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金♥작가 1편 김영하 작가편(http://blog.aladin.co.kr/tiel93/6473969)에 이어 김경욱 작가에 대하여 페이퍼를 올려보고자 한다. 올해가 김경욱 작가의 등단 20주년인 해라고 한다. 김영하 작가가 1996년에 등단했으니 그보다 3년 더 빠르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김경욱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것은 그보다 훨씬 늦다. 

 

 

 요즘 와서 보니 김경욱 작가야 말로 미남이시다는^^; 사실 김영하 작가의 프로필 사진에 반했던 데에 반해 김경욱 작가의 프로필 사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남인 줄 모르고 진심 작품 때문에 좋아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 변명이 안되,겠지?^^ 작가님 소설로는 2005년에 처음 읽은 <장국영이 죽었다고?>로 시작해서, <천년의 왕국>, <위험한 독서> 그리고 공통 집필한 <소설가로 산다는 것>과 <헬로, 미스터 디킨스>를 읽었는데 희한한 건 이 책들이 집에 하나도 없다. 팬이라고 하기엔 참 미안한 지점이다. 대신 집에는 읽지 않은 <동화처럼>과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만 빳빳하게 서 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이 오래된 연인처럼 읽은 듯 안읽은 듯 다 읽고 다 곁에 두었다면, 김경욱 작가의 소설은 연애가 시작되기 전 엇갈리는 인연처럼 아직까지는 이렇게 어긋나고 있다. 읽은 책은 집에 없고 읽지 않은 책만 집에 있으니 읽고 나면 이 책들도 왠지 어디론가 보내버려야할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신간이 나왔으니 어여들 읽자고!

 1999년부터 읽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에 비해 6년이나 늦게 만난 김경욱 작가의 소설이지만, 오래된 연인처럼 마침 그 즈음 살짝 눈돌릴 때였는데(?) 김경욱이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어 또 눈이 하트 뿅뿅 되었다. 독자 마음 참 간사하다. 그래도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 보다는 많이 덜 읽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두 분의 색깔이 많이 달라서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아니 어쩌면 다음에 이야기할 김중혁 작가를 포함해 세 분의 색깔이 정말 달라서 독자로서는 셋을 동시에 다 좋아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 아직도 한창 연애 중(나 혼자만,,,,^^;)인 김경욱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본다.

 

<우리 처음 만난 날 - 장국영이 죽었다고?>

 

 이 책이 생각난 것은 바로, 장국영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소통'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많이 외로워보였다.  기록 중 표제작 '장국영이 죽었다고?'에 대한 기록 중 일부를 옮겨본다.

 

2005.10. 18

개인적 추억은 개인적으로, 대상에 대한 그리움 역시 개인적으로, 바로 그 개인적인 멋스러움이 인터넷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그것이 뭔가 잘못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한 잘못을 느껴본다.

 

 

<아, 작가님 사릉합니다 ♥ - 천년의 왕국>

 

 역사 소설을 쓸 줄은 몰랐다. 단편을 통해 느꼈던 섬세함을 기대했는데 돌아온 것은 묵직함 그리고 탄탄한 문장력이었다. 책을 읽은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문장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경욱 작가의 소설을 읽은지가 꽤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 소설의 역할이 크다.

 

(그나저나 리뷰를 적은 것 같은데 또 없다. 새로 찾은 공책엔 김영하 작가의 두 작품의 리뷰가 있었다. 참, 기록은 열심히 하는데 정리가 좀...^^:)

 

<사랑의 확신 - 위험한 독서>

 단편을 읽어도 장편을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편편이 무게감이 느껴졌다. 김경욱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 형성되었다.

 

2009.

대체로 몇몇 작품만 인상적인 많은 단편집과 비교해볼 때 지금 난 꽤나 ‘유익한 독서’를 한 듯 하다.

