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은 태종 집권 시기인 140510월에 이궁(離宮-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으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궁이 전소하자 1608년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었다. 창덕궁은 1868년 경복궁이 복원될 때까지 260년 동안 정궁(법궁-임금이 거처하는 곳)으로의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창덕궁 건물은 17세기 이후 20세기 초 사이에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 수리와 개축을 거쳐 남은 모습이다.

 

[창덕궁은 한국 건축의 전통이 잘 살아 있는 곳이다. 특히 후원은 광대한 영역은 물론이고 건물이 거의 숨어 있는 듯이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여기서 주인은 자연이고 건축은 그곳에 찾아와 잠시 들렀다 가는 손님 같은 모습이다. 창덕궁의 건축은 집을 지으면서 인공을 최소화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담겨있는 곳이다.

-p.45]

 

궁중기록화에서 궁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궁궐은 궁중 의례의 현장으로서 궁중기록화의 배경이 될 뿐만 아니라 화면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공간적 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동궐도는 창덕궁을 상세히 표현했다.


-<동궐도>-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상세하게 그린 궁중회화

 


여러 궁에는 후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 후원만이 거의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오늘날 창덕궁에 자라는 나무는 16708그루다. 창덕궁 후원이 묘사된 궁중기록화는 서총대(瑞葱臺)’가 가장 대표적이다. 1505년에 조성된 서총대는 남쪽으로 창경궁 영역과 인접해 있다.


-<서총대친림사연도>, 윤두서, 비단에 채색, 1560

 


조선 24대 왕인 헌종(憲宗)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여덟 살에 즉위하여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열다섯 살에 친정체제에 들어갔지만 세도정치에 의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스물세 살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헌종은 1847년 낙선재 일곽을 중수하고 여기에서 기거했다. 후궁 경빈을 맞으며 연조(燕朝- 사적인 공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헌종은 대단한 서화취미를 가졌다. 많은 도서와 서화 인장을 수집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했다. 헌종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는 추사에게 글씨를 써서 올려 보내라고 했다. 그때 추사는 몸이 아파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었지만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간신히 몇 작품을 마쳤다고 한다. 헌종 자신은 예서를 잘 썼다. 서화도 즐겼다.


-<보소당> 현판, 나무, 헌종의 어필

 


19071113일 순종은 창덕궁으로 입어(入御)하여 인정전은 다시 정전으로의 역할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에 대한 알현도 지속되지 않고 황제 폐하라는 칭호를 쓸 수 없었으며 격을 낮춰 왕 전하라고 해야 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해체 과정은 이민족 지배자의 의한 국권침탈 과정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영친왕은 1907년 열한 살의 나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엄격한 일본 군인의 생활을 했다. 1916년 일본 황족인 마사코와 약혼했다. 마사코가 아이를 낳지 못할 체질이라는 이유로 조선 왕실의 대를 끊어놓기 위한 계략으로 이 결혼을 추진했다고 한다. 고종은 반대했고, 영친왕의 결혼식 나흘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이런 이유로 고종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의 나이 61세에 얻은 고명딸이다. 덕혜옹주는 열네 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조발성 치매증이란 진단을 받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덕혜 옹주는 1931년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강제로 결혼한다. 덕혜 옹주의 병이 심해지자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남편과 이혼했다. 38년만에 귀국한 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순종의 계후인 윤대비, 영친왕비 등과 함께 지냈다.


-덕혜옹주, 1923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소학교에서 찍은 사진

 

**위 내용은 창덕궁 깊이 읽기’, 국립고궁박물관 엮음, 글항아리에서 발췌 요약하였고, 페이지는 생략하였습니다.

 


창덕궁 깊이 읽기창덕궁두 책은 제목 그대로 창덕궁에 대한 책이다. 전자는 창덕궁에 관련된 여러 주제를 다루며 책에 사진뿐 아니라 많은 자료를 담고 있다. 내용의 깊이가 상당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후자는 창덕궁 건물을 중심으로 서술되어있다. 창덕궁의 전반적 역사에 대해 개괄하고 건물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자료는 거의 사진을 이용했다. 만약 창덕궁을 간다면 이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건물 마다 멈춰 이 책이 설명해주는 것을 읽고 다시 건물을 본다면 더 깊이 있게 창덕궁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창덕궁은 조선왕조 문화가 그 색깔을 가장 짙게 드러내던 17세기에서 19세기 중반을 법궁(임금이 거처하는 곳)으로 지내온 곳이었다. 당연히 창덕궁은 조선왕조가 갖고 있던 최고 수준의 문화가 한곳에서 빛을 발하는 장소가 되었다. 최고 수준의 건축과 조경이 여기에 담기고 최고의 회화작품이 이곳을 그려냈으며 가장 세련된 음식과 복식,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이곳에서 발현되었다. 장엄함의 절정에 도달한 음악이 연주되고 화려함의 극치를 다한 춤이 이곳에서 피로되었다. 창덕궁은 조선왕조 최고의 문화전당이었던 셈이다.

p.7~8]




 





그레이스 님, 카리나 님과 함께 창덕궁에 다녀왔다. 아직 봄꽃이 피지 않았고, 초록이 진하지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아 걷기에 좋았다. 궁의 사계절은 언제나 아름답다.

 

궁에 가면 매번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낀다. 잘 가꾸어져 있지만 텅 빈 공간에서 감지되는 죽은 자들의 일렁임이 상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모습과 언어로, 영화(榮華)와 한탄과 쇠락으로 엉킨 기운이 여기저기 떠도는 느낌이다. 그 이상하고도 고즈넉한, 모든 것에 사연이 담겨있는 궁은 잠시나마 내게 현실과 떨어져 있게 한다.




창덕궁에서 나와 점심과 커피를 마시러 인사동으로 가는 길목은 우리가 궁에서 느낀 좋은 감정을 순식간에 삭제시켰다. 여기저기에 포진해 있는 태극기부대가, 경찰차와 경찰들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대변했다. 거의 비슷한 모습의 노인들은 거기서 컵라면을 먹으며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일 거슬리는 건 소리였다.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악을 쓰며 내는 목소리들에 소름이 돋았다.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날카롭고 깨지는 듯한 그 소리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사진에 나온 진한 커피색처럼 까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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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13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금희 작가가 말하는 대온실은 안 가 보셨나요? 요즘 그 책 덕분에 창덕궁 가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나 본대요. 다른 곳인가요...?
덕혜옹주의 병이 조발성 치매라니. 그 젊은 나이에... 그러게요. 고궁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요. ㅠ

페넬로페 2025-03-13 12:00   좋아요 1 | URL
대온실은 창경궁에 있어요
창덕궁 후원에서 대온실이 보여요.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해 신경증을 앓게 되었고 그것이 결혼 생활에 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더라고요. 일본인 남편 사이에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딸도 불행했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