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시리즈가 새로운 표지로 재간행되었던데, 나귀님 눈에는 20년 전 구판 표지보다 오히려 더 못나지지 않았나 싶었다. 내친 김에 오래 전 사다만 놓고 들춰본 적 없었던 구판 전9권을 이참에 다 읽고 내버려야겠다 싶어 하나씩 꺼내 읽으며 중간중간 마주친 오역과 수정 사항을 정리하는 중인데, 이게 의외로 꽤 재미있는 소설이다!


여성 작가가 쓰고 소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만 놓고 보면, 석판 들고 사람 패는 '빨갱이'가 나오는 또 다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 넘겨짚었는데, 실제 내용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파생된 '로빈슨계 소설'의 숱한 하위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에서 시작된 '가족 로빈슨' 계열의 모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게 보인다.


19세기 미국 중부에 맨몸으로 넘어온 개척민 일가가 숲과 평원과 마을로 옮겨 다니며 오두막과 판잣집을 짓고, 채집과 사냥과 농사로 식량을 마련하며, 각종 필수품을 직접 만들거나 흥미로운 대체품을 찾아내고, 들불과 홍수와 폭설과 굶주림과 해충과 맹수와 강도 같은 갖가지 위험을 헤쳐 나가는 내용이니, 이것만 놓고 보아도 충분히 훌륭한 모험 소설인 셈이다.


특히 남성 독자라면 특히 제5권인 <소년 농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행 순서로는 두 번째이지만 여주인공의 서사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지금은 다섯 번째로 밀려났다는 '친숙한' 작품 외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주인공이 속한 중부 개척민 가족과의 생활과는 매우 다른 동부 농민 일가의 생활을 흥미롭고 자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가리키는 아홉 살 '소년 농부'는 일찍부터 부모를 도와 농사를 거들며, 언젠가는 멋진 망아지를 직접 길들여 보겠다는 포부를 품는다. 고사리손에 불과했던 아이가 갖가지 시행착오와 경험을 거듭하며 점차 어엿한 일꾼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서술하는데, 농업과 목축뿐만 아니라 목공과 각종 허드렛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예를 들어 제24장 "작은 썰매"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자기 썰매를 만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썰매란 놀이용이 아니라 무려 통나무 운반용이다. 제27장에 가서 주인공은 이때 만든 썰매에 송아지 두 마리를 묶어서 눈밭을 오가며 통나무를 나르고, 처음에는 실수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능숙해져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게 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의 아버지로, 시종일관 엄격하면서도 의외로 현명한 인물이다. 작품에서 드러난 그 경제적 사고방식은 지극히 원칙적이어서 이른바 '청교도 윤리'의 파생물인 듯 보이기도 하는데, 주가가 출렁일 때마다 원금이 녹아내리고 정책을 수정할 때마다 집값이 상승한다는 오늘날의 복잡한 경제 상황에선 의외로 신선하기까지도 했다.


예를 들어 마을 축제에서 5센트짜리 음료수를 선뜻 사는 사촌이 부러웠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 열 배인 50센트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50센트면 돼지 새끼 한 마리 가격이다. 돼지를 사서 기르면 훗날 10배인 5달러를 벌 수 있겠지. 음료수를 사 먹든, 돼지를 사 기르든, 네가 알아서 해라.' 아들은 고심 끝에 돼지를 사러 간다.


또 노점에서 야바위꾼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고 감탄한 아들이 그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은 알고 있지. 그건 그 사람의 장기야. 다른 사람은 도저히 이길 수 없어. 그런 데 돈을 걸면 절대로 안 돼."(258쪽) 최근 중고생 사이에서도 인터넷 도박 중독이 늘어난다니,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해야 할 법하다.


축제에서 경마가 벌어지자, 다른 사람들이 돈 거는 것을 지켜보며 아들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경주에 돈을 걸면, 돈을 낸 만큼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만족감보다 좀더 실질적인 것을 얻고 싶구나."(264쪽) 나중에 아들이 남의 지갑을 주워 찾아주고 받은 사례금 200달러를 난생 처음 은행에 넣고, 돈을 찾는 방법을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도 말한다.


