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스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효율부(DOGE) 장관에 임명된 일론 머스크가 국제개발처(USAID)를 공개 비판했다고 하더니만, 급기야 홈페이지 접속 중단, 사무실 폐쇄, 출근 금지가 이어지며 조만간 조직 자체가 폐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국제개발처는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미국의 정부 기관으로 이름 그대로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 원조 사업을 담당한다. 제3세계의 재난과 빈곤 구제를 중심으로 현재 100여개 이상의 국가를 지원 중이며, 직원이 1만 명에 연간 예산만 65조 원에 달한다.


물론 인도주의적인 외양과 달리 실제로는 해외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선전 및 공작 기구라는 비판도 줄곧 있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관인데 트럼프와 머스크는 "범죄 조직"에 "과격 좌파"라며 축소를 추진한다니 의아한 일이다.


그간 USAID에서 팔레스타인 등을 지원했던 것이 표면상의 이유로 보이고, 트럼프가 추구하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에 따라서 불필요한 해외 지출을 줄인다는 맥락과도 일치하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하여 러시아와 중국만 웃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머스크는 예산 절감과 공무원 감축을 빌미로 물 만난 고기마냥 날뛰면서 재무부며 교육부와도 갈등을 일으키는 모양인데, 과거 "빨갱이 사냥"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기고만장한 나머지 군대까지 건드렸다가 역관광 당한 매카시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USAID라는 기관명을 오랜만에 들으니, 예전에 헌책방에 돌아다니던 영어 원서의 면지에 종종 붙어 있던 "악수 마크"가 혹시 그 상징 아닌가 싶었다. 구글링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위키피디아의 USAID 항목에 성조기 바탕에 악수하는 두 손의 문장(紋章)이 나온다.


종교학자 정진홍의 회고에서도 미국의 원조를 통해 들어온 영어 원서에 이 마크가 붙어 있더라는 증언이 있는데, 비슷한 연배의 김열규나 유종호 같은 학자들 역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문학 잡지를 통해 최신 연구 동향을 접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정확히 45년 전입니다. (...) 저는 아직 그 책을 기억합니다. 표지를 열면 미국의 원조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미국기 문장을 바탕으로 두 손이 맞잡은 그림이 있는 우표 네 배쯤 크기의 딱지가 붙어 있던 The Modern Library Giant 판."(<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117쪽)


나귀님이 가진 영어책 중에서도 "악수 마크"가 붙은 것이 있는데,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구입한 브라우닝 시 전집(The Poetical Works of Robert Browning.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05; rep. 1957)이다. 물론 USAID라는 명칭은 없지만 "악수 마크"임은 분명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본이 없는 브라우닝의 희곡 <피파가 지나간다>를 바로 이 책으로 완독했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 세상이 온통 평안하도다!"라는 찬탄으로 마무리되는 "피파의 노래"가 나오지만, 사실 이 희곡 자체는 정반대로 상당히 어둡고 "불편한" 내용이다.


주인공 피파는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로 매년 딱 하루뿐인 휴일을 맞이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가난해도 긍정적인 주인공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이웃들 역시 자기처럼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 그들은 시커먼 속내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간통과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심지어 피파의 유산을 강탈한 권력자는 이 소녀를 유곽에 팔아치울 계획까지 세운다!) 저지르거나 모의하는 사람들은 피파가 지나가며 부르는 노래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소녀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든다.


"피파의 노래"는 워낙 경건하고 긍정적인 내용이다 보니 <빨간 머리 앤>의 결말에도 인용되는 등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시로 유명한데, 사실은 주위의 음모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피파의 순진함을 강조함으로써 통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든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피파가 지나간다>의 내용을 언급한 글 대부분에서는 '순진한 소녀가 이웃을 회개시킨다'라고만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초판 간행 당시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에두른 해석에 가깝고, 지금에 와서는 그 암울함과 모호성이 더 주목받는 듯하다.


1950년대 말로 짐작되는 그때 고학생이던 정진홍은 과외로 번 돈의 절반을 털어서 USAID 마크가 붙은 <모비 딕> 원서를 구입했다고 회고한다. 구체적인 설명까지는 없지만 정황상 원조품으로 국내에 무료로 배포되었다가 헌책방으로 흘러든 영어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었을까.


구글링해 보니 한국전쟁 직후 미국이 보낸 밀가루 등의 원조 식량에도 이 마크가 붙어 있어서, 옛날 양반들 중에는 이 마크를 식품 회사 상표로 오해하고 "악수표"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식량부터 서적까지 한국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은 USAID라고 봐야 할 듯하다.


