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전집 이야기를 하고 났더니 이번에는 문득 레닌 전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아고라 출판사에서 2017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해서 총120권으로 간행할 예정이라고 선전하기에, 과연 그게 가능할까, 차라리 전기가오리의 스탠퍼드 철학 백과 완간이 더 빠르지 않을까,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8년째인 지금 와서 다시 살펴보니 2020년에 아홉 권까지 간행되고 사실상 중단된 것은 아닐까 싶다.


아고라의 레닌 전집이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특유의 작은 판형과 알록달록한 표지 디자인이다. 말이 좋아 전집이지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외양을 보면서, 이건 120권이 완간되어서 한데 꽂아 놓아도 진짜 정신 없어 보이겠다 싶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디자인 쪽으로는 뭔가 좀 오판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죽하면 나귀님조차 헌책방에서 한 번 사고는 더 사고 싶지 않았을 정도니까.


마르크스 전집도 그렇지만, 레닌 전집도 지금 와서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꼭 필요하다면 선집 정도가 어땠을까 싶은데 굳이 전집을 시도하다 중단되었으니 안타깝다. 예전에 나온 <레닌 저작선>은 역시나 소련 붕괴 이후 헌책방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기에 불량 식품 사먹는 심정으로 몇 권 사다 놓았는데, 아직 구입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지금 생각난 김에 검색해 보니 의외로 중고가가 많이 오른 듯하다.


스탈린 선집이며 모택동 선집도 나오다가 중단된 줄 알았더니,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전자는 2권까지 나오고 후자는 4권까지 나왔다. 전기에 곁들여 읽으려고 구입한 것인데 막상 책을 사고 나니 관심이 시들어 버려서 그냥 차일피일하던 것이 십수 년째이다. 그러고 보니 트로츠키며 등소평이며 심지어 체게바라의 선집도 반짝 하고 나왔다가 사라졌던 모양인데, 또다시 십수 년이 흐르면 유행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에 요즘 다시 책을 모으고 있는 소련 작가는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듯한 막심 고리키이다. 원래는 체홉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읽던 단첸코의 회고록에서 (번역은 정말 엉망, 엉망, 엉망이었지만!) 유난히 고리키가 흥미로운 인물처럼 묘사되기에 그의 희곡부터 시작해서 에세이를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시기상으로 레닌이며 스탈린과도 겹치는 인물이니 이래저래 또다시 빨긋빨긋한 책들을 뒤적이게 될 것 같다.


사실 마르크스며 레닌이며 기타 온갖 빨갱이들의 책에 대해서 나귀님이 가진 관심이라곤 선집이나 전집 같은 세트 자체에 대한 흥미 이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세트에 포함되기 때문에 억지로 구입한 책 중에서도 의외로 결국 읽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가장 최근의 경우에는 이번 의사 파업을 계기로 읽은 <플렉스너 보고서>가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충동 구매의 희박한 장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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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 광고 중에 "MEGA 제1-10권 출간 시작"이란 것이 있기에, 이건 또 MWONGA 싶어 눌러보니 "맑스/엥겔스 전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려 13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인데 "제1-10권"이라고 하니 설마 원서 "제1권부터 제10권까지"를 한 권으로 엮어냈다는 뜻은 아닐 것이고, 십중팔구 "1차분 전10권 중 제1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동아대 맑스엥겔스 연구소며 MEGA 독일어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확인해 보니, 알라딘 북펀드에 나온 "MEGA 제1-10권"은 결국 "MEGA 제I-10권"의 오기였다. 즉 맑스엥겔스 연구소의 공지사항에 썼듯 "제1부 제10권"을 말한 것인데, "제1부"를 로마 숫자(I) 대신 아라비아 숫자(1)로만 표시하다 보니 "제1권부터 제10권까지"로 착각한 거다.


