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마이페이퍼 당선작

공허한 아름다움 - 잠자냥
소설이 다시 재미있는 시기가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서재에 들어가 사두고 안 읽었던 책들을 훑어보다가 꽂히면 읽기 시작하고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그렇게 꺼내 들었다. 이걸 몇 해 전에 사두었더라? 문학동네에서 신간 나온 걸 샀으니 꽤 지난 셈이다(2018년). 당시에도 영화로 하도 유명한 작품이라 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은 책인데, 읽을까 말까 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읽기를 마친 지금, 그냥 읽은 듯한 책으로 남겨둘 걸 하는 후회도 조금 밀려오지만, 실체(?)를 알고 나니 좀 후련한 기분도 든...

다시 가을이 왔구나 했는데, 벌써 가려나 보다. 시... - 곰돌이
다시 가을이 왔구나 했는데, 벌써 가려나 보다. 시린 찬 바람이 여전히 낯설고 와닿지 않는 이별을 더 실감 나게 한다. 예전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금 가능해진 게 있다면 ‘좋은 것’을 붙잡고만 싶어하지 않고 놓아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해마다 다 함께 오던 장소에 인원수가 달라져 몇 년 만에 다시 오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영 쉽지가 않았다. 모두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리움 탓에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굳이 애써 놓아주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바닥에 피어...

일반인을 위한 물리교과서 시리즈 - blueyonder
요즘 이른바 '일반인을 위한' 물리교과서 시리즈들이 출간되고 있다. 스타트를 끊은 것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드 교수이다. '일반인을 위한'이라고 내가 뭉뚱그렸지만, 결국 이것은 비교적 쉽게 쓴 '교과서'임에 유의해야 한다. 아마 주 대상은 물리를 공부하는 대학생일 듯 싶고, 그 외에는 이공계 학과를 전공한 졸업생이나 아니면 정말 물리에 갈망이 있는 고등학생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미적분 정도의 지식이 분명히 있어야 하므로, 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정말 '일반인'에게는 이해가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아마 보통 고등학생에...
 
잔인함에 대하여 - 별족
잔인하다,는 말은 감정적인 인상이 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찌르는 것,과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 무엇이 더 잔인한가?라는 이야기를 하릴없을 때 하릴없이 한 적이 있다. 잔인하다,라는 한자어는 역시 칼,이지만(殘忍 죽을사변에 남을잔(창(戈:창과)이 두 개나 겹쳐있다),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 말이 가지는 감정적인 느낌은 저런 질문을 만든다. 잔인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풀이에 보이는 인정머리 없다,라는 건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어떤 마음이 뭘까,라는 무얼 더 보기 힘들어 하는가,란 질문도 만든다. 어떤 걸 더 보기 힘들어하...

뻔한 말들의 위로 - 구단씨
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여름 다음의 계절이 아닌, 곧 시작될 겨울을 예고하는 날씨에 마음이 더 추워진 듯하다. 어제 모처럼 생긴 여유에 아파트 놀이터에 잠깐 앉아 있었는데, 바쁘고 피곤하다고 노래하면서 살다 보니 못 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 한쪽에 자리한 은행나무 잎이 진한 노랑으로 물들었고, 단풍잎은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한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네, 가을이었네. 몰랐다.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서늘하고, 그저 아침에 나갈 때 점퍼를...

희극이라 이름 붙여진 것에서의 지독한 폭력 - 페넬로페
고전을 읽을 때 내가 자주 고민에 빠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책이 써진 시대의 특성만을 고려해 읽을 것인가, 아니면 현대적 관점을 조금이라도 들이밀 것인가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은 그것이 어느 시대의 것이든 그 의미가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매번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 5대 희극에 들어가는, 1592년경 초연된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같은 작품이 내게 고민을 던져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번역가와 평론가는 이 작품이 역설적이며 극적인 반전과 풍자가 있다고 하...

첫사랑, 회로 작동기 - 차트랑
일련의 회로에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동기 혹은 계기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시골 마을에 새로 전입해 온 윤초시네 증손녀가 개울에서 던진 조약돌 하나가 소년이 아련한 첫사랑을 앓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소년은 '이 바보!' 였기에 조약돌에 튕겨진 물을 맞아도 싼 어리숙이었다.어째거나 대한민국에서 고전 음악 회로를 작동시키는 첫사랑 베스트 1위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이라고들 한다. 흔히, '입.문.곡.'이라는 얘기다. 아.... 연주를 들어보면 정말 이해가 간다. 황순원 '소나기'의 어리숙한 소년 주...

