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중반이 몇 해 지난 어느 6월의 초저녁, 아일린 코널티 부인은 라스모이 마을을 통과해 지나갔다. 광장 4번지에서 출발해 머게니스 스트리트를 거쳐 헐리 레인으로 빠진 후, 아이리시 스트리트를 따라 클럭조던 로드를 건너 구세주회 성당으로 갔다. 밤은 그곳에서 보냈다.

선한 행실과 단호한 성품이 돋보였고 가사와 가족 문제에서 다소 엄격했던 한 인생이 끝난 것이었다.

오래전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을 택했을 때 기대했던 소소한 행복을 코널티 부인은 결코 누릴 수 없었다. 남편도 딸도 그녀를 낙심시켰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이제 다시 남편 곁으로 가야 할까봐 두려웠고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빌었다. 딸과의 이별은 아쉽지 않았지만 이제 쉰이 된 아들, 아기 때 처음으로 팔에 안은 순간부터 그녀의 귀염둥이였던 아들을 남기고 떠난다는 생각에는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작은 마을 라스모이는 움푹 꺼진 지대에 자리했는데, 지형이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없었고 궁금해하는 이도 없었다. 농부들은 매달 첫째 월요일에 가축을 마을로 들여왔고 마을의 은행 두 곳 중 하나에서 돈을 빌렸다. 그들은 광장에 있는 치과에서 이를 뽑았고 때로는 인근의 사무변호사와 상담을 했다. 또 니나 로드의 데스데블린스에서 농기구를 점검받았고 종자상인 헤퍼넌과 거래했으며 마을 곳곳에 있는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농부의 아내들은 식료품을 사기 위해 캐시앤드캐리의 창고형 매장을 이용했고 돈이 좀 있을 때는 맥거번스로 갔으며 신발은 타일러스에서, 옷이나 커튼 재료, 식탁에 깔 유포 등은 코벌리스 포목점에서 구입했다. 예전에는 제분소에도, 그리고 섀넌 강 발전 계획1이 시행되기 전에는 제분소 안의 발전소에도 일자리가 있었다. 이제는 유제품 공장과 연유 공장, 건축자재 야적장, 상점, 주점, 생수 공장 등에서 직원을 고용했다. 광장에는 법원이, 밀 스트리트 끝에는 버려진 기차역이 있었다. 또한 교회 두 곳과 수녀원, 기독교형제회 부속학교, 실업학교 등도 있었다. 수영장 건설 계획은 자금이 확보될 때까지 보류한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마을을 뜨는 쪽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더블린이나 코크나 리머릭으로, 잉글랜드로,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수가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과장이었다.

검은 머리에 몸집이 마른 20대 초반의 이 젊은 남자는 라스모이가 초행이었다. 전반적인 행동거지나 녹색과 파란색 줄무늬의 화사한 넥타이 등은 얼핏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지만 편안해 보이는 헐렁한 양복이 그 효과를 반감시켰다.

그는 혼자 살았다. 급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자주 늙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중년이 다 가도록 여태 자기 소유일 수도 있었던 것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살았다는 회한을 느낄 때가 많았다.

누이가 촬영에 대해 얘기한 이유는 그가 듣고 걱정하기를 바라서이기도 했고, 장례식이 무슨 축제라도 되는 양 사진을 찍는 행위가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혹시 누이가 지어낸 말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누이는 가끔 말을 지어내곤 했다.

누이는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갈수록 꼬인 성격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그녀의 불만을 눅여주기를 바라며 몇 번인가는 기도하며 빌기도 했다. 두 사람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딸을 부엌에 데려다놓고 아들에게는 혼자 나가 놀라고 한 적이 많았다. 그는 부엌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때에, 대개는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누이가 비계와 힘줄을 제거하는 법, 결을 봐가며 고기를 써는 법, 고기에 밀가루를 너무 두껍지 않게 뿌리는 법 등을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누이에게 국물을 얼마나 오래 고아야 하는지, 언제 경단을 넣고 비스토3를 넣어야 하는지 가르쳤다. 누이는 혼자서 경단을 만들게 되더니 파이에 넣을 사과껍질을 깔 수 있게 되었고, 이어 커스터드를 젓고 감자를 으깰 수 있게 되었다. 부엌은 모녀의 장소였으며 그들은 ? 시골 처녀가 되었든 돈이 필요한 마을의 과부가 되었든, 일손을 거드는 가정부와 더불어 ?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들이었다.
여자들의 이런 세계에 익숙해지고 나자 조지프 폴은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는 장 보러 갈 때 그를 데리고 다니며 ‘우리 꼬마 신사’라고 불렀다.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이 없는 아이다, 어머니는 말했다. 천성이 그럴 수 없는 아이다. 매일 아침 모자는 식사를 마친 후 난롯가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가 앉은 곳에서 채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동생을 괄시하는 것은 누이가 마음속 원망을 표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알기에 견디기가 수월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여전히 성격 표현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만 아니었다면 지금 그녀를 눈에 띄게 만드는 수수한 아름다움이 더욱 도드라졌을 터였다. 그 아름다움은 잿빛 푸른 눈과 담담한 미소에 깃들어, 예전에는 불안스러웠던 눈빛과 자신 없이 머뭇거리던 미소를 지워주었다. 다루기 힘든 부드러운 금발은 이제 그런 머릿결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로 뒤로 넘겨 묶었다.

