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거리 가득 환하게 이글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성큼성큼 걷는 키 큰 중국 남자와 대나무 멜대 양 끝에 나른하게 대롱거리는 바구니 두 개가 만든 그림자는 햇볕에 물든 연못 수면을 우아하게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와 비슷해 보였다.

색색의 종이를 잘라 닭과 염소와 양 같은 종이 동물을 만드는 법도 배웠는데, 이는 여러 신과 조상이 산 자들을 찾아와 함께 잔치를 즐기도록 제물 삼아 불태우는 것이라고 했다.

만두 가장자리에는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재물을 상징하는 구불구불한 조개껍질 무늬를 새겼는데, 릴리는 포크로 이 무늬를 새기는 일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돈이랑 사탕이 든 빨간 봉투를 아무나 다 받을 수 있대." 아이들은 서로서로 소곤거렸다. "그 사람들 집 앞에 가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만 하면 된대."

캄캄한 어둠에 괴로워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으려고, 인간 화물들은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소?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철로를 놓으러 가는 길인데. 미국은 늑대와 호랑이가 사는 땅이 아니요.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 우리와 똑같이 일하고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 곁에는 가족이 없소. 그러니 관우님께서 유비님과 장비님과 함께 복숭아밭에서 보여 주신 모범을 따릅시다. 우리 서로에게 형제가 되어 줍시다."

"먹어, 먹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말했다. "양껏 먹어."
중국인들은 뭐가 더 맛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기진 배를 채워 주는 음식인지, 오랜만에 듣는 고향 말인지.

취해서 곯아떨어지면 아무 걱정도 못 하니까 말이지."

약속을 어기다니, 중국인답지 않다고요

한나라 공주였던 해우의 이름은 ‘슬픔을 삭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저는 두 번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영광을 안겨 드릴 것입니다.’

하늘은 운명을 제 손으로 개척하는 자에게만 웃음을 보인다는 것이 관우님의 가르침 아니오?

"바깥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는 나도 모른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니까. 하지만 눈을 감을 때가 되면 우리는 알 것이다. 우리 삶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은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음을, 우리가 거둔 승리도 우리가 저지른 실수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었음을."

"이곳의 땅은 고향의 냄새가 나지 않지만, 하늘만은 내가 본 그 어디의 하늘보다 더 넓고도 높소. 나는 날마다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의 이름을 익히고, 내가 할 수 있는 줄도 몰랐던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소.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올라가 스스로 새 이름을 거머쥐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요?"

미약한 불빛 속에 서 있는 라오관은 남자들의 눈에 나무처럼 커다랗게 보였고, 길고 가느다란 눈은 화톳불처럼 벌건 얼굴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중국인 남자들의 가슴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결의와 갈망으로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건 실수였소. 우리는 술에 취해 싸워야 하오."

고국 땅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맛보는 소박하고 안온한 즐거움을 버리고
이국 하늘 아래 성공하여 누릴 거친 기쁨을 택했다는 말.
대대로 살아온 집의 따뜻한 난롯가와 조상들이 묻힌 들녘을 떠나 왔다는,
다시 말해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버리고 행운을 좇아 떠나 왔다는 말……
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이 최상의 칭찬이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참 놀랄 노 자로군. 당신이 만두를 세 개나 먹는 거 내가 다 봤어. 중국인들이 만든 음식에는 손도 안 댈 줄 알았는데."

"어쩌다 그런 허튼 생각을 품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이웃이 문을 열고 파티에 와서 함께 먹자고 초대하는데 당신 말처럼 행동하는 건 결코 크리스천이 할 짓이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여기 이교도는 당신 혼자인 줄 알겠어요."

"근데 당신, 내 첫사랑이었던 남자애 이름이 잭인 거 알아요?"
그 말에 주위의 여성들은 박장대소했고, 잭도 따라서 웃었다.

에밋은 크게 성공할 인물은 절대 아니라는 평을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그러면서도 큰 사고를 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에밋을 좋아했다. 누가 ‘헤이워스 나리’라고 불러 주면 기꺼이 술을 한잔 샀기 때문이었다.

에밋은 군 생활에 의외로 잘 적응했다. 말 위에서 생활하며 식사를 양껏 못하다 보니 몸은 점점 날씬해졌지만, 활발한 성격은 결코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아,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에밋 연대의 병사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헤이워스 대령님하고 결혼할 텐데. 손은 점잖고 말은 명랑한 우리 대령님. 그분이 우릴 뉴올리언스까지 데려가실 거야."

그곳에는 에밋 대령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용기와 충성과 대의에 헌신하는 자세를 보여 준 대령 같은 사람이."
에밋은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판사는 전쟁 영웅이었다. 잭 시버는 그런 자들을 잘 알았다. 아버지 재산으로 편히 사는 데에 익숙한 자들, 그런 주제에 보급선 관리 같은 편한 보직을 사서 조그마한 공까지 박박 긁어모아 모든 것이 북부 연합과 하느님의 영광 덕분이라고 떠들다가, 약삭빠르게 이런 한직에 취임하는 자들이었다.