"돈을 달라고 하면 내줄 거야. 하지만 이 점을 명심해라. 그 돈이 은행에 있는 동안은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은행에 1달러를 넣어 두면 1년에 4센트를 벌 수 있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어. 5센트를 쓰고 싶으면, 돈을 쓰기 전에 우선 이걸 생각해 봐. 1달러를 벌려면 일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알겠니?"(361쪽)


물론 AI가 거리를 배회하고 ETF가 파도에 넘실거리는 지금의 상황과는 안 맞는 케케묵은 원론적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폄하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갖가지 생존의 기술을 회고하는 이 시리즈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평생 땅을 일군 저 아버지의 조언 역시 우리가 어느새 망각해 버린 지혜를 상기시키지 않나 싶어 해 본 말일 뿐이다.



[*] 제5권의 대표적인 오역으로는 "단풍 시럽을 굳힌 커다란 갈색 덩어리"(large brown cakes of maple sugar)를 "단풍 시럽을 넣은 갈색 케이크"(31쪽)로 오역한 것이 있다. 그 외에 본문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체불명의 "교반기" 삽화(202쪽) 문제도 있는데, 과연 이것이 삽화가 가스 윌리엄스의 잘못인가 아닌가를 놓고 해외의 "초원의 집" 애독자들 사이에서 지금껏 논란이 지속되는 모양이다.(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든가 말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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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2026년 노벨문학상 발표 사전 이벤트라며 "노벨문학상을 기다리며: 유력 후보 작가와 역대 수상작 함께 읽기"라는 메뉴를 일찌감치 만들어 놓았기에 클릭했다가, 마거릿 애트우드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단골 후보들의 명단 중에서 이건 문제다 싶은 이름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예상 투표에서 10위를 차지한 케냐의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이다.


평소 세계 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양반이야말로 올레 소잉카와 나딘 고디머 같은 아프리카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된 1980-90년대 이래 나이지리아의 치누아 아체베 등과 함께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던 작가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법도 한데, 진짜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응구기는 2025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이라면 생존 작가에게 시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 보니 사후에 수상한 사람도 하나 있기는 했다. 1931년 수상자인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1864-1931)가 그러했는데, 사실은 노벨문학상 선정을 담당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종신 사무총장으로 재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결정의 적절성을 놓고 적잖은 논란이 일었다.


한림원에서는 카를펠트가 1919년에 이미 수상자로 내정되었지만 스스로가 논란을 우려하여 고사한 바 있었으므로 사후에라도 시상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결국 '자체 표창'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다. 그나마 카를펠트는 1931년 4월 8일에 사망하고 7개월 뒤인 11월 8일에 수상했으니, 한 해에 사망과 수상이 이루어졌다.


반면 응구기 와 시옹오는 2025년 5월 28일에 사망했으니, 노벨문학상 발표 예정일인 2026년 10월 8일보다 1년 4개월 먼저 타계했다. 굳이 주려면 2025년에나 주었겠지, 설마 이듬해인 2026년에 주겠는가. 그런데도 알라딘에서는 후보로 꼽았으니, 지난번 윤석열을 풀어주었던 이유였던 신박한 날짜 계산법이라도 채택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무계한 실수이다.


더욱 황당무계한 점은 예상 투표에서 무려 4명이 응구기의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에 기꺼이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최소한 응구기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일 법한데, 정작 그의 타계 소식까지는 듣지 못한 듯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투표 참가자야 알라딘에서 내놓은 명단 중에 아는 작가가 있어 반가웠을 뿐일 테니, 결국 원흉은 알라딘이다!


