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폭염이 한창인 와중에 알라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무려 세네카의 책이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기후 변화 때문인가, 아니면 또 리센느 때문인가. 이미 붓다와 쇼펜하우어 책이 한 번씩 차지하고 내려간 다음이니 세네카라고 해서 예외로 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그 세네카 책이 뭔가 함량 미달의 편역서로 보인다는 점이다.


문제의 세네카 책은 자기계발 콘텐츠로 구독자 90만 명을 찍었다는 유튜버 하와이대저택이 편저했다. 나름대로는 감명 받은 책이라고 해서 세네카의 저술을 직접 번역하고 재구성했다는데, 문제는 원문에 충실하지도 않고 뚜렷한 의도가 드러나지도 않아 영 애매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세네카의 책도 아니고, 하와이대저택의 책도 아닌 애매한 물건일 뿐이다.


보통 고전을 편역한다면 완역과 달리 편역자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만약 나귀님더러 세네카의 저술을 편역하라면, 오늘날의 국내 독자에게는 영 생소할 수밖에 없는 로마 제국 당시의 인명과 관직명 같은 각종 고유명사를 모두 발라내고,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일리가 있을 법한 내용만 선별해서 어느 잘난 꼰대의 조언처럼 꾸며내고 말겠다.


그런데 문제의 책은 완역본인 천병희 번역서와 비교했을 때 내용을 군데군데 덜어내고 다르게 연결해서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일러두기에는 영역본을 대본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있는 그 원문과 대조하니 그쪽과도 일치하진 않는다. 종종 축약과 첨언이 등장하다 보니 원래의 문맥과 사뭇 달라져 오해를 야기할 만한 부분도 없지 않다.[*]


세네카의 대화편에는 장절 구분이 있어서 편역서라면 그 출처를 표시하게 마련이고, '성공론' 분야의 편역서도 일부에선 이런 규약을 따랐는데, 이 책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분명히 세네카의 말과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곧이어 생소한 문장이 연이어 등장하는데, 이게 과연 다른 부분에 나온 세네카의 말을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편저자의 첨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세네카의 대화편에도 애초의 문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편역서라고 한들 내용을 삭제하거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 항상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장절로 그 출처를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그래서이니, 이를 통해 편역자가 어떤 의도와 논리로 세네카의 대화편을 재구성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저자의 첨언이 과도하게 섞이면 문제다.


편저자의 독창적 해석을 내세울 의도였다면 차라리 해설서를 쓰는 게 맞다. 예를 들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처럼 인용문을 내놓고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이면 충분했을 텐데, 세네카의 텍스트라고 해놓고서 실제로는 누락과 첨언이 많다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하와이대저택의 유튜브 콘텐츠를 누군가 이처럼 멋대로 편집해 유포하면 수긍할 수 있을까?


여하간 나귀님 기준으로는 절대로 세네카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편역서인데, 이런 책을 왜 만들고 왜 사는지 의문이다. 물론 하와이대저택은 '편역'이라는 말로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지금도 영화 <오디세이> 개봉에 맞춰 각종 '편역서'가 난무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읽은 독자라면 어디 가서 '세네카를 읽었다'고 자부하진 말아야 맞겠다.


이번 일로 인해 또 하나 걱정스러운 점은 앞으로의 부작용이다. 세네카의 말과 편저자의 말이 뒤섞인 책이 무려 베스트셀러씩에 등극했으니, 머지않아 양쪽의 말을 구분할 수 없는 까닭에 원문에는 없었던 편저자의 말이 세네카의 말로 와전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차라리 저 유튜버가 이미 여럿 나온 세네카 원전 번역서를 추천했다면 그 진정성도 인정했을 텐데.


그나저나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하와이대저택의 세네카 편역서가 무려 16,200원인데 천병희의 대화편 4종 완역본은 15,300원이라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재료도 덜 들어가고 조리도 애매한 음식을 더 비싸게 먹는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독자만 손해 아닐까. 물론 그 독자가 하와이대저택의 구독자라서 군말 없이 책을 산다면 편저자에게는 이득이겠지만.