잭 시버 같은 병사들이 진흙탕에서 총알을 피하고 동상에 발가락이 잘리는 고생을 하는 동안에. 잭은 이를 악 물었다. 속에 품은 경멸을 드러내기에는 때도 장소도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잭은 동부에 살 적에 장인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법률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나저나 그 닭 피 어쩌고 하는 얘기는 뭐요?" 에밋이 물었다.

잭 시버는 무척이나 설득에 능한 사람이었다. 만약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일대의 변호사들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수준이었다.

"법이란 우스꽝스러운 거다.

릴리는 속으로 그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로건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야 하므로 아무것도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전 오비가 하는 거짓말을 믿을 바엔 차라리 중국인이 될 거예요."

"미안하다, 릴리. 나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도 가끔은 냉소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다." 로건은 빙그레 웃으며 릴리를 마주 보았다.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좋지. 하지만 앞으로는 중국인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턴 내가 어떻게 미국인이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주마."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전에 다 설명해 준 이야기였다. 엄마가 시간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그거라고 했다. 엄마한테 남은 시간인 2년을 길게 늘여서, 내가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엄마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엄마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많았다면 엄마한테 말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엄마가 준 선물들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직 거짓말이 서툴렀다

아빠가 방문을 다시 열었다. 아직 스물다섯 살인 엄마, 지금도 가족사진 속의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엄마가 아빠 곁에 나란히 서 있으니, 아빠가 얼마나 늙었는지 더럭 실감이 났다.

아빠는 내가 속옷에 묻은 피를 처음 보고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겁에 질렸을 때 나를 달래 준 사람이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가게 점원에게 나한테 맞는 브래지어를 좀 골라 달라고 더듬더듬 말한 사람도 아빠였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대들 때 꿋꿋이 서서 나를 안아 준 사람도.

집에 오려고 몇 광년을 건너뛴 사람이었으니, 어차피 합판으로 만든 문짝 하나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보려고 억지로 들어오는 엄마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내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그냥 서로 멀어진 것뿐이에요. 말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에게 오랫동안 했던 거짓말이었으니까. 나 자신도 포함해서.

"떠난 보람이 있었나요?"
"난 다른 엄마들보다는 너를 지켜볼 시간이 적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훨씬 오래 볼 수 있었어."

프로그래머이자 변호사, 번역가, 소설가인 리우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한껏 담아 써 내려간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한국의 독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최고로 꼽았고, 같은 이야기에서도 다른 지점에 감동했다.

이처럼 다양한 감상에 비슷하게 나타나는 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역사와 언어, 기술이라는 요소를 SF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짧지만 여운이 긴 이야기로 직조하는 탁월한 이야기꾼.’

이전 단편집과 달리 느슨하게나마 수록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가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초월’이다. 수록작 가운데 굳이 나누자면 SF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육체라는 존재 양식만이 아니라 시공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초월을 이룬 후에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라고, 아마도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야기 짓기와 읽기는 오로지 또 마땅히 지은이와 읽는 이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가장 인간다운 활동으로서, 거기에 옮긴이가 끼어 앉을 자리는 없다.

독자들은 제가 책에 쓴 단어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겁니다. 왜냐면 독자 한 명 한 명이 자기만의 이야기보따리와 자기만의 해석 틀, 자기만의 상처, 자기만의 정서적 공명점을 지닌 채로 책을 펼친 다음, 제가 쓴 글을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쌓아올릴 테니까요. 이로써 완성된 결과물은 사실 절반만 제 것이고, 절반은 독자의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친놈과 벌이는 싸움은 뼈가 몇 대 부러지고 나서야 끝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창조한 건 전능하신 하느님이지만,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 건 콜트 대령이거든."

릴리는 자신 안에 깃드는 고요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릴리는알았다. 다 잘 끝나리라는 것을.

릴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대 위의 연극처럼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겁에 질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든가, 아니면 아예 기절해 버려야 마땅했다. 어머니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난 몇 초 동안 세상의 속도는 느려졌고, 릴리는 안전하고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는 기분이었다.

"넌 아직 배우는 단계니까 실제보다 작은 판에서 두는 거다. 이건 바둑[圍碁]이라는 놀이인데,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포위하는 놀이’라는 뜻이지. 씨앗 한 개를 놓을 때마다 네 소유의 땅을 둘러싸고 울타리를 치느라 말뚝 한 개를 박는다고 생각해라. 말뚝이 자리를 옮기면 안 되겠지?"

"어릴 적에 나는 세상에 오로지 다섯 가지 맛만 존재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세상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그 다섯 가지 맛을 서로 다르게 섞은 것인 줄 알았지. 나중에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다. 모든 곳에는 그곳만의 새로운 맛이 있어. 그리고 미국의 맛은 위스키야."

이 나라는 어디에나 새로운 이름이 붙어 있잖느냐. 네 어머니께서도 결혼하실 때 성을 바꾸셨을 텐데? 이곳은 도착한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는 땅이다.

"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모든 맛이 조화를 이룬 그 맛이야."

