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커넥션 l 미래의 문학 4
앨프리드 베스터 (지은이) | 조호근 (옮긴이)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05-30 | 원제 The Computer Connection (1975년)
* 이 글은 소설 『컴퓨터 커넥션』 및 영화 『맨 프롬 어스』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시리즈 네 번째로 출간된 앨프리드 베스터의 『컴퓨터 커넥션』은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소설이다. 필자는 이렇게 새로운 방식의 소설을 볼 때면 즐겁다. 매번 같은 방식의 구조를 취하는 안정적인 소설들과 차별화된 세계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얌전하게 좁은 골방에서 인물과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소설이 아니라, 때로는 시간을 이동하고 세계와 행성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근사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 커넥션』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생각하는 전개 속도와 밀도를 벗어난다. 전개 속도는 앞서 출간되었던 새뮤얼 딜레이니의 『바벨-17』(새뮤얼 딜레이니,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현대문학), 2013년 4월)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숨이 찬다. 이렇게 빠른 속도감 속에서 녹아 있는 소재, 인물, 문화, 발상의 밀도는 지나치리만치 정보량이 많아서 뇌에서 처리하기가 벅찰 지경이다. 이 책은 천천히 읽거나 되풀이해서 읽어나가거나 다시 읽어야 온전히 그 내용을 숙지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빠른 속도감과 밀도 높은 디테일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혀 다른 소설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한 마디로 파격적이며 글에 몰입하는 순간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컴퓨터 커넥션』은 할란 엘린슨이 작가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말한 “회전 불꽃놀이처럼 사방으로 놀라움을 뿌려대는” 문체로 무장한 소설이다.(작가 소개에도 그의 작품들은 일명 “불꽃놀이” 스타일이라고 명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한 달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는 현란하며, 곳곳에서 불꽃처럼 반짝이는 설정들은 눈을 현혹케 한다. 하나의 핵심적인 사건이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계속 쉴새없이 터지는 사건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든 소설이다. 그야말로 수십 개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듯하며, 이런 독특한 전개와 문체가 이 소설의 단점인 동시에 매력이고 장점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거대한 네트워크 컴퓨터들이 있고, 사람들은 생체칩 같은 ‘버그’라는 기계를 대부분 장착한 시대다. 여기에는 타임머신도 존재하며, 스팽글리시라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은 언어를 사용하고, 몰맨이라는 불사인간들이 존재한다. 인디언은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마약을 팔아 부를 쌓고, 마피아를 조직했으며, 백만장자들은 날렵하게 훈련된 닭을 쏘는 사냥을 즐긴다. 여기에 몰맨이라는 불사인간들은 자기들의 단체를 조직했으며 주인공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의 외모나 개성이 하나같이 너무 특이해서 이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분량을 사용해야 한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줄거리를 요약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정도로 전개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사건이 터진다. 설정도 많아서 다 기억해서 정리하는 것도 벅차다. 베스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섯 권 정도로 풀어서 각각이 인물을 묘사하고, 내면을 그리고, 사건을 전개하고, 설정들을 소개하고 했다면 전통적 소설의 형태를 띄었겠지만, 이 소설은 그 다섯 권 정도의 분량을 한 권에 압축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여기서 파생되는 압축으로 인한 밀도와 미칠듯한 전개를 따라가며 이 속도감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 만족을 할 테고, 아니라면 혹평을 가할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험적이다. 그렇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발상들과 인물들, 설정들, 이야기가 녹아 있다.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소설
처음부터 주인공은 스카이콩콩을 탄 추적자들에게 쫓기면서 또 다른 불사인 허브 웰스의 은신처로 숨어들어간다. 허브 웰스는 고물 시간여행기를 사용해 금괴를 과거로 날려대고 있었다. 그래서 영생자 단체에서는 그에게 H.G 웰스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영생자 단체는 이렇듯 인물들에게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붙여주곤 하는데, 해양연구학자에게 네모 선장의 이름을 붙여준 것도 인상 깊었다.
