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맥머트리 책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 보니 (2종 3권인데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지난번에 사다 놓은 토마스 만 정치평론집 <예술과 정치>가 눈에 띈다. 마침 예전에 꺼내 보고 한동안 방치한 예술론집 <숲 속의 예술철학>을 도로 꽂은 직후라서, 이것도 가져가서 함께 꽂으려고 일단 꺼내 뒤적이다 보니, 책 앞에 적힌 플라톤의 인용문이 눈에 들어온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One of the penalties for refusing to participate in politics is that you end up being governed by your inferiors) - 플라톤, <국가>". 토마스 만의 책이라면 십중팔구 독일어에서 옮겼을 터인데, 특이하게도 이 인용문에는 독일어나 희랍어 대신 영역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문득 '플라톤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뭔가 좀 지나치게 신랄한 발언처럼 들려서였다. 최근 검색한 체스터튼의 (실제로는 출처불명인) '무신론자는 아무 거나 믿는다' 명언처럼 혹시 와전된 것은 아닐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국가> 제1권 347c에 실제로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종현 번역본을 꺼내 보니 원래의 문맥은 영 달랐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101쪽) 희랍어 원문 번역에는 토마스 만 책의 인용문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이라는 표현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토마스 만 책에 병기된 영역문 역시 앞에 함께 나온 번역문보다는 박종현 번역문에 더 가까웠다.


해당 영역문을 직역하자면 "정치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치르는 대가 중 하나는 결국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것이다"쯤 된다. 여기에 굳이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었으니, 이쯤 되면 의도적인 왜곡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편역서임을 감안하면, 원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번역자/출판사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더욱 이상한 점은 책 앞(15쪽)에 위처럼 왜곡된 인용문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책 뒤(416쪽)에 해당 구절을 전후한 <국가> 제1권 347c의 문장이 여러 개 더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해당 구절도 여기서는 적절히 옮겼다. "훌륭한 분들이 스스로 통치에 나서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인데 앞과 뒤의 인용문이 달리 번역되었으니, 결국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걸까? 혹시 이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 하나에서 토마스 만이 해당 인용문의 왜곡과 진의에 대해, 또는 플라톤과 <국가>에 대해, 또는 정치 참여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나 뒤적여 보았는데, 막상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던 듯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국가>에서의 원래 문맥을 감안할 경우, 위와 같이 똑 떼어서 인용해 놓으면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즉 토마스 만 책 앞에 나온 인용문만 보면 마치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통치자를 낳는다'로 이해하기 쉽지만, 플라톤의 발언 요지는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하지 않으면 훌륭하지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한다'는 뜻이었다.


즉 플라톤은 선거 같은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를 독려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의 정치 참여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위와 같은 논리를 제시했던 셈이다. 따라서 번역자/출판사가 혹시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서 플라톤의 인용문을 집어넣었다고 한다면 문맥의 왜곡이고,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은 것도 온당하다 볼 수 없다. 


게다가 번역문과 다른 영역문을 병기한 것이며, 달리 옮긴 인용문을 추가한 것도 고의성을 드러내니, 정확한 의도야 불명이라도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그저 인용문 하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책 전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다른 문장은 충실히 번역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앞으로 이 번역자/출판사는 피해야 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번에 벚꽃 구경하러 신촌 나갔다가 잠깐 들른 지하 헌책방에서 살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놓고 나온 책이 하나 있었다. 제목이 <시베리아 탐험기>인데, 예전에 제목 비슷한 책을 하나 산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같은 출판사에서 저자만 다른 <시베리아 탐험 일지>라는 책도 내놓았기 때문인데, 이미 가진 게 뭔지 몰랐으니 아깝지만 안 사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책장을 뒤져 보니, 내가 이전에 구입한 책은 <탐험 일지>였다! 이번에 <탐험기>까지 샀다면 딱이었는데, 헛갈려서 망설이는 바람에 결국 놓친 셈이다. 좋은 기회를 날렸다고 투덜거렸더니, 바깥양반이 사실은 자기도 아까 살까말까 고민하다 놓고 나온 책이 한 질(?) 있으니, 내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 예약해 놓고 오후에 가서 사오겠다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시베리아 모험기 2종을 모두 구입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탐험기>의 저자 조지 케넌(1845-1924)은 미국의 전신기사로 1864년부터 2년간 러시아 횡단 전신 부설을 위해 시베리아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저술했다. 이후 20년간 러시아 각지를 여행했고, 시베리아 유형 제도를 비판했으며, 이후 미국 정부의 러시아 전문가로 활동했다.