 

<내 눈엔 너 밖에 안 보여♬ - 소설가로 산다는 것>

여러 작가들의 소설쓰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가로 산다는 것>의 첫 글은 김경욱 작가였다. 에세이라고 하기엔 매우 진지했고, 나는 그런 진지함이 정말 좋았다. 이후에 이어진 소설가들의 이야기는 그에 비해 가벼웠고, 나는 그런 가벼움이 정말 가벼웠다. 이 책에선 김경욱 소설가만 보였다.

 

2012. 1. 23

-17명의 작가가 글을 썼고 나는 그중 대여섯 명의 글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단 3명의 글을 좋아했고 그중 으뜸은 김경욱이다. 그러니까 내게 이 책은 <-김경욱 외>이다.

 

<더 알고 싶어요!>

 사놓고 읽지 못한 책, 분명 솟구치는 궁금함으로 샀을 거면서 이렇게 밀려있다. 새로 나온 소설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느낄 묵직함도 기대하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장국영이 죽었다고?>이전의 작품도 궁금하다. <헬로, 미스터 디킨스>에서의 김경욱 작가님 작품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중혁 작가님 소설이 좀더 좋아서 이 책은 3편에 소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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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애정하는 3김 작가가 있다. 좋아하게 된 순서로 소개하자면 김영하, 김경욱, 김중혁 작가가 바로 그들이다. 나는 각기 그들을 영하느님, 욱이옵, 혁사마 라고 부른다. 별명은 혁사마, 영하느님, 욱이옵의 순서로 지었다. 사실 김경욱 작가의 경우엔 괜히 설레어서 별명을 지어 부르지 못했다가 신간 출간 기념으로 별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물론 대상없는 호칭이다.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스물두 살로 기억한다. 그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충격과 매력을 동시에 느꼈었다. 그땐 두세줄 메모로 기록했을 기록장에 나는 무어라 적었을까? 그즈음의 기록을 찾아보니 다행히 있다.( 잠시 후에 소개^^) 책장 한 칸엔 이 3金 ♥작가의 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읽었으니 전작은 아니더라도 9할작주의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정하고 읽지 않았는데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혹은 그것을 놓친 다음에는 늦은 후에라도 찾아 읽다보니 스물두 살로부터 13년이 멀어진 지금, 나는 작가의 경력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초기작부터 <빛의 제국>까지를 좋아한다. 이후의 작품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좋았다. 그를 가장 신뢰하게 된 작품은 단연 <검은 꽃>이다. 이번에 출간된 <살인자의 기억법>은 왠지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작품들을 닮았을 것 같은 기대를 해 본다. 새로우면서도 탄탄한 문장과 사건을 만나고 싶다.

 

 

 <처음 그에게 반했던 작품들- 1999년 이후의 기록과 함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시작한 줄 알았는데 기록을 보니 <호출>을 먼저 읽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이 책을 읽고 스물 두살의 나의 기록 중 한 줄을 소개해 본다.

1999.7.1

- 신선하다. 깬다. 이게 내가 그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다.

 

 

1999. 7. 26 

- 착한 소설이다. 나비효과. 그런 맘이 들 때가 있다.

 

 

 

 

 

 

1999. 8. 21

- 푹빠져 있는 지금 그의 소설에 대해 평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담배같은 소설.

매캐한 중독성.

 

 

  

 

이 책이 네번째 읽은 소설이라는 점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이 책의 인상이 컸던 모양이다. 그것도 2002년에야 읽었다니!!!

 

2002. 1. 7

-난 왜 김영하의 글을 좋아하는 걸까? 형식을 파괴하고 기존의 안정된 내용들을 완전히 탈피했기 때문이지. 사실 뭘 말하고자 하는 지는 파악이 잘 안된다.

 

<권태기랄까? - 2005년 이후의 기록과 함께>여기서부턴 리뷰를 길게 쓰던 시기이다.

 

2005. 1. 12

- 다소 부드러워진 그의 글 속에도 예전의 느낌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나도 함께 물러진 탓이리라.

 

 

 

2005. 1. 26

영화평을 읽을 땐, 그가 글을 잘 쓰는 사람같지는 않다. 그저 사고가 유연하다고 느껴질 뿐. 그러하기에 여전히 난 그가 소설을 쓰기를 바란다.