"그거 조심해." 그가 말했다.
"깜빡했어요." 엘리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남편이 레이번 뚜껑을 자꾸 열지 말라고 했던 것을 잊어서가 아니라 그가 아직도 부엌에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는 늘 조용히 움직였다. 엘리는 그가 마실거리를 나중에 갖다달라고 했을 때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잘해주었고, 실수를 해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농장 생활에서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일처리가 미숙할 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스토브의 철제 뚜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계단 아래 벽장에 쓰레받기를 걸고 그 옆에 빗자루도 걸었다. 또 창문 두 개를 다 열어 잠시 환기를 시켰다. 비 오는 날에도 빠뜨리지 않는 매일 아침의 일과였다.

엘리는 이제 거실로 갔다. 기분 좋은 여름 곰팡내와 희미한 검댕 냄새가 풍겼다. 외짝 창틀에 놓인 흰 물병에는 분홍색 장미꽃이 향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시든 꽃을 부엌으로 가져가 물병을 헹궈낸 뒤 집 앞 정원에 있는 덩굴시렁에서 싱싱한 꽃송이를 꺾었다. 꽃을 잘 꽂은 다음 닭장으로 가 암탉들에게 모이를 주고 달걀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밸브에 문제가 있는 자전거 뒷바퀴에 공기를 주입했다. 그렇다고 오늘 어디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고해성사를 한 번 더 하는 일도 많았으며, 대단히 재미있지도 않은데 코벌리스 뜨개질 매장에서 버크 양이 읽는 소설 내용을 들을 때도 있었다. 늙은 오펀 렌이 인사를 건네기도 했는데, 가끔은 그녀를 알아보기도 했다.

플로리언의 개, 이제는 젊지 않은 검정 래브라도가 그를 따라 위를 쳐다보았고, 꼭 무엇을 찾는지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요즘 개는 혼자 힘으로 해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상대에 대한 헌신으로 밝게 빛나던 결혼생활에서 부부는 서로의 크고 작은 기벽을 다 받아주었고 빚쟁이들마저 예사로 매료시켰다.

그는 살림을 꾸리거나 채소를 키워 팔거나, 자두가 나무에서 떨어져 키 큰 풀 사이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따는 일 같은 것을 잘해내지 못했다. 전화는 최근에 끊겼고 발행된 수표는 지급불능으로 되돌아왔다. 채권추심 대행업자는 정기적으로 전화를 해왔다.

외롭게 외동아들로 태어나 아동기와 이후의 시기를 무난하게 보낸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기질적으로는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예의 바르고 가식이 없고 말수가 적었다. "얘가 수줍음을 좀 많이 타요." 생전에 나탈리아 킬데리는 종종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드러나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정한 가족이었다.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구웠다. 서두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아버지의 골동품 레밍턴 타자기가 있었으며 한 귀퉁이에는 아버지의 일기장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들은 부모라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너무나 대단하게 보았다. 플로리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당시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야. 때가 되면 드러나겠지. 세상일이 다 그렇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자기 길을 찾으면서 말이야.
플로리언은 찾지 못했다.

"집 잘 보고 있어." 플로리언은 떠나기 전에 개에게 일렀고, 개는 다시 엎드리며 이해했다는 듯이 꼬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개의 이름은 제시였다.

사제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존경받았으며, 교구민들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크게 기뻐했다. 감사할 일이 정말 많다, 신부는 자주 그렇게 단언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덧붙이는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엘리는 이 말을 들었다. 그리고 역시 감사할 일이 많다고 믿는 그녀도 신부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펀 렌은 라스모이 기차역에서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을 기다렸다. 사시사철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렸다. 여름 기운이 완연한 따뜻한 아침에 역에 나와 있으니 기분이 좋아서 그는 졸음을 쫓지 않았다. 더블린 기차가 전진하는 소리가 들리면 깨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차는 오지 않았다. 기차역이 폐쇄된 후로 기차는 온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오지 않을 터였다.

오펀은 현재에도 살고 과거에도 살았다. 그는 오래전 리스퀸 저택을 소유한 세인트존 가문에 고용되어 도서관 장서 목록을 정리하는 일을 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 이후로 그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비록 세인트존 가문은 32년 전에 저택과 토지를 시장에 내놓았고 가구는 경매에 넘겼지만 말이다. 수대에 걸쳐 학자들이 드나들던 저명한 세인트존 도서관은 장사꾼들에게 약탈당했고 그들이 쓸어가고 남은 것은 마당에 피운 모닥불 속으로 던져졌다. 집은 비워지고 지붕의 납판과 슬레이트는 벗겨져나갔다. 벽난로 선반과 천장, 문과 벽판, 그리고 계단 양 측면에서 곡선으로 휘어지며 널찍한 2층 층계참의 특징이 되던 발코니는 따로 해체되어 팔려나갔다. 폐허가 된 건물 뼈대는 완전히 철거되었고, 수톤에 달하는 석재 역시 밖으로 운반되어 팔려나갔다.