장생은 바둑이 매실주보다 훨씬 더 좋았다. 단순한 규칙은 달콤했고, 패배는 씁쓸했고, 승리는 몸이 얼얼할 정도로 즐거웠거든. 바둑돌이 만드는 무늬는 꼭꼭 씹으며 음미하는 맛이 있었고.

그렇게 못된 아이는 아니었구나. 장생의 아버지는 생각했어.승부에 지고서도 품위를 지킬 줄 알다니. 그건 인간들 사이의 봉황이 지닌 품성이거늘.

"현명한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너처럼 실패를 기회로 여기지는 않는단다."

릴리는 그들의 대화에서 귀에 걸리는 영어 단어를 알아듣는 것이 즐거웠다. 이제 릴리에게도 익숙해진 중국식 억양은 그들의 음악과 닮은꼴이었다. 쇳소리 같았고, 딱딱거렸고, 구두점처럼 끼어드는 리듬은 들뜬 심장 고동 같았다.

어머니는 릴리에게 연습장에 시를 더 많이 베껴 적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코르셋을 차고 예쁘게 단장해서 남편을 구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아니야. 지금은 햇볕을 받으면서 뛰어다녀야 해.

릴리는 마침내 두부 한 조각을 무사히 입에 넣고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냠냠 씹었다. 그때껏 알지 못했던 맛이 입속에 퍼져 나갔다. 혀 전체가 기뻐할 만큼 풍부한 맛이었다. 짠맛, 고추의 어렴풋한 매운맛, 소스의 바탕을 이루는 약한 단맛, 그리고 혀를 간지럽히는 무언가. 릴리는 두부를 오물오물 씹어 보았다. 맛이 더 우러나오도록 해서 뭔지 모를 그 맛의 정체를 더 또렷이 밝히려고. 고추 맛은 더욱 강해졌고, 간질거리던 느낌은 얼얼한 느낌으로 변해 혀끝에서 혀뿌리까지 남김없이 뒤덮었다.

얼얼한 느낌이 갑자기 조그맣고 뜨거운 바늘 수천 개로 변해 혀를 온통 찔러 댔다. 콧속에 콧물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고, 눈앞은 눈물 때문에 뿌예졌다.

"쌀밥을 먹어라. 어서."
로건의 말에 릴리는 부리나케 쌀밥을 몇 입 씹어 삼켰다. 부드러운 밥 알갱이가 혀를 주무르고 목구멍 안을 달래 주도록. 혀는 마비돼서 감각이 사라진 듯했고, 얼얼한 느낌은 이제 가라앉았지만 볼 안쪽은 계속 따끔거렸다.

"그건 ‘마라[麻辣]’라는 맛이다. 촉(蜀) 땅의 이름을 중국 전역에 알린 얼얼한 매운맛이지. 조심해라, 그 맛은 사람을 살살 꼬드겨서 먹게 해 놓고는 입안 가득 불을 질러 댄다. 하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혀가 춤을 추고 그보다 순한 맛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지."

"중요한 건 맛의 균형이다. 중국인에게 운명이란 단맛과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마라 맛, 그리고 부드러운 위스키 맛을 한꺼번에 모두 맛보는 거다. 뭐, 사실 중국인은 위스키가 뭔지 모를 테지만, 그래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 거다."

개를 먹다니…… 그건 어린애를 먹는 거나 같은 짓이잖아.

관우는 기다란 핏빛 구름이 손짓하는 동쪽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싸움의 쾌감과 복수의 달콤함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어. 관우는 신이 된 기분이었단다.

둘은 별빛 아래 머물렀다. 한참 동안, 아주 한참 동안.

내가 황제라면 판관은 다시금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테고, 농부는 어진 마음으로 부지런히 들을 일굴 것이며, 다관은 다시금 학자와 가희(歌姬)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할 것이오.

불콰해진 얼굴은 이미 피처럼 붉었지만, 손은 무심하게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지. 마치 화동들이 꽃을 따는 5월의 정경을 시로 쓰기에 앞서 붓을 만지작거리는 문인처럼.

"성공할지 어떨지는 저도 모릅니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니까요. 하지만 훗날 죽음이 목전에 오면, 한때 용처럼 날아오르고자 애썼다는 기억은 떠올릴 수 있겠지요.

이 전포를 두르고 나서, 나는 오로지 덕(德)의 이름으로만 도검을 휘둘렀소. 그대가 내게 그 이상의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이오?

"형님 곁에서 나란히 싸울 때면 말이지." 장비가 검은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난 겁이란 게 뭔지 까맣게 잊어버린다니까. 정신은 굳건해지고 마음은 예리해지고, 기운은 빠지는데 투지는 거꾸로 더 활활 타오른다, 이거야."

단단하고 서늘한 옥 술잔은 부드러운 와인과 더없이 잘 어울렸지. 날은 점점 캄캄해졌지만 술잔의 재료인 옥돌은 속에 빛을 품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얼굴은 술잔의 빛으로 물들었어.

로건은 비파를 무릎 위에 올리고 서양 배처럼 생긴 몸통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쓰다듬듯이.