평소에 '좌파' 코스프레 좋아하던 알라딘이니, 어쩌면 어디선가 들어 본 해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사후 수상 절대 금지 규정도 없고, 노벨문학상과 죽음 겸직 불가도 사실은 관행에 불과하니 십중팔구 생존 작가들 사이에서 '상 나눠먹기'를 의도한 것뿐일 수 있다며, 스웨덴 한림원을 향해 하루속히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라고 오히려 큰소리치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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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알라딘에서 <완서학의 정동들>이라는 책의 북펀드 광고가 나오기에, '설마, 아니겠지' 싶은 미심쩍은 마음에 클릭해 보았더니만,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거'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년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 학자들의 공동 연구서인 모양인데, 나귀님이 보기에는 '완서학'이라는 명칭이 영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거다.


이런 식의 명칭은 유학에서 독자적인 학파를 수립한 경우에나 해당하는데, 옛부터 명(名: 이름)은 부모만 부를 수 있고 나랏님조차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기피[諱] 원칙에 따라, 동료와 제자가 부르던 명칭인 호(號)에 '-학(學)'을 덧붙인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학', '이학', '식학'이 아니라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이라는 명칭이 있는 것이다.


박완서는 생전에 호(號)가 따로 없었으니 명(名)인 '완서'에 '-학'을 붙인 모양이지만, 앞서 말했듯 명(名)이나 자(字)를 기피하는 일반적인 원칙에는 어긋난다. 이제 와서 유학의 그런 원칙을 굳이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도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박완서 연구'로 충분할 법한 작업에 굳이 '-학'을 갖다 붙인 것부터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과연 박완서의 작품 세계가 국문학 분야에서 별도의 '학'을 수립할 만큼 독보적이었냐는 의문도 제기해 볼 만하다. 동시대 작가로서 충분히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이문구나 박상륭만 해도 사후 전집이며 연구서는 간행되었지만 '문구학'과 '상륭학'은 없다. 여성 문학으로 좁혀 봐도 '경리학'이나 '혜석학'(영어로 hyermeneutics?) 역시 없다.


물론 나중에 가서 '강학'이나, '한강학'이나, '노벨부커한강학'이나, '한국최초노벨문학상수상추카추카한강학'이 나올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코미디언 이경규의 말마따나 '과분한 칭찬은 결국 엿 먹이기'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생전에 남긴 에세이에 드러난 평소의 소박한 성격대로라면 고인조차 '완서학'에 손사래를 치고도 남지 않을까.


여기서 문득 고인이 언젠가 남영역에서 오도가도 못했던 사연을 털어놓은 에세이가 생각난다. <세상에 예쁜 것>에 수록된 "나는 누구일까"라는 에세이인데, 원래 <법보신문>에 기고한 칼럼이었는지, 현재 해당 매체의 사이트에서도 원문을 읽을 수 있다.(그런데 정작 거기에는 제목이 "나는 구구인가"로 잘못 나와 있어 '박완서의 굴욕' 시리즈의 연장이 되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는 지인과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에 왔는데, 뒤늦게야 핸드백 안에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음을 깨닫고 당황했다는 것이다. 노인 무료 승차권을 얻으려 해도 신분증조차 없으니, '나를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나'를 놓고 한참 동안 실존적인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결국 '이뭣고' 화두의 연장이라 불교 신문에 기고한 걸까).


문득 저자는 가끔 독자가 자기를 알아보고 말을 걸던 것이 기억나서, 혹시나 이곳에도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있다면 돈이나 전화를 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남영역에서 목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사후에는 새로운 '학'의 주인공이 된 유명인인데도, 숱한 행인 중 누구도 끝내 알아봐주지 않아 좌절한다.


지금 와서는 웃음을 자아내는 실수담이지만, 이미 유명 작가였던 박완서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여전히 작은 존재임을 실감하며 새삼스레 겸허한 마음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 민망한 경험을 털어놓은 것 역시 고인의 소박함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라고 치면, 아무리 흠모의 마음이라도 '완서학'은 과하지 않나 싶어 한 마디 해 보는 것뿐이다.