이런 전집류의 권명 표기에서 별도의 규약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귀님 기억에 보통은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섞어서 I-3, II-2, III-1라고 표기하거나, 아니면 하이픈(-) 대신 "스랏슈"(/)를 써서 1/3, 2/2, 3/1라고 표기하지 않나 싶다.(MEGA 독일어 홈페이지에서도 로마 숫자와 마호로... 아니, 스랏슈를 사용해 구분했으니, 이게 맞지 않을까).


현재 북펀드에 올라온 I/10권은 <독일 제국헌법투쟁,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 계급투쟁, 독일 농민전쟁 외>라고 수록작 중 대표적인 것 세 가지의 제목을 모조리 적어 놓았던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냥 <독일 제국헌법투쟁 (외)>나, <저작: 1849/7-1851/6> 정도로 간략하게 표기하는 쪽이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I/10권은 1300쪽임을 감안하더라도 가격이 10만 원으로 상당히 비싸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는 톨킨 저작선이 이에 버금갈 만한데, "가운데땅 이야기들"은 1100쪽에 정가 11만 원, "호빗과 반지 연작"은 2400쪽에 정가 19만 원이고, 400쪽 도록이 정가 13만 원에 달한다. 어쩐지 맑스와 톨킨의 미친 가격 종말 전쟁 같다고 해야 하나.


결국 양쪽 모두 살 사람만 사라는 뜻인데, 하필 또 맑스의 저서이다 보니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공산주의는 그 순서만 거꾸로이다"라는 비아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셜 버먼은 냉전 시절 소련의 지원으로 간행된 맑스 저서를 헐값에 구입하면서 크게 감동했다고 회고했는데, 이제는 부처도 신도, 레닌도 스탈린도 없으니...


MEGA의 편찬에 관해서는 예전에 정문길 교수가 저서도 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문헌 비평을 통해 후세가 왜곡한 맑스의 본래 모습을 찾겠다는 목표야말로 공산주의가 폄하해 마지않았던 기독교 성서 신학의 행보를 답습하는 셈이 아닐까 싶어 우습기도 했었다. 문득 "맑시즘은 가장 성공한 기독교 이단"이라는 평가가 새삼 떠오르기까지 했었고.


어떤 면에서 맑스의 이론은 소련의 흥망으로 이미 검증된 셈인데도, 스탈린의 폭주와 소련의 폭망에도 '맑스께선 옳았으나 스탈린이 틀렸도다'는 변명이 등장했으니, 이 역시 '차르께선 선하시며 간신들의 농간일 뿐'이라는 궤변의 연장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일부만 틀려도 다 틀린 것이지만, 공산주의는 나라가 망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까.


내가 가진 맑스/엥겔스의 저서는 대부분 80-90년대에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펴낸 것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헌책방에서도 먼지만 쌓여가기에 재미 삼아 하나둘씩 모은 것이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로선 그저 추억의 빨간책일 뿐인데, 지금 와서 맑스를 다시 읽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맑스와 사회주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 책도 운동권 서적으로 간주되어 압수당했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지는데, 이번 총선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운동권 심판"을 들고 나왔다가 폭망한 현재 여당이며 정부의 분위기로 봐서는 MEGA의 속간에 발맞춰 "메가커피"며 "메가스터디"에 대한 탄압이라도 벌이지 않으려나.


MEGA 번역본은 2021년에 간행된 II/3권에 이어서 이번의 I/10권이 겨우 두 번째이다. 총114권으로 예상되는 전집의 완역은 불가능하겠지만, 선역도 상당히 오래 걸릴 것 같다. 그 사이에 톨킨의 유고를 편집한 "가운데땅의 역사" 시리즈가 번역된다면, 맑스와 톨킨의 미친 가격 종말 전쟁은 이후로도 지속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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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푸바오를 중국에 반환하게 되었다고 해서 떠들썩 하더니만, 당일이 되자 뉴스 중계 도중에 에버랜드를 떠나는 트럭 모습을 생중계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니 방송사마다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기에 신기한 일이다 싶어서 한동안 틀어놓고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푸바오 작별 생중계를 보고 있자니 곳곳에서 여자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기에 이건 또 뭔가 싶었다. 한국 최초 자연 번식 판다로 아낌 없는 사랑을 받았던 녀석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겠지만, 뭐, 저렇게까지 울고불고할 일이 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던 거다.