역자 해설에 따르면 케넌은 러일전쟁 당시 언론인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했지만 부정적인 내용의 보도를 일삼았고, 이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외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특사 헐버트를 냉대하는 등 한국과는 악연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베리아 여행기만큼은 <데르수 우잘라>에 버금가는 걸작 논픽션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 정재겸이 시베리아에 각별히 관심을 두고 관련서를 여러 권 번역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나온 <시베리아 탐험기>와 <시베리아 탐험 일지> 외에, 솔에서 나온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도 번역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역사연구재단'은 '동북아역사재단'과 종종 헛갈리는데, 양쪽은 별개의 단체이고 후자만 공공기관이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욕이 앞서더라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민폐만 끼치게 마련인데, 나귀님이 보기에는 <시베리아 탐험기>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만 같다. 당장 서두에 실린 래리 맥머트리의 소개글만 봐도 터무니없는 오역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인데, 이런 식이라면 이 책의 본문은 물론이고 다른 시베리아 관련서까지도 오역 의혹이 짙어진다.


맨 먼저 눈에 띈 오역은 미국 작가들이 쓴 대표적인 여행기를 언급하던 차에 마크 트웨인의 <유랑기(Roughing It)>와 <미시시피 강의 생활(Life on the Mississippi)>을 한 작품으로 오해해 <미시시피 강에서의 원시 생활 체험기(Roughing It, Life on the Mississippi)>라고 옮긴 부분이었다. 뭐, 간혹 있는 일이니까 그냥 넘어갔는데, 다음의 오역은 더 심각했다!


"이들은 오래된 신문들을 읽다가 애틀랜틱 케이블 사가 승리를 거두고 러-미 전신회사는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2쪽) 하지만 이 문장은 오역이고, 제대로 옮기면 대략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이 성공하며 러-미 전신 부설은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 대목은 역자 해설에서도 언급된 케넌의 시베리아 탐험기의 동기와 관련 있다.


당시 웨스턴유니온 전신 회사에서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을 추진했지만,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자 반대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즉 러시아 횡단 전신을 부설해서 유럽과 미국을 연결한다는 발상이었고, 이에 전신기사 조지 케넌은 선발대를 꾸려 2년 동안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시베리아를 헤매며 사전 답사를 다녀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껏 고생하고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웨스턴유니온은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에 결국 성공해 버렸고, 그래서 러시아 횡단 전신 부설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자는 '대서양 횡단 전신'과 '러-미 전신(러시아 횡단 전신)' 모두를 기업명으로 착각해서 "애틀랜틱 케이블사"와 "러-미 전신회사"로 오역했는데, 그로 인해 문맥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이런 식으로 문맥을 놓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심지어 멜빌부터 트웨인에 이르는 동시대 미국 작가들의 주요 여행기와 그 특징을 간략히 설명한 다음, "간단히 말해서, 위에서 설명한 맥락에서 조지 케넌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덧붙인 저자의 당부를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조지 케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31쪽)라고 오역을 넘어 창작까지 해놓았다!


심지어 소개글을 쓴 래리 맥머트리에 대해서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비록 그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기는 했지만 맥머트리의 역할은 애니 프루의 단편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것뿐이었다. 사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이기 이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을 각색해서 제작된 영화만 해도 이미 여러 편이다.


그중 대표적인 영화가 <애정의 조건>(1983)인데,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5개 부문을 휩쓴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도 훌륭해서 잔잔한 피아노곡인 메인 테마는 광고에 종종 사용된다. 감독 제임스 L. 브룩스는 <브로드캐스트 뉴스>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로도 유명하고, 무엇보다도 <심슨 가족>의 제작자로 가장 유명하다.