나귀님이야 저 편역서를 알라딘 미리보기로만 살펴보았으니 다음 구절도 거기 들어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는 세네카 책 구매자들이라면 한 번쯤 귀담아 듣기 바란다. "더 나은 것이 다수의 마음에 든다면 좋으련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해요. 군중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곧 그것이 최악이라는 증거니까요."("행복한 삶에 관하여" 2장 1절, 천병희, 169쪽)




[*] 예를 들어 다음 구절에서 << >>로 표시한 대목을 원전 번역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저자가 전달하려는 핵심 내용을 편역자가 빼먹은 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 하와이대저택 편역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자연을 향해 따졌다. 어떤 동물에게는 수백

년을 허락해 놓고, 인간에게는 왜 이토록 짧은 시간만 주었느냐

고.


<< 그러나 전제 자체가 틀렸다.


문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다. 쓰임이다. >>


거대한 왕의 재산도 나쁜 주인의 손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흩어진다. (18쪽)



2. 천병희 번역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연에 대해 철학자답지 않게 시비를 걸었지요

. "자연은 동물에게는 인간보다 다섯 배 또는 열 배나 오래 살도

록 수명을 넉넉히 주었거늘 그토록 많은 일을, 그토록 큰일을 하

도록 태어난 인간에게는 그토록 짧은 수명을 정해놓다니" 하고 

말이오.


<< 그렇지만 우리는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

하고 있는 것이오. 인생은 충분히 길며, 잘 쓰기만 한다면 우리

의 수명은 가장 큰 일을 해내기에도 넉넉하지요. 하지만 인생이

방탕과 무관심 속에서 흘러가버리면, 좋지 못한 일에 인생을 다

소모하고 나면, 그대는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강요에 못 이

겨 인생이 가는 줄도 모르게 지나가버렸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오.


짧은 수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명을 짧게 만들었고, 수

명을 넉넉히 타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명을 낭비하는 것이라

오. >> 마치 왕에게나 어울릴 넉넉한 재산도 적합하지 않은 주인

을 만나면 금세 탕진되고, 얼마 안 되는 재산도 제 주인을 만나

면 사용함으로써 늘어나듯이, 우리의 수명도 제대로만 배분하면

크게 늘릴 수 있는 것이라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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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인가 알라딘 바탕 메뉴 한편에 "오뒷세이아"라는 붉은 링크가 생겨난 것을 보니, 이제 막 개봉했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보통은 아닌 듯하다. 하긴 지난번에도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과학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전국민이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얼마나 좋았을까"를 외치게 했으니 그 영향력을 충분히 알 만하다.


그래서인지 알라딘에서도 관련 도서 특별전 메뉴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뭔가 싶어 클릭해 보니 영화 개봉에 맞춰 간행된 갖가지 해설서와 편역서가 나오고, 심지어 수년 전부터 준비했음직한 호메로스 원전 번역본까지도 여러 종 나오니, 이래저래 당분간은 '호메로스'와 '오디세이(아)'라는 키워드 따라 돌아가는 출판계와 서점계와 독서계가 아닐까 짐작된다.


물론 영화가 되었건 드라마가 되었건 간에 이번 기회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어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간혹 방송에서 이 고전을 소개받는 사람 대부분이 '시 형식이라 어렵다'는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을 감안하면, 그토록 굳건했던 대중의 편견이 고작 영화 한 편 때문에 무너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살짝 우스워진다.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유명 영화의 영향력 덕분에 관련 단행본이 간행되는 것이 좋기보다는 싫다는 편인데, 왜냐하면 영화 개봉 일정에 맞춰 날림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고, 역시나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감과 동시에 모조리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과거 <트로이>나 <알렉산더>나 <베오울프> 같은 영화가 그러했으니, 지금은 저 영화만큼이나 관련서도 잊힌 상태이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느새 네 종으로 늘어난 호메로스 원전 번역을 서로 비교해 읽어보는 것 정도가 의미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막상 저 영화는 2017년에 간행된 새로운 영역본을 토대로 한 것이라서 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일각에선 가뜩이나 여성의 비중이 적은 고대 서사시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번역자가 PC 색채를 입히려 애썼다(!)는 비판도 있는 듯하다.