[*] "박완서 칼럼 - 나는 구구인가", <법보신문> 2004년 8월 10일자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6541)


박완서의 다른 여러 '굴욕' 중에는 컴퓨터가 바이러스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옆에 놓인 디스켓도 감염될까봐 얼른 치우다가 수리 기사에게 바보 취급 당한 일, 역시나 같은 수리 기사에게 자기가 컴퓨터로 글 써서 돈 번다고 자랑했다가 '타자 빠른 젊은 사람도 수두룩한데 할머니한테까지 입력 일거리가 돌아오느냐'는 반문을 들은 일, 트럭 몰고 다니는 과일 장수에게 '빈곤 아동 수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버금가는 좋은 책 많이 쓰세요'라는 덕담을 들은 일, 택배 오배송에 항의했다가 한밤중에야 배달을 온 젊은 택배 기사에게 핀잔을 들은 일, 또 다른 수리 기사에게 뭘 물어보았다가 '당근이죠' 하는 답변을 듣고 영 이해를 못했다가 뒤늦게야 그게 '당연하다'의 은어임을 깨닫고는 새삼스레 당근의 처지를 걱정한 일, 딸들에게는 맥주를 잘만 따라 주면서 마누라가 한 잔만 달라고 애원해도 항상 거품만 부걱부걱하게 조금 따라주는 남편에게 영 서운했던 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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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바깥양반이 저녁 먹으러 나오라기에 약속 장소로 가는데, 정류장에 멈춰 선 버스 옆구리 광고판에서 희한한 문구가 눈에 띈다. "아부지 뭐하시노? 지휘하시는데예" 클래식 공연 광고 치고는 참 희한하다 싶어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정민의 차이콥스키"라는 공연 제목 아래에 작은 글자로 적힌 "정명훈 아들"이라는 문구가 뒤늦게야 보였다.


저 유명한 영화 대사를 인용한 것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아버지가 지휘하고 아들이 협연하거나, 또는 부자가 하루씩 연이어 지휘하는 이색 연주회인 것인가 추측했었는데, 알고 보니 지휘자 정명훈의 아들 정민이 지휘하고 다른 연주자가 협연하는 공연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문득 요즘 유행하는 밈처럼 '얼마나 성공하고 싶은 건지 감도 안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 전 지휘자 정민의 데뷔를 앞두고 나왔던 여러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자가 지휘자로 활동하는 사례는 해외에서 드물지도 않고, 또 정명훈 자체가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유명한 지휘자이니 그 아들에게도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직접 참여하지 않는 공연에도 그 후광을 굳이 빌려오는 것은 좀 민망하지 않나 싶다.


스포츠 스타 2세인 이정후와 차두리도 유명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고충을 토로한 바 있지만, 그래도 각각 메이저리그와 광고계(?)에서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는 후광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여길 만한데, 정민의 경우는 오히려 후광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셈이니 이상한 일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 '빽'을 사용한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지 않을까.


연예계의 스타 2세 중에는 아버지와 비교되거나, 또는 그 후광을 입었다고 비판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예명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광고에서부터 대놓고 '지휘하시는 아부지'를 들먹인 것은 뭔가 지나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지휘자 정민'으로서가 아니라 '정명훈의 아들'로서 평가를 받겠다는 의도인 것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말하자면 '지휘봉수저'인 셈인데, 나날이 경쟁이 심화하는 세상이다 보니 유독 불공정에 민감한 최근 풍조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도 궁금하다. 물론 조국 사태부터 갑질 학부모까지 갖가지 '내 새끼 지상주의'가 판치고, 신임 장관 후보자 중에도 가족 특혜 논란에 휘말린 사람이 여럿이라니, 이쯤 되면 이것도 한국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라 봐야 할지 모르겠다만...




