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떤 어둠(<오직 두 사람>)이란 건 뭘까? 남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둘만의 매커니즘으로 그 둘의 삶이 연명되는 것? 아니 그 둘조차도 서로의 언어를 불신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속되는 관계? 그게 뭘까? 그게 뭘까? 계속 생각해 보았다. 오직 이 소설집과 내가 느꼈을 어떤 어둠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읽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김영하의 소설을 만나는 것은 분진처럼 내 안에 가라앉아있는 어떤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렇게 이 소설들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오래 전 일이 생각이 났다. 아마, 나도 아주 찰나였지만 그런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꼭 현주와 아빠의 관계처럼 고구마를 먹은 정도의 갑갑함은 아니었고 상대와 교감이 깊지 않아 금세 거기에서 빠져나왔었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속한 관계 속에서는 그 관계의 어둠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소멸을 전제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가 되는. 우중충한데 왜 자꾸 여기에서 생각이 머무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소설의 목적이라면 이 소설은 성공한 건가?

 

가장 묵직하게 읽은 소설은 [아이를 찾습니다]였다. 도대체 삶을 살게 하는 힘은 무엇에서 오는 것인지, 아이를 잃지 않고 아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윤석은 더 '잘' 살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삶은 배신의 연속이고 그 배신이 대체로는 삶을 무너뜨리지만 때로는 그 삶을 지탱하게도 한다는 것을 윤석의 삶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한없이 무너지던 그때에도 죽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구나. 지나간 남의 삶에서 이렇듯 나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삶이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데 이토록 평범한 내가 그 삶에 일부 있다는 것, 소설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다. 어쩌면 모든 소설과 나는 '오직 두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옥수수와 나]를 읽으면서는 '내' 무엇이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란 본디 그런 것인데 무엇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크게 중요할까, 혹은 내가 무엇이든 보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왜 무엇을 어떻게 보려는 일 보다도 무엇이 되려는 데에 더 애를 쓰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생각은 [최은지와 박인수]에서도 들었고, 더 나아가 [신의 장난]에서는 제한이 없는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저마다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소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한심함이 들었다.  우울만이 희망이라는 정은의 말에 백 프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다보면 너무 밝음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불현듯 그것이 너무나 불균형하다고 느껴졌다.

 

김영하의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왠지 제일 처음 그의 소설집을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내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을 때 당시의 남자친구는 몇 장 읽어보더니 작가더러 변태냐고 물었었다. 지금의 소설이 그때처럼 하드코어적이진 않지만 최근에 읽은 소설들보다는 초기에 읽었던 소설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20대의 나와 이제 막 40이 된 내가 다시 만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해맑았던 때는 30대인 것 같으니 아마 소설이 아니라 내가 변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20대 초반 사진으로나 보던 작가님을 TV에서도 수시로 보더니 급기야 얼마 전엔 게릴라 사인회와 강연에서 초근접으로 뵈었으니 20대의 팬심과 40의 팬심이 만난 건 확실하다. 사인받으러 챙겨가느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그 책들이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초기작을 다시 읽어보자! 그때도 그랬듯 지금 이 소설들도 내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으니. 그땐 큰 균열이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