고전 번역은 시대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이야 쉬워도 실제 결과물을 내놓기는 힘들게 마련이다. 서양에서야 그리스어와 각국 언어의 유사점 때문에라도 다양한 번역 시도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말로 옮기려 하면 아무래도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더 부각되지 않을까. 가만 보면 천병희 이후의 번역본 모두 이 점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언젠가는 고대 그리스어 지식과 시적 재능 모두를 보유한 이례적인 인재가 나타나서 마치 호메로스가 빙의한 것처럼 정확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인데, 과연 나귀님의 생전에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산문역으로 호메로스를 처음 접한 나귀님으로서야 천병희를 위시한 운문역만 네 가지인 현실만 해도 감지덕지이지만.


그나저나 이번 영화의 차마 무시 못할 영향력 때문인지, 호메로스 서사시의 제목은 <오디세이아>이지만, 영화 제목에 맞춰 <오디세이>라고 표기하거나 아예 영어를 병기한 경우도 흔한 듯하다. 알라딘의 특별전 메뉴에 소개된 책들 중에서도 비전공자의 해설서와 편역서는 "오디세이아"로, 원전 번역자는 "오뒷세이아"로 쓰는 (알라딘도 덩달아 이쪽인) 모양새이다.


그리스어 철자 입실론(Y)을 '이'로 읽느냐 '위'로 읽느냐의 차이인 듯한데, 그리말 사전에 붙은 강대진의 설명처럼 '위'로 읽으면 '테티스'와 '테튀스'를 구분할 수 있어 편리한 점도 있다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표기의 어려움 때문인지 편의상 '이'로 읽는 경우도 흔한 모양인데, 얼마 전 <국가>를 뒤적이니 박종현 선생도 편의성 면에서 '이'를 지지했었더랬다.


그나저나 알라딘의 "오뒷세이아" 특별전에 소개된 책 중에는 의외로 빠진 것이 더러 보인다. 우선 원전 번역 중에서 민음사의 김기영 번역본은 찾아볼 수 없어 이상한데, 때마침 영화에 편승하기 위해 기존 표지를 완전히 덮는 대형 띠지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원작!"이라고 커다란 글씨로 적을 만큼 눈물겨운 노력까지 했으니 더욱 이상하다.


나귀님 같으면 호메로스 서사시의 후일담과 2차 창작에 해당하는 작품들도 소개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나,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저 서사시의 말미에서 주인공이 아내에게 전한 말 때문인지, 그의 여정은 저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이라고 상상해 본 사람들도 옛날부터 적지 않았던 듯하다.


심지어 고대의 <오디세이아> 속편 중에는 <투 마더스>와 유사한 결말(!)도 있다고 전한다. 의외로 단테의 <신곡>에서도 오디세우스의 후일담이 등장하는데, 꾀를 자주 사용한 까닭인지 거짓말쟁이가 가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저 시인에게 자신의 최후를 설명한다. 여기서 나온 묘사에 착안해 보르헤스는 오디세우스가 '남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지적하기도 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도 그 주인공의 여정 중에 <오디세이아>에서 소개되었던 몇몇 장소를 재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부에서는 두려운 나머지 멀찍이 돌아가서 화를 면하기도 한다. 심지어 오디세우스의 동료 중 하나인 낙오자를 적군이었던 아이네이아스가 구출하는 대목도 있었으니, 이래저래 선행 작품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다.


