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거리 가득 환하게 이글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성큼성큼 걷는 키 큰 중국 남자와 대나무 멜대 양 끝에 나른하게 대롱거리는 바구니 두 개가 만든 그림자는 햇볕에 물든 연못 수면을 우아하게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와 비슷해 보였다.

색색의 종이를 잘라 닭과 염소와 양 같은 종이 동물을 만드는 법도 배웠는데, 이는 여러 신과 조상이 산 자들을 찾아와 함께 잔치를 즐기도록 제물 삼아 불태우는 것이라고 했다.

만두 가장자리에는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재물을 상징하는 구불구불한 조개껍질 무늬를 새겼는데, 릴리는 포크로 이 무늬를 새기는 일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돈이랑 사탕이 든 빨간 봉투를 아무나 다 받을 수 있대." 아이들은 서로서로 소곤거렸다. "그 사람들 집 앞에 가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만 하면 된대."

캄캄한 어둠에 괴로워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으려고, 인간 화물들은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소?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철로를 놓으러 가는 길인데. 미국은 늑대와 호랑이가 사는 땅이 아니요.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 우리와 똑같이 일하고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 곁에는 가족이 없소. 그러니 관우님께서 유비님과 장비님과 함께 복숭아밭에서 보여 주신 모범을 따릅시다. 우리 서로에게 형제가 되어 줍시다."

"먹어, 먹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말했다. "양껏 먹어."
중국인들은 뭐가 더 맛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기진 배를 채워 주는 음식인지, 오랜만에 듣는 고향 말인지.

취해서 곯아떨어지면 아무 걱정도 못 하니까 말이지."

약속을 어기다니, 중국인답지 않다고요

한나라 공주였던 해우의 이름은 ‘슬픔을 삭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저는 두 번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영광을 안겨 드릴 것입니다.’

하늘은 운명을 제 손으로 개척하는 자에게만 웃음을 보인다는 것이 관우님의 가르침 아니오?

"바깥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는 나도 모른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니까. 하지만 눈을 감을 때가 되면 우리는 알 것이다. 우리 삶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은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음을, 우리가 거둔 승리도 우리가 저지른 실수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었음을."

"이곳의 땅은 고향의 냄새가 나지 않지만, 하늘만은 내가 본 그 어디의 하늘보다 더 넓고도 높소. 나는 날마다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의 이름을 익히고, 내가 할 수 있는 줄도 몰랐던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소.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올라가 스스로 새 이름을 거머쥐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요?"

미약한 불빛 속에 서 있는 라오관은 남자들의 눈에 나무처럼 커다랗게 보였고, 길고 가느다란 눈은 화톳불처럼 벌건 얼굴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중국인 남자들의 가슴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결의와 갈망으로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건 실수였소. 우리는 술에 취해 싸워야 하오."

고국 땅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맛보는 소박하고 안온한 즐거움을 버리고
이국 하늘 아래 성공하여 누릴 거친 기쁨을 택했다는 말.
대대로 살아온 집의 따뜻한 난롯가와 조상들이 묻힌 들녘을 떠나 왔다는,
다시 말해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버리고 행운을 좇아 떠나 왔다는 말……
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이 최상의 칭찬이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참 놀랄 노 자로군. 당신이 만두를 세 개나 먹는 거 내가 다 봤어. 중국인들이 만든 음식에는 손도 안 댈 줄 알았는데."

"어쩌다 그런 허튼 생각을 품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이웃이 문을 열고 파티에 와서 함께 먹자고 초대하는데 당신 말처럼 행동하는 건 결코 크리스천이 할 짓이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여기 이교도는 당신 혼자인 줄 알겠어요."

"근데 당신, 내 첫사랑이었던 남자애 이름이 잭인 거 알아요?"
그 말에 주위의 여성들은 박장대소했고, 잭도 따라서 웃었다.

에밋은 크게 성공할 인물은 절대 아니라는 평을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그러면서도 큰 사고를 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에밋을 좋아했다. 누가 ‘헤이워스 나리’라고 불러 주면 기꺼이 술을 한잔 샀기 때문이었다.

에밋은 군 생활에 의외로 잘 적응했다. 말 위에서 생활하며 식사를 양껏 못하다 보니 몸은 점점 날씬해졌지만, 활발한 성격은 결코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아,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에밋 연대의 병사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헤이워스 대령님하고 결혼할 텐데. 손은 점잖고 말은 명랑한 우리 대령님. 그분이 우릴 뉴올리언스까지 데려가실 거야."

