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사는 것보단, 그래도 남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험하지 않겠어?" "위험하긴요. 사실 저 안전하려고 혼자 사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랑 같이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게 생존율이 통계적으로 더 높대요. 전 세계적으로 살해당하는 여자들의 절반이 남편이나 전남편, 남자친구나 전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걸요. 그러니까 저 오래 살려고 남자랑 같이 안 살려는 거예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통계적으로 사실이죠. 남자를 사귄다고 모두가 살해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살해당하거나 폭행당할 통계적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죠. 그건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당연하죠!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죠! 하지만 통계적으로 남자와 같이 사는 여자보다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 여자의 생존율이 더 높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건 담배를 피운다고 모두가 폐암에 걸리는 건 아닌 것과 비슷해요. 흡연자 전부가 폐암에 걸리는 건 아니지만,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선배들은 원래 법의학은 만화와 드라마로 공부하는 거라고 했다. 법의학은 사건을 통해서 공부하는 것이니,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법의학 전문의 사요코와 히카루는 그런 여자들의 시신을 통해 범죄 현장을 재구성해내고 범인을 추적한다. 아무 증거도 없어 미제 사건으로 묻힐 뻔했던 죽음과 고통을 위로하고, 무의미한 죽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나는 이렇게 끝까지 강간살해범을 잡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애도라고 느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애도해야 한다. 범인을 반드시 추적해서 잡아야 한다.
사귀다 보니 이상한 낌새가 있어 위험을 감지하게 될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만나지 말고 헤어지자고 얘기하는 순간이 가장 살해당하기 쉬운 시점이 된다. 그런 사람인지 알기 전까지는 헤어질 이유가 없다가 그런 무서운 느낌이 들어 헤어지자고 얘기하면 폭행/살해당한다니, 이건 뭐, 절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분노에 떨며 악몽에 잠을 설친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법의학자가 되는 꿈을 접었다. 분을 삭이기도 힘들었지만, 이런 일을 평생 하면서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은 한 번이면 족하다.
검도 도장에 다니면서 점점 밤길이 안 무서워졌던 건 아니다. 그런 건 점차 느끼는 게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어랏, 내가 밤 대학로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네’라고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힘을 키우는 것은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과도 같다.
지금은 검도 같은 대련하는 운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 느낌이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어, 나 쫄지 않아도 돼!’라고 느껴본 사람은, 다시는 그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힘들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무슨 운동이 되었든 반드시 운동하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체를 단련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무엇으로도 용서가 안 되겠지만, 그놈이 미운 만큼 합의금을 많이 받아내라. 합의금을 받으면 꽃뱀이라고 그놈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는 것 같고 자존심 팔아서 몸 팔아서 받은 돈 같아서 그 돈이 꼴도 보기 싫겠지만, 그놈이 나쁜 거지 돈이 나쁜 게 아니다. 돈으로라도 실제로 그놈에게 타격을 줘야 한다. 돈이 아니면 무엇으로 타격을 주겠나.
이도 저도 안 되겠으면 그냥 소문을 흘려라. 꼭 총여학생회 명의를 걸고 대자보 붙여야만 그게 옳은 거냐. 그놈이 학교 안에서 또 그런 짓을 못 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으냐. 과방에, 동아리방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으냐. 누가 썼는지도 모르게 대자보를 붙일 수도 있고, 조용히 뒤로만 성폭력범이라고 소문을 낼 수도 있다. 아니, 훼손될 명예도 없는 것들이 어디서 명예훼손이라고 고소하고 지랄이야!
싸우는 방법에 얽매이지 말고, 싸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싸우라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스스로를 잘 지키라는 것!
이러한 몇 가지 일이 있은 후 나는 ‘쌈닭’으로 이미 찍혀, 친해지고 싶지도 않지만 건드리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포지션은 아주 유리하다. 암, 유리하지.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면 애초에 ‘미친년’으로 찍히는 게 낫거든. 건드리면 재미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최고다.