그러다가 문득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일화가 생각났다. 올 초엔가 유재석이 진행하는 대담 프로 <유퀴즈 온 더 블록>에 탤런트 나문희와 김영옥이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나문희가 사별한 남편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자, 옆에 앉아서 듣던 김영옥이 눈물을 펑펑 흘린다. 


노래를 마친 나문희가 '왜 나 대신 언니가 우느냐'고 농담을 건네자, 김영옥이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다 내 설움이지, 뭐. 내 설움으로..." 이 대목에서 어쩐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여자들이 전사한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애곡하던 대목이 떠올랐다.


그 시작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불화의 원인이었던 트로이 여자 브리세이스였다. 전쟁으로 남편과 형제를 잃고 적군의 노예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그나마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했던 적장 파트로클로스까지 죽은 것을 보고 본인의 거센 팔자를 한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신은 내가 이 막사를 떠날 때만 해도 살았으나 돌아와 보니 죽었군요. (...) 젊은 시절 부모님에게서 나를 넘겨받아 아내로 삼았던 남자도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도시 앞에서 찔려 죽었고, 내 어머니가 낳으시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형제 셋도 역시나 죽었죠."


곧이어 다른 트로이 여자들도 뒤따라 통곡하자, 호메로스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 "그녀와 더불어 여자들도 겉으로는 죽은 자 때문에 울었지만, 실상은 저마다의 슬픔 때문에 울었으니라." 즉 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며 한탄했다는 뜻이다.


푸바오와의 작별을 지켜보던 사람 중에는 '고작 짐승 한 마리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냐' 하고 비아냥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할 만한 여지도 충분히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날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심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꼬물이 시절부터 지켜보고 응원했던 마음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아쉬움의 눈물일 수도 있지만, 태어나서 자라난 동물원을 떠나 낯선 나라로 끌려가는 동물의 모습에서 세상 모든 억압과 폭력의 현실을, 또는 내일 다시 출근해야 할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감정 이입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생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그 특징이 없었다면 아마 인간도 인간다울 수 없었을 것이다. 푸바오를 보고 우는 사람을 비아냥거린 누군가에게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을 터이니.


아무리 이성적이고 침착한 사람도 갑작스러운 감정의 습격은 견디지 못한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아내가 죽은 당일에는 핵실험 때문에 정신이 없어 눈물도 안 났지만, 몇 년 뒤에 우연히 여성복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보다가 아내가 생각나 대성통곡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푸바오가 떠나는 모습에도 덤덤했고, 평소에도 예를 들어 알라딘 고객센터 직원에게는 가차 없이 굴던 나귀님도 앞서 일본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판다 샹샹이 우연히 일본인 관광객의 말을 알아듣고 깜짝 놀라 귀를 쫑끗하는 모습을 유튜브로 보니 안쓰런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사람마다 구구절절한 각종 사연이 방아쇠가 되어서 눈물을 자아냈던 것일 수 있으니, 울음은 똑같아 보여도 그 사연은 제각각일 수 있겠다. 그러니 남의 눈물에 대해서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 방아쇠가 판다건, 레서판다건, 쿵푸판다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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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수사반장>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드라마를 방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어서 계단 책장을 뒤져 보았다. 바로 저 유명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최불암의 실제 모델이라고 해서 유명한 최중락 전직 총경의 자전 에세이인 <우리들의 영원한 수사반장>(민중출판사, 2007)이다.