[*] 그나저나 어제 뉴스를 보니, 어느 유명 에세이 작가가 신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출판사와 공모해서 사재기에 나섰다가 적발되어 재판에 넘어갔다고 한다. 구작 중에는 무려 170만 부나 판매된 베스트셀러도 있다 하고, 심지어 감성 에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귀님조차 저자 이름이나 책 제목을 중고샵에서 한두 번쯤 접한 듯한 느낌마저 있으니 제법 유명한 사람인 모양인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사재기한 신간뿐만 아니라 구간도 모조리 절판되었으니, 이쯤 되면 황금 알을 낳다 말고 할복한 거위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문득 저 사람도 '얼마나 성공하고 싶은 건지 감도 안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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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이 사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전쟁이며 캐나다와의 호수 전쟁(?)으로 한창 바쁜 와중에도 굳이 짬을 내서 일주일간의 조기 게양을 명령했다는 것은 살짝 뜬금 없지만, 그만큼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큰 연예인이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정작 코로나 백신이며 동성애자를 대하던 파튼의 태도는 트럼프와 정반대였었는데도.


미국의 컨트리라면 한국의 트로트와도 유사하게 골수 팬이 많아서, 비록 세계적인 인기는 뒤떨어지더라도 판매량은 어마어마하다고 알고 있다. 돌리 파튼도 1980년대 초의 전성기 이후로는 줄곧 하향세라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유작 앨범 <록스타>의 참여자들만 봐도 대중 음악계에서는 '큰할머니' 대접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1980년대에는 크로스오버를 통해 빌보드 메인 차트와 컨트리 차트 모두를 석권한 컨트리 가수가 여럿 나온 바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라이오넬 리치 작곡의 "레이디"로 인기를 끈 케니 로저스이고, 또 한 명의 사례가 "나인 투 파이브"로 인기를 끈 돌리 파튼이다.(아울러 두 사람이 함께 부른 "해류 속의 섬"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나인 투 파이브"는 동명 영화의 주제가인데, 돌리 파튼은 영화에서 악질 상사에게 반기를 든 여직원 3인방 중 하나로 출연했다. 다른 출연작으로는 샐리 필드, 줄리아 로버츠, 셜리 맥클레인, 대릴 해나와 함께 나온 <철목련>이 있다. 여기서는 주인공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미용실 원장으로 나왔는데, 극작가 샘 셰퍼드(!)가 남편으로 나온다는 점도 특이했다.


파튼의 출연작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이라면 <텍사스 최고의 갈봇집>이라는 1982년 영화가 있다. 제목 그대로 20세기에 텍사스 라그레인지에 실제로 있었던 '치킨 랜치'라는 성매매 업소(!)를 소재로 했는데, 본래 그곳에 관한 탐사 보도 기사가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뮤지컬이 먼저 제작되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까지 제작되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치킨 랜치'는 대공황 시절 쪼들리는 손님들에게 닭 한 마리씩을 화대로 받고, 아예 그 닭들을 이용한 양계장을 부업으로 삼으며 생겨난 별명이다. 여성 포주가 종사자의 위생을 철저히 관리하고, 수익금 일부를 지역에 기부금으로 내놓고, 지역 상점에서 물품을 구매하고, 심지어 운영 중 얻은 정보를 경찰에 제공하는 등 여러 모로 상생 협력(?)을 지속해 나갔다.


그래봤자 성적 착취에 불법 영업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괴짜 경제학> 류의 연구에서 드러났듯 해적부터 마약 밀매 조직에 이르는 범법자들의 무리 역시 나름대로 효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문화를 구축하게 마련이므로, '치킨 랜치'와 '머스탱 랜치' 같은 유명 성매매 업소가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주목 대상이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치킨 랜치'는 당대의 여타 성매매 업소에 비해 진일보한 편이었다는 평가마저 나오니, 어쩌면 여성사 분야에서도 또 하나의 빈칸을 채우기 위한 시도로서 해당 업소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를 시도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잭 더 리퍼의 희생자인 빅토리아 시대 성매매 종사자들에 대해서도 최근 유사한 맥락에서의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듯하니까.


