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딘 북펀드에 <티무르 승전기>라는 것이 있다기에 눌러 보니, 이전에 나온 김호동 교수의 <집사> 완역본에 이어서 나오는 몽골사 원전 번역서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광고 문구를 대강 살펴보니 "완역, 축약본"이라는 표현이 나오기에 문득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완역이면 완역이고, 축약이면 축약이지, "완역, 축약본"은 도대체 뭣이냐 싶었던 거다.
"완역"은 문자 그대로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번역했다는 뜻이고, "축약"은 전체 내용 가운데 일부만 고르거나 압축했다는 뜻이니, 사실은 서로 모순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도 책 소개글에서는 스승 김호동이 "<집사> 완역, 축약본"인 <몽골 제국 연대기>를 내놓았고, 제자 이주연은 "<승전기> 완역, 축약본"인 <티무르 승전기>를 내놓았다고 적었다.
<집사>는 김호동 교수가 무려 20년 넘게 걸려서 전5권으로 완역했고, 그 방대한 내용을 축약한 것이 한 권짜리 <몽골 제국 연대기>이니, 결국 <승전기>와 <티무르 승전기>도 비슷한 관계라는 뜻인 듯하다. 하지만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승전기>의 완역본은 찾을 수 없었고, 이 작품의 번역서로는 이번에 간행이 예정된 축약본 <티무르 승전기>가 처음인 듯했다.
뒤늦게야 책 소개글의 작은 글씨까지 다 읽어보니, <승전기>의 완역본은 아직까지 단행본으로 간행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사실은 이주연이 김호동의 지도로 쓴 박사 논문 자체가 <승전기>의 완역본이라고 한다. 즉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아니지만 논문 형태로는 있으니까, 그 내용을 축약한 <티무르 승전기>를 간행하면서 굳이 "완역, 축약본"이라고 지칭한 듯하다.
하지만 "완역, 축약본"은 결국 "축약본"이지 "완역본"이 아니다. 따라서 "축약본"에 불과한 <몽골 제목 연대기>와 <티무르 승전기>를 굳이 "완역, 축약본"이라고, 또는 "교감, 완역, 축약 편집본"이라고 지칭하면 나귀님 같은 순진한 독자는 혼동만 겪을 뿐이다. 굳이 "완역"을 언급하고 싶었다면 역자 약력이나 일러두기 정도에서나 명시하고 넘어가도 그만 아닐까.
여기서 하나 의아한 점은 왜 <승전기>의 단행본 중 완역본보다 축약본이 더 먼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의 완역 자체가 '사건'이다 보니, 박사 논문이 완성된 2020년에 이미 주요 언론에서 이주연을 인터뷰했고, 인터뷰 말미에 완역본이 그해 안으로 간행될 예정이라는 설명까지 있었는데, 어째서 5년이 지나서야 축약본 형태로만 먼저 나오게 된 걸까.
서울대 사이트에서 이주연의 박사 논문 "티무르朝 史書, 야즈디 撰 『勝戰記』(Ẓafar-nāma)의 譯註"를 다운로드해 읽어보니, 나름대로는 적지 않은 고충이 있겠거니 짐작할 수 있었다.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수시로 시(詩) 인용문이 끼어드는 방식의 구성이다 보니,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와 각종 미사여구를 제외한 사실 위주의 편역서라야 더 유용할 법하다.
해당 논문의 연구사에도 나왔듯이, 18세기에 나온 불역본이나 영역본이 완역까지는 아닌 발췌에 머물렀던 것도 충분한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런 난점을 감안하면 축약본 <티무르 승전기>는 가치가 높아지는 반면, 완역본 <승전기>는 오히려 가치가 줄어드는 셈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껏 완역을 했더라도 실제로 단행본으로 나오는 것은 축약본뿐이니까.
<집사>처럼 상업 출판사에서 나오지 못하더라도, <승전기> 정도면 한국연구재단 번역총서 같은 데에라도 충분히 들어갈 만한데,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완역은 했지만 완역본은 없는' 셈이 되어서 '홍철 없는 홍철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인터뷰에서 <승전기> 외에도 중앙아시아 역사서 원전 번역을 몇 가지 더 했다던데, 그건 또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승전기>도 축약본을 보고 나서 완역본이 궁금한 독자라면 박사 논문을 공짜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이익일 수 있지만, 무려 115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논문을 뒤적이다 보면, 적어도 편집 면에서는 띄어쓰기 오류, 오타, 수정 실수, 용어 선정 등 아무래도 일반 단행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운 점들이 여러 가지 눈에 띈다.
나귀님의 관심사와 연결된 오류를 하나 지적하자면, <승전기>의 유럽 최초 번역가인 프랑스 동양학자 들라크루아(François Pétis de la Croix)에 관한 오타이다. 논문에서는 "프랑소와 페티스 델라 크로와"(F. Pétis de la Croix)로 적고, 그의 자료를 "프랑소와 사본"(Manuscript Francais)(62쪽)이라 했는데, Francais가 아니라 François라고 써야 맞을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천일야화> 계열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천일일화>의 번역자로도 유명한데,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바 있다. 물론 갈랑이나 버턴의 방대한 <천일야화>에 비하자면 덜 유명한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한 가지 이야기는 훗날 오페라로 각색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바로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원작인 "중국 공주 투란도트 이야기"이다.)
같은 페이지 각주 222번의 프랑스어 자료 제목에도 알파벳이 이중으로 들어가는 오타가 있던데 (예를 들어 françcais, sièecle, Méediterranéee) 십중팔구 c와 e를 ç와 é와 è로 수정하라는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서 생긴 오류인 것으로 짐작된다.(예전에 여진어 연구서에서 "일말사전"을 "일-말사전"으로 고치려다 "일가운데점말사전"이 된 것이 생각난다).
아울러 본문 도입부에서 점성술에 의거한 천체의 변화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여기서 몇몇 용어를 오늘날의 영어식 표기로 (예를 들어 "하우스"와 "쿼드런트 시스템"과 "홀사인 시스템"으로) 번역한 것은 영 어색하다. 어디까지나 현대식/영어식 표기에 불과한 그런 용어는 각주에나 참고용으로 적고, 차라리 신조어를 만들거나 음역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걸 완역본으로 만든다고 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역주를 선별하고 정리하는 것도 만만찮아 보이고, 수많은 페르시아어의 로마자 표기를 일일이 살펴보는 것도 역시나 만만찮아 보인다. 그러니 박사 논문을 뒤적인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완역본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 축약본이든 "완역, 축약본"이든 먼저 나와주는 편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은 "완역, 축약본"보다 "'몽골제국사 연구의 대칸'으로 불리는 김호동"이라는 구절도 낯간지럽고, "북펀드 굿즈"라며 선전하는 "<티무르 승전기> 수면안대"도 역시나 낯간지러워서 한 마디 꼬집어 줄까 싶어 쓰기 시작한 글인데, 박사 논문까지 뒤적이고 보니 새삼스레 번역자를 응원하고픈 마음이다. 물론 쓰다 보니 응원보다 '디스'가 더 많기는 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