맥머트리 원작 영화 중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이 <라스트 픽쳐쇼>(1971)인데, 모델 출신이었던 시빌 셰퍼드가 당시 남친이었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빽으로 이 작품에서 조연을 맡아서 확 떴고, 후속 작품에서 연이어 발연기를 선보이며 내리막길을 걷다가 <택시 드라이버>에서 다시 조연으로 부활하고, <블루문 특급>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후일담이 유명하다.


영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래리 맥머트리의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 (아마도)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애정의 조건>은 영화의 국내 개봉에 맞춰 우후죽순으로 간행된 번역서가 서너 종쯤 되는 모양인데, 나귀님이 책장을 뒤지니 비교적 멀쩡했던 번역서 대신 <성(性)바라기>라는 괴이한 이본(異本)만 있다!


"해바라기가 해를 찾듯 오르가즘을 목말라하는 여자" 운운 하는 표지의 광고 문구만 놓고 보면 딱 1980년대 길거리에서 흔히 보던 카바이트 불빛 책 노점에서 <황홀한 사춘기> 등과 함께 판매될 법해 보이지만, 내용은 야한 것과 거리가 멀고 영화에서처럼 오로라와 에마의 모녀 갈등뿐이다. 물론 나귀님 기억에는 영화의 내용이 원작보다 훨씬 더 유머러스했지만.


다행히 그 당시에 유행한 '영화 소설'(원작 무시하고 한국 사람이 영화 내용을 소설로 재구성한 사이비 소설)까지는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원작에 어느 정도까지 충실한 번역인지는 아직 비교해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라스트 픽쳐쇼>는 <마지막 영화 상영>이라는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내 영혼의 푸른 텍사스>라는 제목으로도 나왔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래리 맥머트리가 장서가 겸 고서매매업자로도 유명하다는 점이다. 1970년부터 3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하며 한때 2개 매장에 40만 권 이상을 보유했고, 2012년에 "마지막 서적 판매" 행사를 통해 개인 장서를 대거 경매로 매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지 케넌의 탐험기 소개글을 쓴 까닭도 희귀본 애호가라는 평소의 취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란치스코 교황 타계 소식을 듣고 뉴스를 보니 10여 년 전 한국 방문 당시의 영상이 나온다. 문득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의 행사에서인가 교황을 직접 만났던 세월호 유가족 중에 '유민 아빠'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중에 바깥양반하고 앉아 있다 교황 이야기가 나오기에 유민 아빠 이야기를 언급했더니, 그렇잖아도 추모글을 올렸더라 대답한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교황 알현이 평생 소원이라고 알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의 어느 사이비 종교 지도자도 교황을 만났다는 거짓 주장을 홍보에 이용할 정도였으니, 그 권위와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따라서 유민 아빠의 경우에도 특별한 경험을 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딱히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처지까진 아니었다.


물론 유민 아빠가 했다는 부탁대로 교황이 세월호 사건 처리에 대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는 없었으리라 짐작되고, 또 이후의 상황 전개만 보아도 압력 따위는 있지 않았음이 분명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한편으로는 각국 지도자보다 더 큰 권위의 상징인 교황까지 만난 이상, 이제는 산 사람의 입장에서 더 호소할 곳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아무리 잊지 말자 다짐했어도 잊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11년째인 올해에는 나귀님도 당일까지 미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가족은 아직도 진실 규명을 주장하지만,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진 목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가족이 여전히 몸부림치는 사이에, 책임을 방기했던 대통령은 물론이고 선장을 제외한 선원들도 모두 석방된 상태다.


지금 와서 세월호 사건의 가장 끔찍한 부분은 도무지 결말이 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교황을 만나고, 정권을 바꾸고, 선체를 인양하고, 조사를 진행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로 11년 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심지어 유가족 측에서도 조사 결론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하며 사건에 마침표 찍기를 완강히 거절한다는 폭로 아닌 폭로까지 나왔었다.


이쯤 되니 세월호와 유가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칭 '촛불 정권'에서도 마무리하지 못했으니, 이제 이 사건은 수많은 조롱과 폄훼 속에 영영 미완결 상태로 남게 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유민 아빠의 교황 알현 모습이 유독 씁쓸하게만 기억되는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는 끝내 안 되는 일이 있었으니까.


