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난讀難
1
드디어 선풍기를 꺼내놓았다. 커피는 무조건 아이스. 식후 산책은 함께해요, 반바지.
2
5개월에 190권이라. 연 450권 페이스긴 한데, 글쎄. syo는 내가 잘 아는데, 걔는 하반기에 더 미친 듯이 읽는다. 모르긴 몰라도 8월에는 한 70권쯤 읽을 거고, 8월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탄력이 그대로 남는다면 9월도 어지간하겠지. 예상컨대 올해는 500~600권 사이에서 맺을 듯. 그렇다면 17년 이후 최대량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는 이렇게 읽을 일은 없겠거니 했었지만, 작년에 1일 1권 달성에 실패한 반동으로 올해 이러는 모양이다. 그리 잘하는 짓 같지는 않지만 딱히 못할 짓도 아니어서 아무려면 어떤가 싶고 그렇다. 뭐 이런 게 syo고 또 이런 게 syo의 인생이지.
3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읽고 또 읽은 것들을 오래 기억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늘 혀를 내두른다. 읽은 양으로는 나도 어디서 꿀리질 않는데 나는 왜 저런 게 안 되는가. 그것은 오래도록 숙의의 과제였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문득, 아, 내가 이래서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소설을 잘 읽는 친구들은 등장인물에 이입한다. 그 친구들은 아, 저 기쁨 나도 알지, 아,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너무 슬펐겠구나, 아, 떠나! 저 호로새끼를 버리라고 제발! 이렇게 읽는다. 그런데 syo는 작가에 이입한다! 아,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대단하다, 아, 저런 오도 가도 못 할 상황을 만들어내다니 대단하다, 아, 저런 불세출의 호로새끼를 창조하다니 대단하게 대단하다! 이렇게 읽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읽는 친구들이 등장인물들을 따라 다종다양한 감정의 널을 뛰면서 읽기의 직물을 짜나가는 동안, syo는 오로지 감탄의 감정 하나만 가지고 독서를 해나갔던 것. 감탄이란 건 뚜껑 따자마자 원샷으로 들이켠 500ml 콜라처럼, 체감하는 당시에는 온몸이 저릴 정도로 톡 쏘고 목은 따갑고 눈물이 퐁퐁 샘솟을 정도지만, 진정되는 데 긴 시간이 필요 없고, 결국 빈 플라스틱병만 남는 그런 유형의 감정이다. 그래서 syo의 소설 읽기가 시간의 이빨 앞에 그토록 무력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될 작정이 1도 없는 인간이 작가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에는 어떤 이점이 있는가. 이제는 이게 질문이구나…….
4
나는 소플아(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만 만나면 이상하게 까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 읽은 ---
190.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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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작품에 흔하고 무딘 찬사를 한 줄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의 줄기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그 줄기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무척이나 적합한 양의 잎과 꽃이 달려 있다. 세밀해야 할 만큼만 세밀하고 아름다워야 할 만큼만 아름다운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이것 보소, 또 작가에 이입하고 앉았다. 울만 안 돼, 울만 안 돼…….
그나저나 동명의 야한 게임이 있었다. 원도 있고 투도 있고 리메이크조차 있었다. <동급생>은 그냥 야겜의 대명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동급생'은 실수로라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단어였다. 자칫하면 뭐라고? 동급생이라고? 이새끼 그거 해봤나보네? 이러면서 비릿하게 웃는 하이에나들에 둘러싸인 부시맨 소년이 되고 마는 것. 하지만 과연 그게 안 해본 놈들 입가에서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나. 어떻게 그 <동급생>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이 『동급생』은 잘 지내다 못해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지금 이 문단은 세상에서 제일 미친 놈이 쓴 제일 미친 리뷰의 한 대목 같다.
어느 날 밤, 부모는 외출을 하고 가정부는 심부름을 갔을 때, 그 목조 주택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소방차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나는 불이 난 것을 보지도, 가정부와 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단지 다음 날 시커멓게 그을린 벽과 타버린 인형들, 뒤틀린 나무에 뱀처럼 매달려 있는 숯이 된 그네 줄을 보았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일은 전에 그 어떤 일로도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수천 명을 빨아들인 지진, 마을들을 묻어 버린 불타는 용암의 흐름, 섬들을 삼켜 버린 대양의 파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황하가 범람해 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거나 2백만 명이 양쯔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추상적인 이야기 ―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양기였다. 그 아이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가여운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해야 했을까?
