터리 그리고 로맨스

 총 1억부를 넘게 판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푸른 묘점]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집은 아시는 분은 다들 아시다시피 두 출판사가 연합으로 함께하는 기획입니다. ‘세이초 월드’라 하여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하나의 통일된 장정으로 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연대를 통해 독자들이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북스피어에서는 [짐승의 길](상, 하), [미스터리의 계보]를 냈고, 모비딕에서는 [D의 복합], [잠복], [점과 선], [일본의 검은 안개](상, 하), 등이 나왔습니다. 앞으로도 북스피어에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이, 모비딕에서는 [시간의 습속](점과 선 2탄) 등이 나올 예정입니다.
 [푸른 묘점]은 일단 독특한 추리소설입니다. 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 남녀가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번 형사나 탐정이 주로 나오는 추리소설이 아닌 조금 신선한 추리소설을 찾는다면 [푸른 묘점]은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문예지 편집자인 남녀가 사건을 추리해나가고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신선한 재미로 느껴졌습니다. 출판사나 편집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꼭 편집자가 아니라도 직장에 다니는 분들이 읽어도 공감을 하면서 읽어나갈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을 반납하고 계속 휴가를 쓰면서 사건 추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노리코’는 작년에 여대를 졸업하고 요코샤에 입사한 신입 사원입니다. 요코샤는 문예 작품을 출판하는 곳이면서 《신생 문학》이라는 잡지도 간행하고 있습니다. 노리코는 바로 이 잡지의 편집부에 배치되었습니다. 반년 간 교정과 레이아웃을 배우고 나서 외부 활동인 작가를 찾아가 원고 청탁을 하고 독촉을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이메일이 있어서 보통 직접 찾아가서 원고를 달라고 매달리고 작가가 여관에 숙박하면 바로 옆 여관에 숙박해서 기다렸다가 친필 원고를 받아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발표된 작품은 그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문학 잡지의 신입 편집자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도, 그 디테일들도 이 소설의 장점이었습니다.

 편집장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하코네의 스기노야 호텔 프런트를 통해 무라타니 아사코와 연결되자, “무라타니 선생님이십니까? 이거 큰일 났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이달은 벌서 여름을 타서 다른 괜찮은 원고가 없어요. 선생님 작품이 메인이라고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오늘 밤 그쪽으로 시이하라를 보낼 테니 내일 저녁까지 어떻게든 꼭 좀 써 주세요. 네? 무리라고요? 무리라면 모레 오후까지 최대한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원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달엔 잡지를 내도 의미가 없어요”하고 비위를 맞추며 애원했다.(10쪽)


 이야기의 시작도 이러한 편집자의 설정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노리코가 담당하는 작가 ‘무라타니 아사코’의 원고가 기한보다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자택에 갔지만 문이 잠겨 있고 하코네의 미야노시타, 스기노야 호텔로 갔다고 편지를 남겨놓았습니다. 편집장은 호텔로 전화를 걸어 노리코를 보낼 테니 어떻게든 원고를 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노리코는 잡지에 실릴 원고를 받기 위해 외부 출장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코네를 무대로 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추리소설의 단골 손님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다쿠라 요시조라는 인물이 벼랑에 추락해서 죽습니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하지만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저급한 기획 기사를 써서 정보를 여러 잡지에 강매하러 돌아다니는 저널리스트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옆에는 바로 노리코가 기다리던 무라타니 아사코가 묵고 있었습니다. 다쿠라가 죽었을 당시 아사코 여사의 가족도 모두 외출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라타니 아사코가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정확히 열세 개네.”
 사키노는 노리코에게 적은 내용을 다시 보여 줬다.
 “더 자세히 열거할 수도 있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자.”
 노리코는 대충 읽어 보았다. 죽 읽어 보자, 일관된 굵은 선이 내 앞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다쿠라 씨의 죽음에 무라타니 선생님이 연관돼 있는 걸까?”
 전부터 느꼈던 희미한 의문이 조금 확실해졌다.
 “응.”
