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이즈는 차양 밑의 탁자로 안내받은 이후 말이 없었다, 주문한 점심이 나오는 동안에도, 음식을 깨작거리다 대부분은 손도 대지 않고 남기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날이다. 대위는 생각했다.

나쁜 날이면 그의 직관이 예리해졌다. 그는 늘 알았다. 그의 손가락들이 누르는 힘 속에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 담겨 있었지만 그가 팔을 뻗어 잡은 손에는 그것을 알은체해주는 반응도 없었다.

"네, 부탁합니다(Si,Perfavore)."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다 싶을 만큼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그녀 혼자 노력하고 있었고 그는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더는 피난처를 찾을 수 없는 나라가 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차분하게 그녀가 물었다.

그는 말하면서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의 품에 누웠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그에게 읽어주었고, 그들은 서로에게 여행의 벗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이런 날이면 그녀는 오직 자신에게만 속했다.

"여덟 살인가 아홉 살 어린아이 때 보고는 처음이네, 루시."
루시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았다.

브리짓은 레이프의 방문에 대비해 식당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했다. 통풍을 하고 긴 식탁을 윤나게 닦은 다음 오래전에 접어 보관했던 식탁보를 꺼내 덮었다. 쟁반과 나이프와 포크를 서둘러 챙기는 손길에 흥분이 느껴졌고, 뺨에는 홍조가 퍼졌으며, 풀을 먹인 하얀 앞치마는 매일 깨끗했다.

그는 식사 시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브리짓이 나가고 식당 문이 닫히면 그는 자신들이 결혼하면 이럴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라하단의 모든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집이 있는 자리, 집 자체, 아침 일찍 바닷가에 가는 것,L.G.라고 새겨진 나무들로 안내되는 것. 개울가 풀밭에 누워 있는 것도, 징검다리로 개울을 건너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들은 그도 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치 그러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응접실에서 사진첩을 넘겨 보다가 갈색 안개 너머 사과나무들 사이의 유모차 옆에 서 있는 남녀를 보았다. 앨범의 어떤 사진들은 잠시 멈추고 다른 사진보다 더 열중하여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루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과연 자신이 언젠가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부드럽고 옅은 머리카락과 목과 뺨, 주근깨가 박힌 팔과 이마와 감은 눈, 입술을 쓰다듬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에서 그냥 끝나버리지나 않을지.

"라하단을 떠나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허영의 시장》을 다 읽기 전에는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다 읽으면 우린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것도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가끔 산책을 할 때면 잠시 손등이 서로 스치기도 했고,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손바닥이 만나 서로 움켜쥐기도 했다. 넘기 힘든 돌담을 넘을 때도 밀착이 있었다.
"총 642쪽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수줍음은 좀 사라졌는데, 그가 그녀를 전보다 잘 알게 되어서 또는 그렇다고 상상해서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녀는 그의 수줍음과 상냥함을 좋아했다.

레이프는 루시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것이 그가 한 말에 대한 부정이 아님을, 그의 어조와 눈에 담긴 뜨거운 감정을 의심하는 표현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고삐 풀린 희망의 어리석음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녀의 말 없는 답이 반복되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추측하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손님은 라하단을 떠날 것이고 가을날은 짧아지다가 겨울에 자리를 내줄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새해 첫 몇 달 동안 최악의 날씨가 닥쳐올 것이었다. 다시 여름이 오면 그가 에니실라로 돌아올까? 그가 다시 여기에, 라하단에 올까? 아니면 시간이, 변덕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그를 그들에게서 점점 멀리 떼어놓을까?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듯 낯선 남자의 애정을 수상쩍게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프가 집에 머무는 동안 헨리는 점차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벌어진 일이 나쁘지 않다는 말에도 그 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위의 자식을 누가 이 장소로부터 데려가는 것, 이 장소에 달라붙은 어둠으로부터 마침내 떼어내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너는 나를 잊게 될 거야. 올여름도 잊을 거야. 나는 희미해지다 그림자가 되고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 들리지도 않게 될 거야. 지금은 ?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 현재는 ? 하나의 현실이지만 이건 지속되지 않을 거고, 지속될 수도 없는 현실이야. 소설에서 묘사되는 얼굴들이 내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듯이 너도 이 방을 또렷하게 보지 못하게 될 거야. 라하단 꿈을 꾸기는 하겠지, 레이프, 가끔 한 번씩, 어쩌면 전혀 꾸지 않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꾼다 해도 그때는 내가 유령이나 다름없을 거야."