유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김훈이 훗날 기고문에서 언급한 현금 6만 원이 떠오른다. 평생 받은 중에서도 가장 많았으리라 짐작되는 용돈을 갖고 떠났지만, 결국 쓰지 못한 지폐만 물에 젖어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그 돈은 지금 어디 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될 돈으로, 화폐가 아니라 유품이라고 간주되지 않을까.


김훈이 그 6만 원의 구매력을 언급하기에, 11년 뒤인 지금의 가치를 따져보니 물가 인상을 반영해 대략 7만 4천 원쯤 되었다. 마침 어제 지인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 열 배쯤 되는 돈을 한 달 용돈으로 원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큰 돈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이고, 그 돈을 주려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프게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중고매장에 안도 다다오 도록이 있어서 구입했다. 저자와 출판사가 똑같은 구판도 이미 갖고 있었지만, 저 건축가가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도록의 부제가 "1975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전집"이니, 구판의 간행년도인 2007년부터 신판의 간행년도인 2023년 사이에 추가된 내용이 있을 듯했다. 물론 실제로는 추가 분량만큼 삭제도 있어 쪽수는 비슷했지만.


추가 내용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톰 포드와 리처드 버클리의 주택과 마굿간'이었다. 건축주가 마주인 모양인지, 미국 뉴멕시코의 산꼭대기에 있는 개인 소유 목장에서 말 여러 마리를 기르면서 관리하는 시설을 지었는데, 비록 안도 다다오 특유의 콘크리트와 원형과 복도와 연못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용도를 생각하면 뭔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톰 포드가 뭐 하는 사람인가 궁금해 구글링해 보니, 구찌와 이브생로랑 같은 브랜드에서 근무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라 한다. <싱글맨>과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영화를 감독해서 호평을 받은 이력도 있다는데, 두 권 모두 원작 소설이 나와 있다. 함께 이름을 올린 리처드 버클리는 예상대로 동성 배우자인데 2021년에 이미 사망한 모양이다. 


그런데 안도 다다오 도록에서는 두 사람 소유의 건축물 중에 '마굿간'만 보여주고 '주택' 이야기는 없어서 그 현재 상태가 궁금해졌다. 설명에 따르면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만 먼저 완성되었고, 거기서 자동차로 15분쯤 걸리는 부지에 예정된 "절벽 위에 자리잡고, 마굿간에 있는 것과 유사한 투영 연못도 곁들인" 주택은 여전히 설계 중이라고만 했기 때문이었다.


구글링해 보니 해당 주택은 결국 건축이 불발되고 말았는지, 지금 와서 검색해 보면 안도 다다오가 톰 포드를 위해 설계한 건물이라고는 단지 저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뿐인 것으로만 나온다. 그나마도 이를 포함한 목장 전체가 2016년에 무려 1천억 원에 매물로 나왔는데, 이후 유찰을 거듭하다가 결국 절반 가격인 500억 원에 새로운 주인에게 매각되었다고 한다.


나귀님이 안도 다다오를 좋아하는 까닭은 빛의 교회나 스미요시 주택처럼 유난히 비좁고 불편하며 폐쇄적인 구조물을 매력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계한 미술관이나 주택 단지 같은 대형 구조물을 보면 감탄과 동시에 그 실용성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마련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따라다녔다.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건물이지만, 정작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불편을 호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또 다른 거장 르 코르뷔지에도 실제 거주민을 배려하지 않은 설계로 악명이 높아서, 급기야 어느 공동 주택에서는 주민 모두가 건축가의 의도와 배치되는 방향으로 개조를 일삼았다고도 전한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 벌어진 셈인데, 건축의 경우에는 설계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거주자의 편의도 중요한만큼, 이런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한 일이다. 안도 다다오의 출세작인 스미요시 주택만 해도, '이곳에 실제로 사는 분들이 더 대단하다!'는 어느 건축 전문가의 평가가 있으니만큼, 건축가와 거주자의 뜻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런데 이번 안도 다다오의 최신(이라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난 20여 년 사이의) 작업들을 도록에서 살펴보고 있으니, 대형 건축물의 경우에는 실용성 의문에다가 낯설음과 공허함의 느낌마저 새삼스레 받게 되었다. 인상적이라 여겼던 빛의 교회며 스미요시 주택이며 4X4 주택 같은 비교적 작은 구조물에 비해서는 역시나 지나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매립 사업을 위해 토사를 채취하면서 망가진 자연 환경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인 아와지 유메부타이가 그러한데, 그 결과물이 결국 콘크리트 더미라는 점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콘크리트라 하더라도 수십 년 세월이 지나면 결국에는 부서지고 무너지게 마련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물론 그것까지 건축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나귀님이 너무 속물이라서 '가성비'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멕시코의 몬테레이 소재 개인 주택 같은 경우에도 산중턱 경사면에 설치한 인피니티풀 형태의 투영 연못을 보니, 제아무리 이상이고 예술이라도 결국 '돈지랄'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물론 세계적인 건축 거장에게 마굿간 설계를 맡긴 또 다른 '돈지랄'만큼은 아니겠지만...