 사키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담배를 피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사키노의 옆얼굴이 노리코는 왠지 마음에 들었다.(73쪽)


 이야기는 여기서 다양한 질문들을 발생시켜 놓습니다. 다쿠라 요시조는 왜 죽었을까? 사고사일까? 자살일까? 타살일까? 어째서 수면제를 먹은 채 외출을 했을까? 죽였다면 누구 죽인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는 단순히 다쿠라 요시조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문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무라타니 아사코가 여관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다쿠라가 여관을 이어 바군 이유는 무엇인가? 전날 다쿠라 요시조를 찾은 부인은 왜 자살일 거라고 증언했는가? 아사코 작가의 남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런 의문점들을 노리코는 편집부에 같이 일하는 사키노 다쓰오에게 털어놓습니다. 이제 노리코와 사키노는 팀처럼 이 사건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편집장도 관심을 보이고 추적해 나가라고 하고, 사키노는 명탐정처럼 추리를 거듭하며 증거를 수집합니다. 사건의 의문점을 처음 접근한 노리코는 사키노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때로는 놀라운 발상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사키노가 주로 추리를 하고, 노리코는 조력자 역할에 머물러서 홈즈와 왓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노리코의 역할이 작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는 두 개의 플롯이 진행되는데, 사건을 추리하는 것과 함께 노리코와 사키노의 연애 전선도 점점 발전해 나갑니다. 사건의 추리는 이 두 사람의 유대 관계를 진전시키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두 사람의 데이트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이 관계를 주목하고 읽으면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어서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노리코가 사키노가 더러운 수건을 쓰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 관심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귀엽게 보이는 것이지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도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달달한 로맨스와는 다른, 막 관계를 시작하려는 남녀의 감정이 은근히 비쳐와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엿보이는 소설이었죠.
 상당히 두툼한 책입니다. 578쪽에 달하는 본문을 보자면 의문점이 많은 만큼 그것들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편이라 전개가 상당히 느릿느릿 진행됩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많은 페이지가 주인공과 작가를 설명하느라 사용되었고,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작가의 표절 의혹이나,(이 표절 의혹에서 작가의 허영심이나 한 작품이 성공하고 이후에 작품이 없는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중요 인물들이 사라지는 등으로 해서 아마츄어 탐정인 두 편집자의 추적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형사가 아닌 편집자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건도 추적해 나가기 때문에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주로 노리코의 시선으로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면이 있습니다. 혼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추리해나가는 사키노의 시점이었다면 소설의 분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리코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은근한 연애 감정과 추리를 하는 재미를 동시에 내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추리는 치밀하거나 정교한 편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형사가 추리해나가고, 전문적인 범인이 범인을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에 가까운 편집자가 일반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쫓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야기는 우연의 연속이며 산만한 전개로 진행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세계와 달리 현실 속 범죄들은 여러 우연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런 우연이 사건의 진상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소설은 합리적이지 않고 우연이 많을수록 허술한 소설이 됩니다. 사키노와 노리코가 단번에 범인을 지목하고 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건이 추리 소설 속 사건에서 벗어난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 속 사건이라면 정교하게 짜인 범죄를 사키노와 노리코가 오히려 헷갈리지 않고 빨리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범죄처럼 [푸른 묘점]의 사건은 ‘우연’이 겹쳐져 있고 이는 추리소설의 원칙에서는 어긋나는지 모르나, 오히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독자와 사키노와 노리코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 데 성공합니다. 즉, 작가가 모르고 실수로 한 것이 아니고, 어설프고 쉽게 범죄 방식을 설정하게 아니라, 일부러 느슨한 범죄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정교하고 치밀한 범죄 수법과 위배되게 하여 여러 의문점들을 증폭시키는 방법으로 활용합니다. 이 소설이 분량이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연성’을 트릭으로 사용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의 거장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답게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안에 다 읽어내려 갈 만큼 가독성 높은 문장과 흡인력이 일품인 소설입니다.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작가의 작품답게 정말 잘 읽히고 재미있습니다. 왜 4차례나 드라마화가 될 정도로 사랑받는 이야기인지 작품을 직접 읽고 알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로 하기 정말 좋은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상한 만남과 살인사건 이어서 작가의 표절의혹 등 의문이 의문을 낳는 구성도 페이지를 계속 넘길 수밖에 없게 만들고 관찰자 시점의 중심인물인 노리코의 행동이나 묘사도 생동감이 있습니다. 당시 출판계 모습은 물론이고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쫓지만 무겁지만은 않고 적당히 전개에 리듬이 있고 경쾌한 느낌이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빨리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꽤나 까다로운 작가였다. 작가 중에는 편집자를 옆방에서 기다리게 해 놓고 하룻밤 만에 소설 한 편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소를 나누면서 원고지 위에서 펜을 굴리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한낮에도 덧문을 닫은 채 완전히 홀로 있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작가도 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리 원고가 늦어져도 편집자를 집 안에 들여놓고 기다리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다른 사람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도저히 못 쓴다니까요.”
