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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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기준으로 책을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분류하곤 한다. 지식을 전하는가/지혜를 전하는가. 지혜를 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가/답을 던지는가.



2.

            지혜와 지식의 경계는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모호하며, 어떤 책은 질문과 답이 모두 있거나, 질문도 답도 없거나, 질문 같은 답, 답 같은 질문이 있거나 하므로, 저런 분류가 나이브하고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럼에도 저런 분류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세상에는 책이 너무도 많고, 읽을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고, 대놓고 답을 던지는 책은 너무도 별로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거를 책을 고르는 데는 너무도 충분한 '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은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척, 풀이방법만을 알려준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척,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 법'만을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읽었어요. 어때요. 몰랐죠? 멋지죠? 심지어 그것은 박웅현의 '풀이'일 뿐, '정답'도, 심지어 '해답'도 되지 못한다. 


            박웅현이 이철수 화백의 판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두부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다.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하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님의 몫이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고 안주인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다. 저 문구는,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특정 성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구도를 아무런 고찰없이 진술한다. 더 중립적인 단어(이를테면 고객님)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주 타겟인 '주부님'들에게 가족의 건강을 고려하는 헌신, 유전자 변형의 유해성을 따져보는 지성 같은 훌륭한 가치들을 부여하여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별 두개를 매기기 위해, 젠더의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없다. 실제로 저건 지엽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떡하니 책 뒷편에 써 놓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라는 선전 문구를 보며, 문학적/예술적 감수성 말고도 인권/젠더/인종 감수성도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가 박웅현에게 도끼로 작용했겠지만, 그 도끼가 그의 모든 얼음을 깰 수 있는 만능 도끼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물론 완전히 무용한 책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뜨렸다고(혹은 깨뜨릴 도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쭙고 싶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발견한 새로움들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혹시 김훈의 책을 읽으며 박웅현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셨나요. 더 나은 사람이 되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이 책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이 제공하는 얄팍한 지적 포만감은 어떤 이들을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만큼, 또 다른 어떤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배 두드리며 늘어지게 한 잠 자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더 나아갈 이들은 배가 부르든 고프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 위에 텐트를 치고 당당히 머문다. 나, 이런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이야. 비슷한 책들을 서가에 계속 꽂아 넣으며 지적/감성적 죄책감을 자가치유한다.  



5.

            5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도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읽어보며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을 다시 읽을 때 상실하고,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흠결을 다시 읽을 때 발견하며, 처음 읽고 꽂아 놓았던 서가에 두 번째 읽고는 다시 꽂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이 책을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저자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 

            주부라는 단어가 못마땅한 것이 내 과민반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는 어떤 멘토께 저 문장이 문제가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는데,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단점으로 젠더 편향 문제를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그다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예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찌끄려 본다. 


            만약 저 광고 멘트를 쓴 사람이 마트에서 두부 시식코너를 맡았다고 해 보자. 여성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을 때, "주부님(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겠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그/그녀가 말했다고 하자. 카트를 끌고 온 여성이 맛있게 먹고 돌아갔는데, 저쪽에서 카트를 끈 아저씨 한 사람이 두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그때 시식코너의 그/그녀는 그 아저씨에게도 "주부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할까? 


           " ......경제활동의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혼한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자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갖는 돌봄노동의 책임은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도한다. 여성은 가족 내 주부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노동시장에서는 이차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 때문이다." _<젠더와 사회> 308쪽, 허민숙과 신경아의 글


            여류 작가라는 말이 멸칭이듯, 남자 주부라는 말도 멸칭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여류 작가에서는 '여류'가, 남자 주부에서는 '주부'가 멸칭적 요소라는 것을 보면, 두 용어는 완전히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직업의 위계와 젠더의 위계가 버무려져 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앞의 것은 멸칭적 요소를 제거하면 바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용어는 멸칭적 요소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주부를 대체할 새로운 용어, 용어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지 않는 중립적 용어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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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번과 5번이 인상깊습니다. 저 역시 박웅현의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얄팍한 지식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나름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광고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건데요...자본의 충실한 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잘난척은 참 오지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문학계에서 전문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인문 운운하며 책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오지게 공감합니다요!

syo 2017-06-28 21:35   좋아요 1 | URL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고=창의성 이라는 등식을 시도때도 없이 들이밀더라구요. 그 등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목적은 자본을 보필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창의성을 휘두르는 거면서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아우라만 뒤집어쓰려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책만 놓고 보자면 결국은 박웅현이나 이지성이나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독자들에게 책을 읽히리라-일지, 독자들에게 책을 팔리라-일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읽고 좋은 이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바.. 이렇게 거침없이, 쉼표없이 스트레이트 잽을 시원하게 날리시니 읽는 맛이 납니다..

syo 2017-06-29 06:53   좋아요 0 | URL
더욱 용맹정진하여, 훅에 어퍼컷도 익히겠습니다.
 