나이가 들면서 오펀은 몸이 비쩍 마르고 얼굴 살은 뼈에서 분리된 듯 처졌으며 약해진 턱 밑은 동굴처럼 움푹 들어갔고 눈은 푹 꺼져 조그만 구멍처럼 보였다. 옷은 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는데 늘 입는 나달나달한 외투는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낡은 밤색 신발도 뒤축과 밑창이 다 떨어져 있었다. 기차역에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는 오늘 아침에도 그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보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오펀의 다리로 기어올라 정강이에 몸을 비볐다. 그는 허리를 숙여 고양이의 매끄러운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잘 아는,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고양이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늘 그렇듯 갑작스럽게 흥미를 잃고 살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광장에 있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가 꼿꼿하고 자신감 있는 몸짓이 멀리서 보아도 세인트존 가문 사람이 분명했다. 세인트존 가문이 떠난 뒤에 태어난 조지 프레디 씨의 손자, 조지 앤서니라고 이름 지은 아이일 터였다

암양 한 마리가 죽어서 시간이 약간 지체되었다. 헤더 관목 사이에 그냥 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남은 사체를 묻어주기 위해 더 좋은 장소를 찾았다. 그는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양을 존중했다.

그가 머릿수를 세는 동안 개들은 양떼를 제자리에 붙들어두었다.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하늘이 개었다. 보송보송한 흰 구름이 부드럽게 떠다녔고 잿빛 사이로 군데군데 파란색이 내비쳤다.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물이 끓자 혼자 있을 때 쓰는 작은 찻주전자에 차를 우렸다. 달걀을 삶을까 생각하다가 배가 고프지 않아 그만두었다.

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늘 버터밀크를 가지러 오기로 한 해든 부인일 것 같았다.

해든 부인은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면서 양로원으로 보낸 이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했다.
"가슴이 미어져요." 부인이 말했다. "활기가 없는 곳은 아니에요. 너무 조용한 곳은 의심해봐야 하거든요."

호리 굴드는 백한 살까지 살았고, 마지막 10년 동안은 매년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새 양복을 사 입었다. 그분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 해든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금독수리’라는 이름의 자전거는 손잡이 기둥에 독수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자전거를 본 적이 없어서, 흙받기가 우그러지고 낡기는 했지만 사실 특별한 자전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남자가 다시 라스모이에 나타나면 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말을 걸면 가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고해성사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창피하겠지.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하려 해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가 캐시앤드캐리에서 버즈 젤리 상자나 겨자 캔, 삭사 소금 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그 물건들에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냥 물건을 넘어선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를 떠나지가 않았다. 엘리는 궁금했다. 그 물건들이 다시 예전과 똑같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이 산 브라운앤드폴슨의 옥수수전분, 린소 등도 예전 같아질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 역시 예전과 같아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이 이제는, 그리고 앞으로도, 코널티 부인 장례식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날 남자가 누구 장례식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이 시작이었지만 엘리는 알지 못했다. 코널티 양이 광장에서 그 사람을 가리켰을 때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캐시앤드캐리에서 그가 미소 지었을 때도 알았다. 햇살을 받으며 함께 서 있었을 때, 그가 담배를 권하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띌 수 있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처음 면도 비누가 거품으로 변하는 모습, 그리고 면도기가 거품을 긁어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엘리는 깜짝 놀랐다. 식탁에서 남자와 마주 앉아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되기 전에, 가정부로 지내던 시기에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다른 사람과 침대를 함께 쓰는 것만 빼고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때는 없다. 하루의 매순간, 인생의 매순간.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가 저지른 죄의 엄청난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한다. 고백해라,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려라. 그분은 그것 이상을 바라시지 않으니까.

건물이 없어졌다고 인연도 모두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곳의 일부로 살던 때의 우리 자신과 우리 유년기와 그 시절의 순진함과 완전히 이별하는 것은 아니다.

엘리는 잠시 가만히 서서 고해성사를 할 용기를 달라고, 자신의 생각에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했다.

성모마리아님,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소서…… 어떤 경우든 고백을 하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열다섯 해 전에 홀아비가 된 개헤건은 농장 일을 돕는 사람도 두지 않고 혼자 살았으며 만나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때가 많았다.

딜러핸은 그곳을 지나쳤다. 잠시 후 차를 멈추고 울타리 문을 열어 개들을 내려주었다. 이제 개들은 매일 저녁 자기들끼리 소들을 안으로 몰아넣었다.

수채화는 예전만큼 생생하지도 화사하지도 않았다. 도화지는 우글쭈글하고 파리 떼가 남긴 자국으로 더러웠으며 햇볕에 바랜 데다 압정에서 나온 녹까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빛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 그림들은 탁자 위에 정렬된 사진들을 시시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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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이 너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대위는 깜짝 놀랐다. 그는 군대에 가서 고통받던 이 남자, 연병장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혼자 떠돌고, 등 뒤의 수군거림의 표적이 되고, 잠들면 두려움을 안겨주는 꿈과 싸우던 남자를 상상했다.

그녀는 겨울에 먹이 헛간에 불을 계속 피워둘 때는 불 옆에 앉아 있곤 했다. 브리짓도 어렸을 때 그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루시는 그곳으로 가서 그늘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불은 없었다. 오래전에 용도가 바뀐 뒤로는. "여기다가는 장작을 쌓아둘까?" 헨리가 마치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그때 그녀는 열한 살이었다.

그는 알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언젠가 슬픔이 가득한 답장이 올 것이고, 그녀도 다시 편지를 쓰고 싶을 것이고, 쓰려고 할 것이다, 아마 쓰지는 못하겠지만.

마무리되지 않은 바닷가 인물들의 자수가 소파 팔걸이에 걸려 있었고 옅은 파란색 실이 바늘귀에 꿰여 늘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색깔들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빈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리넨을 말아 바늘과 함께 챙겨 자수 서랍에 넣었다.

그녀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 예의가 아주 특이해 보였다. 다시 그들의 파괴된 삶을, 한때 행복이 있던 자리에 나타났던 공포와 혼돈을,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의 분노는 무너졌고 터져 나오지 못했다.

