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비혼 페미니스트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그 어떤 지역에서도 단 한 번도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거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집 살 돈이 없어 월세와 전세로 전전하던 대학로나 신촌, 홍대 근처에서 우리는 부평초였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들은 ‘미혼 여성’으로 불렸고, 독립생활을 하는데도 ‘자취’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혼하여 온전한 거주를 결정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사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뜨내기, 친해질 필요가 별로 없는 존재들이었다.

"얘가 왜 이래 정말! 너는, 너는 결혼해서 그렇게 좋디?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해 죽겠어?"
"에이, 결혼해서 좋은 여자가 어딨어?"
"그지? 너도 해서 좋지도 않은 걸 뭐하러 추 원장한테 권해? 추 원장도 한번 당해봐라 이거냐, 응?"

"언니들, 내 사주에 남자가 없대요."
"응, 그러니까 결혼할 팔자가 아니라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결혼을 하든 말든 별 상관 없대요. 설사 결혼을 한다 해도 그 남자가 내 인생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대요. 그게 사주에 남자가 없다는 의미래요."
한 언니가 정색을 했다.
"혜인아, 그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여자라면 다 그래. 비혼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우리 여자들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남자는 없어."

이 동네 이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죽고 싶으려면, 여기에서 살고 싶기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는 의료 지원이 절실한데 현실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진료하고 증거를 채집해줄 의사, 법정에서 증언을 해줄 의사, 다가올지도 모를 임신이나 성병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의사, 심리적 외상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의사가 꼭 필요했다.

내가 가장 순진했던 그 순간에 ‘순수한 피해자’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내가 고작 할 수 있었던 저항은, 그의 수업 시간에 보란 듯이 다른 과목 공부를 하거나,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정도였다. 도서관 운영위원이어서 도서를 정리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업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도 결국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나를 의대로 보냈나 보다. 나는 의대에 합격한 후 입학식을 앞두고 성폭력상담원 교육부터 받기 시작했다. 의학 교육보다 그걸 먼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22-11-29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계시군요.
제가 아는 분의 책이어서 무척 반갑네요. ^^
저는 정작 사놓고 안 읽었는데, 어서 읽어야겠어요.

라로 2022-11-30 15:50   좋아요 0 | URL
앗! 진짜요!!! 이분 넘 멋진 것 같아요!!^^
언제 기회가 되면 소개받고 싶은 분이네요.. 불가능하겠지만.^^;;
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감은빛님은 아는 분의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넘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