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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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더 높은 산에 올라 다른 낮은 산을 바라보거나, 밤의 비내리는 숲이나 바람에 쓸리는 갈대밭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에 대해 쓰기 위해 기억을 되짚다가 만약 "공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공허했노라고 기록해도 될까? 내가 그 단어를 부릴 수 있을까? 그 단어가 저를 모르는 내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까?

 

            그러니까, 무언가 마주쳤을 때 어떤 거대하고 추상적인 말이 떠올랐다면, 이를테면 공허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내게로 왔다고 하면, 아, 이것이 바로 공허한 정경이구나, 하고 단언하는 그 오만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내가 그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 그렇다면 내가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2.

 

            내게 내 글은 적확하지 않다. 무책임하다. 그 무책임이 의식되지 않는, 그러니까 내 글을 믿는 날들을 건강한 날이라고 불러보면, 나는 꽤 자주 앓는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 쓰기는 종종 무섭다. 그 누군가가 나 혼자라도 여전히 그렇다. 자신에게 비난받지 않는 글로 하루를 남기고 싶다. 몇 년을 품고 있는 작지만 큰 바람이다.

 

 

 

3.

 

            그렇다면, 읽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글을 만났을 때 어떤 모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4.

 

            누군가는 그들이 미래라 하고, 좀 더 매서운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현재라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는 과거가 된다. 원래 그렇다. 과거란, 특별히 지은 죄 없이 그저 우물쭈물하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과거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미래를 겨냥한 과거의 모든 말은 실패한다. 과거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고,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중은 내게 오지 않은 것이고, 그들의 방식은 내게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들에 대해 쓰기를 실패한다. 

 

            끝내 그들은 내가 닿지 못할 미래로, 내게 오지 않는 현재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도 슬퍼하지 않고, 무엇도 알게 된 척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기쁨이 아닌 그들이더라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멀찍이 내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들과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추는 기쁨의 춤을 묵묵히 응시할 것이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떠나지 않았고, 아마 나는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5.

 

          이 글을 리뷰와 페이퍼 중 뭘로 쓸지 잠깐 고민해보았지만, 그냥 리뷰로 쓰기로 한다. 어차피 무언가 더 알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이보다 더 나은 리뷰를 쓸 깜냥이 나중에라도 생길 것 같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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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티슈

 

 낡은 바다가 지어놓은 여관

 그 곳에 오래 머문 적 있다

 주머니 속에서 굴리던 조개껍데기

 무늬가 다 사라질 때까지,

 옷깃을 스친 인연들이

 인연 전으로 모두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별빛이 끝난 새벽마다

 창틈에 빠져나온 파도 한 장을 뽑아

 서로의 때 낀 입술을 닦아주었다

 파도는 아무리 뽑아 써도

 쉽게 채워지곤 했으므로

 너와 나 사이에 드나들던

 거짓말도 참말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담장을 걷던 고양이가 같이 뽑혀와

 붉은 혀로 쓰윽,

 우리의 눈길을 핥고 가기도 했다

 망막에 낀 얼룩이 사라지자

 너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먹한 얼굴로 각자 짐을 챙겨

 그 낡은 여관을 빠져나왔고

 남겨놓고 온 우리는

 몇 겹의 파도가 천천히 지웠다

 

_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中 <물티슈>

 

2.

            한때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의 이름은 흔하고 남자도 여자도 쓰는 이름이라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이름을 만나게 되면 아팠지. 이름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우리가 통과한 모든 순간들을 한번에 되짚었고. 좋았던 것들과 좋을 수 있었던 것들과 좋았으나 좋았으면 안 됐을 그 모든 것들을. 좋았던 것들은 좋았던 대로, 좋을 수 있었던 것들은 좋을 수 있었던 그대로 다 아팠어. 종종 울었고, 참고 참다 대답하지 않을 이름을 툭 꺼내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아픔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었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어. 아픔도 나도 그냥 그 자리에 있었지. 이러다가 죽거나 최소 평생 앓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견디는 데 하루를 다 쓰는 날들만 길게 이어졌는데,

 

            그 이름을 만나면 아픔이 아니라 아련함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 아무래도 알 수 없군. 사랑에 얽힌 감정들은 왜 항상 뚜렷한 윤곽선이 없을까. 물론 아직도 그 이름은 쉽게 나를 찾아와. 여자 배우 이름, 남자 가수 이름, 남자 배우 이름, 여자 아이돌 이름, 일본어 초급 교재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 그러나 악착같이 이름 뒤를 따라붙던 감정의 요동이, 부질없는 후회가, 해갈되지 않을 미련이 언제부턴가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남은 것은 어쩐지 어색하게 탈색된 추억들 뿐. 사건들을 그저 사실들로 건조하고, 주고 받던 말들을 한낱 작용과 반작용으로 환원하는 시간. 엄혹한 시간.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시간.

