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 모기 때문에 깨어 부산떨다 보니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바깥양반도 물파스 바르고 화장실 다녀오고 하다 보니 더는 못잘 것 같다며 낮에 읽다 만 책을 집어들기에, 얼떨결에 새벽에 나란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 내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존 업다이크의 초기 단편을 완독하게 되었고.
이 작가의 단편 번역서가 있다는 사실은 한동안 잊고 살았다가, 얼마 전 "토끼" 시리즈의 재출간 소식에 그간 모아 놓은 절판본을 한 번 정리하려 책장을 뒤지면서 비로소 상기했다. 70년대 세계문학전집 유행의 끝자락에 등장해서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진 금성출판사의 120권짜리 시리즈에 <달려라 토끼>와 함께 무려 열두 편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존 업다이크는 무려 반세기 동안 작가로 활동하며 장편 소설 23종, 단편집 18종, 시집 12종, 아동서 4종, 논픽션 12종을 펴냈다고 전한다. 금성출판사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1959년에 간행한 첫 단편집 <같은 문(The Same Door)>에 실린 총16편 (흥미롭게도 하나같이 <뉴요커>에 먼저 게재되었던 작품들이라고 한다)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다음 12편이다.
1. 필라델피아의 친구들 (Friends from Philadelphia)
2. 에이스 인 더 홀 (Ace in the Hole)
3. 내일이, 또 내일이... (Tomorrow and Tomorrow and So Forth)
4. 치과 의사의 의혹 (Dentistry and Doubt)
5. 소년의 휘파람 (The Kid's Whistling)
6. 불이 켜질 무렵 (Toward Evening)
7. 그리니치 빌리지의 눈 (Snowing in Greenwich Village)
8. 누가 노란 장미를 노랗게 만들었는가? (Who Made Yellow Roses Yellow?)
9. 그의 전성기 (His Finest Hour)
10. 1조 피트의 천연 가스 (A Trillion Feet of Gas)
11. 근친상간 (Incest)
12. 악어 (The Alligators)
오 헨리나 모파상의 한 번 읽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단편들과 비교했을 때, 진지한 주제와 세심한 묘사가 돋보이기는 했지만 뭔가 살짝 애매하거나 미진한 느낌도 솔직히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도 가장 궁금했었던 "근친상간"조차도 막상 읽어보니 제목에서 가리키는 상황이 도대체 어디 나오는가 싶어 의아했으니까.
일각에서는 훗날 더 거대하게 자라날 작품 세계의 씨눈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숨어 있다고도 평가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에이스 인 더 홀"은 운동부 스타 출신 주인공이 직장을 때려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마주한다는 내용이라 "토끼" 시리즈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그리니치 빌리지의 눈"은 훗날 별도의 단편집으로 나온 "메이플" 연작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최초로 발표된 단편 "필라델피아의 친구들"이다. 고등학교에 갓 들어간 소년이 저녁에 갑자기 여사친 집에 찾아온다. 여사친은 그가 자기에게 마음이 있어 왔나 싶어 반색하지만, 소년은 의외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용건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손님이 오셔서 술 심부름을 가야 하니, 읍내까지만 차로 좀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여사친의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부탁에 응하고, 아예 값비싼 자기 차를 소년이 직접 운전하게 허락도 하지만, 고학력자인 소년의 부친이 저학력자인 자신보다 돈을 못 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꼬집는 말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힌 면모도 보여준다. 읍내에 도착하자 소년은 여사친과 함께 차에서 기다리고, 미성년자인 소년 대신 여사친의 아버지가 술을 사러 간다.
무슨 술을 살까 묻자, 소년은 '값싸고 좋은 술'로 부탁한다며 2달러를 건넨다. 잠시 후 술을 사온 여사친의 아버지가 거스름돈도 주지 않자 소년은 너무 비싼 걸 샀나 싶어 불안해 하고, 뒤늦게야 거스름돈치고는 너무 많은 금액을 건네받자 완전 싸구려로 샀나 싶어 또 불안해 하는데, 부녀와 작별 후 살펴본 술병에는 '샤토 무통 로칠드 1937'이라 적혀 있었다.
업다이크의 단편 중에는 펜실베이니아의 가상 마을 올링어를 무대로 하는 것들이 여럿이어서 훗날 <올링어 이야기(Olinger Stories)>(1964)로 별도 간행되기도 했는데, 거기 수록된 11편은 하나같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성장 소설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금성출판사 전집 수록 단편 중에서는 "악어"와 "필라델피아의 친구들"이 <올링어 이야기>에도 들어간 작품이다.
그런데 첫 단편집에 있는 작품들을 읽고 나니 내친 김에 업다이크의 다른 단편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최근 여러 번 다시 꺼내 보았던 시사영어사의 현대미국문학전집에도 몇 편쯤 있음직하기에 확인해 보니, 1962년에 나온 두 번째 단편집 <비둘기 깃(Pigeon Feathers and Other Stories)>에 수록된 총19편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하는 4편이 제6권에 수록되어 있었다.
1. 월터 브릭즈 (Walter Briggs)
2. 도피 (Flight)
3. 마술사는 엄마를 때려야만 할까? (Should Wizard Hit Mommy?)
4. 비둘기 깃 (Pigeon Feathers)
이중에서는 "도피"와 "비둘기 깃"이 <올링어 이야기>에도 재수록되었다고 전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편집의 표제작인 "비둘기 깃"이었는데, 순진했던 소년이 독서를 통해 신앙의 위기를 겪고 허무주의에 사로잡힐 뻔하다가, 헛간을 어지럽히는 야생 비둘기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땅에 묻는 과정에서 에피파니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비둘기 깃은 소년이 삶의 신비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계기가 된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비둘기의 깃털조차 오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면, 이런 미물조차 세심하게 창조한 하느님이 나를 비롯한 인간에게 잔인할 리 없다는 확신을 품게 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던 소년은 나름대로의 고민과 깨달음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지게 된다.