중국 남자아이는 누구나 엄마 젖과 함께 마시기 시작한다는 고량주의 맛에 익숙해지려고 여태 애쓰는 중이었다. 고량주를 마시면 면도날을 한입 가득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중국인이란 게 뭐요? 오랑캐는 또 뭐고? 그런 걸 고민해 봤자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 친구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드는 것도 아니요. 그럴 바에야 난 차라리 서역에서 고비 사막을 넘어온 초록 눈의 무희들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비파를 타겠소.

"관우는 당연히 살아 있다." 손권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렇게 말했다. "관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평생 유일한 여한은 이제 곧 건너갈 저세상에서 관우와 벗이 될 수 없음이니라. 언젠가는 그와 친구가 되기를 앙망했거늘."

"나는 너와 네 아비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허나 관우가 네 아비를 기꺼이 섬긴 것을 보면, 틀림없이 내가 간파하지 못한 네 아비의 장점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관공(關公)은 지금도 너를 굽어보고 있을 터, 나는 그에게 나 또한 덕이 없는 자가 아님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너를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 나의 궁에서 언제까지나 귀빈으로 지내도록 하라."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분은 무인일 뿐 아니라 시인이기도 하셨단다. 또한 명예를 잊지 않으려 하루하루 분투한 분이기도 하시지."

"하지만 빨래는 여자들의 일이잖아요! 그 남자들은 체면이란 게 뭔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잭이 중국인 남자들의 사업 계획을 들려주었을 때 엘지가 외친 말이었다.

"글쎄, 그게 그렇게 체면 깎이는 일인가? 당신은 왜 중국인들이 하는 일이라면 죄다 싫어하질 못해서 안달이야?"

이 마을의 나약한 남정네들은 보나마나 크리스천의 의무에 어두울 테니 중국인들한테 빨래를 맡기겠죠.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정직한 홀어머니들한테 맡기는 것보다 싸게 먹힐 테니까.

아옌에게서 가족 이야기를 들은 잭은 묘한 부조화를 느꼈다. 자신이 보기에는 이토록 어리기만 한 아옌이 단지 요리와 세탁을 잘하는 영리한 청년이 아니라, 실은 아내가 곁에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의 요령을 배워야 했던 남편이자 아마도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가 만든 요리를 먹기 전까지 난 양배추하고 콩이 쇠고기나 소시지보다 더 맛있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어. 은은하게 감도는 쓴맛에 마음이 끌릴 거란 생각도 못했고 말이야.

"시버 씨는 칭찬도 참 후하게 하시네요. 남편 입맛에는 뭐니 뭐니 해도 아내가 만든 음식이 최고라는 건 저도 알아요."

아옌은 눈물을 닦았다. "싼룽[三龍]이 그러는데, 식당 이름을 ‘개는 사람 무시, 사람은 개 무시 식당’이라고 지으래요."

"중국에 되게 유명한 만두 가게가 있는데 거기 이름이 ‘개가 쳐다도 안 보는 집(1858년 톈진에서 문을 연 유명한 만두 전문점 ‘거우부리[狗不理]’를 가리킨다. 주인의 아명이 개였는데 장사가 워낙 잘돼서 손님이 와도 만두 빚기에만 바빠 ‘개놈이 만두만 팔지 손님은 쳐다도 안 보네[狗子?包子, 不理人]’라는 말에서 가게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 옮긴이)’이거든요.

"싼룽 말이 미국에선 중국 식당이 절대 성공 못할 거래요, 손님들이 젓가락 쓰는 법을 몰라서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 손톱을 깎아 주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의 손톱을 깎으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당신이 어머니께 효도를 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안전장치 루틴은 당신이 어머니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보장한다.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멀리 살고 핑곗거리도 너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어머니 곁의 당신이 본질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머니가 어젯밤에 잠드셔서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이제 밤마다 어머니한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신은 서랍장 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고 만다.

스스로 미국인이 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은 어떻게 수많은 작은 결정들이 쌓여 돌이키지 못할 변화를 일으키는지, 어째서 결심하지 않는 것이 결심하는 것과 똑같은지를 생각한다. 당신에 관해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당신이 정해진 방식대로 행동할 거라 기대하는지를 생각한다.

딸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지, 당신의 선택을 어떻게 변명할지 생각한다. 나중에 그 애가 이해할 만큼 자랐을 때. 드넓은 대양 너머 다른 대륙에서 새 삶을 시작하느라 치러야 했던 대가를 생각한다. 결코 얻지 못할 사면에 관해 생각한다. 재판관은 당신 자신이므로.

긴장이 돼서 아직은 그 이유를 밝힐 수가 없다. 미리 말해 버리면 징크스가 될까 봐.

나는 아직 어려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지만, 부모님이 주신 세계가 있어서 아주 행복하다.

꼭 붙어 있고 싶은, 안에 감싸지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 느낌이다.