방의 정적 속에서 루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는데 못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쫓기듯이 집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괴로움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려 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남은 할 말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하려고 응접실에 왔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아까 꽂아놓은 하얀 초롱꽃이 햇빛에 갈색으로 변한 벽지를 배경으로 창백했다.

상황이 그녀의 삶에 빈 곳을 만들어냈지만 이제 사랑의 서툰 열정은 다른 아주 많은 것들과 함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과거에 속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뿌리를 하나 더 캤다. 그들의 집안은 그들이 끝나면 끝날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들에 대한 모든 의무도 완료될 것이고, 그 사람들에 대한 모든 기억도 죽을 것이다. 오직 신화만,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만 뒤에 남을 것이다.

브리짓의 단단한 필체는 낙농품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헨리가 맥브라이드 부인에게 목록을 건네주던 시절 이래 변함이 없었다.

이 집에는 서로 밤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던 적이 없고 지금도 없었다.

아버지는 자연의 긴축을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웃음을 지었고, 그녀도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가 병적인 기대를 물리치는 과정을 함께했고, 아버지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느린 여정 동안 예전에 그가 어땠는지를 기억했으며, 아버지를 말없이 책망한 것을 용서받았다.

대위의 죽음과 더불어 집에서는 어떤 격식이 사라졌다. 그의 과거에 속한, 그가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그가 돌아오면서 당연하게 자리를 잡았던 운영 방식이었다. "아니요. 그건 필요 없어요." 루시는 단호하게 말했다. 브리짓이나 헨리가 계속 접시가 든 쟁반을 들고 부엌과 식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이 그녀를 돌본다기보다는 그녀가 점점 그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공하는 것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더 나은 방법을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주는 일은 그녀에게 기쁨이었고 라하단 벽에 이제 걸 자리가 남지 않았다고 말할 때의 과장도 기쁨의 일부였다.

자신에게도 아까 아코디언 연주자한테처럼 사람들이 허물없이 말 걸어주기를 그녀가 얼마나 바라는지! 친근한 농담에 참여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그녀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지켜보았다. 아코디언 연주자는 돈을 받지 않을 차를 마저 마시고, 아기는 유모차 안에서 자고, 커플은 생선과 감자튀김을 먹고, 두 여자는 열중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장갑 안에서 3페니 동전을 발견하고는 찻잔 받침 가장자리 밑에 놓았다. 계산은 카운터에 가서 했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부인?"
그들은 주위에 몰려들어 구경했다. "아름답네요." 액자를 받아 든 관리인이 말했다. "아름답군." 한 사람이 따라 하자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물을 받을 사람을 면회하는 것이 가끔은 가능한지 물었다.

면도칼은 어디에 보관하든 거무스름해지지만 다시 빛나게 할 수 있다, 쿼크 씨는 말했다. 아주 쉬운 일이다. 일을 다 마치면 공장에서 나온 신품보다 좋을 거다.

어떤 얼굴들은 다른 얼굴들보다 쉽게 떠오른다.

손이 닿는 곳에 거미가 거미줄에 매달려 있다. 밤새 짜놓은 것이다. 그녀는 거미를 창으로 가져가 창문을 살며시 밀어 올린 다음 거미를 놔주고 남은 거미줄도 걷어낸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매일 아침 어딘가에 거미줄이 있다.

그가 좋아하던 색깔들이었다. 빨강과 녹색, 노랑과 자주, 그리고 가장 좋아하던 파랑.

그는 주사위를 던졌고 말을 움직였다. 그는 늘 그녀가 이기기를 바랐다. 그렇게 말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그때 한 번, 응접실에서 듣고 다시는 듣지 못했다.

그를 사로잡은 망각이 그의 비밀이었다. 정신병원에서는 비밀이 많다, 젊은 관리인이 말했다. 어디나 정신병원에서는 비밀을 아주 소중하게 지킨다. 다른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망각은 환자의 마지막, 유일한 소유물일 때가 많다. 그 젊은 관리인은 약간 기발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즐거운 일이다. 수녀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보통 화요일에 온다. 그들은 여기에 처음 방문한 후 한 주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두 분은 착하시네요." 그녀가 말한다. 그들과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 고독하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에게 구태여 마음을 쓰는 것이 착하다. 여기까지 와주는 것이 착하다. "친절해요." 그녀가 말한다.

사실, 사람들이 서로 찾아가거나 관 뒤를 따라 걷는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녀는 그들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들은 자주 말한다. 그녀는 혼자 있는 생활을 예술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엌에는 더러운 것이 전혀 없다. 그녀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젊었을 때보다 훨씬 세심하게 옷을 입는다. 가끔 미용사가 에니실라에서 와서 차분한 노년에 접어든 그녀를 돌봐준다.