여하간 이래저래 민망한 소재와 내용일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삽입곡 중 하나가 돌리 파튼이 직접 작사작곡한 "당신을 언제나 사랑할 거에요"인데, 본래 1974년에 발표되었다가 1982년 이 영화 덕분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훗날 휘트니 휴스턴이 영화 <보디가드>의 주제가로 리메이크하여 지금까지 전세계 사람이 다 아는 '앤다이아~'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파튼은 성매매 업소의 여주인으로 나왔는데, 본인도 인정한 평소의 "싼티 나는 이미지"에 딱 어울렸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목청과 커다란 가슴(!)으로도 유명했으니, 유명한 '바니' 복장으로 <플레이보이> 표지에 등장하는가 하면, 젖샘세포를 이용한 세계 최초 체세포 복제양 '돌리'의 이름 유래가 된 것 역시 그런 이미지의 연장이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에 성상품화라는 비판 여론이 나오고도 남았을 법하지만, 정작 파튼 본인은 이 모두를 유쾌한 농담쯤으로 여긴 듯하다. 언젠가 조이스 캐롤 오츠도 <플레이보이>에 기고한 것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 진영을 향해 '내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다고 해서 그 매체의 모든 주장에 동조한 것이겠는가?'라면서 일침을 놓은 것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제목에서 언급한 헤밍웨이 소설과 돌리 파튼이 도대체 무슨 관계냐?'는 질문도 나올 만하겠다. 대답은 이렇다. 앞에서 언급한 파튼과 로저스의 듀엣곡 "해류 속의 섬들"의 제목이 헤밍웨이의 사후에 여러 권 간행된 유작 중 최초인 동명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유작으로는 <에덴 동산>(1986)과 <여명의 진실>(1999)이 있다).


파튼과 로저스의 "해류 속의 섬들"은 훗날 랩 음악에 샘플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던데, 김진태의 만화 <호텔 캘리포니아>에선 컨트리 팬인 백인 교도소장이 툭하면 '힙합 정신'을 외치는 흑인 죄수들을 향해 '오, 그 노래도 원곡은 컨트리였지!' 하면서 흥을 깨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했었다.(한동안 네이버에도 연재하던 김진태인데 요즘은 뭘 하는지 궁금해진다).


헤밍웨이의 소설 <해류 속의 섬들>은 특이하게도 일본 만화 <바나나 피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주인공의 스승인 해결사가 좋아하는 소설이어서 항상 들고 다니면서 읽는 것으로 나왔었다. 만화 제목인 "바나나 피쉬"부터 샐린저의 단편에서 따온 것이라니, 어쩌면 만화가 본인이 영미 현대 문학 애독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해류 속의 섬들>은 1970년에 현암사에서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고, 이후 무려 반세기 만인 2022년에 '고유명사'라는 출판사에서 새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신간의 소개글에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 <해류 속의 섬들>은 1970년 한자가 뒤섞인 세로읽기 판(현암사)으로 출간된 이후, 무려 53년동안 번역이 안된 채 미출간 상태로 남아있었다"는 의아한 구절이 있다.


왜 의아한가 하면, 현암사 구판이 "세로읽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자가 뒤섞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제목만 <海流 속의 섬들>로 한자가 들어갔을 뿐, 본문에서 한자 노출은 '二개'나 '五주' 같은 숫자 표기뿐이고, 단어의 경우에는 '유목(流木)'처럼 한글과 병기했다. 결국 번역자나 출판사는 "한자가 뒤섞인" 책 표지만 보고 지레짐작한 것 아닐까?


따라서 현암사 구판을 굳이 "한자가 뒤섞인" 책이라 지칭한다면, 고유명사 신판은 '한자' 十六 대신 '아라비아 숫자' 16을 사용했다는 점에 착안해 "아랍 문자 뒤섞인 책"이라 해도 무방할 법하다. 신판은 구판의 오역을 바로잡은 바람직한 면도 일부 있지만, 이처럼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떨어진다. 물론 그나마도 이젠 절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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