1929년생인 최중락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순경 계급으로 부임하여 1990년에 총경 계급으로 퇴임했고, 이후 에스원(세콤)의 고문으로 재직하다 2017년 사망했다. 주로 강력계 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범죄자를 체포해 "포도왕"(체포 실적 우수자)에 선정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수사반장> 자문을 맡았다.


본격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기존 강연문과 기고문을 재가공한 모양인지 내용이 다소 산만하고 오타가 종종 눈에 띄는 것으로 미루어 그리 잘 만든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갖가지 범죄 실화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기대만큼 자세한 내용까지는 아니어서 미진한 느낌이다.


예전에 아름다운가게에서 정가의 3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팔기에 심심풀이로 집어들었던 책인데, 범죄 실화라든지 하다못해 저 드라마 관련 일화의 참고 자료로 쓰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아울러 출간 이후의 변화한 세태를 감안해 보면, 책의 내용 중에는 칭찬보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내용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이승만 정권의 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자신도 상부의 지시대로 미리 표기한 투표용지 20매를 투표함에 집어넣었다는 증언이라든지,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자신이 체포한 범인 가운데 여러 명을 삼청교육대에 보냈다고 회고하면서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동을 사죄하는 대목 같은 것이 그렇다. 


초짜 형사 때에는 실적을 올리려다 끄나풀에게 속아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기도 하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서 무고한 피의자를 범인이라 우기기도 하고, 도난당한 유물을 찾아내라고 상부에서 독촉하자 위조품을 제작해서 바치는 둥, 지금 같으면 곱게 넘어갈 수 없을 법한 사고도 적지 않게 쳤다.


야산의 부패한 변사체를 발견하고는 신원 확인을 위해 손가락 하나를 떼어내 옷 주머니에 넣고 집에 왔다가 부인이 발견했다는 등의 엽기적인 내용도 있다. 과학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이다 보니 눈썰미와 으름장만이 유일한 수사 기법이고, 공조 수사도 원활하지 않아 경찰끼리 멱살 잡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고위층 자제의 일탈을 과감히 단속한 적이 있었다고 자랑하는 한편으로, 친분이 있는 유력자가 개입된 경우에는 사건을 은폐하거나 보도를 무마하는 데 개입하기도 했다. 뇌물 공여자인 사업가가 끝까지 함구한 덕분에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았던 경찰관 여럿이 복직하게 되었다며 감사를 표하기까지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투 경찰로 후방에서 인민군 패잔병 토벌에 참여하며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니만큼 당연히 보수적인 면모도 드러난다. 4/19와 5/16과 10/26과 12/12 같은 주요 사건 내내 현직에 있었지만 질서 유지에 노력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고, 박정희의 하사금 봉투를 가보로 삼았다며 자랑한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그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최근에는 경찰의 어설픈 대처며 각종 비리 때문에 대중의 비판이 따갑지만,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최중락이 현역이었던 시절에 비하자면 크게 개선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감안하면 완벽은 무리이지 않을까.


일각에서는 공권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공권력의 강화는 십중팔구 권위주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경찰이며 군인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함도 적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자유가 더 늘어났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 훨씬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문제의 드라마가 (그것도 무려 4/19에) 방영을 앞둔 상황에서 박종철의 어머니 사망 뉴스가 나온다. 저 악명 높은 고문치사 사건에서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궤변이 공분을 일으켰는데, 사실 이런 호통과 위협은 <수사반장>에서도 흔히 등장한 수사 기법이었다.


이후 밝혀진 것처럼 박종철을 죽음으로 몰아간 수사 과정은 단순히 책상 내리치기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탁 치니 억 했다"는 경찰의 궤변은 상당히 많은 것을 은폐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보다 한 세대 먼저를 배경으로 삼은 <수사반장> 프리퀄은 과연 당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까?