 

 

 

 

 

 

2006. 11.2

일반인으로서의 김영하, 일명 지식인으로서의 김영하, 소설가로서의 김영하가 사는 글이었다. 물론 그 안에 일반인으로, 일명 지식인으로, 직업인으로 나도 살고 있는 글이었다. 그래서 나는 10년 가까이 그의 글을 사랑하나 보다.

 

 

 

2008. 10. 30 (시기상으론 절정기지만 작품상으론 권태기인듯)

-길었고 쉽게 읽히긴 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도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실망하기도 했던 소설이었다.

 

 

 

 

 

<애정의 절정기 -2008년 이후의 기록과 함께>

 

  2008. 10. 9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게 인생이 아닐까

‘끔찍’까지는 아니더라도 깜짝 정도는 놀라야 하는 일, 못 견딜 것 같던 슬픔과 아픔, 고통의 일들이 여러 번 반복 되면 그것은 정말 일상처럼 느껴지고 그들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함께 들었다.

 

 

 

찾았다 이 책의 리뷰를!

2006. 11. 19

역사 소설치고 이 소설만큼 민족주의와 영웅주의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글을 읽는 내내 나는 특정 인물에 대해 과도한 애정과 연민, 존경을 가진 적이 없다.

 

 

 

2010. 8. 15

- 김영하의 짧은 소설은 비현실적인 내용에서 현실감을 준다는 점이 다르다. 다시 말해, 순간 멍해지는 느낌을 받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내 든다.

 

 

 

 

그 외 읽었지만 기록이 없는 책들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책들

 

예약 판매로 구매하고 기다리는 <살인자의 기억법>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은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사놓고 읽지 못한 <옥수수와 나>!

 

 

 

남은 2金의 이야기는 다음 이시간에,,,, 근데 나 사실 영하느님 데뷔하셨을 때 프로필 사진에 반했었는데 그때 생각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생겼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무시당함...확인해보니 미남은 아니신걸로! 목소리가 좋으시니까! 남자는 목소리지!라며 다시 신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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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말에 문득 스스로의 무지에 놀라 '나만 모르는 소설가들, 나만 안읽은 소설들'이라는 페이퍼(http://blog.aladin.co.kr/tiel93/6463792)를 쓴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2년 전쯤까지만 해도 로맹 가리 또한 그런 소설가들 중에 하나였고, 그의 소설이라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제목만 들어본 때였다. 그러다 우연히 소식(아주 오래된 소식이지만 내게는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가 바로 로맹 가리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에밀 아자르라는 것이다. '다 아는데 또 나만 모르는건가?'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최소한 로맹 가리를 알고, 로맹 가리의 소설을 세권째 읽는다는 사실만은 다행스럽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은 메시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서술한 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흰 개>의 로맹 가리는 냉소적이고 직설적이었다. '도대체 이 작가의 정체가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이 술술 잘 읽혔다면 <흰 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에밀 아자르의 책보다 로맹 가리의 책이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책을 내가 즐겨 읽을 수 있을까 하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유럽의 교육>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었고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의 개정판이 올해 초에 나왔을 무렵 로맹 가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정작 유명해진 것은 도서전에서 대통령이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이 책을 고를 때 이 책이 교육정책과 관련된 줄 알고 골랐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한 개인으로서 무턱대고 이 책을 산 사람들이 로맹 가리의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히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내 염려와 달리 이 책은 <흰 개>보다는 훨씬 흡입력이 있었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야네크와 함께 했다.