[*] 안도 다다오는 김건희와의 회동 소식이 전해져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당시 김건희의 갖가지 부적절한 행보와 관련해서,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쁜 일본인' 정도로 폄하되었던 모양인데, 애초에 예술계에서 꽤나 행세하고 다닌 사람이었으니 저 건축가와의 친분을 쌓을 만도 해 보인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건축이야말로 큰 돈이 오가는 사업이다 보니, 갖가지 구설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권력자나 벼락부자의 변덕을 맞출 수밖에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건축가나 예술가도 거기 부화뇌동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고, 여차 하면 명성 대신 오명만 얻게 되는 경우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안도 다다오 측에서도 이번 한국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에 문자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는 않았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에 신촌 나간 김에 땡땡거리 옆 지하 헌책방에서 (정부의 단속을 피해 암암리에 운영되는 헌책방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 근처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구입한 책은 달랑 두 권뿐이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지학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이고, 나머지 하나는 <재앙의 월요일: 사상 최악의 판결들>이라는 문고본이었다.


교육과학사에서 나온 '법학교양총서' 가운데 한 권인데, 최종고가 저술한 올리버 웬델 홈스 약전을 비롯해 일반인도 읽어볼 만한 법학 관련 교양서가 여럿 들어 있는 시리즈다. 비록 번역과 편집은 좋지 않은 편이지만, 최근 다시 번역된 칼 슈미트의 책도 몇 권 있었고, 여성 법조인이 본인의 강간 피해 체험을 서술한 <진짜 강간>이라는 특이한 번역서도 있었다. 


<재앙의 월요일>은 부제에 나온 것처럼 미국 연방대법원의 역대 판결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 22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미국 헌법 200주년인 1987년에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흑인 최초의 연방대법관으로 유명했던 서굿 마셜이 쓴 서문이 달려 있었다. 지금 검색해 보니 35년 후인 2023년에 제5판이 간행되었는데, 수록된 판결은 38건으로 절반 이상 늘어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름 그대로 연방 헌법에 대한 해석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으로,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도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물론 미국은 여러 주로 구성된 합중국인 까닭에,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사실 우리나라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 구분이 말끔하지 않아 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고).


"재앙의 월요일(블랙 먼데이)"이라는 제목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매주 월요일에 선고되던 전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 표현의 자유, 평등권, 형사피고인의 권리,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주제별로 예를 들어 동성애, 음란물, 인종 차별, 여성 참정권, 삼진아웃제 등이 얽힌 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분석한다.


보통은 당시의 통념상 불법이라 간주되는 행위가 벌어지고, 이후 경찰과 법원을 거쳐 단죄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판결 불복이 일어나며 상고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온 사례가 대부분이다. 절도 같은 진짜 범죄도 있지만, 경찰의 무리한 단속도 있고, 인종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활동가들이 의도적 범법 행위로 판결을 구한 경우도 있다.


제목과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가 '오판'이라고 본 판결 중에는 드레드 스콧 사건처럼 시대적 통념에 굴복한 사례가 많지만, 애초에 연방대법원의 기능이 합헌 여부 판단인 이상 '미드'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파격적이고 극적인 판결을 기대하긴 힘들다. 아울러 이 책에 나온 판결 중 일부는 훗날 뒤집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도 유념할 만하다.


한국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비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법관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혹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부각된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 논란과도 유사한데, 거의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그 논란조차 연방대법원의 전통 가운데 일부인 셈이 아닐지.


