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마이페이퍼 당선작

인간(Man)에게 사랑이 과연 가능한가 - 잠자냥
휴가 막바지에 읽은 앨리스 워커의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은 심정적으로 무척 힘든 작품이다. 읽는 동안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인간에 대한 환멸, 세상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고 나서도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과연 사랑이 가능한가. 아니, ‘Man’이라 이름 붙이고 스스로 인간이라 칭하는 그들- 그러니까 남자들에게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의 능력이 가능한가. 여자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순간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마는, 그리고 제 자식들마저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희망입니까, 연수씨? - 페넬로페
단편집은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데도, 읽다보면 그 단편들이 연결되어 마치 장편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그랬다. 작가가 시종일관 말하려는 것이 같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도 비슷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깝고 미래는 점점 더 비관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김연수의 소설에는 끊임없이 ‘희망’이 있었다. 굳이 각 소설을 나누고 분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 미래, 낙관-김연수는 우리의 삶이 결코 현재...

[페이퍼] 근현대 중국의 지방 통치 체제 - 겨울호랑이
공산당 일당 체제, 중국의 '당-국가 체제(party-state system)' 혹은 '공산당 영도체제(領導體制, leadership system)'가 유지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섯 가지의 '공산당 통제기제(統制機制, control mechanism)'가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p10)... 공산당 영도 체제가 '<당장>에 근거한 정치 체제'라고 한다면, 국가 헌정 체제는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 체제', 줄여서 '헌법>에 근거한 정치 체제'를 가리킨다. 중국의 ...

미디어, 쉽게 연결되는 것만큼 쉽게 끊어지는 - 자목련
다양한 SNS 채널이 있다. 나는 네이버 블로그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가입을 한 다른 채널이 있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은 아니다. 미디어를 테마로 한 『연결하는 소설』를 읽으면서 블로그를 통해 누구와 연결되고 싶은지 질문을 받은 것 같았다. 처음 블로그를 개설하고 무언가 쓰기 시작했을 때 아무도 모르길 바라면서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랐다. 익명의 존재, 닉네임으로만 알게 된 이들과 소통하였고 그 가운데 몇 명은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고 더 이상 익명이 아닌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한 것이다. 나와 그들을...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서(아닐 수도) - 다락방
좋아하는 작가에 대하여 쓴 잠자냥 님의 글을 읽고 나도 살짝 말을 보태보기로 한다.내 경우엔 얼마전 필립 로스에 대한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기도 했지만, 필립 로스의 글에 감탄하는 쪽이다. 필립 로스가 좋으냐 고 물어보면 확신을 가지고 네! 라고 할 순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뛰어난 작품 《휴먼 스테인》을 읽고 감탄과 동시에 원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전이나 후에 읽었던 그의 작품들, 《울분》, 《에브리맨》, 《죽어가는 짐승》,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을 때만 해도 필립 로스에 대한 별 감정이 없었으나, 휴먼 스테인은...

아무도 이쁘다 하지 않아도. - blanca
언니 같던 중학교 친구가 집에서 아주 멀리, 멀리 기대하지 않았던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멘붕에 빠진 나를 다독이며 선물을 줬다. 나의 적응을 도와줄 친구를 연결해 준 거였다. 아주 이쁜 친구야. 나는 역시 우리 동네에서 뜬금 없이 아주 먼 동네에 함께 던져진 다른 친구와 함께 그 백설공주를 닮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삼총사가 됐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만났다. 사인방이 됐다. 우리는 이십대에도 심지어 삼십 대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다. 첫애를 낳고 방금 내 몸에 벌어진 사건으로 멘붕에 빠진 나를 제일 먼저 찾아준 것도 그 친구들이...

삶의 빛나는 순간은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을지도.... - 바람돌이
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소설을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고 정의했단다. 이 정의에 딱 맞는 작가가 바로 그 자신이 아닐까?살다보면 뭔가 쨍하고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있다. 요새는 그걸 현타왔다라고 우스개소리로 얘기 하던데 뭔가 비슷한 맥락일듯도하다.내 삶에서 그런 순간들은 주로 '아 내가 호구였구나, 이 구역에 호구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게 바로 나라더니..... ' 뭐 이런 느낌일 경우가 많아 내 삶의 경험은 농담거리가 될지언정 이야기가 되지는 못하는 바이다.그렇다고 해서 호구인 내 삶이 딱히 달라지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깨달음은 ...