과거의 드라마는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나빠진 경찰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사회 비판을 배제하고 신파극을 지향했지만, 새로운 드라마는 내용이나 표현 모두에서 노골적 묘사나 조직의 부패를 다루는 최근의 경향을 반영하여 당시의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나 경직된 경찰 조직에 대해서도 다룰 만해 보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옛 시리즈 팬들에게는 설정 붕괴일 수 있으니, 과연 어느 정도까지 다룰지가 중요해지겠다. 마침 각종 사고와 비리로 인해 경찰에 대한 신뢰가 나날이 감소하는 상황에 나온 드라마이니, 어쩌면 옛 시리즈처럼 경찰 이미지 개선 도모 차원일지도 모르겠는데, 여차 하면 역효과만 생길 수도...





[*] 오리지널 드라마의 형사 4인방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맨 나중에 합류해 놓고 맨 먼저 사망한 남성훈이다. 말년에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며 방송 활동도 뜸해지자, 간만에 찾아간 단골 미용실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았다던가. 이후 잠시 배우로도 활동했나 그랬던 그 아들이 부친 사후에 인터뷰에서 원통해 하며 그 사연을 내놓기에 세상이 참 이렇구나 싶어 혀를 찼던 기억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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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왔더니 <피아노 조율사>라는 대만 소설 광고가 눈에 띈다. 영 생소한 작가이고, 내용 소개를 살펴보아도 딱히 호기심이 일지는 않으니 아마도 나귀님이 남은 평생 집어들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 책인데, 다만 딱 하나 흥미롭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간행한 민음사에서는 예전에 <피아노 튜너>라는 비스무리한 제목의 소설을 하나 간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튜너>는 2002년에 미국의 소설가 대니얼 메이슨이 간행한 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에 민음사에서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된 상태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피아노 조율사가 정부의 의뢰를 받아 식민지 버마의 오지에 있는 피아노를 조율하러 떠난다는 희한한 줄거리이다. 예전에 원서를 우연히 보고 관심을 가졌다가, 머지않아 번역서가 나왔기에 사다 놓았는데 지금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영제국 시절 오지 밀림의 피아노라는 설정만 놓고 보아도 딱 식민주의니 제국주의니 하는 비판이 나오기 쉽겠지만, 예전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늘날 남극 월동을 떠나는 대원들이 비디오며 DVD를 잔뜩 챙겨가는 것과도 유사한 일로 보면 어떨까 싶다.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도 밀림에 피아노는 가져갔지만 엑스레이 장비는 마다했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데, 그것도 맥락을 알면 딱히 욕먹을 일도 아니다.


피아노 조율사는 예전부터 업무는 쉽고 보수는 많은 개꿀 직업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아파트 주거가 일반화되기 이전, 즉 대가족이 단독주택에 살면서 마루에 피아노를 놓아두던 수십 년 전의 이야기인 듯하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전자 악기가 등장하면서 피아노 조율사에 대한 수요도 많이 줄어들어서 그 자체로는 돈을 많이 못 버는 모양이라 하니, 이것도 결국 한철 유행이었던 건가 싶다. 


버마/미얀마에 대해서는 아웅산 수지 때문에 한때 관심이 높아지다가 로힝야족 관련 논란으로 실망했다는 여론이 많아지더니, 이후 시민 봉기와 군사 독재의 재점화 등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나 싶었지만 지금은 또다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한국 업체가 미얀마에 건설하는 리조트인지 뭔지를 홍보하는 광고도 뜨고 하던데, 이제는 예전처럼 군부 독재 상태로 그냥저냥 흘러가는 건가 싶다.


미얀마의 역사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샵에서 구입한 딴민우의 저서 두 권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역사 교과서까지는 아니고 개인적인 회고와 의견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어중간한 역사 에세이였지만, 중간에 여기저기 펼쳐 읽다 보니 수십 페이지가 후다닥 넘어갈 만큼 의외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저자가 옛날 UN 사무총장이었던 (그래서 나귀님도 이름만 아는) 우탄트의 손자라는 점도 꽤 흥미로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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