 

최근 몇 년간 세계대전과 관련된 여러 편의 책을 읽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배경 지식은 '히틀러 나쁜 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이 달에 그 당시의 책 두 편을 읽자하니 스스로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어졌다. 어쩌면 생각이 이리 단순한지, 다각도에서 그 당시를 알고 싶어졌다. 독일과 유대인의 문제를 넘어 유럽 전반의 문제로 더 넓혀 세계적인 시각에서 당시를 이해하고 싶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고, 더 깊이 안타까워하고 더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유럽의 교육'을 바라보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의 반대되는 입장 모두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고 싶어졌다. 도대체 히틀러는 왜 그런 전쟁을 벌였고,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가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며, 유럽은 어쩌자고 그를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의문스러웠다. 독일군의 아버지이였지만 그런 독일을 마음 아파하는 아우구스투스 슈뢰더의 모습, 순수하다고 착각하는 아내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변호사 스타니슬라브 스타히에비치의 행동을 이해하는 척하기 보다는 진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야네크의 입장과 도브란스키의 입장을 공평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야네크의 입장에서 좀더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의 말처럼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328쪽)이라는 것에 동조하고 싶어졌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 그 말에.

 

나는 참 어정쩡하다. 절망과 희망의 그 정가운데에서 어느 쪽을 봐야할 지 언제나 모르는 상태인 듯 하다. 그 둘이 함께 한 폴란드의 한 숲속의 묘한 아름다움이 쉬이 잊힐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나처럼 불완전한 채 어정쩡한,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희망을 품는 묘한 상태라는 것이 인간이 세상에 자리하는 좌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보지만 그래도 늘 어정쩡한 스스로에게 조금은 답답함이 느껴진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나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 중 누구의 마음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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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집 가까운 시립 도서관에 갔다. 아이와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에 그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아들의 친구 가족이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아이를 친구 엄마에게 잠시 맡기고 책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매번 아이를 데리고 2층 자료실에 가면 여유는 커녕 나가자는 재촉을 대놓고 들어야 하는 터에 빈 손으로 나온 적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참 달콤했다.

 

나는 주로 '새로 들어온 책'코너에 오래 머문다. 집 가까운 시립 도서관은 '새로 들어온 책' 책장이 무척 넓다. 책들이 꽤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점이 개인적으로는 참 좋다. 내 코스는 인문 쪽에서 자연과학을 거쳐 문학, 역사 및 여행의 책장에 꽂힌 순서대로 훑고 그 과정을 세 번 정도 하게 된다. 세번째에 가서야 눈에 띄는 사랑하는 책들이 꼭 있다. 아마 세번째 되어야 책들이 나를 받아주는 모양이다. '나 여기 있어, 그러니 날 데려가.'라고 자신을 허락해주는 모양이다.

 

 

금요일, 나를 불렀던 책은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와 한국 작가 9인이 쓴 <헬로, 미스터 디킨스>였다. 그중 시집을 얼른 먼저 읽었는데 살짝 내 취향은 아니어서 '미안'. <헬로, 미스터 디킨스>는 잊었던 사랑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표지에 쓰인 김경욱, 김중혁을 비롯한 9명의 작가들이 찰스 디킨스를 테마로 한 권의 책을 엮다니, 잊었었던 설렘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서 결국, 아직도 표지만 쓰다듬을 뿐 읽지를 못했다. 이게 문제다. 너무 설레는 책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려 결국 읽지 못하곤 한다. 조금씩 고쳐가고 있는데 잘 안된다.

 

 

 

 

일요일. 아는 분이 아이들과 키즈카페를 가자고 하셨다. 만남의 장소는 그 집과 가까운 시립 도서관이다. 이곳은 시설이 단연 좋고, 지은지 얼마 안되어 책상태가 좋지만 일단 책이 적다. 그리고 우리 마을 시립 도서관보다 '새로 들어온 책'의 책장이 턱없이 적다. 일일이 장르별로 뒤져야 하는 이를테면 목적형 대여에 가깝다.  그 몇 안되는 공간에서도 턱하니 나를 부르는 아이가 있으니 김성대의 <사막 식당>. 시인인 아는 언니가 강추하고 예전 우결에서 조정치가 낭독했을 때 좋았던 시집이라 반가운 마음에 빌리고 아동실에서 슬쩍 읽어보니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키즈카페에서 놀다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아 다시 우리 동네 시립 도서관으로 고고씽!