<오디세이아>의 영향을 받은 현대 문학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아닐까. 나중에 가서는 저 서사시와의 비교가 불편했는지 그 유사성이나 영향 관계를 애써 부정했다고도 하지만, 조이스 소설의 제목이며 인물이며 구성에서도 호메로스를 떠올리지 않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양자의 유사성이라곤 딱 거기까지긴 하지만...




[*] 그나저나 영화에 편승해서 급조된 책들 중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초판본 오디세이아>이다. 기원전부터 구전된 서사시에 초판본이 어디 있겠나 싶어 클릭해 보니 1616년의 채프먼 영역본 '속표지'를 가져다가 표지에 넣어 놓고 초판본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황당할 따름이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초판본 창세기>며 <초판본 사자의 서>도 간행되어 '저자 북토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든지 좀 정도껏 하자.


[**] 영화에 편승해서 급조된 또 다른 물건 중에 역시나 꼴보기 싫은 것은 알라딘굿즈 티셔츠이다. 시꺼먼 바탕에 진한 색으로 인쇄되어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중 "항해" 디자인에 들어간 대형 범선은 호메로스 시대에 있지도 않았던 훨씬 더 후대의 것이니 고증 오류이다. 알라딘, 니들도 좀 적당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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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전기 저자인 세라 베이크웰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뭔가 궁금해 클릭해 보니,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번역본을 출판사만 바꿔 재간행한 모양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리뷰며 페이퍼에 출판사를 향한 성토가 등장했기에 또 무슨 영문인가 살펴보니, 황당하게도 구판에는 멀쩡히 들어 있던 후주와 참고문헌을 신판에서 빼 버리고 인터넷 링크로 대체한 모양이다.


원서에 후주와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번역서에도 넣는 게 당연한데, 무려 출판사에서 이를 불필요한 군더더기 취급한 셈이니 한심스런 일이다.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을 가리켜 '왜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는 셈이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당혹스럽다. 심지어 책값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출판사의 결정을 두둔하는 글도 올라와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인공지능 환각, 즉 사오정 답변의 원인부터가 정확한 출전을 찾아내고 종합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이니, 이것만 보아도 책에 붙어 있는 후주와 참고문헌 같은 출전 표시 장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논문이나 저술의 표절 시비 중 상당수가 출전 표시 미비로 촉발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니 구간 출판사를 비롯해 학계와 출판계 모두가 준수하던 규약을 굳이 거스르려 작정한 신간 출판사의 행태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지를 보여준 증거라 할 만하다. 아울러 그러한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되었을 신통찮은 행동이 책의 내용까지도 훼손했을 가능성 역시 의심해 볼 만하다. 당장 이번 신간의 첫 페이지 첫 문단부터 오역이 등장하니까.


"그보다 더 이전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 구약성서의 전도서나 욥기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11쪽) 여기서의 문제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이란 구절(오역)이 "전도서나 욥기" 모두가 아니라 <욥기>의 주인공 "욥"만을 수식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대로 정확히 옮기자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의 기원은 더 이전인 19세기의 소설가, 더 이전의 파스칼, 더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그보다 더 이전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쳐버린 전도자며 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이 자신을 갖고 노는 것에 대해서 감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윽박지름을 당하고는 굴복한 인물이다." 


여기서 첫 번째 오역은 바로 앞에서 소설가,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인물'을 연이어 거론했는데도 원문의 인명 '전도자'와 '욥'을 서명 <전도서>와 <욥기>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오역은 욥에 대한 설명이자 <욥기>의 내용(하느님과 악마의 내기 때문에 억울한 고통을 받았던 욥이 항변하지만 하느님의 으름장에 깨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오역은 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구판에서는 "전도서의 욥"이라고 추가 오역한 대목을 신판에서는 "전도서와 욥기"라고 나름대로 수정씩이나 가했지만, 그런 수정조차도 여전히 오역임은 모르고서 내버려둔 셈이다. 구판의 오역을 수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셈이니, 아직 미확인된 오역이 신판 곳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인터넷이 처음 도입된 사반세기 전에도 이처럼 부피와 가격만 늘리는 듯 보이던 도판과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 등을 인터넷 링크며 씨디롬 부록으로 대체하려 시도했던 출판사가 일부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본격적인 대세나 유행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서 안 하는 거라 봐야 맞겠다.