 무라타니 아사코는 살찐 얼굴을 저으며 눈썹을 찡그리고 이렇게 말한다.(11~12쪽)


 마침 여사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야. 하지만 후속작이 잘 써지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었지. 인간은 누구나 한두 가지의 소재는 가지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글재주가 있으면 그런대로 현상 공모전에 입상해서 인정받을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좋은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면 또 그런대로 끝나 버리고 말아. 특히 무라타니 씨는 아버지가 문학자로도 식견이 있는 시시도 간지 박사였기에 언론도 그 점을 주목하여 처녀작에 대해 얼마간 후하게 평가해 준 면이 있지.(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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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파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4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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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에서 밀리언셀러클럽 국내편 24번째 책, 최혁곤 작가의 『B파일』이 출간되었습니다. 장르는 스릴러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장르의 소설입니다. 일단 여러 주인공을 제시하고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사건을 진행해나가는 전개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상당한 긴장감을 주고, 수수께끼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한 명의 주인공에게만 집중했다면, 수수께끼가 극대화되기보다 지루해질 테고, 이야기 구조도 지나치게 단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살인 누명을 쓴 채 도주한 은행원과, 신참 기자, 킬러, 고참 기자 등을 주요 화자로 삼아서 번갈아가면서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갑니다.
 여러 개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그 사건에 맞서 의문을 풀어나가다가 결국에는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에 부딪힙니다. 그게 바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B파일’인 것이죠. 제목에서부터 독자들은 ‘B파일’의 정체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각각의 주인공이기도 한 중심인물들이 시점이 번갈아 제시될 때 ‘B파일 397021 은행원’이라는 말에서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결국 독자는 각각의 인물들과 함께 ‘B파일’에 대한 정체를 풀어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이 됩니다.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퍼즐 맞추기, 여러 갈래로 펼쳐진 수수께끼가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 독자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런 면에서 초반 전개와 전체적인 구성이 상당히 잘 짜인 소설이었습니다. 부담감도 지루함도 없이 독자는 정신없이 인물들을 따라서 연쇄적으로 펼쳐지는 사건들을 들여다보고 하나씩 정보를 얻어갑니다. 중심인물들이 나중에 한데 모여서 진실을 꿰맞출 때, 독자는 한 발 앞서 총체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사건의 전체 모습을 그리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제시되는 화자는 ‘리영민’이라는 은행원입니다. 한국에 들어온지 12년 째인 조선족 출신으로, 어느 날 일어나보니 모텔에서 한 여자가 옆에 죽어 있습니다. 모텔에서 빠져나온 리영민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추적해 나가게 됩니다. 살인자로 누명이 씌여지고 쫓기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게 됩니다. 외국인 특채 직원으로 선망의 직장에 취업하고, 착실한 생활을 이어나간 조선족이라는 출생의 희소성으로 오히려 득을 본 인물을 설정해서 배경이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도망자 신세가 된 리영민의 움직임이 작가의 보호 속에 있는 것처럼 위기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게 좀 아쉬웠습니다. 약간의 시선만 의식할 뿐 일반인처럼 돌아다녔고, 현상수배가 되었다는 점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이런 스릴러 소설의 특성상 경찰이 조금은 무능하게 그려지는 게 정석이긴 합니다만.)
 두 번째로 제시되는 화자는 ‘윤순철’이라는 고참 기자입니다. 닳고 닳은 인상을 주는 중년의 고참 기자라는 설정은 전통적인 스릴러 소설의 배역 중 한명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안정감을 줍니다. 왠지 이런 고참 기자에게 독자들은 신뢰감을 주게 되지요. 편집국장은 윤순철을 불러 의문의 ‘CD’를 한 장 줍니다. 이 CD를 조사해보라는 것입니다. 윤순철은 CD를 가지고 아는 전문가를 찾아가 살펴봅니다. 중년 사내와 젊은 여자가 술을 마시고 침대에서 뒤엉키는 영상이 들어있는 CD. 합성이 아닌 진짜 동영상을 보면서 윤순철은 이 동영상이 어째서 위험한 물건인지 의문을 갖습니다. 이후 편집국장이 죽고, 사건은 심상치 않게 흘러갑니다.
 세 번째로 제시되는 화자는 ‘미호’라는 전업 킬러입니다. 목적이 있어서 돈을 모으고 있는 킬러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인물을 없애고 다음 의뢰를 받습니다. 이 의뢰가 바로 윤순철에게 있는 CD의 회수. 쉬운 의뢰인 줄 알았던 CD의 회수는 어렵게 진행되고, 역으로 살해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네 번째로 제시되는 화자는 ‘에스더’라는 신참 기자입니다. 민주일보 사회부 신참 기자인 에스더는 여성이며, 마포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특종을 놓친 ‘낙종’을 하는 바람에 사회부장에 깨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모텔 살인 사건에 따라가면서 사건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후 ‘리영민’이 결백을 주장하는 연락을 받게 되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나갑니다.