아빠는 ‘안으로’ 들어와서 내 방의 표면에 자리를 잡는다. 20차원인 아빠의 모습은 이 4차원 공간에 처음에는 조그마한 점으로 투영되다가, 서서히 윤곽선으로 바뀌어 천천히, 환한 금빛으로, 하지만 살짝 흐릿하게 일렁거린다. 아빠는 딴 데 정신이 팔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랑 같이 놀아 주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 나쁜 아빠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빠는 훨씬 높은 차원에서 일하는 데에 하도 익숙하다 보니 4차원에서는 엄청 지루해한다. 그런데도 성장기 아이한테는 4차원 환경이 최고라는 전문가들 말을 듣고 내 방을 클라인 대롱 형태로 디자인해 주었다.

우리 의식을 여러 개의 구성 알고리즘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각각의 알고리즘은 다시 루틴과 서브루틴으로 해체되었고, 결국 우리는 개별 명령어, 즉 근원 코드가 되었다. 그런 다음 바이 박사님은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제각각 우리에게 그 알고리즘의 일부를 주었는지 설명하셨다.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알고리즘들이 여러 루틴을 재결합하고 재배치한 결과 우리는 완전한 인격, 즉 우주에 새로이 탄생한 어린 의식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낳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두에게 각자의 일부를 조금씩 나누어 달라고. 내 생각에 나의 끝내주는 수학 실력은 해나 이모한테서, 부족한 참을성은 오코로 삼촌한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친구 사귀기에 서투른 건 리타 고모를 닮았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건 팡레이 삼촌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나의 거의 모든 부분은 엄마랑 아빠가 물려주었다. 나무 모양인 내 가계도에 제일 굵게 그린 나뭇가지는 엄마와 아빠를 의미한다.

나의 부분적인 형제자매들은 내 부모님 중 한쪽이 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끔 나를 놀리곤 했다. 고대인과 보통 사람이 만나면 잘 사는 경우가 드물다고, 그래서 우리 엄마가 아빠와 나를 떠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대들었고, 결국에는 다들 그런 생각을 멈추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포옹하도록 허락한다. 우리 둘의 알고리즘이 서로 얽히고, 클럭이 동기화되고, 서로의 스레드가 동일한 신호 간격에 맞추어 반응한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익숙한 엄마의 사고 리듬 속으로 내가 기꺼이 추락하는 동안, 엄마는 내 사고 리듬 속에서 나를 부드럽게 다독인다.

"우리 반에서 내가 수학 제일 잘해요." 나는 엄마에게 자랑한다. "우리 반 2621명 중에서요. 아빠는 내가 아빠처럼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소질이 있대요."

엄마는 끝내주는 이야기꾼이고, 그렇다 보니 엄마가 육체에 갇힌 채로 겪었던 결핍과 역경이 내 의식 속에 거의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탐험은 인류의 숙명이야.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성장해야만 해. 네가 어린아이에서 성장해 가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수학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상상계의 풍경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그건 실제가 아니야. 가상의 실체에 대한 영원한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서 인류는 무언가 잃어버렸어. 안으로만 눈을 돌리다 보니 현재에 만족하게 된 거야. 우리는 별들과 저 우주 바깥의 세계를 잊어버렸어

나는 엄마한테는 도무지 모질게 굴 수가 없다. 그 점은 분명 아빠를 빼닮았을 것이다.

나는 물질세계를 실제로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모든 새로운 감각의 충격이, 엄마 식으로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이다. 나는 그런 구식 표현이 좋다. 비록 무슨 뜻인지 늘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움직이는 느낌이 아찔하다. 이게 바로 육체를 지닌 고대인으로 사는 기분일까? 보이지 않는 중력의 결합력, 자신을 지구에 묶어 두는 그 힘에 저항하는 느낌? 그 느낌은 너무나 답답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나즐겁다.

나는 엄마에게 기체의 균형을 잡는 계산을 머릿속으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냐고 묻는다. 중력에 맞서 호버링 비행체를 안정화하는 데에 필요한 동적 피드백 계산은 너무나 복잡해서 나는 도무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내 수학 실력은 끝내주는데도.

"응, 이건 그냥 본능으로 하는 거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깔깔 웃는다. "넌 디지털 토박이잖아.

"난 왜 당신한테 안 된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는 걸까?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혹시 애 학교에 결석한다고 전해야 돼?"
"긴 여행이 될 거야. 그래도 해 볼 가치는 있어. 당신은 르네랑 영원히 함께할 거잖아. 난 그저 나한테 남은 시간의 극히 일부를 애랑 같이 보내고 싶을 뿐이야."

에너지 보존은 인류의 최우선 임무이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알잖아." 엄마가 생각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그곳이 육체를 지닌 인류로 가득하던 시절, 에너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소비하던 시절을. 사람들은 널따란 공간을 한 명 아니면 두 명이 독차지하고 살았고, 냉난방을 가동한 상태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기계를 소유했으며, 음식을 만들고 옷을 세탁하는 등 온갖 신기한 일들을 했다. 그러는 동안 내내 탄소를 비롯한 갖가지 독소를 상상도 못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대기 중에 분출했다. 인간 한 명이 소비하는 에너지양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은 의식 100만 개체를 부양할 만큼 막대했다.

