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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집행관
김보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 수 없는 나. 겹겹이 쌓여있는 비밀들을 한하나 들춰나가는 안개 속의 슬로모션. 아름다운 여인을 뒤로 한 채 터져나오는 핏빛 폭력의 선열한 이미지들 …
김보영의 신작 <7인의 집행관>은 그 자체로 이미 숨막히게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입니다. <다크시티> <매트릭스> <인셉션>과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구조 속으로 우리를 몰고가는, 새롭고 신비스러운 문학적/영화적 체험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 영화감독 봉준호
김보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 『7인의 집행관』(김보영, 폴라북스, 2013년 1월)이 현대문학의 임프린트인 폴라북스에서 출간되었다. 김보영은 한국 SF 작가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SF를 집필하며, SF라는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이감을 훌륭하게 묘사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멀리 가는 이야기』
(김보영, 행복한책읽기, 2010년 6월)와 『진화신화』
(김보영, 행복한책읽기, 2010년 6월) 두 편의 단편집만으로 한국 SF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깔끔한 문장과 정교한 플롯으로 SF의 재미를 잘 전달하는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김보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기다리는 독자가 많았다. 단편에서 놀라운 솜씨를 보인 만큼, 장편이라는 긴 분량 안에서는 더 놀라운 재미를 줄 것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김보영의 단편집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에게나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장편은 어떻게 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7인의 집행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의 장편소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보영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색채의 글이 아닐까. ‘나’의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을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는 구성과 환상과 SF를 섞은 듯한 오묘한 분위기의 배경, 텍스트만으로 독자의 뇌를 뒤흔드는 강렬한 체험을 주는 솜씨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기억과 인격을 제거당한 ‘자아’의 동질성의 문제, 이로 인한 철학적 물음들이 독자를 소설에 빠지게 만들고, 심층 구조 속에 내재된 과학적 근거들이 이 작품을 탄탄하게 만든다. 후반에서야 드러나는 과학적 장치들은 장르소설의 근사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호오가 갈릴 수 있는 글이다. 장르소설의 색채가 강한 만큼, 장르소설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지나치게 낯설게 느끼고 소설을 읽어나가기 힘들 것이다. 장르소설의 프로토콜에 익숙한 독자라면 초반에 대번에 알아차릴 여러 가지 암시나 설정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루하고 난해한 작품으로 읽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작가가 설치해놓은 여러 가지 장치에 대한 이해가 높을수록 작품의 재미가 살아난다. 대중적인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높다. 문장이 허술하거나, 구성이나 인물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처음에 보는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1막’, ‘2막’ 식으로 장을 구분하고 있다. 장 구분은 시에서 행 구분과 연 구분이 중요한 의미를 갖듯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와 같은 장 구분은 작가의 의도로 이 작품이 공연 무대처럼 보이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막’의 무대는 21세기 한국, 조폭 사무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장마다 무대가 바뀌는 것도 이 소설의 큰 매력이다. 매번 다른 세계관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다른 세계관들을 훑어보는 재미가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무대 세트만 바뀌면서 배우들이 각자 다른 옷을 입고 비슷한 대본으로 연기를 펼친다. 각 ‘막(幕)’ 사이에 있는 ‘사이’ 파트는 공연의 ‘인터미션’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때는 연기자들이 무대 뒤편에서 잡담을 나누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조상 이 ‘인터미션’의 순간이 바로 현실의 순간이고 이 작품의 실상을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순간이다. 배우가 무대 뒷편으로 간 순간, 그 공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들어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까지 독자가 볼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더욱 빨리 이 소설의 진실된 모습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거짓된 세상과 진실된 세상의 복층 구조는 김보영의 장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표면구조와 심층구조가 나뉘어 독자를 혼란케 하는 방식은 단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단편 「우수한 유전자」나 「0과 1 사이」에서 거짓된 세상을 보여주고 진실된 세상을 나중에 드러내는 구조를 취함으로써 반전과 경이를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구조로는 그렇고 문체나 어조(톤)는 단편 「거울애」를 연상시킨다.) 이를 보다 확장한 세계가 『7인의 집행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독자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이 작품은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수용미학으로 볼 때, 뛰어난 장점을 가졌다. 수용미학은 “작가가 서술하지 않고 그냥 둔 ‘빈 곳Leerstelle’이 있다. 이것을 독자가 채워 넣어 독자 나름으로 작품을 보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작가가 보내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김천혜, 『소설구조의 이론』, 한국학술정보, 2010, 270쪽)라는 말처럼 작가와 독자가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7인의 집행관』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는 스토리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즉, 선형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앞의 이미 중요한 사건은 벌어졌고, 그 결과의 사건을 실시간 장면으로 연극 무대처럼 ‘가상현실’을 이용해 선보이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장편임에도 서술되는 시간이 서술 시간보다 긴 축시적 소설
(서술되는 시간 > 서술 시간 → 축시적 소설)이 아니라, 서술되는 시간과 서술시간이 연극처럼 동일한 동시적 소설