인턴 업무가 아닌 일을 인턴에게 시키면 안 된다고, 나는 당신의 비서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다. 말싸움 끝에 화가 난 전공의는 "나는 인턴 때 이러지 않았다"라며 홀로 비운에 젖은 채 병동을 뛰쳐나갔고, 나의 싸움을 관전하던 병동 간호사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 극강의 쪽팔림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전공의는 나와 병동 간호사들을 다시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꼭 공개적으로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번은 동료 여자 의사가 같이 일하는 다른 과 전공의한테서 성희롱을 당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왔다. 무슨 일인고 하니, 둘은 같은 병동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일하다 말고 만날 이 선생님에게 피곤해서 부부관계가 힘들다는 둥, 아침에 텐트도 안 선다는 둥 하는 얘기들을 자주 했던 것이다. 처음엔 동료 의사가 자신의 질환에 대해 상담한다고 생각하여 점잖게 응대해주던 선생님이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 싸움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계산하면서 싸우는 것, 누구와는 싸우고 누구와는 동지가 될 것인지 고려하는 것, 어떤 방법으로 싸울지 신중하게 전략을 세우는 것, 무엇보다 싸울지 말지부터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꼭 싸워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스스로를 잘 지키고 숨죽여 지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의 생존을 도모해야 할 때가 있다. 병원 안에서 싸우는 데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심장내과로 보내지고 여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정신과로 보내진다는 얘기는 자조적인 농담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급성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들 58만 명의 사망률을 의사-환자 간 성별 차이로 분석한 결과, 환자와 의사의 성별이 불일치한 경우 사망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특히 남자 의사가 치료한 여자 환자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남자 의사는 여자 환자의 심근경색 증상에 좀 덜 민감하고, 여자 환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경우 심근경색이 아닌 다른 질환을 더 의심했다는 것이다. 결국 골든타임을 놓친 심근경색증 여자 환자들이 더 많이 사망했다.
의사의 성별에 따라 환자의 생존율을 분석한 다른 연구도 있다. 역시 미국에서 노인 입원 환자 158만 명을 대상으로 사망률과 재입원율을 분석한 결과, 여자 의사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남자 의사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에 비해 사망률과 30일 이내 재입원율이 낮았다. 여자 의사의 진료 실적이 더 좋았다는 뜻이다.
왜 여자 의사가 남자 의사보다 실력이 좋을까? 의대 내의 성차별, 전공의·교수 선발 과정에서의 성차별은 여자 의사·의대생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다. 내가 의대에 다닐 때만 떠올려도, 여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과의 전공의가 되자면, 그 과에서 정한 여자 티오TO 숫자 안에 들어야 했는데, 소수의 인기 과들은 여자 티오가 한 명에 불과했다. 그 한 명도 다른 남자 지원자들보다 성적이 훌륭해야 뽑히곤 하였다. 큰 과도 다르지 않았다. 여자 전공의 숫자가 많아지면 과의 세력이 약해진다며, 여자들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여자:남자 전공의 비율을 1:1로 한다는 등의 내부 기준을 정한 과들이 많았다. 그 좁은 문을 두고 여학생들은 여학생끼리 경쟁하면서도, 또 남학생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여자 의사들의 실력을 키워주고 있는 성차별에 경례!)
젊은 여자들은 통증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쓴다. 눈물로 호소하면 감정적이라고 믿어주질 않는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보이려고 침착하게 통증을 참고 설명하면, 그렇게까지 절절히 아프지 않다고 여긴다. 여기서도 도대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녀가 진짜로 자신의 통증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느낀 순간은, 통증이 너무 심해 ‘횡문근융해증’이 생겼을 때였다. 전신 근육의 떨림으로 인해 근육이 녹아내렸고, 드디어 혈액검사에서까지 녹아내린 근섬유의 흔적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검사 결과를 의사들이 보고 놀랐을 때, 그녀는 ‘그것 봐, 내가 아프다고 했잖아. 나는 진짜로 죽을 만큼 아팠다고!’라고 생각했다. 횡문근융해증을 겪었으니 근육통은 어느 때보다도 컸을 터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극심하게 아팠기에 가장 인정받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이제야 아프다고 주장할 수 있는 ‘환자’의 범주에 공식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이었고, 그것이 큰 안도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아지고 어떻게 하면 안 좋아지는지를 잘 모르니까, 내 몸에 대한 주도권을 질병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든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질병을 앓고 있는 내 몸이 나의 주인 혹은 조건이라고.
그녀가 농담처럼 ‘명의’라는 단어를 썼지만, 내가 아는 나는 명의가 아니다. 다만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사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연구들은 ‘여자 환자의 아프다는 호소를 믿기 힘들어하는 의사들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환자의 말을 믿는 것이 환자를 살리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가족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누구와 같이 사시나 여쭸더니 따님은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혼자 살고 있다. 15년째 어머니가 아프시니, 결혼은 생각도 못 했다’는 대답이다. 아픈 어머니와 나이 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결혼하지 않은 딸…. 정말 많은 왕진 가구에서 반복 재생되는 모습에 나는 잠시 한숨이 나오려 했으나, 꾹 참았다.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은 곧바로 ‘그녀에게 돌봐야 할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고, 그것만으로도 돌봄 노동에 소환될 명분으로 충분했으니까.
나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누구에게라도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말. 친근하고 헌신적인 돌봄은 항상 ‘딸, 며느리, 아내, 어머니’처럼 여성의 형태를 취해야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이 표현들의 자연스러움에 취하는 순간, 돌보는 당사자인 그 여성들의 고립감은 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돌봄이 실제로는 노동이며, 이 노동이 어느 계층, 어느 성별의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독박 노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에 무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동네에서 만들고자 하는 돌봄의 생태계는 이런 자연스러움의 함정을 의심하는, 평등하고 호혜적인 돌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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