그러나 수녀들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신비가 그들의 본령이다.숲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서 있는 목재만 남는다. 바다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짠물만 남는다. 그녀는 응접실 서가에 있는 책을 처음 읽던 무렵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발견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녀는 그 말이 떠올랐을 때 수녀들에게 전해주었다. "어머, 깔끔하게도 표현했네요!" 앤터니 수녀가 감탄하여 외쳤고 메리 바살러뮤 수녀는 저자가 찰스 키컴이나 프라우트 신부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다. 어떤 외국 사람,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변화가 와 있는데도 그 모든 변화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미 있었던 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의 안전함을 좋아한다. 수녀들도 쫓겨날 것이다.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 그랬듯이. 클래시모어의 모렐 부부, 아글리시의 구버네이가家, 링빌의 프라이어가, 스위프트가, 보이스가가 그랬듯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또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손님들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침묵으로 하는 작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일주일 가운데 이날을 가장 좋아한다. 친구들이 가고 나면 한동안 외롭기는 하지만. 겨울이면 그들은 그녀를 위해 응접실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앤터니 수녀는 농장에서 수녀원으로 왔고, 메리 바살러뮤 수녀는 보호시설에서 왔다. 가끔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어린 시절 알던 동네를 떠올리고, 그녀가 들어봤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회상한다.

낮의 열기는 식었다. 늦은 오후에는 햇빛을 받은 아지랑이가 있고, 바다는 그녀가 언젠가 한 번 본 것처럼 잔잔하고, 파도는 아주 부드럽게 찰싹여 언제까지나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서둘 필요가 없다. 신비인 편이 낫고, 여전히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 속에 있는 편이 낫다. 비록 브리짓과 헨리는 그것 때문에 화를 냈지만. 자비의 은혜, 수녀들은 그렇게 말했다. 음악이 연주되고 자신을 죽일 살인자들이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도 용서는 성 체칠리아의 봉헌송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그 성당을 찾아갈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은 말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웃어넘긴다. 일어난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죽었어야 했다. 그녀는 그것을 알지만 수녀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몇 년처럼 느껴지던 며칠 동안 무너진 돌 사이에 누워 있던 자신의 이야기에도 포함한 적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했다면 그들의 기분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분은 고양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나들이는 오후를 다 잡아먹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저녁이 찾아온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수국의 어둑한 푸른빛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진입로는 어슬어슬해져 나무들의 윤곽이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하다. 매일 저녁 이 시간이면 그러듯 떼까마귀들이 내려와 풀밭을 헤저으며, 하루가 희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벗이 되어준다.

비록 나이는 많고(1928년생이다)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한 자리를 굳힌 작가임에도, 마치 대성할 느낌을 주는 신인을 바라보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향년 88세였으니 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말은 하기 힘드나, 우리에게 소개된 과정만 보자면 왠지 요절한 듯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는 평생 성실하게 작가로 산 사람답게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으며, 읽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그 작품들은 아마 작가보다 긴 수명을 누릴 것이다.

"현재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운명과 시간이 한 개인의 삶에 조용히 작용하는 방식을 윌리엄 트레버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 역사의 격동기에 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극적인 사건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조용히’라니! 하지만 바로 이 점이 트레버를 이해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옮긴이가 단편집을 소개하면서도 했던 말이다.

아무리 극적 우연과 운명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조용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가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하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로 위의 문단 마지막에 옮긴이가 한 말은, 이 소설은 극적 우연이 사람들의 인생에 조용히 작용하는 과정을 거의 80년 동안 추적한다, 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트레버의 루시 소설은 그러면 무엇일까? 트레버의 글은 이 질문에 답을 하는 힘겨운 과제도 물러서지 않고 수행하고 있는 듯한데,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이 시종 조금도 풀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비결이고, 독자들도 그렇게 긴장된 상태에서 트레버와 함께 답을 찾아가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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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만족한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많은데 왜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앉은 방은 거의 어두워졌지만 그는 불을 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데서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불을 켠 것은 그녀였다. 그러자 그곳에 그녀의 행복한 얼굴이 있었다. 하루 중 이맘때면 가끔 그러듯이 밤색 머리는 풀어놓았다. 그는 그녀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그의 곁에 앉으려고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며칠 뒤 대위는 일흔한 살에 접어들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고 싶기는 했다. 때로 인생에서 이정표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을 딸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이 지나가면서 그런 마음은 스러져버렸다. 그는 딸을 위로할 수 없었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나이 듦의 이정표보다 중요했다.

그녀는 의무감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책을 읽었다. 그는 가는 여송연을 한 대 피우고 위스키를 조금 마셨다. 매일 저녁이 똑같았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겠다, 루시는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미첼스타운 동굴을 탐험하는 데 동의한 것을 후회했다.

루시는 묻지 않았다. 흥분으로 인한 떨림, 서늘하면서도 유쾌한 떨림이 온몸을 훑고 가며 살갗을 살며시 콕콕 찔러댔다. 달리 누가 그냥 안으로 걸어 들어오겠는가?

그것은, 그가 집에 오는 것은 두 사람에게 충격일 터였다. 그러나 그를 위해, 이미 결혼한 남자를 위해 옷을 차려입는 것은 더 큰 충격일 터였다. 그녀는 그 생각은,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어떻게 느낄까 하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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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이즈는 차양 밑의 탁자로 안내받은 이후 말이 없었다, 주문한 점심이 나오는 동안에도, 음식을 깨작거리다 대부분은 손도 대지 않고 남기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날이다. 대위는 생각했다.

나쁜 날이면 그의 직관이 예리해졌다. 그는 늘 알았다. 그의 손가락들이 누르는 힘 속에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 담겨 있었지만 그가 팔을 뻗어 잡은 손에는 그것을 알은체해주는 반응도 없었다.

"네, 부탁합니다(Si,Perfavore)."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다 싶을 만큼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그녀 혼자 노력하고 있었고 그는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더는 피난처를 찾을 수 없는 나라가 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차분하게 그녀가 물었다.

그는 말하면서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의 품에 누웠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그에게 읽어주었고, 그들은 서로에게 여행의 벗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이런 날이면 그녀는 오직 자신에게만 속했다.