 

 

3.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또다시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이 그때 그 사랑일까.

 

            가질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건 없다. 가질 수 없는 사랑만이 있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운좋게 가졌더라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은 여전히 가질 수 없다. 그 사랑은 그저 그리움의 자리에 있다. 느낄 수는 있어도 만질 수 없는 자리다. 내가 원하는 것이 행복했던 그 때의 그 사랑이라면, 그것은 다시 오지 않겠지. 어제들의 무덤 속에서 화려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풍화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헛된 바람을 버리자. 어제보다 조금 더 마른 오늘치의 눈물을 뿌리고, 오늘보다 조금 더 마른 내일의 눈물을 예비하며 결국은 모든 슬픔이 서글픔으로 돌아서는 날을 나는 기다리자. 오늘의 사랑이 결국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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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착하다는 말이 싫어 종종 위악을 떤다. 착하다는 것은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 딱 그만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A에게 착한 사람이 B에게는 착한 사람일 수도,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게다가 착하다는 칭찬은 참 무서운 말이고, 반복적으로 들으면 A부터 Z까지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고 싶게(혹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칭찬에 취해 추는 춤이 끝나고 나면, 결국 관습과 사회가 공인하는 가치의 바깥쪽으로는 나갈 수 없는 갇힌 인간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악은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투쟁의 방식이다. 나는 착하기 싫어요. 나는 착하지 않을래요. 

            그렇지만, 열심히 발버둥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착함의 덫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게 다 지독한 욕심일까?

 

 

2.

            많이 읽고 배우고 깨닫는 과정은, 한번에 발견하면 왕창 놀라게 될 내 마음 밑바닥의 벗은 모습을, 한 구절 한 고비씩 천천히 나누어 알아가는 일이다. 충격적인 진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는 일이다. 충격을 정기구독하고 감정을 분할납부하는 일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길을 서서히 걸어가는 일이다. 서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다.

 

 

3.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이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_임솔아, <모래>

            시작이 그랬듯이, 우리는 떨어지며 끝날 것이므로 우리의 모든 대화는 떨어지라고 하는 응원이다. 알 방법이 없든, 알 가치가 없든, 결국 알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모든 병은 궁금증이다. 아픔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결국 모든 우리 사랑의 방향은 아픔을 향한다. 넘치는 것은 아픔 뿐이므로 결국 우리는 어떤 무엇인가가 어떤 무엇보다 부족하다. 어떤 말도 결국 혼자가 되므로, 어떤 말로도 결국 혼자가 된다. 모래는 무수해도 결국 혼자다.

 

 

4.

            이래저래 오늘은 꼭 울고 싶고, 울고 싶은 날이면 결국 울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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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착한 사람‘은 순종적이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요. ‘착한‘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갇히게 됩니다.

yamoo 2017-06-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에 울컥하곤 합니다. 경험상 착하다는 말은 ‘병신같은 짓을 잘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지라...
제일 많이 듣던 말이....‘착하게 생긴 오빠‘....@_@ 그냥 맥이 쭉~~~ 빠져버리죠. 아마도 ‘착하다‘는 거에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하한 때가 저 말을 듣기 시작한 때인듯합니다. --;;

syo 2017-06-17 17:14   좋아요 0 | URL
착하게 생겼다는 거 어쩐지 칭찬 아닌것 같아요.... 저만 그런가요.

또 봄. 2017-06-1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하다는 말이 칭찬이 되는 시대가 어여 왔으면 좋겠어요.

syo 2017-06-17 17:12   좋아요 0 | URL
전 차라리 그런 말을 안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상황상황마다 걸맞는 칭찬이 다 있을것 같아요.
 

 

            어제의 꼬리에 오늘의 머리를 이어 붙이며,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만나지 못한 날이 길고 깁니다. 혹시 아직 밤마다 시 한 편 읽고 계신다면, 우리 사이에 재처럼 허공처럼 쌓인 그 시들로 꽃 한 송이 피었겠습니다. 집 한 채 지었겠습니다.  