 이 주요 네 명의 화자 말고도 각각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 권의 장편 소설 안에 나오는 인물 수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만큼 독자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도 많고 관계나 배경 설정의 양이 많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차분하게 화자를 번갈아가면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산만한 느낌은 들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된 느낌을 받습니다. 의원이나 국장이 죽고, 모텔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등 연관성이 없는 듯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지만, 독자는 이미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당연히 하나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들이 사건을 짜맞추기 전에 이미 먼저 추리를 해보는 재미를 가질 수 있고,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맞아 떨어져가는지 파악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신참 기자와 고참 기자가 등장합니다. 민주일보에서 일하는 이 두 기자가 사건의 추적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만큼 독자에게 생동감을 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 소설은 다른 소설에서 못 본 기자들의 현장감을 여러 디테일을 통해서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가 현실감을 느낍니다. ‘낙종’이라든가, 자정에 기삿감이 생기면 40판, 먼저 나가는 지방판은 놓치더라도 서울과 수도권 배달판에는 실을 수 있는 시간이라든지 하는 정보들이 기자라는 직업 세계에 대해서 전해주는 정보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리영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에 대한 정보 역시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 오고 있습니다. 실제 있을 법한 핍진성을 높이는데 이런 디테일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자의 생활, 조선족의 생활에 대한 지식을 얻는 듯한 재미를 독자가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전개 속도와 기자들의 생활을 그린 디테일 등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인 것입니다.
 네 명의 주요 화자들을 통해 사건을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스릴러 소설입니다. 1부 홍콩모텔은 사건을 벌이고, 인물 소개에 치중하고 있으며 2부 민주일보는 본격적인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3부 원더랜드는 사건의 종착지에 네 명의 인물이 한데 모여서 결전을 벌입니다.
 2부까지는 긴박감 넘치는 전개와 인물들의 추리 과정이 제법 흥미진진했었습니다. 인물들의 매력이 약간씩 부족한 감은 있었지만, 적절히 과거를 소개하면서 인물의 개성을 살려나갔고, 하나씩 주어지는 단서들을 가지고 거침없이 진행해 나가는 지점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아쉬운 지점은 결말인 3부입니다. 2부를 읽으면서도 기대감이 커질수록 3부에 대한 걱정도 커졌습니다. 이렇게 깔끔한 전개와 네 명의 화자를 내세워서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이 좋은 만큼, 그에 걸맞는 결말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3부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결말이었습니다. 네 명이 한데 모이는 것도 너무 갑작스럽게 처리해서 긴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라는 느낌보다는 너무 쉽고 간편하게 처리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서로 정보를 교류하는 것도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를 돕는 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충분히 머리를 맞대고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이 없이 몸으로 부딪히는 느낌이어서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건의 배후가 너무 단순하고, 헐리우드 영화 속 시시한 악당들과 비슷해서 허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금 늘어졌더라도 3, 4부로 분량을 충분히 해서 주인공들이 모여서 맞서는 과정을 세세하게 다루고, 상황에 떠밀려서 우왕좌왕 하는 게 아니라, 각자 비장의 카드들이 있었다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부까지 재미있게 읽은 것에 반해 3부에서는 너무 압축해서 전개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로 인해 앞에서 탄탄하게 쌓아놓은 현실성이 한 번에 다 날아간 느낌이고, 사건의 진상이 현실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몰입감이 깨졌습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장르가 바뀐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모든 음모와 사건의 진상이 돌파로 쉽게 드러나고, 대화를 통해 술술 확인되어지고 마지막에 담보가 없는 단순한 협상으로 결말이 맺어지며, 각 인물 간의 다른 결말을 주어 모호한 정리만 해줘서 허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의 진상 역시 충격적이거나 놀라운 반전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약간 식상한 소재가 아닌가 싶기도 했고, CD의 동영상을 이용한 협박은 진부하면서 그 세월이나 현실성을 따질 때 좀 무리한 방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에 대한 공포를 독자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보다는 빠른 전개 때문에 대충 넘어간 느낌입니다.
 이렇듯, 정리하자면 마지막에 이르러서 급전개로 결말을 처리해서 아쉬운 감이 크지만, 초반 전개는 정말 깔끔하며, 기자와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중심 화자의 사실성을 잘 살렸고, 무엇보다도 초반 구성은 독자의 호기심을 잘 이용한 작품이었습니다. 흡인력이 뛰어났고, 장르소설을 읽는 재미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B파일에 대한 호기심이 드는 분이라면, 속도감 넘치는 한국 스릴러 소설을 읽고 싶은 분이라면 『B파일』은 괜찮은 선택일 것입니다. 뛰어난 흡인력으로 인해 하루 안에 읽어낼 수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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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집행관
김보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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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칼처럼 아름답고 선명한 이야기. 심장을 직격으로 찔러온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서사가 연주되고, 정신없이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복층의 구조를 들여다보게 된다. 한 편의 섬세한 단편같은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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