"여덟 살인가 아홉 살 어린아이 때 보고는 처음이네, 루시."
루시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았다.

브리짓은 레이프의 방문에 대비해 식당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했다. 통풍을 하고 긴 식탁을 윤나게 닦은 다음 오래전에 접어 보관했던 식탁보를 꺼내 덮었다. 쟁반과 나이프와 포크를 서둘러 챙기는 손길에 흥분이 느껴졌고, 뺨에는 홍조가 퍼졌으며, 풀을 먹인 하얀 앞치마는 매일 깨끗했다.

그는 식사 시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브리짓이 나가고 식당 문이 닫히면 그는 자신들이 결혼하면 이럴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라하단의 모든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집이 있는 자리, 집 자체, 아침 일찍 바닷가에 가는 것,L.G.라고 새겨진 나무들로 안내되는 것. 개울가 풀밭에 누워 있는 것도, 징검다리로 개울을 건너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들은 그도 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치 그러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응접실에서 사진첩을 넘겨 보다가 갈색 안개 너머 사과나무들 사이의 유모차 옆에 서 있는 남녀를 보았다. 앨범의 어떤 사진들은 잠시 멈추고 다른 사진보다 더 열중하여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루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과연 자신이 언젠가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부드럽고 옅은 머리카락과 목과 뺨, 주근깨가 박힌 팔과 이마와 감은 눈, 입술을 쓰다듬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에서 그냥 끝나버리지나 않을지.

"라하단을 떠나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허영의 시장》을 다 읽기 전에는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다 읽으면 우린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것도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가끔 산책을 할 때면 잠시 손등이 서로 스치기도 했고,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손바닥이 만나 서로 움켜쥐기도 했다. 넘기 힘든 돌담을 넘을 때도 밀착이 있었다.
"총 642쪽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수줍음은 좀 사라졌는데, 그가 그녀를 전보다 잘 알게 되어서 또는 그렇다고 상상해서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녀는 그의 수줍음과 상냥함을 좋아했다.

레이프는 루시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것이 그가 한 말에 대한 부정이 아님을, 그의 어조와 눈에 담긴 뜨거운 감정을 의심하는 표현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고삐 풀린 희망의 어리석음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녀의 말 없는 답이 반복되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추측하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손님은 라하단을 떠날 것이고 가을날은 짧아지다가 겨울에 자리를 내줄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새해 첫 몇 달 동안 최악의 날씨가 닥쳐올 것이었다. 다시 여름이 오면 그가 에니실라로 돌아올까? 그가 다시 여기에, 라하단에 올까? 아니면 시간이, 변덕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그를 그들에게서 점점 멀리 떼어놓을까?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듯 낯선 남자의 애정을 수상쩍게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프가 집에 머무는 동안 헨리는 점차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벌어진 일이 나쁘지 않다는 말에도 그 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위의 자식을 누가 이 장소로부터 데려가는 것, 이 장소에 달라붙은 어둠으로부터 마침내 떼어내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너는 나를 잊게 될 거야. 올여름도 잊을 거야. 나는 희미해지다 그림자가 되고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 들리지도 않게 될 거야. 지금은 ?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 현재는 ? 하나의 현실이지만 이건 지속되지 않을 거고, 지속될 수도 없는 현실이야. 소설에서 묘사되는 얼굴들이 내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듯이 너도 이 방을 또렷하게 보지 못하게 될 거야. 라하단 꿈을 꾸기는 하겠지, 레이프, 가끔 한 번씩, 어쩌면 전혀 꾸지 않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꾼다 해도 그때는 내가 유령이나 다름없을 거야."

"물론 나도 너를 사랑해." 루시가 말했다. "혹시 그 점이 궁금하다면."

그녀는 축음기 태엽을 감고 레코드판을 올려놓았다. 테너 존 매코맥 백작이 <버드나무 정원에서>를 불렀다.

파도가 거친 백마처럼 뒷발로 일어섰고, 유령 같은 형체들이 터져 거품이 되었으며, 부서지면서 한 형체가 다른 형체를 쫓아갔다. 바다의 때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바람의 흐느낌을 빨아들여 해변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냈다.

폭풍우의 흥분이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완전하게 그들을 속박했다. 평생 두 번 다시 이만한 행복이 있을까? 루시는 생각했다.

그들은 난로 가까이 옮겨놓은 탁자로 의자 두 개를 끌어왔다. 레이프는 와인을 따랐고 그 순간, 그가 오게 된 이 집을 절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루시를 이곳에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는 여기에 속했고 오늘 밤에는 자신도 그렇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축음기에서 바늘이 <런던데리의 노래>를 긁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을, 지금 저 여자들이 괴로워하는 것처럼 괴로워하게 만들었어. 나는 그분들의 용서를 갈망해. 그건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아."
갑자기 루시가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에 레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걸어갔다.

"나는 그때도 사랑에 빠져 있었어. 나무와 바위 웅덩이와 모래에 찍힌 발자국을 사랑했어. 내가 무언가에 홀렸던 걸까, 레이프? 나는 늘 내가 그랬다고 생각했어."

"가엾은 로체스터 부인*처럼 말이야!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너는 어린애였어."23
"아이도 홀릴 수 있어. 그분들을 괴로워하게 만들었을 때 나는 그분들을 미워했던 걸까?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금방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던 걸까?"