하여간, H.G 웰스 별명이 붙은 허브 웰스의 목표는 반 고흐나 모차르트 같은 자들에게 금괴를 선물해서 그들이 건강하고 부유한 상태로 후대를 위해 더 많은 작품을 남기도록 하는 것이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설정만으로도 중편 하나가 나올만한 기발하고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이 부분은 영화 초반 5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스쳐가는 에피소드에만 고물 시간여행기며 금괴를 보내는 영생자 동료가 나오고 주인공은 잠시 동안 현실 시간대에서 몸을 피하기 위해 시간여행기 안으로 들어가서 실제 17세 나이로 죽은 체터튼 꼬마 시인을 만나기 위해 금괴를 들고 이동한다. 영생자 단체와 동료와 고물 시간 여행기와 역사속 인물에게 금괴를 보내는 프로젝트 그리고 주인공이 실제로 시간이동까지 해서 역사 속 인물과 접촉까지 하는데, 이 이야기가 고작 몇십 페이지 동안 안에 전개되고 이후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것을(나중에 시간 여행은 한 번 더 등장하긴 한다. 큰 역할을 하지 않지만. 초반에 설명된 ‘힉-핵-혹’ 네안데르탈인이 나중에 등장하는 것처럼 구조적으로 유기적인 구성이 곳곳에 엿보인다.) 상기할 때, 이 소설이 얼마나 전개가 빠르며 설정과 정보의 밀도가 높은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건 본격적인 이야기에 몸풀기인데도 분량 대비 녹아있는 정보를 볼 때는 경이로울 정도인 것이다. 이후 몰맨의 설명, 제이시와의 대화, 피-5와 어떻게 만났는지를 설명하고 제이시가 다치면서 간질발작을 일으킬만한 후보자 게스를 만난다. 피 멀리는 게스의 조수가 된다. 게스는 JPL 우주 센터에서 세 명의 대원을 냉동수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인공인 기그는 게스를 끔찍하게 죽여서 영생자로 만들어 보려고 영생자 단체의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가설이고 성공한 적이 없는데도 침착하게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기그와 그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보면 이 소설 전체가 부조리적인 코미디마저 느껴진다.) 그 다음 게스의 우주 센터에서 냉동수면 상태인 항해자들이 돌아오는데 관 안에 냉동 비행사들이 없고 쥐 같이 생긴 것들만 들어 있다. 게스는 충격을 받고 발작을 일으키고 피-5는 대신 발표를 해서 사태를 수습하며……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정신없이 혼란스럽고 빠르게 전개되는지 알 수 있다. 이게 다 아직 초반에 불과하며 연이어 사건들이 터지면서 계속 전개가 이어진다. 아직 ‘컴퓨터 커넥션’은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타자를 치는 손이 아플 지경이다. 이후 전개를 서술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직접 읽는 것을 추천한다. 아마 읽고 나서, 머릿속에서 전개를 다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설정만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단,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불사인에 대한 설정이다. 『환상특급』과 『스타트렉』의 시나리오를 맡았던 제롬 빅스비 원작이며 저예산 영화인 『맨 프롬 어스』(The Man From Earth, 2007)가 떠오르는 면이 있다. 국내에서도 좋은 평을 얻은 2007년 영화 『맨 프롬 어스』의 경우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존 올드맨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러나 앨프리드 베스터의 1975년 발표작 『컴퓨터 커넥션』에는 이미 존 올드맨 같은 불사인들의 단체를 등장시키며 놀라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우리는 그래서 꾸준히 SF를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몇 십년 전부터 출간된 수많은 SF에 담겨 있는 발상과 아이디어의 방대함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 단체의 사람들은 죽음 피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다. 물론 상당히 힘겨운 방법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 인한 정신적 갈바니 충격으로 세포 내의 노폐물을 전부 떨어버리고 분자인간Molecular Men, 줄여서 몰맨이 되었다.(18쪽)
이렇듯 몰맨은 극적인 죽음에 처한 간질병 환자가 그 격변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탄생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주인공은 직접 간질 환자를 식별할 수 있는 훈련을 해서 끔찍한 방식으로 죽여서 단체로 끌어들이는 일을 해왔다.