 

 

 

 

그곳에서 바로 나의 로, 맹가리 오빠의 책 <유럽의 교육>을 만났다. 역시 세번째 훑는 과정에서 '나, 여기 있어! 로맹 가리야, 네가 사랑하는.'이라며 손짓하는 살짝 찌그러진 상태로. 로맹 가리의 데뷔작인 이 소설은 책이 나올 때에도 책 좀 읽으시는 분들에겐 관심을 받았지만 일반 백성에게까지 유명해진 것은 국제도서전에서 대통령이 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서점에는 그 타이틀로 묶여져 소개되곤 했는데 그것이 과연 책 매출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 생각엔 이게 핀란드 선진 교육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골랐을 것 같다는 추측이 되는데 말이다. 이 책도 사실 굉장히 읽고 싶었었는데 매력 만점 맹가리 오빠이지만 <자기 앞의 생>와 <흰 개>를 읽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기에 '내가 과연 그를 즐겨 읽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진 터라 이 책으로 한 번 실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설렘에 비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책에 빠졌다. 책을 다 읽을 무렵 아이가 아파 속도가 느려졌지만 아이 곁에서 밤을 새며 읽었을 정도로 책을 읽는 동안 야네크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아! 나는 로맹 가리를 즐겨 읽을 수 있겠어!'라는 확신도 생기고 말이다.

 

일 주일동안 세 번 두 군데의 도서관에 다녀왔지만 '나를 부르는 손짓을 하는 책'을 만나는 데에는 우리 마을 도서관이 좋고, 그 책들을 읽기에는 야외 테라스가 있는 남의 마을 도서관이 좋았다. 마을 버스를 타고 가면 30분이 걸리는 두 도서관을 모두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 둘의 장점을 서로 벤치마킹이라도 하길 바라지만 그건 뭐 내 욕심일 뿐이다.나를 향해 손짓하는 책들이 있는 넓은 책장과 함께 하는 시간도 좋고 넓은 테라스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러 가는 마을 버스에서의 30분도 나쁘지 않다. 이만하면 도서관 환경 참 좋은 곳에서 살고 있다 싶고, 적어도 내 마음 헛헛할 때 받아줄 곳 둘 있어 다행이다 싶다. (실제로 부부싸움하면 간다^^) 아이가 빨리 수족구가 나아서 함께 또 나들이 가고 싶다. 아파 엄마가 잘해줘 그런가 애교만 늘어서, 이젠 엄마가 해달라는 것도 다 해줄거라는데 책 고르는 3회 반복의 시간을 기다려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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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어쩜 이다지도 무지한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슈테판 츠바이크, 제임스 설터, 구효서라...

한 달에 10여 권의 책을 읽고, 일 년에 100여 권의 책을 읽는다면 분명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량보다는 많은데 나는 의외로 작가들을 잘 모른다. 물론 애정하는 작가가 있다. 알랭드 보통, 밀란 쿤데라, 헤르타 뮐러, 김영하, 김중혁, 김경욱, 오은, 김언, 심보선, 아멜리 노통브, 오르한 파묵, 알베르토 망구엘, 로쟈 등등.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들락 거리거나 책관련 카페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보면 마치 나만 모르고 다 아는 작가의 소설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채 하지만 나 정말 궁금하다. 사실 궁금해서 <한밤의 아이들>같은 경우에는 읽어보려고 시도 했었다. 다만 실패했을 뿐이다. 그렇게나마 해소가 되면 기호를 말할 수 있는데 대체 나는 그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을 처음 접하니 할 말이 없다.