나는 학교에서 엔지니어링이 암흑시대의 기술이라고 배웠다.

"우리 여행의 진짜 출발지는 바로 여기야." 엄마가 생각한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긴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 뭘 할지야. 르네, 두려워할 것 없어. 엄마가 너한테 시간과 관련된 중요한 걸 보여 줄게."

인간의 피조물은 그 어떤 것도 영원토록 남지 못해. 데이터 센터조차도 우주가 열역학적 사망을 맞기 전에 언젠가는 산산이 무너질 거야.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남는 법이야. 실체를 지닌 것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클록 수를 낮추는 일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남들보다 뒤처진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남들을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살 테고, 진짜 우정은 나이 차이 같은 건 거뜬히 뛰어넘으니까 괜찮을 거다.

난 사람들이 꿈을 실현시키도록 돕는 데에 소질이 있어. 하지만 당신의 꿈은 내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는 거였지.

베이징의 여름은 사나워. 덥고, 불쾌할 정도로 끈끈하고, 공기는 소나기가 지나간 길가의 물웅덩이처럼 텁텁하지. 무지갯빛 휘발유 막으로 덮인 물웅덩이 말이야. 너랑 나는 찜통 안에서 천천히 익어 가는 만두가 된 기분이었어.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그 방 안에서.

달은 정말 멋진 곳이었어. 공기는 선선하고, 하늘은 깨끗하고, 무슨 도서관처럼 조용했거든.

이 장원차오라는 남자는 방금 막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보였지만, 상대방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냉랭하고, 차분하고, 면밀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얼굴이 붉어진 아이를 보고 샐리는 아이가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이름은 비니예요."

장원차오의 영어 발음은 외국식 억양이 강했지만, 샐리는 그가 하는 말을 거뜬히 이해했다. 그 남자는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했다. 다급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샐리는 구해 주고 싶었다. 스스로의 믿음과 자유를 위하여 너무도 많은 것을 포기한 이 용감하고 조그마한 중국인 남자를.

이때껏 살아오는 동안 내내 샐리는 명확성을 신봉했다. 친구들이 다툴 때면 언제나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를 잘 알았다. 언제나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옳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샐리 본인만큼 옳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뭐가 진짜로 옳은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 때도 있어. 그럴 때면 옳다고 느끼는 쪽을 택해야 하는 거야."

"아니요, 규칙대로만 하면 언제든 뭐가 옳은지 알 수 있어요."

망명 신청자는 자기 사연에 더 끔찍한 세부 사항을 추가해서 우리가 좋아하겠다 싶은 이야기로 가공하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어. 왜냐면 그 사람들의 사연은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얼마나 질서 있고, 안전하고, 더 행복한지 확인시켜 주니까. 우리가 아직 특별하다고 확인시켜 주는 증거란 말이야.

어떤 이야기든 간에, 네가 진실이라고 믿을 때에만 진실인 법이야.

"그 아이가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날에, 너의 이야기는 비로소 진실이 될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정해져 있지요.

"저는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집이 한 채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답니다. 세상은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법은 그중 일부만 들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더군요."

릴리 아버지는 중국인 남자들이 만드는 요리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요리하는 소리 또한 요란해서, 기름이 끓으며 내는 지글거리고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네모난 식칼이 도마를 치는통 통 통 소리 역시 또 한 가지 음악이었다. 한편 그들의 요리는 냄새 또한 야단스러워서, 길 저편에서부터 흘러와 열린 문으로 스며드는 연기는 뭔지 모를 양념과 이름 모를 채소의 매콤한 냄새로 릴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연주했다.

중국 놈들은 너 같은 크리스천 여자애를 보면 신이 나서 토막을 쳐 가지고 저 커다란 프라이팬에 볶아 먹을 게 뻔해. 저놈들한테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알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각엔 달이 지구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입맞춤을 하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오는 거죠."

"햇빛으로 물든 바다의 냄새를 바람이 실어다 줄 때면, 나는 네 엄마 머리에서 풍기던 향기를 들이마신단다."

"밤에 바닷물 속에서 해파리의 빛이 깜박거릴 때면, 네 엄마의 반짝이던 눈이 보여. 파도가 우리 탑에 부딪혀 부서질 때면 네 엄마가 부엌에서 냄비를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떠나겠니? 네 엄마가 저 바다의 일부가 돼 버렸는데."

사랑이 아빠를 묶어 놓았다. 엄마에게, 저 끈질긴 밀물에게.

뤽과 나는 툭하면 눈이 마주치곤 했다

밀물과 썰물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캄캄하고 밀폐된 방 안에 욱여넣지 않은 삶을.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중력처럼 단단했다.

아빠가 아는 한 나에게 미래를 줄 방법은 억지로 떼어내는 것뿐이었다.

인류는 세상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바르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르게 죽는 길도.

텔레비전과 진짜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성적 자극이 없는 지금,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더 길게 누린다.

우리는 예전의 삶에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래된 연극을 상연하고, 오래된 책을 읽고, 유서 깊은 명절을 축하하고,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포기해야 했던 것도 많았다.