_ 프레드 울만, 『동급생』
191. 철학의 태도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20
쌔삥(?) 철학에 대해 비전공자가 공부하러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크지도 않고 잘 발견되지도 않는다. 하려고 들면 하겠지만, 외국어도 필요하겠고, 앞 세대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겠고…… 그럴 땐 개론서가 좋은데, 개론서도 개론할 만큼 명망 있는 철학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니 그 구멍 역시 좁거나 없다. 결국 철학에 조예도 욕심도 없는 통상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최첨단 철학은 들뢰즈나 데리다, 더 나가면 지젝 정도의 위치에서 형성되는 듯. 잘은 모르지만 들뢰즈 훌륭하고 데리다 못지 않겠지만 5G 인터넷망이 어떤 건지 상상이나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철학이 겁나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는 어렵다. 그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폭넓게 아는 독자라면 준거점이 달라서 비교적 참신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름을 들어본 철학자라고는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뭐 이런 사람들 뿐인 독자, 아는 거라고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데, 나는 생각하면 고로 존재해야 한다던데, 뭐 이 정도에 그치는 독자 입장에서는 현대 철학자들의 참신성을 인지하기가 도리어 어렵다. 우편-전신-유선전화-무선전화-시티폰-피쳐폰-스마트폰의 발전사를 따라가는 사람이야 스마트폰의 참신성을 깨닫지, 편지지 보여주고 대뜸 스마트폰 보여주면 그건 참신한 게 아니라 완전 다른 물건일 뿐이다. 아, 이런 게 다 진짜 최신식 철학을 공부하기 싫은 사람에게 좋은 핑계가 된다.
‘젊은’ 철학자로 나타나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일본에는 가끔 있나 보다. 아즈마 히로키도 지금은 차마 ‘젊다’고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지만. 어쨌든, 오래된 생각을 새로운 현상에 적용하는 방법보다 새로운 현상에 맞는 새로운 생각 자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있다.
가령 만화가 있으면 고전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는 만화 콘텐츠를 독해할 뿐, 만화 주변에 형성된 관계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만화가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지, 만화를 읽은 오타쿠가 어떤 2차 창작을 하는지를 간과하고 작품을 논한다. 작품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그 작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작품 주변에 어떤 문맥이 생겨나고, 그 문맥을 활용해 소비자가 어떤 행동을 하며,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 현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소비자의 행위'를 시야에 넣을 때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_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192. 스스로를 아는 일
앙드레 지드 지음 /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
몽테뉴의 『수상록』을 앙드레 지드가 발췌하고 서문 해설을 단 책이다. 『수상록』은 두꺼운 책이라 그런가, 대부분 다 편역이고, 완역한 것은 동서문화사 판밖에 없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그 책을 읽었었는데, 문체가 참 신비롭지만 졸립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다.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 많았다. 유물론자 공대생이 읽기에는 괜찮았다. 신비롭지만 졸린 게 문제였지. 이것은 곧 신비롭고 졸린 문체로 느껴졌고, 마침내 신비롭게 졸린 문체라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하루에 한두 꼭지를 침대 위에서 읽다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나를 깨울 때까지 기절하는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확립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아,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언제 한번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 작정이다. 그 몸풀기로 이 작은 책을 집어든 것. 작아도 신비롭(지만/고/게) 졸렸던 것을 보면, 역시 위대한 책은 크나 작으나 자신의 빛나는 특성을 잃지 않는 법인 듯.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짐작건대, 심지어 몽테뉴의 이 문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상상해볼 수 있다. 취존.
모든 스포츠와 훈련이 공부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육상, 레슬링, 음악, 무용, 사냥, 무기와 말 다루기. 학생의 외적 태도나 품위, 그의 사람됨을 마음과 함께 빚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성해 주는 것은 마음도 몸도 아니라 바로 인간이며, 교사는 비단 제자의 몸과 마음만 빚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아직 유연하므로 마땅히 모든 유행과 관습에 부응해야 하며 젊은이는 대담하게 모든 국가와 집단에 들어맞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필요하다면 모든 무질서와 고통도 맛보아야 한다. 그가 모든 유행에 친숙해지게 하라. 그러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칭찬받은 일만 하려 들 것이다.
_ 앙드레 지드, 『스스로를 아는 일』
--- 읽는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 이주영
1417년,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맨발 / 문태준
회계가 직장에서 이토록 쓸모 있을 줄이야 / 한정엽, 권영지
하루 5분의 초록 / 한수정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 사라 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