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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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숨은 이야기 찾기

 

'글머리에'에 쓴 작가의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서양의 그림과 달리 우리 나라의 옛그림엔 스펙타클한 '역사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 우리에게도 신화가 있고, 영웅이 있고, 사건이 많았을진대 얼핏 떠올려도 정조대왕의 행차도를 비롯한 도화원의 그림 외에는 떠오르는 역사화가 없다.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의 풍속화가 그것에 조금 해당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발달'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므로 역사화로서 우리 옛그림을 분류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책은 역사화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제일 처음 지배자에 관한 역사화를 다루고 '산은 높고 골은 깊다'라고 제목을 붙인 장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아우구스투스, 루이 14세, 나폴레옹, 이반 뇌제, 스탈린의 사상과 생을 담은 그림들을 보여준다. 태양왕이라는 별칭이 붙은 루이 14세의 상징은 화가들의 그림에서였을 뿐 실제 그는 타협왕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자신의 지배력을 위해 화가들을 후원하여 자신을 태양왕으로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역사화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사관이나 화원들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의 여부를 떠나 루이 14세는 표면적으로 절대 왕정의 판타지를 이루었고, 나폴레옹은 정치에 그림을 더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고 이후의 서양 지배자들 역시 자신의 권력을 강화 혹은 미화하기 위하여 화가의 붓을 이용했고 화가들은 기꺼이 그것에 응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여성에 관한 역사화를 다루었다. 역사 속의 여성이라면 첫 번째로 꼽힐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퐁파두르 부인, 오달리스크, 매춘 여성까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을 그린 그림을 볼 때 외면적 아름다움이나 관능미, 교태 등을 중심으로 감상한 후 지나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작가의 설명을 겸해 듣다 보면 당시의 여성으로서 각자의 지위에서 충실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했던 모습이 다가오게 된다. 마지막까지 사명감을 잊지 않음을 보여주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어떻게든 자신을 팔아야했던 여인을 그린 '노예시장' 처럼 말이다. 작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시대의 자식인 그림은 이렇게 그 시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203쪽)'

 

세 번째 장은 전쟁화이다. 장의 이름처럼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 우리 나라도 전쟁이라면 빠지지 않는 나라인데 그런 기록화들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오래 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본 몇 점 안되는 그림들이 아주 어렴풋이 떠오르곤 하지만 무슨 전쟁인지, 누가 그렸는지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서양의 전쟁화는 화가들의 철학이 묻어나는 그림들이 많았다. 풍속화가로 알려진 피터르 브뤼헐(피터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를 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오직 죽음 뿐임을 우리는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냉철하게 전쟁과 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전쟁을 그린 역사화에서 많이 느껴졌다. 사는 게 다 뭐란 말인가, 이렇게 한 번 휩쓸고 가버리면 아등바등한 행동들이 모두 의미없어지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장은 '정신의 역사, 역사의 정신'이라는 내용으로 역사화의 주제가 된 인물들의 카리스마와 유럽의 종교와 철학,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네이처리즘을 다룬다. 그 가운데 당대 역사화가로서 이름을 높인 다비드의 그림만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라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린 다비드는 격동의 시대를 산 만큼 그가 그린 그림도 역사화의 범주 안에서도 다양하다. 신들의 모습부터 당시 가장 핫이슈가 된 내용까지. 개인적으로는 그의 그림 중에 새로 알게 된 '사비니의 여인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과의 전투에서 로마로 잡혀간 사비니 여인들이 중재하는 모습, 그 둘의 피가 섞인 아기들을 데리고 중재하는 모습은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아파왔다.

 

그림은 그런가 보다. 역사란 그런가보다. 그린 사람도 보는 사람도, 살아간 사람도 지나간 사람도 모두 울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서양의 역사화에 대해 깊은 호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들의 역사였고, 그들만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들만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들의 역사를 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그들만 알던 사람을 나도 알고 있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 그림의 힘이다. 글의 힘이기도 하다. 찬찬히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어진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을 읽다가 글에서 설명하는 그림이 글 옆면이 아니라 뒷면에 나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 몰입이 조금 번거로웠다. 이 책의 한국판도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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