2023년 제발트를 읽는다는 건 - scott
[외국 도시에서 지인들에게 헛되이 통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참으로 큰 공허함을 자아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의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섰고, 다이얼을 돌리는 이 행위가 마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도박인 듯이 느껴졌다. 그러므로 전화기에서 다시 튕겨나온 동전을 집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밤이 될 때까지 다시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

서양 학술용어 번역어와 근대어의 탄생 - 거리의화가
학술의 분류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생기거나 사라지면서 변화해왔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러한 분류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즉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당연한 것으로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당연한 것‘이 있으면 ‘왜 그렇게되었는가‘라는 내력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내력을 알지 못하면 그 필연성도 잃게 됩니다. - P21오늘날 대학은 취업문을 위한 길로 전락해버린지 오래다. 학과는 문과와 이과로 분리되어 있어 서로 간 교류가 자유롭지 않다. 학생은 전공에 따른 전문화된 공부만 한다. 교양 수업이 있기는 하지...

에우리피데스, 라신, 괴테의 이피게네이아, 그리고 하루키 - 그레이스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십니까?”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주인공 와타나베가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말하고 있다. 환자는 여자 친구 미도리의 아버지다. 미도리와는 연극사 수업에서 만났다. 미도리가 병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간 사이, 아버지가 눈을 뜨고, 와타나베는 자기소개를 한다. 참 어색한 만남이다. 이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소소한 신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환자에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듯 보이는 이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가 등장한다. 왜 하필이면 에...

엄마는 베스트셀러만 읽어요 - 단발머리
방학 내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씨름하고 있던 큰아이는 책을 사 준다면 열심히 읽겠다 큰소리를 쳤다. 최근에 쟝님이 추천해 준 <기억의 뇌과학>을 살짝 권했지만 자기는 이 책이 더 좋겠다 해서 그래라 그럼, 하면서 큰아이가 고른 <천 개의 뇌>을 구입해 주었다.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는지, 아롱이는 느닷없이 <현대사상입문>을 읽고 싶다고 했나 보다. 큰아이가 그 책은 집에 있어, 엄마 책, 이라고 말해서 아롱이는 책(구입)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이는 1학기 때 기숙사에 ...

같은 V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연히 발견한 한국 출간 전 추리소설 - 달자
알라딘 사이트를 둘러보다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4월의 유혹>.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출간하는 책들은 구성이 좋아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편이다.특히 각 시즌 별로 컨셉을 달리 해서 출간하는 세계 문학 시리즈가 흥미롭다.<4월의 유혹>은 알라딘 서재 팔로워 분들이 왕왕 읽고 후기를 남겨주셨던 책, <불쌍한 캐럴라인>과도 함께, 휴머니스트 세계 문학 시즌 5 -할머니라는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 일단 표지에 눈길이 갔다.테이블 뒤로 펼쳐진 눈부신 푸른빛의 바다 해안선을 바라보는 ...

어제,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아직은.(불어판 원문을 내가 번역함)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 초란공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1945 히로시마》 존 허시(John Hersey) 지음 | 김영희 옮김 | [책과함께] | (2015)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관련된 배경을 더 이해해보려고 《카운트다운 1945》와 《원자 스파이》, 그리고 《1945 히로시마》를 이어서 읽었다. 특히나 오늘(2023년 8월 24일)은 일본 정부가 오후 1시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앞으로 30년간 방류하기로 하고 첫 발을 뗀 날이기에 오늘을 기억해두고자 글을 남겨둔다. 1930년대...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해서 - 구단씨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는 각각 자신의 재능대로, 자신의 기질대로 열심히 삶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어떻게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놀든 일하든 배우든 실패하든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은가. (초보 노인입니다 195페이지)누군가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보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당황스럽다. 내 나이를, 내가 모른다. 금방 계산이 안 된다. 그래서 태어난 해를 말한다. 몇 년생이요. 그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높게만 보였던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어 벌써 이 나이라고? 나, 많이 늙었구나. 나보다...

나의 아름다운, 그 무엇 - 유수
아이의 솜털이 햇빛에 비쳐 반짝거린다. 귓바퀴, 팔꿈치 위, 광대와 볼 라인을 따라 동그라니 줄지어 있다. 회색인지 하얀색인지도 모를 섬유, 얼핏 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균일하게 누운 그 천연덕스러운 모양새를, 본다. 분명 매일 보는 아이 몸의 일부인데 낯설다. 어제도 있었던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함께 해온 시간을 일순 몽환의 영역으로 소환하면서 이제야 저를 발견했냐고 능청부리는 솜털을 보노라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순간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