사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라서 전기나 통신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니, 이제 와서 굳이 그 내용 일부를 인터넷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씨디롬 드라이브 자체도 사라져 버렸고, 인터넷도 영원하지는 않아 불과 몇 년 만에 소멸한 링크며 사이트가 허다하니, 한 번 만들면 50년씩 100년씩 가는 종이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후주와 참고문헌을 링크로 대체하자고 제안한 편집자는 ("이달의 우수사원" 밈처럼) 25년 전에 남들이 시도했다 포기한 것을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인 듯 떠올리고 으스댔을 수도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사실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의 유용성은 그걸 실제로 써 본 사람만 안다. 결국 저 출판사에는 책을 속속들이 활용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다.




[*] 근래에 접한 몇 가지 다른 사례(이른바 "처녀성을 떠맡은 자"와 엉터리 세네카 번역본)와 함께 출판계의 망조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 한 마디 꼬집어 주려고 기껏 글을 써서 다시 들어와 보니, 출판사에서도 논란을 의식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책을 일시 품절시키고 새로 제작해서 몇 주 뒤에 재유통시킬 계획이라 한다. 십중팔구 이미 간행된 책을 재단해서 표지를 제거한 다음, 기존 본문에 앞서 누락되었던 부록을 추가하고 새로 제작한 표지를 씌워 다시 제본하지 않을까.(문제는 이렇게 되면 책 크기가 원래보다 사방 몇 밀리미터씩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잘 안 팔리는 책을 몇 년 뒤에 '표지갈이' 해서 재간행한 경우가 그러했다). 이와 유사한 논란이 있어도 엉터리 책을 끝까지 고수하는 악덕 출판사도 많았음을 감안하면 해당 출판사의 신속한 조치는 대단한 결단이지만 (물론 애초에 무개념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애초부터 오역이 있는 책이니 과연 이번 조치로 문제가 다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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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읽다 말고 놓아둔 박완서의 에세이집 <호미>를 오랜만에 뒤적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언젠가 저자가 설비 수리를 하러 온 나이 지긋한 목수에게 뭘 물어보니 '당근'이라는 답변이 나오더란다. 무슨 말인가 싶어 한참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뒤늦게야 '당근'이 '당연'을 뜻하는 유행어임을 깨닫고는 머쓱해졌다는 것이다.


기존 '박완서의 굴욕' 시리즈(컴퓨터가 바이러스 걸렸다기에 옆에 있던 디스켓을 멀리 치웠더니, 수리기사가 한심하게 쳐다보더란 이야기도 그중 하나)의 연장인 셈인데, 저자도 겸연쩍은 듯 이렇게 덧붙인다. "별로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은 연령층과 직업인에게까지 당근이 당연으로 일반화됐다는 걸 느끼면서, 그럼 정작 당근은 뭐가 되나 걱정이 됐다."(121쪽)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공감 가는 구절이었는데, 왜냐하면 최근의 '무섭노' 논란을 비롯해서 일베 용어 사용 논란이 대두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연 어디까지 일상 용어를 잠식당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일베 용어가 특정될 때마다 금기어로 간주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일상어의 범위만 쪼그라들지 않겠냐는 것이다.