거기에 종신제라는 특성상 일부 대법관은 현직 대통령의 후임자 지명을 저지하기 위해 병중에도 출근을 강행한 일화까지 있었으니,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찬사와 비판 모두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흑인이나 여성이나 기타 소수자 출신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동류에게 유리한 판결만 내린다는 보장은 없으니, 정치 논리로 사법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쉽게 정답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중지를 모았다가도 한두 명이 입장을 선회해서 결론이 뒤바뀐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변덕이나 외압의 결과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또는 법치의 근본적 한계라고 봐야 하지 않으려나.


연방대법원에 재직하는 내내 소수 반대 의견에 서는 경우가 많아서 '위대한 이의제기자'로 일컬어진 올리버 웬델 홈스만 해도, 발달장애인의 강제 불임 시술을 다룬 '벅 앤드 벨' 사건에서 합헌 의견을 내며 "3대째 천치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일갈해서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자면, 과연 이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킬 판결이 있기는 한지 의문도 든다.


사실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이 야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심판을 둘러싸고 제기된 갖가지 의혹과 예단에서도 드러났듯이, 심지어는 재판관의 성향이며 출신을 놓고 인신 공격성 발언까지 나왔으니, 이런 '흔들기'를 통해서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실추되며 판결 불복 심리가 팽배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툭하면 사법부를 소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국민 모두에게 법률과 판결에 대한 불신만 조장한 셈이 아닐까. 대통령이고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기존 법률의 빈틈을 찾아 각자의 입장에 걸맞게 이용하려 들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대통령 권한 대행의 헌법재판관 후보 지명을 놓고 또다시 터진 논란 역시 그 연장이라 할 만하다.


일단 편법의 물꼬를 터 놓았으니 앞으로 여야의 대치 과정에서 법률과 판결을 둘러싼 혼란도 지속되지 않으려나. 급기야 이제는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불복하면 그만이다' 식 태도가 난무하니, 이걸 과연 법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법조인조차도 난생 처음 가 보는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셈이다 보니 혼란도 불가피해 보인다. 


일반 국민이라고 사법부의 존재를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차 시비건 층간 소음이건 상식 선에서 적당히 합의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을 일단 소송부터 걸어보고 재판까지 끌고가는 것은 누가 봐도 과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일반 국민조차도 비상식적이라 생각해서 시도하지 않는 일이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상식이자 권리로 통한다니 이상한 일이다.


급기야 개헌 주장도 나오던데, 누군가의 일갈처럼 과연 지금의 혼란이 모두 헌법 때문이냐는 의문을 유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아무리 헌법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재앙의 월요일>에 수록된 논란의 판결들이 이미 증명했고, 나아가 편법을 도모하는 세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스러운 현실이 이미 증명한 셈이니...




[*]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책으로는 '워터게이트'를 보도한 밥 우드워드의 <지혜의 아홉 기둥>과 제프리 투빈의 <더 나인>이 있지만, 저마다 특정 시기를 다룬 것이다 보니 전체상을 조명하기엔 아쉬워 보인다.(아울러 오역과 오타에 대한 지적이 많다!) <최후의 권력, 연방대법원>이라는 책도 있지만, 대법관이었던 저자 존 폴 스티븐스의 회고가 중심이다 보니 역시나 한계가 있어 보인다. 대법관 개인에 대해서도 전기나 자서전이 여럿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될 정도면 십중팔구 이력이나 판결로 인해 유독 주목을 받은 경우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블랙먼, 판사가 되다>가 그러한데,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한 '로 앤드 웨이드' 사건으로 유명한 (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악명 높은') 대법관 해리 블랙먼(1970-1994 재임)의 전기이다.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93-2020 재임)와 소니아 소토마요르(2009-현재)도 전기와 자서전 등이 여럿 간행된 듯한데, 역설적이게도 판결보다는 오히려 성별과 인종에서 비롯된 상징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마찬가지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인 올리버 웬델 홈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전기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홈즈 평전: 미국법의 사이비 영웅>은 부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흔히 진보 성향으로 평가된 저 인물을 보수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판의 여지도 있는 인물이고, 어느 누구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겠지만, 국내에는 본격적인 전기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더 먼저 나온 격이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