영화 『맨프롬어스』에서는 그가 예수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는 장면이 극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오른 부분이기도 하다. 『컴퓨터 커넥션』에서는 불사인 제이시가 등장하는데, 등장은 짧지만 나오는 부분마다 재미있다.
제이시는 내가 그 현상을 기적이라 부를 때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멕시포니아에서 나와 함께 몇 달을 보냈는데, 내가 우리 단체의 생성 과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할 때마다(영생의 고달픈 점은 장황한 헛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닙니다. 기적이란 신성 발현의 요소 중 하나이며, 신의 성격과 목적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그래, 그래, 나도 알아, 제이스. 그러면 나와 같은 놈을 영원히 살게 해주는 신의 목적이란 대체 뭐란 말이야? 좋아, 나는 19세기 합리주의의 산물이라고. 확률과 생화학이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스피노자 같은 말투로군요, 기그.”
“그건 칭찬인데. 직접 만나본 적이 있나, 제이스?”
“암스테르담에서 그 사람에게 안경 한 벌을 샀지요.”
“어떤 사람이던가?”
“대단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낸, 인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신이라는 관념을 벗어던진 첫 번째 사람이었으니까요. 1600년대에 그런 일을 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겠지요.”(24~25쪽)
“이리 온, 내 아이야.” 제이시가 말했다.
피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서는 유혹하듯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가 뱀파이어 꼬마 아래로 팔을 넣어 자세를 편안하게 해주자, 순간 이 광경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변했다. 이것이 제이시의 마법이다.
“혹시 약에 손을 댄 적이 있니?”(32쪽)
이제는 산수가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비병들은 일상적인 방벽을 유지한 채로, 가장 예쁜 여자아이들을 구속하고 강간할 권리를 놓고 서로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정신 나간 제이시는 이런 축제 한복판으로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산상수훈이 재탕될 모양인데, 녹음기를 가져오지 않았잖아. 망할!’
그러나 그는 설교를 시작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행동대원들이 얌전히 주차된 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있던 헬리콥터 한 대를 공격했다.(34~35쪽)
이렇게 매력적인 인물이 초반만 등장하고 이후에 잘 등장하지 않아서 매우 아쉬웠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정말 단권에 어울리지 않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인물 조형이 내면을 깊이 파고들지 않으나, 외형과 특징을 매우 색다르게 잡아서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불사인 중에 한 명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멍청한 애엄마가 애 이름을 생각해내지 못해서 인구 조사원이 그냥 여성이라고 등재해서 지은 ‘피-5’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요부같이 굴면서도 어린애 같은 모습도 보이고 당돌하면서도 연약하고 세계의 전파를 다 수신하는 능력이 있는 기묘한 매력을 가진 소녀다.
피-5가 마약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지적인 모습으로 분장하고 있었다. 렌즈 없는 뿔테 안경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스프레이로 그려 넣은 그래피티만 바른 채였다.
“이건 뭘 팔려는 거지?” 게스가 물었다.
“아니, 그 아이는 진짜야.”
“가스 줘요.” 피는 바에 대고 말하고는 크고 검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베니 디아즈, 신사 양반들.”
“괜찮아, 피. 이 친구는 XX를 할 줄 알거든. 지식인 타입이지. 이쪽은 세쿼이아 게스 박사. 추장이라고 부르면 될 거야. 추장 양반, 이쪽은 파-5 그로먼즈 차이니즈 양이네. 이름들 참 대단하군!”
“그 신이 내린 엄청난 비탄, 그 엄혹한 광휘가 뒤틀린 자의 마음을 변모시켰노라.”+ 피는 진지한 말투로 이렇게 뇌까렸다.