노무현을 비롯한 각종 표적에 대한 조롱과 합성에서 드러난 일베의 역량은 창작이 아니라 변형이다. 이른바 일베 용어도 기존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통용하는 것뿐이니, 일베 용어를 배제한다며 해당 단어를 배제하고 논란이 되는 표현들을 적극 기피하게 된다면, 결국에 가서는 일상어를 모조리 일베의 전유물로 순순히 넘겨주고 마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심지어 일베와는 무관한 나귀님조차도 공연히 오해를 받지 않으려 '노무'와 '운지' 같은 일베 용어를 기억하고, 생경한 신조어를 접할 때마다 그 출처가 무엇인지 일단 검색부터 해 보는 판이니, 이번 '무섭노' 논란 역시 역설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일베 용어 학습 기회를 제공했다고 봐야 할 법하다. 일베로선 최초 문제 제기자에게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이번 논란에서 드러났듯, 어떤 표현이 일베 용어인지 판정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니, 자칫 일베 비판이 마녀사냥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다. 물론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평소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자처하던 조국 같은 사람조차도 마녀사냥을 거들고 나섰다는 점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박완서의 걱정이 아직까지는 기우라는 점이다. '당근'이야 여전히 '당연'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근'의 원래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당근'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봐야 할 테지만, 이 경우는 '당연'에 부정적 의미가 없어서일 뿐, 일베 용어처럼 부정적 의미가 깃들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 있다.


그런데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근'은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키워드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당근, 당근"은 여성을 바짝 흥분시키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자칫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막무가내로 달려들 수 있으니 남성도 조심해야 하고, 특히나 주변에 납작하고 단단한 물건이 없게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할 정도이다.


물론 요즘 분위기만 보면 저 마법의 암호 "당근, 당근"도 여차 하면 학폭에 일진으로 처벌받기에 딱이니, '당근'이 '당연'으로 대체된 것도 그런 분위기의 반영은 아닐까 싶다. 같은 시기에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급감했으며, 입양아 학대와 교권 추락도 종종 벌어졌으니,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도 혹시 시대를 꿰뚫어 본 통찰이었을까...



[*] 그나저나 '거제야호'부터 '무섭노'까지 최근 연이어 나라를 뒤흔든 화제의 시발점은 번번이 리센느이니, 이번 정부의 향후 최대 과제는 주가 안정과 부동산 공급과 더불어 저 걸그룹의 입단속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최근의 국정 기조를 감안하면 결과적으로는 BTS나 블랙핑크 같은 초인기 아이돌에 대한 활동 일수 규제니, 호남 출신 신인 걸그룹 육성이니, 차트 순위 2배 반영 아이돌 굿즈 발매처럼 영 뚱딴지 같은 대책만 줄줄이 나올 것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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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존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원래는 몇 달 전에 이미 써 놓았던 글이었다. 일단 초고를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내용 중에 '펜(PEN) 대회 참석차 업다이크가 방한했을 때 동행한 선배 작가 존 치버의 술주정을 받아주느라 고생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고 적은 대목의 사실 확인이 필요해 보여서 뒤늦게야 다시 자료를 뒤적였다.


처음에는 치버의 일기나 서한집에서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막상 펼쳐 보니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언급만 짧게 나오고 술주정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면 혹시 펜(PEN) 관계자의 책에서 봤나 싶어, 해당 단체에서 29년간 근무한 직원의 회고록인 <해외에서 온 엽서>(엘리자베스 패터슨 지음, 박해경 옮김, 선우미디어, 2001)를 뒤져 보았지만 없었다.


이쯤 되면 한국 펜(PEN)의 대표를 역임한 전숙희(1919-2010)의 회고록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이걸 도대체 어디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있을 법한 곳의 책장을 서너 번이나 연달아 뒤져도 안 나오기에 결국 포기했는데, 두 달이 지나서야 바깥양반이 찾아내라는 또 다른 책을 찾다가 책더미 사이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숙희 회고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을 찾을 때의 역설 가운데 하나는, 늘 보고 지나치던 책인데도 막상 찾으려면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를 쓰다 포기하고 나면, 그러니까 더 이상은 굳이 그 책을 찾지 않아도 그만일 때가 되면,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 책이 딱 눈에 띈다. 오죽하면 헌책방에서도 '주인보다 손님이 책을 더 잘 찾는다'는 속설이 있으니, 나귀님만의 망상까진 아닌 듯하다.