그곳에는 에밋 대령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용기와 충성과 대의에 헌신하는 자세를 보여 준 대령 같은 사람이."
에밋은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판사는 전쟁 영웅이었다. 잭 시버는 그런 자들을 잘 알았다. 아버지 재산으로 편히 사는 데에 익숙한 자들, 그런 주제에 보급선 관리 같은 편한 보직을 사서 조그마한 공까지 박박 긁어모아 모든 것이 북부 연합과 하느님의 영광 덕분이라고 떠들다가, 약삭빠르게 이런 한직에 취임하는 자들이었다.

잭 시버 같은 병사들이 진흙탕에서 총알을 피하고 동상에 발가락이 잘리는 고생을 하는 동안에. 잭은 이를 악 물었다. 속에 품은 경멸을 드러내기에는 때도 장소도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잭은 동부에 살 적에 장인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법률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나저나 그 닭 피 어쩌고 하는 얘기는 뭐요?" 에밋이 물었다.

잭 시버는 무척이나 설득에 능한 사람이었다. 만약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일대의 변호사들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수준이었다.

"법이란 우스꽝스러운 거다.

릴리는 속으로 그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로건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야 하므로 아무것도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전 오비가 하는 거짓말을 믿을 바엔 차라리 중국인이 될 거예요."

"미안하다, 릴리. 나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도 가끔은 냉소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다." 로건은 빙그레 웃으며 릴리를 마주 보았다.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좋지. 하지만 앞으로는 중국인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턴 내가 어떻게 미국인이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주마."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전에 다 설명해 준 이야기였다. 엄마가 시간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그거라고 했다. 엄마한테 남은 시간인 2년을 길게 늘여서, 내가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엄마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엄마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많았다면 엄마한테 말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엄마가 준 선물들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직 거짓말이 서툴렀다

아빠가 방문을 다시 열었다. 아직 스물다섯 살인 엄마, 지금도 가족사진 속의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엄마가 아빠 곁에 나란히 서 있으니, 아빠가 얼마나 늙었는지 더럭 실감이 났다.

아빠는 내가 속옷에 묻은 피를 처음 보고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겁에 질렸을 때 나를 달래 준 사람이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가게 점원에게 나한테 맞는 브래지어를 좀 골라 달라고 더듬더듬 말한 사람도 아빠였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대들 때 꿋꿋이 서서 나를 안아 준 사람도.

집에 오려고 몇 광년을 건너뛴 사람이었으니, 어차피 합판으로 만든 문짝 하나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보려고 억지로 들어오는 엄마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내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그냥 서로 멀어진 것뿐이에요. 말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에게 오랫동안 했던 거짓말이었으니까. 나 자신도 포함해서.

"떠난 보람이 있었나요?"
"난 다른 엄마들보다는 너를 지켜볼 시간이 적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훨씬 오래 볼 수 있었어."

프로그래머이자 변호사, 번역가, 소설가인 리우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한껏 담아 써 내려간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한국의 독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최고로 꼽았고, 같은 이야기에서도 다른 지점에 감동했다.

이처럼 다양한 감상에 비슷하게 나타나는 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역사와 언어, 기술이라는 요소를 SF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짧지만 여운이 긴 이야기로 직조하는 탁월한 이야기꾼.’

이전 단편집과 달리 느슨하게나마 수록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가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초월’이다. 수록작 가운데 굳이 나누자면 SF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육체라는 존재 양식만이 아니라 시공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초월을 이룬 후에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라고, 아마도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야기 짓기와 읽기는 오로지 또 마땅히 지은이와 읽는 이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가장 인간다운 활동으로서, 거기에 옮긴이가 끼어 앉을 자리는 없다.

독자들은 제가 책에 쓴 단어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겁니다. 왜냐면 독자 한 명 한 명이 자기만의 이야기보따리와 자기만의 해석 틀, 자기만의 상처, 자기만의 정서적 공명점을 지닌 채로 책을 펼친 다음, 제가 쓴 글을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쌓아올릴 테니까요. 이로써 완성된 결과물은 사실 절반만 제 것이고, 절반은 독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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