얼마 전에 송승환의 유튜브를 보니 가수 민해경이 나와 인터뷰한 내용 중에 과거 강남의 에이아이디(AID) 아파트에 살았다고 회고한 부분이 있던데, 이것 역시 과거 USAID의 원조로 지었음을 아예 이름에다가 밝혀놓은 이른바 "AID 차관 아파트" 가운데 하나였다고 알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일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굶주림을 채워준 식량과 서적 같은 구체적인 원조의 사례를 보고 들은 나귀님으로서는 USAID를 백해무익한 조직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선뜻 수긍이 가는 조치는 아니다.


그런데도 의견 수렴이나 여론 청취 같은 절차 없이 전격적으로 USAID 폐지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니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권 교체 직후 기관장 물갈이며 조직 개편 같은 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한데, 트럼프에 머스크를 "곁들인" 탓인지 유난히 매운 맛이다.


아직까지는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살아 있는 미국이다 보니, 이것 역시 관세 폭탄이며 이민자 단속 같은 트럼프 정권의 여러 겁박 시도처럼 결국은 흐지부지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무모한 비상 계엄 시도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자충수임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제도며 정책을 하루아침에 뒤집고 싶어 하는 트럼프이지만, 누군가의 지적처럼 이렇게 일관성 없는 깜짝 조치가 결과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오히려 불리하리라는 점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현재 대립 중인 두 기관의 이름 약자가 DOGE와 USAID이다 보니 졸지에 "강쥐"(doge)와 "원조"(aid)의 다툼이 되어 버렸다는 거다. 세인트버나드처럼 조난자를 구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강아지도 있었다던데 어째서 미국의 상황은 이처럼 "개판 5분 전"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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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막바지에 알라딘 중고샵에 <국역 요사> 상권과 하권이 있기에 구입했다. 사실은 "있기에"와 "구입했다"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가"라는 첨언이 들어가야 맞겠다. 권당 정가가 6만 원이나 하는 비싼 책이다 보니, 중고가가 절반 가까이로 책정되었어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며, 솔직히 당장 필요한 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로는 원체 보기 드문 물건에, 지난번에 알라딘 서울대입구점에서인가 달랑 중권만 구입해 놓은 상태였고, 최근에는 처세의 달인 풍도의 전기를 읽으면서 요 태종과의 일화도 ("부처도 할 수 없는 일을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해 요나라 군대의 약탈을 중단시켰다) 접했으니, 고민 끝에 지르기로 했다.


애초에 구입을 망설였던 이유 중에는 완질이 있을 때에 일부만 빼서 구입해서는 안 된다는 예전 '오프라인' 헌책방 시절의 국룰(?)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 <국역 요사>는 낱권 구입도 가능하도록 등록되었으니 셋 가운데 둘만 가져가도 잘못은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남은 한 권도 금방 팔린 듯하다.


지난번 서울대입구점에서도 <국역 요사> 중권을 보고 혹시 상하권은 없나 확인했더니, 검색은 되지만 재고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누가 사간 직후인 듯했다. 혹시 지난번 구매자도 전3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상하권만 구입했다가, 뒤늦게야 실수를 깨닫고 이번에야 중권을 구입해서 나귀님처럼 완질을 맞추게 된 것은 아닐지.


<요사>는 원나라 때 저술된 기전체 역사서로, <사기>부터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정사를 통칭하는 "24사"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219년(907-1125) 역사를 서술했으며, 본기 30권, 지 32권, 표 8권, 열전 45권, 국어해 1권으로 총 116권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문 포함 B5 판형으로 총 2천 페이지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삼국과 고려 관련 지명과 사항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편찬 기간이 짧기 때문에 내용의 흠결이 많아서 사료 가치에 대한 의문도 종종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심지어 번역 과정에서도 일부 사학자가 반대 의견을 제시해 난처했었다는 후일담이 역자후기에 나와 있었다.


지금도 <요사>를 이용한 연구가 줄줄이 나오는 상황에서, 완벽하지 못한 사료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 역자의 논리인데, 우리에게는 가장 요긴할 법한 "이국외기" 중 "고려" 편만 해도 <고려사> 등의 사료와 맞지 않는 내용이 상당수라서 일일이 역주로 바로잡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기는 해 보인다.