모든 아이들이 내가 자란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갖가지 기술에 능숙하다. 뜨개질, 목공, 원예, 사냥 같은 일에.

우리 정신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계에 거주하고, 우리는 제각각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누리고 있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 사람 정신의 질감을 경험하는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워.

우리진짜 엄마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세상에서도 살아가고자 애쓰는 진솔함이었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망이었고, 우리 육체가 겪는 고통과 수난이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이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인간성에 대한 믿음.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한 믿음."

"난 절대 포기 안 해."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난 인간이니까."

"저 왔어요."
당신은 지금의 자신이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자신과 과연 얼마나 다를지 궁금해한다.

어머니의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살 모양은 조각한 가면처럼 변하지 않는다. 뇌졸중이 초래한 마비는 영구적이다.

이불을 젖히고서, 간병인이 당신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기 시작한다. 당신은 눈을 돌리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보지 않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인 것을. 당신은 어머니의 앙상한 두 다리를, 뼈를 덮은 창백한 피부에 점점이 핀 저승꽃을 보고 흠칫 놀라고, 숨을 참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브래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낫 유어 애버리지 토이에서 근무한 지 1년이 채 안 될 무렵이었으니까. 전에 몇 번 대화한 적은 있었지만 다 일 이야기였다. 브래드는 매사에 진지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 아직 고등학생일 때 첫 번째 회사를 창업했을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어쩌면 수업 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돈을 받고 팔았을지도. 그런 브래드가 왜 나한테 수분 측정기에 관해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긴장했는지 떠보려고?

"로라는 영어 단어 약 2000개를 구사합니다. 의미와 문장 구조에 맞춰 사용하도록 접두사 및 접미사도 코딩되어 있지요. 로라가 하는 말은 ‘문맥 자유 문법’에 따라 제어됩니다."

옥세틴을 먹으면 똑바로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내 머릿속에는 벽이 있다. 생각 하나하나를 만족감으로 감싸 버리려고 하는, 뿌연 벽이.

연애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늘 그랬듯이 브래드는 야심만만하게 요리를 시작했지만 한 문단이 넘는 조리법은 따라 하질 못했고, 나는 그가 망치려 하는 새우 에투페를 구조하러 달려오곤 했다.). 익숙한 일상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걸로 이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컴퓨터광들이 좋아하게끔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부분적으로 배포하고, 개발자용 키트를 판매하는 거야."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가르치거나 노인들의 시중을 드는 기계.

진중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예상을 뒤엎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브래드에게 반한 까닭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브래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지 다 눈치챌 만큼 그를 속속들이 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먼저 아기부터 갖자. 나는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 순간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브래드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약에 취한 상태에서는 누구를 속이는 것조차도 너무나 힘들다.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휴식이라고는 점심시간 정도. 왼손을 뻗어서,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붓을 놀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찻잔을 뒤로 넘기고, 붓을 물감에 찍어 앞서 한 일을 또 한다. 이토록 단순한 알고리즘이라니. 너무나 인간적이다.

세상에 나 같은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나는 무언가 품에 안을 것이 필요했다. 말하기와 걷기를 학습할 줄 아는 것, 내게 ‘안녕’이라고 인사해 줄 만큼만, 내 귓가의 울음소리를 잠재울 만큼만 성장하는 것. 하지만 진짜 아이는 아닌 것. 살아 있는 다른 아이를 데리고 살 자신은 없었다. 그건 배신처럼 느껴졌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술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일

내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피부 뒤에 진짜는 아무것도 없다. 그 고통, 사랑을 진짜로 만드는 그 고통, 그 이해라는 고통은 어디로 갔을까?

뭔가 할 일을 주면 브래드는 마음을 놓는다.

튜링 테스트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인공지능이란 그저 허상일 뿐인 것을.

중국어 방 논증은 다른 식으로도 전개할 수 있다. 사무원 대신 ‘뉴런’을 넣고, 규칙이 적힌 책 대신 ‘폭포처럼 흐르는 활동 전위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을 넣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언가 ‘이해’한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사고(思考)는 허상일 뿐이다.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미리 정해진 반응일 뿐이라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법칙의 결과라면?"

알고리즘은 미리 정해진 코스를 따라 실행되었고, 우리의 사고는, 그 알고리즘을 차례로 따라갔다. 제 나름의 궤도를 따라 회전하는 행성처럼 기계적으로, 예측대로. 알고 보니 시계공이 곧 시계였던 것이다.

남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내 주위로 바닥없는 어둠을 파 놓은 고통에 관하여, 공포에 관하여.

아픔을 만드는 알고리즘은 없다.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고, 거기 나 있는 흉터에 흠칫 놀란다. 너무도 익숙하다. 전에도 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가로로 난 흉터, 벌레처럼 징그러운 분홍색 흉터들이, 나를 실패자라며 비난한다. 알고리즘에 생긴 버그들이.

어떤 일에나 정해진 방법이 있다.

나는 브래드를 보며 그가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러우리라 믿는다. 내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이 너무나 넓어서 나는 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 역시 나의 아픔을 못 느낀다.