“그건 누구고 왜 비탄에 잠겨 있는 거지?” 세쿼이아는 이렇게 물었다.
“누구든 될 수 있지. 뉴튼, 드라이든, 빅스, 폰 노이만, 하인라인. 마음대로 골라잡게나. 이 아이는 내 여자 프라이디++ 라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이기도 하죠.” 피는 자기 가스를 드리켜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추장을 예리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덧붙였다. “당신 내 가슴을 만져보고 싶은 거죠.” 그녀가 말했다. “어서 해봐요. 자신의 남성을 부인하지 말고요.”(42~43쪽)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5권 13장.
++ 로빈슨 크루소의 하인 프라이디(금요일)에서 유래한 단어. 충직한 비서 또는 하인을 가리킨다.
“나! 나! 나요!” 피가 소리쳤다. “나 그 여자들 중에 끼워줘요.”
“처녀는 뻔뻔해서 싫어.”
“난 다섯 살 때 강간당했는데.”
“바라는 대로 믿게 되는 법이란다, 피.”
“그건 누가 한 말이지?” 몬테주마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쉿, 쉿, 쉿. 지금 그 말 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 찾았다. 셰익스피어. 헨리 4세.”
“이건 융의 이상 그대로야.” 게스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말했다. “이 아이는 세계의 집단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거라고. 이 아이가 필요해.”
“JPL로 가면 내가 요구하는 대가도 줄 건가요?” 피가 물었다.
“그게 뭔데?”
“범죄성 강간이요.”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좋아, 피. 정말로 범죄적으로 해주마. 1000rpm으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속에서, 수은주 0.5밀리미터의 진공실 안에서, 뚜껑을 덮은 냉동보존 용기 안에서도 해주지. 약속이다.”
“좋았어! 들었죠?” 그녀는 내 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여덟 달 전에 가슴이 훌쩍 부풀어 올랐을 때만큼이나 승리에 도취한 모습이었다.
“네가 그 정도로 체제 순응적인 아이인 줄은 몰랐구나. 우리 꼬마 피. 이제 병원으로 가서 제이시를 좀 돌봐줘라. J. 크라이스트먼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단다. 사람들에게 네가 게스 박사의 중요한 조수라는 사실만 말하면 다들 무릎을 꿇을 거야.”(47~48쪽)
여기서 인용한 대사를 치는 방식만 봐도 이 소설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르며 정신없고 기괴하게 비틀린 세계를 극단적인 인물들이 활개치고 있다. 대사들은 종종 재기 넘치고 때로는 매번 달라지는 이름들과 새로운 정보, 다양한 인용들로 화려하다.
다들 알다시피 앨프리드 베스터는 초기에 DC코믹스에서 스토리 작가로 일하면서 『슈퍼맨』, 『그린 랜턴』의 작품에 참여했다. 1978년 개봉한 실사 영화 『슈퍼맨』(Superman, 1978)의 각본도 앨프리드 베스터가 쓸 뻔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설카인드가 아이디어에 난색을 표하다가 대부를 쓴 마리오 푸조에게 맡겼다고 한다. 소설에 등장한 몇몇 장면에서는 ‘슈퍼맨’을 연상케 하는 부분은 소소한 재미였다.
“작은 상처라면 그냥 재생을 하지. 심각한 부상이라면 끝장이네. 머리를 자르거나 심장을 태우거나 하면 불사신이라도 죽는 거지. 우리라고 무적은 아닐세. 그러니 슈퍼맨이라도 된 양 돌아다니지는 말게나.”
“누구?”(124쪽)
정신없는 소설, 혹은 정신 나간 소설?