나귀님은 구입 직후 "본기" 중에서 태조와 태종(실제로 풍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항목을 읽어보았고, "열전" 중에서 뒷부분의 문학, 능리, 탁행, 열녀, 방기, 영관/환관, 간신, 역신, 이국외기 항목을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란어 어휘를 설명한 "국어해" 항목까지 읽어보았는데, 무미건조한 사실 나열 위주라 별 재미는 없었다.


역사통 선배의 말에 따르면 "24사" 중에서는 처음 네 가지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정도만 읽을 만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렇다더니만, <요사>의 경우만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다만 호기심 많은 나귀님 입장에서는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던 역사서가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4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30년 전 봉천동 헌책방 삼우서점에서 파란 천으로 장정한 축쇄영인본을 구경했을 때였다. <사기> 완역본조차 나오기 전이라 "열전"만 겨우 읽었을 때였으니, 그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많아 보이는 역사서의 육중한 외관 앞에서 정말이지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박영문고로 나온 세 권짜리 <십팔사략>을 우연히 구해서 읽어보니, 중국 정사 "24사" 가운데 <사기>부터 <신오대사>까지 "18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기에 다시 한 번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십팔사략>은 중국보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인기였다는데, "24사" 자체가 귀한 변방에서 일종의 대용품이었던 듯하다.


가끔은 낯선 헌책방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똑같은 장정의 "24사" 우리말 번역본이 있기에 반색하며 집어드는 (그러나 어째서인지 항상 책을 펼쳐보기 직전에 깨어 버리는!) 꿈을 꾼 적도 있었으니,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새 "24사" 가운데 3분의 1쯤은 번역서가 나와 있다.


<사기>는 까치(1994-1995)에서 전7권(완역은 아니라고 한다)으로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김원중이 민음사(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고, 신동준이 위즈덤하우스(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다른 몇몇 출판사에서도 완역을 목표로 삼아 부분 번역서를 내놓았다고 알고 있다. "열전" 등의 부분 번역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한서>는 진기환이 명문당(2016-2021)에서 전15권으로 완역하고, 이한우가 21세기북스(2020)에서 전10권으로 완역했다. <후한서>는 역시나 진기환이 "본기"와 "열전"만 명문당(2018-2019)에서 전10권으로 번역했고, 어째서인지 "본기"만 번역한 것도 나와 있다. <한서>와 <후한서> 모두 "열전"만 선역한 것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삼국지>는 김원중이 신원문화사(1994)에서 전7권으로 완역하고, 나중에 민음사(2007)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가, 지금은 휴머니스트(2018)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 역시나 진기환이 명문당(2019)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연의>의 인기 때문인지 그 외에도 전자책이나 주문 제작으로 간행된 번역본도 다수 있는 모양이다.


<수서>는 지만지(2020-2023)에서 전13권으로 완간했지만, 원체 작은 판형에 값비싼 시리즈라서 분량은 6천 페이지에 가깝고 가격은 50만 원에 가깝다. <요사>는 단국대학교출판부(2012)에서 전3권으로 완역했고, <금사>도 단국대학교출판부(2016)에서 전4권으로 완역했다. 결국 24사 가운데 7종이 전체, 또는 일부 번역된 셈이다.


비록 일부 번역서에 대해서는 오역 비판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어쨌거나 나귀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요사>의 경우에도 실제로 읽어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진진하거나 유익하지는 않다는 점이 살짝 의외이기는 했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은 중국 정사들도 읽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24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십팔사략>이며 <자치통감> 같은 번역서를 통해서 중국사의 대강을 파악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지 오래이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 씁쓸한 일이다. 물론 그 사이에 현직 대통령 탄핵 심판은 세 번, 전직 대통령 구속은 네 번, 전직 대통령 자살도 한 번이란 사실만큼 씁쓸하기야 할까마는.


<국역 요사>에서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각주 색인은 있지만 본문 색인이 없다는 점이다. 마침 "국어해"에서 뱀의 말을 알아듣는(파셀텅!) "신속고"라는 인물이 언급되었기에 관련 본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색인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편집 구조상 전체 색인 작성이 어려워서라고 설명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대학 출판부에서 내놓은 학술서에 걸맞게(?)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역자후기에서까지 "요나를 연구"한다는 오타가 나왔으니,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민망하지 않겠나. 죄인이 감옥에 "갖혀" 있었다는 오타도 나온 것을 보면, 단지 교정만이 아니라 번역자의 우리말 실력 자체부터 문제인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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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출판사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으니, 몇 년 전부터 또 하나 짜증났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최근 들어 신생 소형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나귀님 눈에는 영 생소한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는데, 그중에서도 몇 군데는 이름이 어쩐지 서로 엇비슷해 보여 헛갈리더라는 거다.


