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어쩜 이다지도 무지한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슈테판 츠바이크, 제임스 설터, 구효서라...

한 달에 10여 권의 책을 읽고, 일 년에 100여 권의 책을 읽는다면 분명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량보다는 많은데 나는 의외로 작가들을 잘 모른다. 물론 애정하는 작가가 있다. 알랭드 보통, 밀란 쿤데라, 헤르타 뮐러, 김영하, 김중혁, 김경욱, 오은, 김언, 심보선, 아멜리 노통브, 오르한 파묵, 알베르토 망구엘, 로쟈 등등.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들락 거리거나 책관련 카페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보면 마치 나만 모르고 다 아는 작가의 소설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채 하지만 나 정말 궁금하다. 사실 궁금해서 <한밤의 아이들>같은 경우에는 읽어보려고 시도 했었다. 다만 실패했을 뿐이다. 그렇게나마 해소가 되면 기호를 말할 수 있는데 대체 나는 그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을 처음 접하니 할 말이 없다.

 

 

 

여러 번 페이지에서 언급했다. 김영하 작가가 읽어주는 <만>에 반해 그가 궁금했다고. 그러나 아직 그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어제서야 바로 그 책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내 책장에 들어왔다. 탐미주의라고 했고, 실제 그의 삶이 탐미적이라고 했다. 탐미적이라고? 그게 무슨 뜻일까? 소설을 들어본 바로서는 무척이나 '여성의 몸'에 대한 탐미로 느껴졌다. 사실 혼자 책읽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나로선 썩 즐겨읽는 내용이 아니지만 왠지 끌렸다.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는 더더욱! 제대로 빠져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소설을 읽어주며 언급한 <세설>이라는 (내 기억에는 그런데 확실하진 않다.) 작품도 궁금해하는 중이다. 최근 창비 세계문학 속에서도 <열쇠>라는 작품으로 포함되어 있으니 이 작가가 궁금한 것은 나만의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 왜 우리는 그의 소설을 탐하게 되었을까? 세상이 어지럽기 때문일까? 어쩌면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나랑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잊자. 아름다움을 제외하고 모두.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들을 한창 구입할 때만 해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내 위시리스트에 올랐던 적이 없었다.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슈자도 몰랐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던가? <열린 인문학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유유출판사에서 나온 연두색 표지를 보고 가진 1%의 관심, 누군가 추천하는 페이지에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보고 사실 작가보다는 주제에 대해 가진 10%의 관심, <백년의 지혜>에서 알리사 할머니가 의지했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30%의 관심, 그러다가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나니 주루룩 목록이 뜨는 그의 많은 작품들, 작품들, 작품들.  나는 가랑비에 옷이 홀랑 젖고 말았다. 그리고 우선 <이별 여행>이라는 표지가 아름다운 책을 구입했다. 나는 그의 소설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사실 소설 외의 책에도 많은 관심이 생기지만 우선 시작은 소설로 하고 싶다. 알리스 할머니에 의하면 그는 히틀러 집권을 미리 예감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소설이 심리묘사가 섬세하다고 한다. 섬세함과 통찰력을 갖춘 소설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인간의 조건 중의 하나이다

 

 

 

 

 

 

 

 

 

 

하하하, 난 이 페이지에 그의 데이터를 입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가벼운 나날>의 표지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탓이다. <가벼운 나날>이 출간되어 책정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인데, '작가들이 칭송하는 작가' '미국 최고의 문장가'로 꼽힌다고 했다. 더욱이 이 책의 편집자는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오래 남을 책을 들라”는 질문에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꼽았다고 한다. 고뤠? 그 정도야?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그저 <가벼운 나날>에 한하여 생긴 관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트위터였다. 트친들이 주고받는 트윗들에 제임스 설터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다. 그 중 <어젯밤>을 읽었다느니 다시 읽을 예정이라느니 하는 말은 심히 부담되었다.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작가들 중 단연 독보적으로 백지상태의 지식이지만 왠지 문장력이 기대된다.

 

 

 

 

 

 

 

 

 

 

 

한국 소설을 어릴 때부터 읽은 것이 아니라 대학 때부터 읽었기에 의외로 한국 소설을 잘 모른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은희경, 김영하였고 나는 그 이전에 나온 작가들의 소설은 이문열의 삼국지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경숙과 김형경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더 선호한다. 그러다 구효서의 신작 모니터링을 하게 되었는데 사실 좀 놀랐다. 1958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56세인데 문장에서 젊음이 느껴졌다. 탄탄했고 예상을 전복했다. 단편들의 내용도 좋았지만 그 점이 개인적으로는 인상깊었다.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터에 이번에 <베를린 인 랩소디>를 구입했다. 책을 고르면서 '구효서'라는 이름만으로 책을 사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평은 내가 신작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 필력의 작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악에 귀 기울이고 싶다.

 

 

 

 

 

 

 

 

 

 

아마 지금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더 많은 작가들이 내 머릿 속을 살짝 살짝 가랑비 뿌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떤 계기로 소낙비 한 번 내려주면 나의 관심은 수직상승할 터이다. 좋은 작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참 좋은 일 같다. 처음엔 몰랐던 작가가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하기도 했지만 내가 꼭 그들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라며 일단은 합리화를 하고 그들 중 몇 분을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고 읽고 애정하게 되는 과정이 참 좋다. 이 네 분 중 세 분의 소설이 오늘이면 책꽂이에 자리하게 된다. 내 손에도 부디 빨리 오시길 바랄 뿐이다. 그건 나도 장담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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