"물론 나도 너를 사랑해." 루시가 말했다. "혹시 그 점이 궁금하다면."

그녀는 축음기 태엽을 감고 레코드판을 올려놓았다. 테너 존 매코맥 백작이 <버드나무 정원에서>를 불렀다.

파도가 거친 백마처럼 뒷발로 일어섰고, 유령 같은 형체들이 터져 거품이 되었으며, 부서지면서 한 형체가 다른 형체를 쫓아갔다. 바다의 때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바람의 흐느낌을 빨아들여 해변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냈다.

폭풍우의 흥분이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완전하게 그들을 속박했다. 평생 두 번 다시 이만한 행복이 있을까? 루시는 생각했다.

그들은 난로 가까이 옮겨놓은 탁자로 의자 두 개를 끌어왔다. 레이프는 와인을 따랐고 그 순간, 그가 오게 된 이 집을 절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루시를 이곳에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는 여기에 속했고 오늘 밤에는 자신도 그렇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축음기에서 바늘이 <런던데리의 노래>를 긁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을, 지금 저 여자들이 괴로워하는 것처럼 괴로워하게 만들었어. 나는 그분들의 용서를 갈망해. 그건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아."
갑자기 루시가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에 레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걸어갔다.

"나는 그때도 사랑에 빠져 있었어. 나무와 바위 웅덩이와 모래에 찍힌 발자국을 사랑했어. 내가 무언가에 홀렸던 걸까, 레이프? 나는 늘 내가 그랬다고 생각했어."

"가엾은 로체스터 부인*처럼 말이야!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너는 어린애였어."23
"아이도 홀릴 수 있어. 그분들을 괴로워하게 만들었을 때 나는 그분들을 미워했던 걸까?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금방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던 걸까?"

"나는 그분들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언젠가 ? 오늘, 내일, 1년 뒤의 어느 날 ? 그분들은 이곳으로 돌아올 힘을 찾을 거야. 이런 일에는 너무 늦었다든가 하는 건 절대 없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부대에 가서 그의 홀쭉하고 말수 적은 모습을 묘사했고 그가 이상하다고, 예배당 성상을 혼자 자주 찾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친구는 사귀지 않았지만 하는 일에서는 양심적이고 참을성 있고 믿을 만했으며 그런 자질이 그를 지휘하는 장교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아주 키 크고 홀쭉해요. 킬데어가 말이에요. 완전히 청년이에요! 잭은 원예가가 되고 싶대요. 나는 그냥 그 단어가 멋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라고 믿지만! 둘 다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하고 우리는 선생님이 여기서 보낸 몇 달에 감사하고 있어요. 루시 골트는, 기억하고 있겠죠, 틀림없이, 지금도 라하단에 있어요. 그곳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여기 우리는 모두 잘 있답니다.

다른 책을 또 찾았어 ? 루시가 편지를 썼다 ? 레이디 모건의 《플로렌스 매카시》야. 별로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짐작보다는 훨씬 좋아.

있어?
언젠가는 서로 편지를 쓰지 않게 될 거다, 루시는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반복이기 때문에.레이프,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돼, 그녀는 속으로 썼다.

결국 필요한 기술은 인내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이 걱정해야 할 건 외로움이에요." 브리짓은 말했다.

브리짓이 말한 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질 양이면 내 안의 뭔가가 그것을 알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일을 했다.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들은 선 채로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제 독감은 전염병이 되었다, 의사는 말했다. 동네에서 안 걸린 집이 없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떤 전염병이 돌더라도 이해할 수 있고 또 예상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인생은 짧다, 그는 스위스인다운 분별력 있는 태도로 환자들에게 쉬지 않고 일깨웠다. 좀 길게 간다 해도 결국은.

