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퇴계의 후손으로 퇴계 선생의 이름을 그 어느 집 아이들 보다 많이 접했지만 사실 어릴 적에도 제대로 된 위인전 한 번을 읽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이라는 말로 접했을 땐 이미 지폐의 레벨에서 느꼈던 느낌이 여전했다. 이이는 젊은 사상이고 뜨는 태양이며, 이황은 고리타분하고 실용적이지 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귀에 딱지 않게 그의 이름을 말하는 이가 없어 그런지 내가 퇴계의 후손이라는 점은 아주 간혹만 되새길 수 있을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도 나는 퇴계를 이름 외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후손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굉장히 민망한 노릇이었다. 어릴 적 황희 정승의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라는 일화에 감동받아 그의 책을 뒤적거린 적이 있고, 오랫동안 근무한 지역이 다산 정약용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라 그의 평전은 적지 않게 읽었다만 정작 퇴계에 관한 그 어떤 책도 읽은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글항아리에서 [퇴계처럼]이라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른 사 두었고 이번에 기회가 되어 [퇴계 생각]을 읽게 되었지만 읽기 전까지도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한국국학진흥원 교양총서/ 오래된 만남에서 배운다'라는 기획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책장을 열자마자 그런 긴장은 스르르 풀린다. 특히나 [퇴계처럼]은 퇴계의 가정사를 중심으로 퇴계의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를 엮은 내용이 많아 무척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생애 전체를 통틀어 주변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아 현재 전하는 것만도 3154통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더욱이 그 편지의 내용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겸허하며 욕심이 없는 학자였는지 알 수 있는데 그런 그의 성품 때문에 아무래도 존재감이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라는 강력한 무기에 대적하기에 사단칠정설은 현대인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에 그러하다고 하여 그가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퇴계처럼]에 이어 읽은 [퇴계 생각]은 예상과는 달리 퇴계의 생각만을 다룬 책이 아니라 퇴계와 생각을 나눈 이들의 생각을 더불어 다룬 책이었다. 영남학파의 대표 학자로 호남의 유림들과 생각과 마음을 스스럼없이 나눈 수많은 예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가 지역과 나이의 차이를 불문하고 좋은 지기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탐하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인데 그런 순수한 마음과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은 한미한 가문에서 홀어머니 아래에서 유명한 스승 한 사람 없이 공부하였음에도 당대의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우리가 퇴계를 떠올릴 때 기대승 한 사람만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앎인지 부끄러웠다. 네 명의 임금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사직과 재직을 반복하며 오간 것이 일곱 번이며 늘 궁궐이 아닌 초야에서 학문을 닦길 원했던 이가 퇴계였고 그러한 마음을 존숭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 새삼 아름답게 보인 것은 너나없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자하는 요즘 세상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퇴계의 삶과 생각을 말하며 현실을 비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공감이 더 많이 되었다.

 

[퇴계처럼]이 퇴계의 성장과정과 개인사를 소개하고 주변인들과의 일화들을 통해 자상한 카리스마, 상식에 기반한 융통성있는 지식, 농사일을 중요시한 실천인으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소개한다면 [퇴계 생각]은 가정과 주변인에서 벗어나 학문적으로 소통한 호남의 유림들과 관계를 통해 퇴계의 사상이 무척 깊고 정밀하며, 식견을 나누는 태도가 무척 세련되고 균형감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구나 뿌옇게 이해한 사단칠정에 대한 퇴계의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준다는 점이 무지한 후손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주자학을 처음 연구한 이가 이황이었다는 점은 왜 이리 잘 알려지지가 않았는지 놀랐는데 아마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의미있는 연구였겠지만 아무래도 요즘 시대는 그것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방향이기에 그런 모양이다.

 

올해 퇴계를 알게 되려는 모양이었는지 일전에 초방책방에서 출간된 [도산서원]이라는 책을 선물받고 도산서원에 가고파졌는데 이렇게 [퇴계처럼]과 [퇴계 생각]을 읽게 되니 마음이 괜히 충만해진다. 매화를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도산 서원엔 그가 형님으로 모신 매화가 있다고 하니 매화도 볼겸 내년 봄쯤엔 갈 수 있으려나 막연한 기대를 해 본다.  이 세 권의 책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무척 고마웠다. 따로따로도 충분히 좋은 책이지만 함께여서 더 좋은 세 권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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