"나는 그분들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언젠가 ? 오늘, 내일, 1년 뒤의 어느 날 ? 그분들은 이곳으로 돌아올 힘을 찾을 거야. 이런 일에는 너무 늦었다든가 하는 건 절대 없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부대에 가서 그의 홀쭉하고 말수 적은 모습을 묘사했고 그가 이상하다고, 예배당 성상을 혼자 자주 찾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친구는 사귀지 않았지만 하는 일에서는 양심적이고 참을성 있고 믿을 만했으며 그런 자질이 그를 지휘하는 장교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아주 키 크고 홀쭉해요. 킬데어가 말이에요. 완전히 청년이에요! 잭은 원예가가 되고 싶대요. 나는 그냥 그 단어가 멋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라고 믿지만! 둘 다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하고 우리는 선생님이 여기서 보낸 몇 달에 감사하고 있어요. 루시 골트는, 기억하고 있겠죠, 틀림없이, 지금도 라하단에 있어요. 그곳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여기 우리는 모두 잘 있답니다.

다른 책을 또 찾았어 ? 루시가 편지를 썼다 ? 레이디 모건의 《플로렌스 매카시》야. 별로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짐작보다는 훨씬 좋아.

있어?
언젠가는 서로 편지를 쓰지 않게 될 거다, 루시는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반복이기 때문에.레이프,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돼, 그녀는 속으로 썼다.

결국 필요한 기술은 인내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이 걱정해야 할 건 외로움이에요." 브리짓은 말했다.

브리짓이 말한 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질 양이면 내 안의 뭔가가 그것을 알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일을 했다.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들은 선 채로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제 독감은 전염병이 되었다, 의사는 말했다. 동네에서 안 걸린 집이 없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떤 전염병이 돌더라도 이해할 수 있고 또 예상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인생은 짧다, 그는 스위스인다운 분별력 있는 태도로 환자들에게 쉬지 않고 일깨웠다. 좀 길게 간다 해도 결국은.

그는 방을 나오며 문을 살살 닫고 혹시 귀 기울여야 할 일이 있을까 싶어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떴다. 아내의 일상의 핵심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점점 커지기만 했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그의 사랑은 놀랍게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혼하던 날을 기억했다. 그녀가 고모의 반대를 웃어넘겨버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정말 운 좋은 남자라고 덕담을 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내내 대위는 울며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깨가 들썩이고 흐느낌이 가끔 큰 소리로 바뀌고 슬픔이 분출되는 사이사이에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했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결혼 생활에 충실했으며 한 번도 다른 삶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헬로이즈가 얼마나 자주 행복하다고 말했는지 ? 여기 벨린초나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몇 년 동안에도, 또 그 전에 몬테마르모레오에서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혼잡한 소읍들로 나들이를 갔을 때도 ? 기억했다. 그녀는 최대한 행복을 누리려 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애도하고 있으니 좋았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기뻤던 일들, 그녀의 웃음과 자신의 웃음, 처음 결혼했을 때, 아직 사랑에 그림자가 전혀 드리우지 않았을 때 서로를 발견하던 과정. 지금은 거리를 덮은 눈만큼이나 텅 빈 공백이 있었다.

이 잉글랜드 여자를 조금 안다고 느꼈던 사람들, 먼 방식으로나마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열린 의식에 참석했고 몇 사람은 묘지까지 갔다. "아름다웠어요, 아름다웠어(Bella,bella)." 한 여자가 상처한 남자에게 소곤거렸고 굳이 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고통으로 눈이 흐릿해졌을 때에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그녀가 아는 것 이상의 위안을 주었다.

레이프의 마지막 편지가 왔을 때 루시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몰랐다. 하지만 편지가 더 오지 않자 다시 살펴보고 그 안에서 전에는 놓쳤던 분위기, 부정확한 진술과 고백 안에 담긴 의미를 발견했다. 마치 말이 머뭇거리다 다른 표현 방식으로 가지 못한 듯했고 평범하게 전하는 내용 밑에 절망을 적어놓은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루시는 텐트 스티치 기법으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처음 스티치를 독학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타고난 솜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주실, 그리고 명주실로 장식하는 리넨은 가정 수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더블린의 가게 안크린스에서 우편으로 왔다. 어머니가 받아놓았지만 《아일랜드 용기병》 책갈피에 끼워놓고 잊어버렸던 그 가게의 카탈로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와 레이프 ? 크로스비 신부와 마찬가지로 설리번 씨도 에니실라의 거리에서 알게 되었다 ? 사이의 우정에 어떤 진전이 있었다면 그는 마침내 루시를 아이 이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인인 그의 눈은 라하단, 그리고 그곳에 모여 살게 된 작은 가족을 석화된 존재처럼, 그곳에서 있었던 드라마 속에 갇힌 존재처럼 보고 있었다. 루시는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녀 자신의 자수 속의 구성 요소나 다름없었다.

대위는 이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지 않은 말이 너무 많았다. 서로 사랑했기에 직감이 발달했고, 직감에 의지하여 말을 절약하는 지름길로 가는 데 익숙해지면서 무심하게 너무 많은 것을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두었다.

"괴로운 일이 있군요, 무슈." 그것은 진술이었지만 어조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기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낯선 사람과 애도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고 이번에도 그런 관심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콩코르드 광장에서보다는 조심했다.

우물우물 나오는 동정의 말은 아무리 상냥해도, 그 의도와 관계없이 경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을 주지 않았던 아내 헬로이즈가 죽어서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을 주고 있었다.