 

            오늘은 내내 젖은 꿈을 되짚듯 어린 날의 일기를 뒤적였습니다. 듣지도 못하실 당신의 이름 어쩌면 이리도 많이 불렀을까요. 어떤 날은 일곱 번, 다른 날은 열한 번, 또 다른 어떤 날은 이름 하나로 하루를 온통 채우며...... 저의 이름이 모자란 것은 제가 모자랐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이름이 넘치는 것은 당신이 넘쳤기 때문일까요. 여전히 일기에 채울 것 없는 이름을 안고도,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기억하십니까, 폴 오스터의 『공중곡예사』.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옮기던 어느 공원에서 당신이 제게 주셨던 그 책을 찾기 위해 먼지 앉은 서가를 한참 헤집었습니다. 찢어버린 맨 앞장에 적혀 있었을 당신의 글씨가 이제 더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의 어느 한 구절을 읽어 주던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는 아직도 가끔 떠오릅니다. 왜 이 책을 제게 주셨는지 이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 책을 왜 제게 주셨는지는 아직도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당신은 아셨을까요. 제가 무엇을 잊고 무엇은 잊지 못할 것인지를. 그 때 저는 알았을까요. 어떤 것은 잊지 않으려 해도 잊히고, 어떤 것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임을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을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알았을까요. 우리는 함께 많은 책을 읽었고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서 많은 책을 읽고 있겠지만, 마지막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를까요. 아니면 끝내 모든 것을 알게 될까요.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그 때 우리가 그러했듯 누군가를 만나 우리가 되었고, 그 때 우리가 그러려 했듯 화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려 하고, 그 때 우리가 그러했듯 사랑을 옮겨적으며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잘 지내시는지요. 제가 잘 지내는 것이 한때는 당신께 아픔이었을 것임을 짐작하지만, 우리 사이에 강처럼 구름처럼 쌓인 시들로 만든 달력이 한참을 넘어갔음에 기대어 오늘은 감히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아직도 많이 읽으십니까. 여전히 많이 걸으십니까. 가끔씩 혼자 노래를 부르십니까. 그때 불렀던 노래를 요즘도 부르십니까. 기타는, 영어는, 귀여운 그림들과 손수 만드는 초콜릿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잘 지내시는지요. 내일의 당신을 궁금해할 수 없으며 궁금해하지 않을 오늘의 제가 당신의 오늘을 궁금해하는 것이 만약 당신께 무해하다면, 여쭙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 한 대가가 작지 않군. 대신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공존은 상실을 치유하고, 할 일을 늘려주고, 새로운 희망과 재생의 힘을 선물해주지. 그러나 상실의 극복은 바쁜 일이나 웃음으로는 절대 성취되지 않아. 앞으로도 내 인생은 당신에 대한 회한과 배덕의 자책감으로 지배되겠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다 살아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_니시카와 미와, 『아주 긴 변명』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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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1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 촉촉해 집니다. ^^

syo 2017-06-14 22:40   좋아요 2 | URL
책 읽고 퐁퐁 울었더니 그만 감정이 말콩말콩해진지라.....

내일 날 밝고 깨끗한 정신으로 다시 보면 반드시 이불킥입니다

다락방 2017-06-15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 이런 감상이 나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syo 2017-06-15 06:50   좋아요 0 | URL
으.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고 이불 팡팡 찼어요.

책 때문인지, 아니면 뒤끝이 말끔하지 못한 연애를 한 제 경험 때문인지, 감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블랙겟타 2017-06-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달 전 극장에서 영화로 봤었는데 보고 나서도 내용이 생각이 많이 났었거든요. 이게 사실 소설이 원작이었군요? 다음기회엔 소설로 읽어봐야겠네요. syo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감상에 젖었네요. ㅜ

syo 2017-06-15 10:28   좋아요 0 | URL
그 영화감독이 이 소설도 쓴 걸로 알고 있어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전 블랙겟타님 댓글을 보고 나니 어쩐지 영화도 보고싶어졌어요 ㅎㅎㅎ

쇼코 2017-08-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는 고사하고 장르조차 모르는 책의 리뷰를 읽고 감정이 동요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때는 활자를 잘 다루는 이들을 불신하기도 했었는데,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고, 좋은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던 유시민 님의 글을 읽고 생각을 고쳐 먹었어요. 근데 고쳐먹길 잘 한 것 같습니다.^^

syo 2017-08-05 22:00   좋아요 0 | URL
유시민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은 제 글이 아니라 쇼코님의 댓글로 증명이 되는것 같은데요?

이렇게 자꾸 원글이 부끄러울만큼 고급진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고 곤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