여하간 나귀님이 발견한 전숙희의 책은 제목부터 <펜(PEN) 이야기>이며, 그 단체와 맺은 인연과 활동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물론 본격적인 회고록이라기보다는 관련 쪽글을 엮고 자료를 추가한 것이다 보니 생각만큼 체계적이지는 못해 아쉬운데, 차라리 대담 방식으로 그 생애와 활동을 차근차근 돌아보는 방식이었다면 훨씬 더 유용한 자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국제 펜클럽, 약칭 펜(PEN)은 1921년 영국에서 창립되어 세계 각국에 지부를 둔 문인 단체이다. 시인(Poet), 수필가(Essayst), 소설가(Novelist)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칭을 지었고 H. G. 웰스, 모리스 마테를링크, 알베르토 모라비아, 아서 밀러, 하인리히 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 다수가 포함된 각국의 유명 문인이 번갈아 대표를 맡았다.


1960년에는 투옥 문인을 후원하는 산하 조직을 만들었고, 이후 각국을 돌며 열리는 총회마다 문인의 인권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한국 지부는 1954년에 설립되었는데, 휴전 직후 파리의 UN 총회에 참석했던 시인 모윤숙이 우연히 런던에 들렀다 펜(PEN) 본부의 간판을 보고 호기심에 우연히 문을 두들겼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는 비화가 전한다.


전숙희는 모윤숙을 보좌하다가 펜(PEN) 한국 지부의 대표를 맡았으며, 전쟁의 피해를 극복한 일본과 서독이 연이어 총회를 유치하는 것을 지켜보고 부러운 마음에 1970년 제37차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려고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라 김지하에 대한 탄압 문제가 대두했고, 독재 정권의 선전에 사용될 수 있다는 펜(PEN) 내부의 반대 여론도 만만치는 않았다.


문인을 탄압하는 국가는 안 된다며 한국 총회 반대 여론이 팽배한 가운데, 전숙희를 비롯한 한국 지부 회원들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한국 정부에 항의를 전달하는 선에서 타협하고 총회가 개최되었다. 나귀님이 얼마 전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이, 업다이크와 치버가 미국 지부 대표단 자격으로 내한했던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예상대로 박정희가 개막 연설을 하고 자신과 정부를 선전하는 영문 책자까지 참석자에게 잔뜩 선물하는 등, 당시 정권의 입김을 아주 벗어날 수야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전숙희가 호텔로 찾아가 보니, 각국 대표마다 문제의 홍보물을 도로 내놓으며 '이건 가져갈 필요가 없으니 알아서 처분해 달라'고 눈웃음과 함께 부탁을 남기더라는 민망한 일화도 전한다. 


이후 1988년 제52차 총회의 한국 유치 과정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김남주 등 문인 투옥 문제가 또다시 대두했다. 이때 가장 거세게 반대했던 회원 중 하나가 미국 지부의 수전 손택이었는데, 전숙희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총회 개최를 놓고 찬반 투표가 진행되어서 결국 찬성으로 결론이 나자, 분한 마음에 미국 지부의 동료와 함께 눈물(!)까지 흘렸다 전한다.