루시는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발은 걷어차 벗어버렸고 읽던 책은 옆에 엎어놓았다. 그녀는 책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도, 대성당이 있는 장소들도, 프루디 부인이나 하딩 씨나 종탑에 걸린 해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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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1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윌리엄 트레버 밀회 읽고 있어요. ^^

라로 2022-06-18 05:16   좋아요 1 | URL
저도 곧 곧(언제일지는;;;)따라 읽겠어요!!! 루시 골트이야기 아주 좋았어요!!!
 

크로스비 신부가 바깥세상에 나가는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녀는 자기 인생의 성격과 신조가 이미 정해졌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기다린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기다리면서 믿음을 유지한다. 모든 방은 깨끗하게 청소해두었다. 모든 의자, 모든 탁자, 모든 장식품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가득 채운 여름 꽃병, 벌, 층계와 층계참을 딛는 걸음, 방과 조약돌 깔린 마당과 자갈밭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그녀가 내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외롭지 않았다. 가끔 외로움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 하지만 저는 행복해요." 신부가 물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안심시켜주었을 것이다. "아주 행복해요, 정말로."

그녀의 스물한 살 생일에도 신부로부터, 그의 부인으로부터, 설리번 씨로부터 또 선물이 왔다. 나중에 그녀는 따뜻한 저녁 햇볕을 받으며 사과 과수원에 누워 다른 세대 사람들이 남기고 간 소설을 또 한 권 읽었다. 스물한 살의 루시 골트에게 세상은 그 정도로, 네더필드13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부인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그와 대조를 이루었다. 급속히 붙는 살을 부주의하게 방치한 그녀는 자신에게 너그러웠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너그러운 성정은 몸의 풍만함과 태도에 반영되어 있었다.

두 아들이 게으르다는 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은 남편의 분야다, 그녀는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하여 걱정이 그가 즐기는 일임을 은근히 암시했다.

라이알 씨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했고 부인은 그 바닥에 깔린 감정적 의미를 제시했다.

루시 골트는 그해 여름내 아름다웠다. 무늬 없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고 햇빛이 그녀의 보석 없는 귀걸이의 은색 점들에 걸려 반짝거렸다. 그 아이 어머니의 귀걸이였을 거다, 라이알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드레스도. 결국 서둘러 떠나게 되면서 남기고 간 거다.

레이프는 가끔 혹시라도 실수를 하여 루시 골트의 미소 전에 곧잘 찾아오던 엄숙한 눈길을, 허벅지 위에서 손을 맞잡고 대리석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던 모습을 묘사할까 봐 자신의 입을 경계했다.

"또 잘못 들게, 레이프. 내 간절히 원하는데, 또 잘못 들라고. 자기 세대 사람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녀와 좀 어울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 정말로 간절히 바라. 다시 그 쓸쓸한 집에 가게나, 레이프."

내리긋기와 둥근 고리, 흐름과 필체에 관한 모든 지침을 따르는 묘하게 완벽해 보이는 글씨로 쓴 루시 골트의 편지가 마침내 도착했다. 레이프가 아주 은밀하게 품어온 그 이름은 편지의 다른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로도 이 이름을 확인했을 때의 힘을 포착할 수는 없다. 레이프는 확신했다.

나중에 연병장에서 이 신병은 외따로 서 있었다. 그는 주위의 임시 막사, 변소, 핸드볼 코트를 둘러싼 높은 담, 구석에서 어슬렁거리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어떤 소식을 전해주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과묵함은 때로는 헨리의 생각의 흐름을 반영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감추기도 했다.

"편한 대로 하는 녀석이군."
"아, 착한 젊은이예요."
"나는 그런지 모르겠는데."
브리짓은 이런 의견 충돌을 더 밀고 나갈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말했다.
"차 마실 때 또 벌집을 가져오래요."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레이프는 그녀를 루시라고 생각했다. 함께 있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루시 골트, 그는 그렇게 적힌 것을 보았다. 그녀가 쓴 대로였다. 다른 어떤 이름도 그렇게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터였다.

"내가 책을 센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전혀."
그는 그녀가 세는 상상을 했다. 손가락이 책꽂이 선반을 따라 책등에서 책등으로 옮겨 가고 그런 뒤에 아래 선반에서 다시 시작하고. 지난번에 왔을 때는 집 안까지 초대받지 못했다. 오늘은 방을 보게 될지 궁금했고 보게 되기를 바랐다.

헨리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자동차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뒤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 기울였다. 대화가 더듬더듬 편치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일찍 온 것을 사과하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다.

별나게 들렸으리라. 책 4027권을 세다니. 하지만 이상해 보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왔네." 헨리는 부엌에서, 그 말을 했을 때 자신이 기뻐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아내는 기뻐하고 있음을 느꼈다.

"뭐든 잘 돌본 걸 보면 기분이 좋지요. 나는 2륜마차가 제대로 굴러가게 손봅니다. 두어 해 전에는 그 사냥개 마차20에 칠까지 해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흔들흔들해요."

그녀는 책에 대해 말한 것을 후회했다. 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허영의 시장》 이야기만 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21라는 이름으로 그의 관심을 끄는 데까지는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메이크피스라는 이름은 킬데어라는 이름만큼이나 특이했고 그녀는 그 이름의 리듬이 좋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경험이 그가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여자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일과 비교하면 하잘것없다는 것도 잘 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공감도 사랑의 일부였으며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양심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것은 낯선 사람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였고, 그녀가 너무 많은 것을 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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