특히나 고약한 것은 "00의 00"라는 형식의 출판사 이름인데, 그리 흔치 않을 듯하지만 의외로 여러 개이고, 표지 디자인이나 출판 성향까지도 엇비슷해 보이다 보니, 나귀님 입장에서는 더 혼동하기 쉬워 보인다. 바로 "사월의책", "오월의봄", "봄날의책", "남해의봄날"이라는 출판사이다.


우선 "사월의책"은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이반 일리치 전집"과 "악셀 호네트 선집"이다. 최근에 나귀님이 구입한 리처드 로티의 책도 여기서 나왔다. 물론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의 회고록이지만.




"오월의봄"도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다가 지금은 전자보다 후자에 더 열심인 듯한데, 하나같이 시의적인 내용이니 의외로 수명이 짧을 수 있어 보인다.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일레인 스캐리와 사라 아메드는 여전히 나오지만, 나귀님이 좋아하는 토니 주트 책이 절판이라니 아쉽다.




"봄날의책"은 문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요즘 들어서는 해외 여성 작가에 집중하는 모양이다. 마니, 아랍, 북극, 침묵 등 초기에 나온 깔끔한 표지의 기행 에세이 시리즈가 계속되기를 바랐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후의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남해의봄날"은 문학, 그중에서도 에세이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특이하게도 경남 통영에 있는 지방 출판사라고 한다. 아쉽게도 나귀님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듯 보여서 지금껏 구입한 책도 하나 없고, 아마 앞으로도 구입할 만한 책은 딱히 없을 듯하다. 그냥 헛갈리기만 할 뿐.




물론 앞서의 글에서 밝혔듯 閣, 館, 堂, 院, 社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도 항상 서로 구분하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시나 앞서의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름부터 진부한 데다가 출판 성향이나 표지 디자인 등에서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쯤 되면 나귀님은 쌍팔년도에도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을 헛갈렸을 만한 사람이 아니냐는 의문도 일각에서 제기될 법한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종종 헛갈리곤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특유의 책등 "빨간 띠"가 출판사의 정체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장치였던 거다.


똑똑한 작가인 노라 에프런도 역시나 "00의 00"라는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운명의 역전>이다!) 기억 못해 헤맨 적이 있었다고 썼었으니, 이건 단순히 지능이나 노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애초의 제목 짓기 과정에서 창의성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출판사만 탓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제 우연히 네이버 연예 뉴스에서 최신 드라마 인기 순위를 확인해 보니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와 <모텔 캘리포니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창의성 부족은 비단 출판계뿐만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만연한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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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알라딘 북펀드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베 코보의 <벽>이 재간행될 예정이라기에 어떤 눈 밝은 출판사인가 궁금해 확인했더니 저놈의 '마르코폴로'라는 출판사였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동방견문록> 저자 '마르코 폴로'에 관한 논픽션을 검색했더니만, 엉뚱하게도 이 출판사의 책만 줄줄이 검색되어 짜증이 치밀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가져다 쓰려면 하다못해 '뿌쉬낀하우스'처럼 살짝 변형이라도 하든가, 다짜고짜 그 이름을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거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북펀드 중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 재간행 소식이 있길래 살펴보니, 이건 또 출판사 이름이 '구텐베르크'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요즘에는 출판사 이름 정하는 데에서부터 일찌감치 창의성이 바닥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閣, -館, -院, -堂, -社 등으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이 훨씬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폴로'나 '구텐베르크'가 더 개성적이거나 인상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알라딘에서 '뿌쉬낀'으로 검색하면 '뿌쉬낀하우스'도 덩달아 검색되어 불편하지만 (그런데 '푸시킨'이라고 검색하면 '뿌쉬낀'이라고 표기한 책도 줄줄이 검색되는 반면 '뿌쉬낀하우스'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쪽은 러시아 전문 출판사라는 정체성에 어울리는 반면, '마르코폴로'와 '구텐베르크'는 그런 것조차 아닌 듯하다.


이건 아동서 전집 출판사인 한국톨스토이, 한국헤르만헤세, 한국셰익스피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도대체 그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책과 그 출판사의 이름에 들어간 작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흠좀무'한 사실은 이 세 출판사가 사실은 똑같은 회사의 계열사인지 브랜드라는 점이다.


