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셸 우엘벡, 그는 그가 소설의 초반에 스스로에 대하여 설명한 대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한 사람일까? 무한 감정의 에너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소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냉정'한 사람이기는 한 것 같다. 더더욱 자신을 작품 속에서 처참히 죽이다니 냉정하다. 정확하기 위해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니 스스로에 대한 설명이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꽤나 정확하기는 하다.

 

소설 초반  '지도와 영토'라는 제목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인공위성사진이 희미한 파란 얼룩이 흩뿌려진 어느 정도 균일한 초록색의 죽 한 사발에 불과해 보였다면, 지도는 지역구분선, 생동감 있는 길들, 지도의 시점, 숲, 호수, 언덕들의 그물망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두 확대사진 위에는 검은색 대문자로 전시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92쪽) 

 

위의 글처럼 영토보다 흥미로운 지도,를 생각하며  실제보다 흥미로운 가상 혹은 현실보다 흥미로운 환상, 예술 등등을 떠올렸다. '이 작가 정말 시적인걸, 유머도 있는 것 같고, 냉소적이면서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해.' 라는 감탄을 읽는 내내 했던 것 같다.

 

우엘벡은 작품 중반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느리고 한적하고 향수어린 장소에서의 행복감, 그것은 흥미로운 지도를 두고 영토를 택한 행동처럼 보였다. 지도란 어딘가를 빨리 찾기 위한 그림이고 실제 영토로만 더듬다보면 느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혹은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사색적인 태도는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곤한다. 지도는 분명 영토보다 흥미롭지만, 영토는 분명 지도보다 아름다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분명 영토가 없다면 지도는 없다.

 

마르탱과 우엘벡은 예술가이다. 그러면서도 예술을 피하려고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미술상 프란츠가 말한 것처럼 마르탱과 우엘벡이 예술가라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작품에 대한, 사회에 대한 태도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을 하는 순간 순응하던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마르탱과 우엘벡이야 말로 예술가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어 자신의 존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확인을 시키는 과정을 행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후의 같은 양상의 행위는 용납불가능하다. 이것이 그들이 예술가로 사는 법이다. 다만, 작품 속에서는 우엘벡보다는 마르탱을 그 점에서 우위에 두어 작가는 스스로를 압박한다.  흥미로운 지도를 벗어던지고 영토로 회귀하는 태도에 대한 압박.

 

마치 두 편의 소설을 읽는 듯 이야기의 중후반은 우엘벡의 죽음을 기점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우엘벡은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자들이 꽤나 사회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이끄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학관계를 다룬 마르탱의 그림들, 그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폐적 가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섬뜩한 욕망, 경쟁사회에서 성취감을 얻고자하는 욕구, 반면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후 나약해진 인간이 선택하고 선택받은 마지막 길까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편한 모습들을 아주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 우엘벡은 이 작품을 쓰면서 역시 예술가적 태도인 '예측 불허의 불가해한 메시지에 순응하는' 중이었던 것일까. 무척 덤덤하다.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여기자에게 제드 마르탱이 한 말이 떠오른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서는 의미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470쪽)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이라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탱의 말이 더 다가오는데, 여기까지 책을 읽으며 내가 찾으려고 했던 지도와 영토에 대한 의미 찾기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그래, 이 책은 소설이었지. 그러고 보니 책의 중반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이미 작가는 이때부터 의미를 찾지 말라고 경고를 했던 모양인데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나보다.

 

구체적인 실제 풍경과, 촌락이며 초원이며 평야가 눈에 띄지 않게 나란히 놓인 이 지도에서 그는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균형과 평온한 조화. (292쪽)

 

똑같은 느낌. 다르다고 숱하게 인식했건만, 이 때부터 지도와 영토에는 똑같이 균형과 평온한 조화의 느낌이 있다고 말했었구나.  현실과 환상에 느껴지는 똑같은 균형과 평온한 조화라니 역시 우엘벡이다.  똑같은 균열과 미화에 대한 냉소적 표현이라 믿어의심치 않겠다. 마르탱의 그림이나 현실 사회의 모습이 죄다 추잡하고 난감하다. 그러니 예술가로 살아서는 무엇하겠는가 싶은 마음까지 느껴져 자신을 그저 죽였는가 보다. 아, 똑같은 그 느낌이 서글퍼진다.

 

개인적으로는 미셸 우엘벡의 냉소적인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문체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흥미롭게 쓸 수 있겠는가 싶다. 다만, 이 책에서 거슬리는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한자어 부사어라던가 외국어체의 번역이다. '거의'라는 말을 두고 꼭 '거개'라는 말을 굳이 택해야 하였는지, '도무지'를 두고 꼭 '도시'라고 해야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지시를 듣는 (장 피에르 페르노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236쪽)' 이라는 문장에서  ( )의 문장이 꼭 필요했는지, '사진이 내용의 거의 전부여서 (280쪽)'라는 말이 어색한 것은 나뿐이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원본에는 그렇게 써있었겠지만 한국어를 좀더 잘 운용하는 번역가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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