분명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혹은 쓸 수 있는대로 ‘베스터 스타일’로 쓰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문득, 존 스칼지가 휴고상을 수상한 『Fuzzy nation』을 『작은 친구들의 행성』으로 리부트 했던 것처럼 이 소설도 다른 작가가 리부트를 한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5권에서 10권 정도 분량의 전혀 다른 소설이 나올 것이다. 충분한 복선과 암시가 녹아 있고, 인물들과 배경 설명이 더 자세해질 것이다. 서사는 한층 세세하게 풀어질 것이고, 매력적인 설정들은 그 가능성이 극대화될 것이다.(혹은 그래픽노블도 어울릴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그건 베스터 소설이 아닌 베스터 소설의 인물과 설정을 가져와서 만든 다른 소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 소설은 베스터만이 쓸 수 있는 스타일이며 아무도 이렇게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희귀하고 매력적이다. 이 희귀성이 이 소설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파괴된 사나이』와 『타이거! 타이거!』는 확실히 대중적이고 잘 정련되었으며 구성이 보기 편하고 줄거리가 명확한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따라서 같은 작가의 작품인 『컴퓨터 커넥션』에도 비슷한 형태의 작품을 기대한 독자들은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개별 작품마다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고 다른 것을 실험할 때, 굳이 기존 작품과 다르다고 실망하기보다는 이 작품만이 이룬 성취를 분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없이 질주만 하는 전개는, 진부한 비유이지만 몇 시간 동안 내리 롤러코스터만 타는 기분을 느끼며 만들며 그 속도감에서 희열을 만들어낸다. 그 속도감 속에서 주변을 스쳐가는 표지판들 같은 하나하나가 단편이나 장편이 될 만한 발상들의 향연은 다양한 상상의 계기를 제공하고,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낸다. 베스터 스타일에 잠식당하거나(너무 몰입해서 전개만 따라가기 벅찬), 튕겨나가지 않고(읽기 벅차서 중단해버리는) 거듭 읽어나가면서 이 작품의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자기만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마치 소설 속 컴퓨터 커넥션처럼 아이디어가 신경 세포처럼 연결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증폭되면서 새로운 사고에 다다르는 희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십 개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아이디어와 커넥션하는 순간 새로운 뇌신경이, 새로운 의식이, 새로운 발상들이 만들어지는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전 작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읽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기존 문법을 파괴하는 실험성에 매료되었고, 재치 있으면서도 맛이 간 듯한 대사들은 감칠맛이 있었고, 각각의 비중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매혹적인 인물들의 등장도 만족스러웠다.
장르소설은, 특히 모험과 스릴의 요소가 주된 SF에서는 얌전한 소설보다는 과격한 소설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차분하고 정적이며 정상적인 소설들보다는 차라리 아예 극한까지 미친 소설이 더 흥미롭다. 현실에서 일탈해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에너지가 이 소설에서는 느껴진다. 돈에 발목을 잡히거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런 세세한 것은 갈등 요소로 잡지도 않고 지구를 마치 저택처럼 느껴지도록 공간감이 축소된 감각이 느껴진다. 우주를 자유롭게 나갔다가 심해까지 들어간다. 인물들도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때로는 시간조차 이동시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디스토피아에 가깝게 조형되어 있으면서도 블랙코미디처럼 희화화 되어있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괴이하다. 일부러 그 당시 세계를 1차적으로 일그러트린 다음에 외삽으로 미래를 그려냈는데, 마치 이상한 나라에 빠진 듯한 기이한 감각에 휩싸인다. 근미래라는 느낌보다는 일종의 특이한 취향을 가진 제작사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속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정말 어디에도 없는 독특하고 괴이한 SF다. 떠오르는 상상력을 모두 집약한 듯한 세계의 모습은 초현실적인 세트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은 강박증을 가진 정신병 환자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유머가 곳곳에 놓여 있어 이 현란함 속에서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 한국에서 이 작품이 번역되어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정도로 신선한 독서 경험이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한 동안 잊을 수 없는 듯하다.
컴퓨터 커넥션을 읽는다면, 자신의 두뇌를 만화경 속에 넣고 흔드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앨프리드 베스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