(서술되는 시간 = 서술 시간 → 동시적 소설)이다. 이는 실시간으로 독자가 눈앞에서 계속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는 느낌을 준다. 즉 소설을 생동감 있게 만들며 흡인력을 증대시킨다. 이렇게 연극처럼 계속 대화 위주로 바로 공연처럼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장면 위주로 장편을 끌고 가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장편소설은 1년이나 몇십 년 단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대부분의 장편소설은 축시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마다 매번 무대를 바꿔나가는 구조를 취해서 이를 성공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앞서 말한대로 실시간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같은 인물들이 배역만 바꿔서 매 장마다 비슷한 구도를 취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있다. 물론 이를 해소하는 장치는 있다. 바로 ‘추리’의 요소이다. 이 소설은 일종의 추리소설 또는 추리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독자가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든다.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독자는 작가가 낸 문제를 풀어서 이 작품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사건을 온전하게 복원해내는 순간, 소설 속 주인공 역시 모든 기억을 복원해낸다. 독자와 주인공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쾌감은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독자가 세상의 실체를 읽어내려는 노력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자가 읽으면서 쓰는 소설이며,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시작은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또한, 이 세상의 진실된 모습은 무엇인가. 주인공이 벌인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조정자는 누구인가. 선조의 유산인 가상현실 프로그램은 어떤 원리인가. 왕의 시해자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정말 거짓인가. 그리고 귀신은 존재하는가. 미스터리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매 장마다 조금씩 단서가 주어진다. 따라서 반복되는 장의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단서를 찾는 재미, 조금씩 밝혀지는 세상의 실체를 알아가는 재미로 인해 이 작품은 큰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끝까지 읽어나가게 된다.
조동일 교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외적 자아의 개입이 있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식”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구도로 표면적으로만 이 작품을 살펴보았을 때, 소설의 ‘내적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내적 세계’는 8개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다. ‘내적 자아’는 온전한 기억이 있는 ‘자아’와 기억을 잃은 ‘자아’로 나뉠 수 있다.
“나는 이제 이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시계는 내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13) 라는 말이 고딕체로 표현되는데 이는 기억을 잃기 전의 진짜 ‘내적 자아’다. 시스템의 빈틈을 뚫고 ‘내적 자아’는 기억과 인격을 잃은 거짓 내적 자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이 진실한 목소리는 고딕체로 표현되며 계속 복층 구조의 소설에서 힌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끊임없이 ‘기억, 지식, 지력, 사고능력, 판단능력, 신체능력’을 모두 잃고 ‘나’를 유지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 물음은 흥미로운데, 이 작품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나오기 때문에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주인공의 내적 자아는 백지 상태로 매번 새로운 세계에 덧씌운 기억으로 살아간다. 이는 ‘환생’, ‘윤회’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매번 비슷한 행동과 사고를 하는데, 이는 근원의 ‘나’가 조금씩 드러나서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고도 ‘나’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신비적이고 경이로운 분위기가 작품을 긴장감 있게 만든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인가. ‘육체’인가. 이런 성찰들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매혹적이다. 여기서 ‘내적 세계’는 가상현실로 구성되는데, 이는 ‘꿈’, ‘다른 시간대’, ‘평행 우주’ 등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 속 가상현실은 ‘꿈’으로 자주 비유가 되는데,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전부 꿈으로 처리되더라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세계의 외적 자아인 우리네 꿈들이 이 작품 속과 마찬가지로 무게감을 가진다는 점은 재미있는 은유로 다가오게 한다.) 실제 서술에서도 이 세계가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 다른 우주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하여, 독자로 하여금 빈 부분을 채우게 만든다. 이를 다른 시공간의 분화로 본다면
(영화 『소스 코드』 같이) 이 작품의 내적 세계는 실제 내적 세계와 가상현실의 내적 세계 말고도 7개의 내적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작품의 스케일이 커진다. 이런 확장으로 인한 경이감은 SF의 코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구조가 7개의 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번 연극 무대가 바뀌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이를 연극무대의 단위로 보는 게 아니라 평행세계처럼 본다면 우주를 넘나드는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자아의 근원을 유지하는 우주적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끊임없는 꿈 속의 꿈이라는 이미지는 작가의 단편 「몽중몽」에서 제시되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깊이 내려가는 하강의 이미지라면 이번에는 수평적으로 세계를 이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소설이 단순히 부도국의 왕자 흑영이 형이자 주군인 왕을 시해한 죄로 여섯 개의 세계에서 여섯 번의 사형을 구형하는데 그치는 이야기라면, 독자는 이야기를 읽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줄거리만으로는 참신하고 매혹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단 한 줄로 함축되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소설이라면 줄거리만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게 미스터리이고, 음모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수 겹으로 꼬인 음모 속에서 한 줄기의 진실을 찾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기억과 인격을 잃은 채로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 단서라고는
“-내기를 기억하라.”(11)라는 말뿐이다. 처벌을 받기 전에 어딘가에서 내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말로써, 자아가 바뀌었음에도 내기가 있었다는 말만은 꿈처럼 남는다. 이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라고 할 수 있는 장치다. ‘내기’라는 단어 하나를 기억한다고 해서 기억과 인격을 잃은 채로, 집행관에 의해 6번의 죽음이 집행되는 상태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야기는 단순히 6번의 죽음이 집행되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는 흥미를 가지고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삶이 단순하지 않듯, 소설 역시 복잡한 구성으로 독자와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 게임은 흥미롭게도 텍스트에서만 가능한 트릭을 사용하여 소설의 매력을 강조한다.) 기억과 인격을 잃은 주인공이기에 반복되는 주인공의 진술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집행관과 독자 모두 혼란스럽다. 이 혼란이 이 소설의 매력인 셈이다. 독자를 능수능란하게 흔들고 헤집어놓을 수 있는 작품이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세계가 변화할 때마다 소설의 매력이 달라지는데, 초반에 조폭물에서는 피 튀기는 액션 장면을 깔끔하게 묘사해서 인상적이었다. 집행관들이 신처럼 그려진 세계에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
(로저 젤라즈니,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6년 4월)가 떠오르면서 매력적이었고,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이렇게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가상현실과 필립 K.딕을 연상케 하는 기억 조작이다.