 

 

 

여러 번 페이지에서 언급했다. 김영하 작가가 읽어주는 <만>에 반해 그가 궁금했다고. 그러나 아직 그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어제서야 바로 그 책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내 책장에 들어왔다. 탐미주의라고 했고, 실제 그의 삶이 탐미적이라고 했다. 탐미적이라고? 그게 무슨 뜻일까? 소설을 들어본 바로서는 무척이나 '여성의 몸'에 대한 탐미로 느껴졌다. 사실 혼자 책읽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나로선 썩 즐겨읽는 내용이 아니지만 왠지 끌렸다.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는 더더욱! 제대로 빠져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소설을 읽어주며 언급한 <세설>이라는 (내 기억에는 그런데 확실하진 않다.) 작품도 궁금해하는 중이다. 최근 창비 세계문학 속에서도 <열쇠>라는 작품으로 포함되어 있으니 이 작가가 궁금한 것은 나만의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 왜 우리는 그의 소설을 탐하게 되었을까? 세상이 어지럽기 때문일까? 어쩌면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나랑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잊자. 아름다움을 제외하고 모두.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들을 한창 구입할 때만 해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내 위시리스트에 올랐던 적이 없었다.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슈자도 몰랐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던가? <열린 인문학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유유출판사에서 나온 연두색 표지를 보고 가진 1%의 관심, 누군가 추천하는 페이지에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보고 사실 작가보다는 주제에 대해 가진 10%의 관심, <백년의 지혜>에서 알리사 할머니가 의지했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30%의 관심, 그러다가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나니 주루룩 목록이 뜨는 그의 많은 작품들, 작품들, 작품들.  나는 가랑비에 옷이 홀랑 젖고 말았다. 그리고 우선 <이별 여행>이라는 표지가 아름다운 책을 구입했다. 나는 그의 소설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사실 소설 외의 책에도 많은 관심이 생기지만 우선 시작은 소설로 하고 싶다. 알리스 할머니에 의하면 그는 히틀러 집권을 미리 예감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소설이 심리묘사가 섬세하다고 한다. 섬세함과 통찰력을 갖춘 소설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인간의 조건 중의 하나이다

 

 

 

 

 

 

 

 

 

 

하하하, 난 이 페이지에 그의 데이터를 입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가벼운 나날>의 표지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탓이다. <가벼운 나날>이 출간되어 책정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인데, '작가들이 칭송하는 작가' '미국 최고의 문장가'로 꼽힌다고 했다. 더욱이 이 책의 편집자는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오래 남을 책을 들라”는 질문에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꼽았다고 한다. 고뤠? 그 정도야?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그저 <가벼운 나날>에 한하여 생긴 관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트위터였다. 트친들이 주고받는 트윗들에 제임스 설터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다. 그 중 <어젯밤>을 읽었다느니 다시 읽을 예정이라느니 하는 말은 심히 부담되었다.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작가들 중 단연 독보적으로 백지상태의 지식이지만 왠지 문장력이 기대된다.

 

 

 

 

 

 

 

 

 

 

 

한국 소설을 어릴 때부터 읽은 것이 아니라 대학 때부터 읽었기에 의외로 한국 소설을 잘 모른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은희경, 김영하였고 나는 그 이전에 나온 작가들의 소설은 이문열의 삼국지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경숙과 김형경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더 선호한다. 그러다 구효서의 신작 모니터링을 하게 되었는데 사실 좀 놀랐다. 1958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56세인데 문장에서 젊음이 느껴졌다. 탄탄했고 예상을 전복했다. 단편들의 내용도 좋았지만 그 점이 개인적으로는 인상깊었다.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터에 이번에 <베를린 인 랩소디>를 구입했다. 책을 고르면서 '구효서'라는 이름만으로 책을 사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평은 내가 신작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 필력의 작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악에 귀 기울이고 싶다.

 

 

 

 

 

 

 

 

 

 

아마 지금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더 많은 작가들이 내 머릿 속을 살짝 살짝 가랑비 뿌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떤 계기로 소낙비 한 번 내려주면 나의 관심은 수직상승할 터이다. 좋은 작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참 좋은 일 같다. 처음엔 몰랐던 작가가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하기도 했지만 내가 꼭 그들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라며 일단은 합리화를 하고 그들 중 몇 분을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고 읽고 애정하게 되는 과정이 참 좋다. 이 네 분 중 세 분의 소설이 오늘이면 책꽂이에 자리하게 된다. 내 손에도 부디 빨리 오시길 바랄 뿐이다. 그건 나도 장담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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