결국 '마르코폴로'건 '구텐베르크'건 '한국톨스토이'건 '한국헤르만헤세'건 '한국셰익스피어'건 간에, 해당 인물의 사상이나 유산과는 무관하게 그저 명성만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까치'도 조류 책만 내는 것까진 아니고, '동문선'도 한국 문학만 내는 것까진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그나저나 유명인의 이름을 출판사의 이름으로 차용하는 지금과 같은 풍조가 계속될 경우, 나중에 가서는 '한국보리스파스테르나크'나, '한국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나, '한국장마리귀스타브르클레지오'나, '한국토마스트란스트뢰메르'도 나올 법하다. 당연히 '한강'이나 '한국한강'이나 '노벨한강'은 거의 기정 사실처럼 보이고...



[*] 안부공방 이야기를 하려다가 얼떨결에 출판사 이름 이야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벽>은 1970년대에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세로쓰기 전집에 수록된 번역본으로 갖고 있는데, 완역이 아닌가 싶어 어제 다시 꺼내 확인해 보니 "S. 카르마 씨의 범죄"부터 "바벨탑의 너구리"까지 여섯 편이 모두 수록된 완역본이었다.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1977년에 나온 신조문고 일어판 <壁>도 한 권 나온다.(나귀님이 안부공방 좋아했네!) 새로 나온다는 책의 번역자는 과거에 <아베 고보 연구>라는 학술서도 내놓았는데, 고유명사 표기 등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눈에 띄어 딱히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번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이것밖에 없으니 살 사람은 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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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바깥양반이 TV에서 방영하는 양궁 예능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기에 나도 오며가며 띄엄띄엄 보게 되었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이미 은퇴한 선수들을 불러내서 개인전을 펼친 다음, 아직 현역인 선수들까지 추가해서 단체전을 펼치는 구성이었다.


제목부터 "전설의 리그"이다 보니, 바깥양반은 김수녕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한 모양이고, 나귀님은 김진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서향순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결국 두 명 모두 나오지 않아서 아는 얼굴은 기보배와 안산(!)뿐이었다.


양궁의 특성상 실력보다는 실수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역시나 많았는데,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은퇴 선수들이 종종 체력 저하로 오발하는 부분이 긴장감을 주는 재미 요소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세월의 야속함을 실감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데 활과 화살 이야기가 나왔으니 언젠가 활집과 화살집의 옛날 명칭에 관해서 알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수년 전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을 차용한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을 때에 그 정확한 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뒤져본 까닭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동화 같은 앞다리에 천둥 같은 뒷다리로"라는 가사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인데, <동편제 판소리 창본>(송순섭 & 전형대 편저, 한샘, 1991)에 나온 바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동개(筒介) 같은 뒷다리, 전동(箭筒) 같은 앞다리"(167쪽)라는 가사이다. 


동개(筒介, 또는 筒箇)는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메는 기구"이고, 전동(箭筒, 또는 箭筩)은 "화살을 넣는 통"이라고 각주가 붙었는데, 모양으로 설명하자면 동개는 활의 모양[B]대로 넓고 납작한 "활집"[D]이고 전동은 원통형의 "화살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판소리에서 호랑이의 굵은 뒷다리(U) 모양과 가는 앞다리(V) 모양을 동개와 전동에 빗대어 그럴싸하게 비유했다고 할 수 있겠다. 판소리 사설은 워낙 천차만별이라 똑같은 "수궁가"라 해도 이 대목 자체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에는 정확히 나왔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꽤 오래 전에 아현국민학교 앞 헌책방에서인가 구입한 책인데, 아마 나귀님이 처음으로 산 판소리 사설집이었을 것이다. 공편자 송순섭은 동편제에서 송만갑의 계보인 박봉술의 직제자이고 현재 무형문화재 "적벽가" 보유자라 한다. 


판소리 사설집은 이 책 외에 민중서관의 고전문학전집으로 나온 신재효 판본과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음반 가사집의 재간행 판본을 갖고 있다. 훗날 박이정에서 각종 이본을 총합한 시리즈도 내놓았던데, 탐은 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판소리며 민담이며 하는 구비문학 관계 자료를 한때 열심히 사 모았는데, 이제는 뭐가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헌책방에 도로 뱉어놓을 때가 된 것도 같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중고 가격도 비싸던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파는 게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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