(이미 이 두 개의 소재만으로 세계를 바꾸면서 처벌하는 발상이 가능한 만큼, 이를 바탕으로 무한한 우주가 생성될 수 있고 무한한 거짓 인격과 가상의 인물이 나올 수도 있다.) 가상현실과 기억 조작이라는 소재를 조합하면 소설을 무한한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작가가 제대로 조정을 하지 않으면, 독자가 받아들일 수 없을 이야기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차분하게 단계별로 소설의 설정을 드러내면서 그런 위험성을 제거했다. 기억조작은 주인공의 자아를 새로운 세계에 데려다 놓는 장치로 한정했다. 그러면서도 기억조작을 통해 소설의 암시와 복선으로 활용하면서 독자와 집행관 주인공까지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데 성공했다. 기억 조작은 매력적인 설정이다. 제대로만 살린다면 소설의 긴장감을 부여하며 장르소설의 재미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거기서 오는 희열도 그만큼 크다. 기억 조작은 ‘자아’의 인격을 형성하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소재이다. 우리는 모두 기억을 통해 우리를 확신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억을 쌓는 일이며, 죽는다는 것과 흡사한 것이 기억을 제거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기억 조작이 가능해서 자유자재로 다른 기억들이 삽입되고 다른 인격이 만들어진다면 ‘나’는 ‘나’일 수 있을까. 테세우스의 배처럼 풀리지 않는 고찰이다. 기억이 ‘나’일까. 기억이 아니고도 ‘나’일까. ‘기억’이 없다면 없는 일이 될까. 세상도 나도. 기억을 조작하면 세상을 창조하고 인물도 창조할 수 있을까. 그럼 어떤 게 진실일 수 있을까. 진실과 거짓도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 삶은 기억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가.
초반부터 압도적인 이미지로 밀고나가는 소설이며, 마지막의 결말은 인상적이다. 중간에 언변으로 독자와 집행관을 모두 거짓과 진실의 파도 속에 몰아놓는 기술도 뛰어나며, 인물을 형상화도 제한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면서 안정되게 이뤄냈다. 장막 공연을 본 느낌이다. 장편소설임에도 비슷한 처형이 반복되면서 깔끔한 하나의 단편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도 받는다. 결국에는 다 읽고 나서 모든 사건이 함축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정리된다. 완성된 퍼즐, 시작하는 삶, 단 한 번의 생과 사. 꿈은 끝났다.
집행관들이 고혹적인 분위기가 일관되게 흐르고, 매번 피 흘리며 죽는 주인공이 처절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어 긴장감을 조성한다. 때로 어떤 소설들은 한 번이 아니라 반드시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들이 있다. 『7인의 집행관』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한 구조와 인물들도 인해, 단 한 번에 소설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쉽지가 않다. 독자가 추측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 뒤에. 다시 한 번 완성한 작품을 감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온전한 『7인의 집행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심장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또한, 머리를 상쾌하게 만드는 복층 구조가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7인의 집행관』을 추천한다. 자아와 기억, 세계에 대한 대립을 환상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분명 경이로운 가상세계를 체험할 것이고, 세계 너머의 세계를 가닿게 만들 것이다.■
나는 보지도 않고 다음 놈을 찌른 뒤 날이 박힌 손으로 마지막 놈의 목을 온 힘을 다해 눌렀다. 면도날이 내 손과 그의 목을 동시에 눌렀다.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도니 뒤에야 나는 깊이 박힌 면도날을 이빨로 물어 빼낸 뒤 땅에 뱉었다. 피 맛이 지리다.(44)
“밖으로 나가면 모두들 이것이 긴 악몽이고 꿈이었으며, 네가 죽음에 이르러 만들어낸 환상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가끔씩 모여서 말하겠지. 세상에 의혹은 많지만 진실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라고.”(412)
내가 나라면.
나는 벽을 우그러트리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도 능력을 잃고도, 지식과 지력을 잃고도, 판단력과 취향과 성격과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잃고도 내가 나일 수만 있다면.(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