그래도 손택은 아들(!)까지 데리고 한국 총회에 참석했으며, 문학과 자유를 주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그 번역문 "작가의 시대적 사명"이 전숙희의 책에 수록되었다). 비록 성향도 확연히 다르고 종종 맞서기까지 했지만, 어쩌면 전숙희야말로 손택이 처음 만난 한국 여성 작가일 수 있으니, 과연 두 사람 사이에 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펜(PEN)의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그 대표성 문제가 있고, 냉전 시대에는 동서 갈등에 편승해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한국 총회처럼 본래 의도와 달리 독재 정권에 홍보 기회를 선사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전세계 문인의 만남과 소통이라는 이상을 위해 나름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펜(PEN) 총회 활동을 통해서 한국 문학을 조금이나마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전숙희만 해도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한국 문학 번역서를 챙겨가고, 한국 문학 소개 행사를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으며, 특히 한국 총회를 통해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해외 작가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회고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을 망정, 이런 초창기의 무모한 노력이 한국 문학 번역 지원 사업 등의 제도를 낳았고, 그 결과 반세기 뒤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남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으니, 최근 각광받는다는 각종 K-문화가 나아갈 길을 미리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노벨문학상도 타게 될 것이고, 국제 사회에서 인정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1992년 저서 <펜(PEN) 이야기> 말미에 덧붙인 이 바람은 결국 30년 뒤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현실이 되었지만, 정작 전숙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15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예전의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무니 안타깝다.


전숙희는 보통 '수필가'로 지칭되지만, 문인보다는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월등했던 듯하다. 단체 운영과 행사 유치를 위해서는 추진력과 자금력이 필요한데, 지금 봐도 만만찮은 국제 행사를 유치했다는 점에서는 이른바 여장부 유형일 수도 있겠다. 물론 전숙희가 한국 전쟁 당시의 말 많았던 '낙랑클럽'과도 가까웠다 하니, 짐작컨대 정부 쪽의 연줄도 있었겠지만.


전숙희의 가장 큰 뒷배는 동생인 '카지노 대부' 전락원(1927-2004)이었다. 펜(PEN) 지부 운영에도 그의 지원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 총회 당시 참석자를 위한 '기생 파티'이다. 존 치버도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관련 언급을 남겼는데, 일기에는 그냥 '접대를 받았다'고만 나왔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은밀한 곳을 주무르더라'고도 써 놓았다.


전락원은 워커힐 카지노로 시작해서 호텔 운영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면서 파라다이스 그룹을 현재 재계 100위권 내의 재벌로 성장시켰는데, 본인과 가족 모두 외부 노출을 꺼린 탓에 소문만 무성하다 보니 종종 사기꾼들의 사칭 피해를 입는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전청조 사건이 있는데, 이때에는 전락원의 아들이며 현재 회장인 전필립의 혼외자로 자처한 바 있다.


동생 전락원의 지원 하에 전숙희는 계원예중, 계원예고, 계원예대 등 학교를 설립하고, 잡지 <동서문학>을 창간하는 등 문화 방면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펜(PEN)의 두 번째 한국 총회로부터 불과 한 세대 만에 잠시 잊히기는 했지만, 향후 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루려면 십중팔구 전숙희의 활동에 대해서도 재발굴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여하간 '내한 당시 업다이크가 치버의 술주정 때문에 고생했다'는 나귀님의 기억은 잘못된 듯해서 삭제했다. 어쩌면 더 먼저 열린 소련 총회 당시 두 작가의 부부 동반 여행의 일화를 서울 총회 당시라고 착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치버 못지않게 주정뱅이로 악명이 높았던 레이먼드 카버라든지 또 다른 작가의 비슷한 일화를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겠고...



[*] 예전에 사다 놓은 책 중에 1970년 펜(PEN) 서울 총회 자료집도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 다시 찾으려니 어디 있나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꼭 필요할 때에는 안 보이다가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슬그머니 나타나는 패턴이 또 반복되려는 모양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펜 선집: 독일편>(분도출판사, 1976)과 함께 다시 한 번 소개해 볼까...


[**] 대략 1년 전쯤에 존 업다이크 글 쓰면서 덩달아 쓴 글인데, 올릴까 말까 차일피일하다가 마침 8월 1일이 전숙희의 16주기 기일이라기에 생각나서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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