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안을 걷다 시작시인선 62
김병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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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달안을 걷다   김병호 /시작시인선 0064 /천년의 시작 펴냄
 
내가 한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혓바늘 돋은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달안을 걷다 中>
 
1971년생 시인 김병호의 시집 달안을 걷다는 짜임새 있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하다.
음산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시작된 그의 시집의 첫번째 모음 / 강가의 묘석에는 죽은 아버지와 음산한 숲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발현되는 숲의 이미지들이 생명의 탄생이나, 싱그러움들을 대변한다면, 그의 숲은 어둡고 무섭고 음침하다. 숲이 너무 울창하여 햇빛은 하나도 들지 않고 온통 습지로 뒤덮여있으며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숲이다. 그런 숲에서 아버지는 마술사가 되고 죽은 누이의 장례가 펼쳐진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시인의 두번째 모음 / 난생처음 봄에서, 그는 그 숲들을 모두 극복한다.
 
오래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
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나는, 차마 묘석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강가의 묘석> 中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환한 길 하나> 中
 
그리고 그는 다시 바람은 무늬로 기억을 새긴다 라는 세번째 장에서 삶의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남자는
돌아갈 먼 길을 생각하는데,
 
한숨이 움파처럼 돋아난
감또개 그늘 안에서
여자는
종일 항아리를 씻었다
 
<오래된 집> 전문
 
+ 감또개 :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사람 하나 가슴에 묻는 일이
찬밥 한 덩이 물에 말아 훌훌 넘기다
눈 부딪친 밥상 귀퉁이의 떨어진 귀 자국 같아
사소한 병을 키워 잠자리 뜨겁게 만들고
어두운 말을 버려 꽃 진 나무를 시늉하지만
...
<풍경 風磬> 中
 
해 빠질 무렵의 내소사
미열처럼 스미는 어둠 안에서
무릎 접고 어깨 움츠린
배롱나무의 밑동을 본 적이 있는가
밤새 안부를 묻던 설익은 바람과 독을 키워
비탈로 내달리던 목어를
가두어본 적이 있는가 ...
 
<마음이 지다> 中
 
음산하던 세월들을 혼자 지켜내다가, 그 젊음과 청춘이 괴롭다가 어느 한 순간 어미가 되고 아비가 되는 우리의 인생처럼, 나의 인생처럼, 나는 그렇게 김병호의 시집을 읽었다.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생소한 이름의 시인 한 명이 전해주는 자식 생긴 아비의 기쁨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와 코끝이 찡하도록 감동했다.
그리고 사람 하나 가슴에 묻는 일이, 라는 구절을 몇 번씩 혀끝으로 말아 올렸다가 꿀꺽 삼키곤 했다.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읽는 시집마다 모두 절절하게 들린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좋은 시들이 많이 나오게 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도 그네들과 같이 나이먹어가며 뭔가를 조금은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2007. 4. 18.
 
세 번째 말, 요고
 

엄마 아빠란 말 다음에

아이가 배운 말은 요고

할머니도 강아지도 개나리도 요구르트도

모두 요고다

 

아이의 닭똥구멍 같은 입술 위에서

둥글고 뜨겁게 열리는

할머니와 강아지와 개나리와 요구르트가

제 이름들을 놓는 순간

요고의 할머니와 요고의 강아지와

요고의 개나리와 요고의 요구르트에는

아이만의 정한 이름과 마음이 따로 있어

아이의 요고는 서슴없다

 

태초의 말,

그것은 한 소리였다. 
 

2007.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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