[페이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예술, 게르망트와 메제글리즈의 변증법적 종합 - 겨울호랑이
느닷없이 예전 콩브레 시절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바로 그 지고한 희열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마르탱빌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 희열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희열감은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세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광경을 보았는데, 그 너머로는 숲으로 덮인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언젠가 이미 보았던 광경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연 그와 똑같은 광경을 예전에 어디서 보았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언젠가 틀림없이 본 광경이란 느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어쩐지 주변이 낭떠러지인 정보의 바다... - 나귀님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솔직히 누군지 모르겠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진만 볼 때에는 <나의 투쟁>이란 오해 받기 딱 좋은 제목의 책을 쓴 스칸디나비아 작가인가 싶었는데, 헝가리 소설가라니 모르는 사람이 확실했다. 하긴 작년 수상자 한강도 '한승원 딸'로만 알았던 나귀님이니, 이름조차 생소한 헝가리 작가를 알았을 리 만무하다.물론 헝가리나 그 나라의 문학을 대놓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책 중에 그 나라 소설도 하나 있었다. 지난번 옥타보 미르...

에르노와 하라리 - 단발머리
1. 아니 에르노의 말 ​한국의 아니 에르노라 불리는 열정의 아이콘인 바로 그분이 아주 예전에 사 준 것을 이제야 읽었다. 손때 탈까, 아껴서 아껴서 읽다가 어쩔 수 없이 마저 읽었다.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와의 케미가 책의 성패를 가늠한다. 서로에 대한 정보와 이해와 존중이 있을 때 성공할 테다. 아니, 하나만 있어도 성공이다. 모르고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걸 다 인터뷰어의 잘못이라 할 수 없기도 한데, 푸코 인터뷰집(그 책 제목이 기억 안 난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에는 사회자가 말만 하면, ...

우리의 플랫랜드 - blanca
모두가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것에서 의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한 위계에서 자유롭기란 더더욱 그렇다. 당연히 보이는 가치가 다가 아니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런 원칙에 따라 살기란 시지푸스가 거대한 바위를 중력에 역행해 끌어올리는 것처럼 어렵다. 걸을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종이 동물원>...

믿음이란 무엇일까. - 꼬마요정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각자의 믿음이 달라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가 달라서, 이념이 달라서 등 말이다.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 모든 종교나 이념이 모두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이나 볼셰비키 혁명 같은 것을 들여다보면, 종교는 사랑을 외치고 이념은 모두가 평등하고 잘 사는 세상을 외치는데 정작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억압한다. 그것이 마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유일한 길인...

누군가의 삶을 엿본다는 것 - 푸른희망
누군가의 삶을 본다는 것우리는 보이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여기 두 삶이 있다.컬럼비아에서 40마일 떨어진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에게 태어난 스토너는 어느날 부모의 권유로 미주리 대학 농과에 입학한다.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워 졸엄 후 돌아와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보기를 희망한 부모는 기꺼이 아들을 대학을 보냈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이방인이었고 낯선 사람이었으나 문학을 만나면서 대학에 깊이 빠진다. 아니 문학에 눈을 뜨면서 배우는 즐거움, 읽고 쓰는 기쁨을 알게 된다. 문학으로 전과를 하고 전쟁동안 참전하지 않고 학...

오늘 내가 읽는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일부가 되어 줄 것이다. - scott
겨울이 성큼 찾아 오니 밖을 나서기 전 챙길 것들이 많다.머플러, 장갑, 모자, 마스크 그리고 언제나 몸과 혼연 일체여야 하는 스마트 폰...옷이 두툼해지는 겨울에는 가능한 가방 속에 많은 물건을 넣고 다니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른 것은 빼놓더라도 종이책은 반드시 가방 속에 넣고 다니고 있다.매일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커피를 내리는 시간 동안 오늘 하루 나와 함께 할 책을 고르는 것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무작위로 눈에 들어 오는 책을 고를 때도 있고 전문 지식분야를 쌓기 위한 책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책일 ...

이별하는 시간 - 자목련
책장의 시집을 정리했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읽지 못하는 미안함이 아니라 그 마음이 허영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시들, 읽고 싶을 때 읽어야지 하며 쌓아둔 시집들은 그 마음의 결과였다. 물론 계절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고 시가 있다. 좋아하는 단어가 등장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면 더 찾아서 읽기 마련이데, 그러다 보니 어떤 시집은 하나의 시만 읽고 나머지 시들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박준의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도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유독 짧은 시들이 많았고(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