그는 방을 나오며 문을 살살 닫고 혹시 귀 기울여야 할 일이 있을까 싶어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떴다. 아내의 일상의 핵심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점점 커지기만 했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그의 사랑은 놀랍게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혼하던 날을 기억했다. 그녀가 고모의 반대를 웃어넘겨버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정말 운 좋은 남자라고 덕담을 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내내 대위는 울며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깨가 들썩이고 흐느낌이 가끔 큰 소리로 바뀌고 슬픔이 분출되는 사이사이에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했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결혼 생활에 충실했으며 한 번도 다른 삶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헬로이즈가 얼마나 자주 행복하다고 말했는지 ? 여기 벨린초나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몇 년 동안에도, 또 그 전에 몬테마르모레오에서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혼잡한 소읍들로 나들이를 갔을 때도 ? 기억했다. 그녀는 최대한 행복을 누리려 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애도하고 있으니 좋았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기뻤던 일들, 그녀의 웃음과 자신의 웃음, 처음 결혼했을 때, 아직 사랑에 그림자가 전혀 드리우지 않았을 때 서로를 발견하던 과정. 지금은 거리를 덮은 눈만큼이나 텅 빈 공백이 있었다.

이 잉글랜드 여자를 조금 안다고 느꼈던 사람들, 먼 방식으로나마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열린 의식에 참석했고 몇 사람은 묘지까지 갔다. "아름다웠어요, 아름다웠어(Bella,bella)." 한 여자가 상처한 남자에게 소곤거렸고 굳이 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고통으로 눈이 흐릿해졌을 때에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그녀가 아는 것 이상의 위안을 주었다.

레이프의 마지막 편지가 왔을 때 루시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몰랐다. 하지만 편지가 더 오지 않자 다시 살펴보고 그 안에서 전에는 놓쳤던 분위기, 부정확한 진술과 고백 안에 담긴 의미를 발견했다. 마치 말이 머뭇거리다 다른 표현 방식으로 가지 못한 듯했고 평범하게 전하는 내용 밑에 절망을 적어놓은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루시는 텐트 스티치 기법으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처음 스티치를 독학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타고난 솜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주실, 그리고 명주실로 장식하는 리넨은 가정 수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더블린의 가게 안크린스에서 우편으로 왔다. 어머니가 받아놓았지만 《아일랜드 용기병》 책갈피에 끼워놓고 잊어버렸던 그 가게의 카탈로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와 레이프 ? 크로스비 신부와 마찬가지로 설리번 씨도 에니실라의 거리에서 알게 되었다 ? 사이의 우정에 어떤 진전이 있었다면 그는 마침내 루시를 아이 이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인인 그의 눈은 라하단, 그리고 그곳에 모여 살게 된 작은 가족을 석화된 존재처럼, 그곳에서 있었던 드라마 속에 갇힌 존재처럼 보고 있었다. 루시는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녀 자신의 자수 속의 구성 요소나 다름없었다.

대위는 이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지 않은 말이 너무 많았다. 서로 사랑했기에 직감이 발달했고, 직감에 의지하여 말을 절약하는 지름길로 가는 데 익숙해지면서 무심하게 너무 많은 것을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두었다.

"괴로운 일이 있군요, 무슈." 그것은 진술이었지만 어조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기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낯선 사람과 애도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고 이번에도 그런 관심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콩코르드 광장에서보다는 조심했다.

우물우물 나오는 동정의 말은 아무리 상냥해도, 그 의도와 관계없이 경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을 주지 않았던 아내 헬로이즈가 죽어서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을 주고 있었다.

루시는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발은 걷어차 벗어버렸고 읽던 책은 옆에 엎어놓았다. 그녀는 책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도, 대성당이 있는 장소들도, 프루디 부인이나 하딩 씨나 종탑에 걸린 해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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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1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윌리엄 트레버 밀회 읽고 있어요. ^^

라로 2022-06-18 05:16   좋아요 1 | URL
저도 곧 곧(언제일지는;;;)따라 읽겠어요!!! 루시 골트이야기 아주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