하지만 내 알고리즘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나는 적당한 말을 스캔한다.
"사랑해."

나는 창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에,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주인공 엘레나가 아기를 갖기 직전 남편에게 건네는 말을 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비슷한 상황에서 하는 말과 호응하도록 썼다는 점을 여기에 밝혀 두고자 한다.

리즈가 영리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삶을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자질구레한 부분에 신경을 안 쓸 뿐이었다.

늙어 가다 보면 사람은 점점 파충류와 비슷해진다. 아침에 햇볕을 흠뻑 쬐지 않으면 돌아다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생존용품 중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양말이야."

나는 오히려 양말 두 켤레로 어떻게든 버몬트주에서 캘리포니아주까지 가겠다는, 고작 그걸로 가는 길에 만날지도 모르는 연쇄 살인마와 성범죄자, 사기꾼 등등을 물리치겠다는 리즈의 순진한 낙관주의가 더 걱정스러웠다.

일상생활에 서툰 것처럼 보이는 리즈의 결점들이 어떻게 장점으로 변하는지를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시 두보아처럼, 리즈는 남들의 친절에 기댔다. 사람들은 저절로 리즈에게 끌렸다. 그 애한테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는 부러웠다. 리즈의 무모함이, 자기 삶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자신감이.

내가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남 앞에 서기를 두려워한다는,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식구들이 행복해지도록 돌보며 세상이 나를 빼고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에 만족한다는 체념이었다.

리즈는 판에 박힌 여행기를 새롭게 쓰는 재주가 있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미시시피주 어디쯤에서 그 애의 가출을 용서했던 것 같다.

"근데 언니, 그거 알아? 제일 중요한 생존용품은 양말이 아니었어. 그건 우리 몸이야."

그래도 나는 홍옥이 제일 좋다.

홍옥은, 온몸으로 맛을 음미한다. 단단한 과육은 깨물면 턱이 얼얼하고, 아삭거리는 소리는 두개골에 부딪혀 메아리치고, 시디신 맛은 혓몸을 타고 넘어 발끝까지 퍼져 나가니까. 홍옥을 먹을 때면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 세포 하나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아아, 이거야, 더 줘, 부탁이야.’

내 생각에 몸은 저 나름의 지능이 있다. 정신은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아니까.

리스프와 프롤로그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실력이 쑥쑥 느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아아, 내가 이렇게 내성적이지만 않았어도!). 그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에는 일종의 유기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꼭 파이를 굽는 것처럼.

종래의 엑스퍼트 시스템(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프로그램화하여 전문가와 유사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인공 지능 정보 처리 시스템. ? 옮긴이)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효율적으로 대처하기에는 너무나 허술했고, 규범과 사례에 지나치게 얽매였다. 로고리즘스는 그러한 난관을, 마치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처럼,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우리 정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일 뿐이야. 내가 하는 일은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거고. 그러니까 내 삶은 곧 수많은 정신과 만나는 과정인 거야."

나는 지금도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한다. 어떻게든 헤쳐 나간다.

거울이 켜져 있는 동안 리즈는 열아홉 살처럼 보였다. 거울이 꺼지자 서른다섯 살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벌거벗은 리즈가 더 예뻐 보였다. 거울을 끈 상태의 리즈가.

"그 새끼가 차를 타고 달아난 건 내가 울 만큼 운 다음이었어. 난 풀밭에 앉아서 생각했어. 내가 세상 끝까지 여행을 가 봤자 이 기억은 언제나 나를 따라오겠지. 내 셔츠를 찢는 그 새끼의 손이, 내 입을 누르는 그 새끼의 입이 떠오르겠지. 내 정신은 언제까지나 내 몸에 갇혀서 이 기억을 살고 또 살 거야. 나는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거야."

"있잖아, 몸은 실제로 제일 중요한 생존용품이긴 한데, 약하고 불완전해. 몸은 결국엔 우릴 버리게 마련이야."

나는 노년이 되면 여행을 하며 살 거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은 젊은이를 위한 것이니까. 나이를 웬만큼 먹어서까지 여행에 나서지 못한 사람은 나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태어나 자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붙박이는 것이다.

나는 내 방 바닥 위로 움직이는 그늘이 좋다. 계단을 올라갈 때 들리는 삐걱삐걱 소리도 마음에 든다. 한 단 한 단이 내는 소리가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다. 사과나무들이 보이는 풍경도 좋다. 집 뒤편 언덕에, 묘지의 비석처럼 줄줄이 서 있는 그 나무들이. 아니면 그냥 그런 것들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편안해서 바꾸기가 싫은 건지도. 그것들을 냅다 팽개칠 이유를 찾아보기에는 내 뇌세포가 너무 많이 죽어 버렸다.

그 애는 짐 싸기 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만큼 돈을 많이 벌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 애는 옷장 하나가 가득 찰 만큼 많은 옷을 새로 샀고, 떠날 때면 그렇게 산 옷들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빈손으로 출발했다.

리즈가 말했고, 우리는 함께 깔깔 웃었다. 그 애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커서 접시가 다 떨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