물론 나귀님의 취향에는 시사영어사 전집에서 업다이크 다음에 수록된 버나드 맬러머드의 단편이 오히려 딱이기는 하다. 맬러머드의 단편은 쉽게 말해 내가 읽고 남에게 구연했을 때에도 비슷한 감동을 자아낼 만큼의 선명한 줄거리가 특징인 반면, 업다이크의 단편은 자질구레한 묘사가 강점이다 보니 읽으면서는 감탄하더라도 금세 내용을 잊어버리게 되고 만다.
맬러머드의 "요술통"에서는 미혼 랍비가 유대인 전문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하지만, 허름하고 미심쩍은 중매장이 할아범이 소개하는 여자마다 성에 차지 않아 퇴짜를 놓는다. 그러다 하루는 중매장이가 건네준 봉투 속 사진 속에서 발견한 여자의 모습에 반해 만남을 신청하는데, 늘 자신만만했던 중매장이도 이때만큼은 당황하면서 사진을 빼앗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랍비의 물음에 모르셔도 된다고 둘러대던 중매장이는 상대방의 집요한 요구에 결국 사실대로 말한다. '내 딸년이오, 천벌을 받아도 아쉽지 않을 만큼 타락한 딸년이오!' 놀란 랍비는 마음을 접으려 노력하지만, 일주일이 지나 수척한 모습으로 중매장이를 찾아와 딱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중매장이도 마지못해 승낙한다.
단편 "감옥"에서는 구멍가게 주인인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단골 가운데 하나인 어린 소녀의 물건 훔치는 모습을 목격하고 고민에 빠진다. 이때부터 소녀를 유심히 관찰한 남자는 점점 대담해지는 도둑질에 착잡함을 느끼고, 젊은 시절 품었던 이상을 되살려 범죄자를 교화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극적인 참회 장면을 상상하며 흐뭇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뒷방에서 역시나 흐뭇한 상상에 빠져 있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놀라 가게로 나온다. 알고 보니 문제의 소녀가 또 물건을 훔치다가 남자의 아내에게 걸린 것이었다. 도둑년 운운 하는 아내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남자는 조용히 하라고 타이르지만, 화가 난 아내가 계속해서 소녀를 향해 언성을 높이자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갈긴다.
남편의 이유 없는 폭행에 아내는 망연자실하고, 남자도 아차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가게에 모인 구경꾼을 헤치고 소녀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주인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싹수가 노란 년이라느니, 오늘 아주 요절을 내겠다느니 폭언을 퍼부으며 딸을 끌고 나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에게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메롱 혀를 내민다.
방금 설명한 맬러머드의 단편 2종의 줄거리는 그저 기억에만 의존해서 서술한 것인데, 워낙 선명한 줄거리와 특이한 반전으로 한 번 읽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는 까닭이다. 물론 기껏 업다이크의 단편 이야기를 하다가 맬러머드의 단편을 예찬하니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뭐, 나중에 맬러머드 이야기 하다가 업다이크 이야기를 하면 되겠지.
물론 업다이크의 단편 중에도 인상적인 줄거리와 반전을 지닌 것이 없지 않은데,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라는 희한한 제목으로 간행된 (물론 그림 동화의 "노간주나무"에 나오는 노랫말이기는 하지만) 고전 동화 재해석 단편집에 수록된 "아일랜드의 푸른 수염"이 그렇다. 제목 그대로 아일랜드를 여행하던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싶어 하는 내용이다.
중년을 지나 노년을 앞둔 남자는 세 번째 아내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도보 여행 중인데, 여자가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바람에 점점 증오가 커져 급기야 살의를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소변이 급해 비탈에 쪼그려 앉은 아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마지못해 손을 붙잡아 주던 남자는 이러다가 그냥 손을 놓아버리면 간단하게 불평꾼을 제거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아내의 오줌 냄새를 맡다 보니 새삼스레 자기네가 처음 어떻게 호감을 갖게 되었는지가 기억났고, 그렇게 생각을 되짚던 남편은 이제껏 불평꾼으로만 알았던 아내의 주장이 하나같이 정당했음을 깨닫는다. 즉 음식이 맛없다는 말은 진짜 음식이 맛없었기 때문이고, 발이 아프다는 말은 진짜 운동화가 발에 안 맞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마음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뒤바뀐 것은 물론이고, 급기야 미움 때문에 명백하고도 정당했던 주장조차도 불평이나 짜증으로 치부하며 외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남편은 자신의 무지와 무심을 자책하게 되고, 다시 한 번 애정 넘치는 부부 관계를 회복하려 다짐하는 한편으로, 이제는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에 회한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단편에 나타난 의사소통의 실패는 업다이크의 초기 작품에서 두드러진 요소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데, 특히 그로 인한 부부의 갈등과 파국이 자주 묘사되었던 듯하다. 대표작 "토끼" 시리즈나 "메이플" 연작 단편의 줄거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감안해 보면, 20세기 후반 미국의 풍속도를 가감 없이 묘사한 작가라는 평가도 나름 일리 있어 보인다.
"토끼" 3부작과 "메이플" 연작을 읽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했던 나귀님이다 보니 거기 묘사된 미국 중산층 부부의 막장 드라마가 전혀 딴 세상 이야기처럼 낯설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주인공의 심정이며 행동에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업다이크 소설을 다시 읽을 적기인 것인가 싶기도 하다.




[*] 근데 이건 또 언제 읽고 정리해서 끄적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