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보고

 

 

1

 

코로나19와 임용 동기 비슷한 관계가 되면서, 공무원 생활의 첫 단추를 기이한 모양새로 채우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경로당 휴관한다는 내용을 평생의 첫 공문으로 기안한 것이 벌써 3주 전, 어느덧 syo는 쩜오에서 쩜칠이나 쩜팔이는 된 느낌이다. 과장님이 물어 보실 때마다 찾아보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눈물과 함께 남기며 돌아나가는 경우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천성이 을이다 보니 전화받기는 여전히 어렵고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민원인을 향해 연방 굽신거리는 굽syo. 그는 전화를 받고 나면 허리가 아프다.

 

 

 

2

 

알라딘에서 비벼대며 익혔던 것이 글솜씨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안하는 족족 빨간펜이다. 깨어있는 18시간 가운데 14~15시간 정도를 회사와 회사를 오가는 길 위에서 보내는 요즘이다 보니, 좋은 글에 대한 감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2월 한달 정도는 독서와 글쓰기를 포기하고 일 배우는 데만 집중하고 살아야겠다 다짐했었는데, 아무래도 3월도 그런 식으로 소비해야 할 듯. 공무원이 되기 위해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던 것처럼, 훌륭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외워야 할 것도 잔뜩이다. 우선 관내 121개 경로당의 이름과 주소지부터 싹 외워버릴까…….

 



루피누스는 쓰디쓴 어조로 이렇게 고백했다. “이 판국에 글을 쓸 정신이 있겠는가주위는 온통 무장한 적들이고보이는 건 그저 황폐해진 도시와 들판뿐인데.”

카를로 M. 치폴라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3

 

같이 사는 남자는 위생 감각이 떡이다. 이 사태가 나도록 마스크 쓰고 출퇴근하는 꼴을 본 적이 한 번 없고, 퇴근하고 돌아와도 손을 씻지 않는다. 씻으라고 하면 어어- 맞다- 이러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게, 이놈은 내가 아는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인간으로서, 25년을 친구로 지내면서 입에서 욕 한번 나오는 걸 본 일이 없을 정도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가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 같은 건 품을 줄도 모르는 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얘가 무해한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놈이 아무 생각이 없는 바람에 옆에 있는 친구들이 피해를 입은 경험이 결코 적지 않다. 일이 터지고 친구들이 불만을 토로하면, 미안- 몰랐지- 어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따위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도 그때뿐, 우리는 여전히 무심함과 무식함이 반반 섞인 듯한 이놈의 행태에 이래저래 데미지를 받고 있다. 기가막힌 건, 본인은 전혀 다치지 않는다는 것.



언니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최은영손길


 

 

4

 

바지를 다리다가 손목을 다렸다. 바지도 펴지지 않았고 손목도 펴지지 않았다. 괜히 손목만 따끔할 뿐이다. 혹시 바지도 따끔할까? 아린 손목을 쥐고 바지의 심정을 상상하게 된다. 일찍 퇴근하면 별 일이 다 벌어진다.

 

 

 

5


책은 하나도 읽지 못하는 중이다. 이 아래쪽에 읽었다고 표시한 책들도 실은 읽은 지 일주일은 지난 것들이라, 한줄평을 쓰려는데 한줄도 평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큰일이다. 그래도 일단 찌끄려야 한다.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syo는 늘 졌지만, 그렇다고 대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득하게 책 읽고, 글 쓰고 싶다.



인간은 자기 환상의 노예이다그는 항상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뒤에 유령을 데리고 산다때때로 그는 그의 앞에서도 유령을 본다술에 취해 있거나눈이 눈의 역할을 하기를 포기했을 때에 말이다.

김현사라짐맺힘


 

--- 읽은 ---


27. 시민과 함께 만드는 서울 / 서울연구원 : 174 ~ 289

: 서울 시민으로 잠깐 살아 본 바, 개인적인 경험을 반추해보면 시민이 서울을 만든다기보다는 서울이 시민을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큰 도시는 그런 맛이 있고, 큰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를 넉넉히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이 책 속에 만들어진 서울을, 나하고 같이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서울이 나를 또 만들긴 할 것이다.



 

28. 최고의 인재는 무엇이 다른가 / 박봉수 : 175 ~ 294

: 뭣이 다른데.

 



29. 보고서의 신 / 박경수 : 132 ~ 271

: 뭣이 신인데.

 

 

--- 읽는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96 ~ 245

엑셀 2016 바이블 / 최준선 : ~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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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1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2-24 2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응원합니다. 으랏차~~^^

syo 2020-03-01 21:57   좋아요 1 | URL
또 한 주가 갔네요. 북다님, 건강 조심하세요!

다락방 2020-02-2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저는 직장생활 20년 했지만 아직도 품의서 쓰는 게 넘 어려워서 기존에 썼던 거 찾아 베껴와요.....책읽고 글쓰는 거랑 달라요, 그건.....

syo 2020-03-01 21:5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저도 그럽니다..... 새로 뭘 쓰겠어요. 이미 결재까지 다 받은 모범 답안이 떡하니 있는데...

비연 2020-02-24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목...;;; 바지는 모를거에요, 손목의 따끔함을..ㅠㅠ 조심하삼~

syo 2020-03-01 21:58   좋아요 0 | URL
흉터가 생겼어요. 다리미로 지져진 흉터는 뜻밖에 평생가던데.
비연님, 건강 조심하세요!

페넬로페 2020-02-25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에 대한 감각자체가 아직 살아있어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syo님!
이 시국에 힘드신 공무원을 응원합니다^^

syo 2020-03-01 21:59   좋아요 1 | URL
모두들 힘든 시간이네요.
페넬로페님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이 힘든 국면을 무사하게 헤쳐나가자구요!

반유행열반인 2020-02-25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고가 많으셔요. 일 바쁘고 사람도 많이 대할 텐데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잘 지내시길 빕니다.

syo 2020-03-01 21:59   좋아요 1 | URL
저는 튼튼까지는 아니지만 건강합니다 ㅎㅎㅎ
반님도 건강, 반님의 가정에도 건강, 아무쪼록 건강입니다!

단발머리 2020-02-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십니다, 쇼님~~~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바쁘시네요.
얼른 시간이 지나가, 과장님이 물어보시면 찾아보겠습니다~ 할 때가 있었지, 그런 시절 왔으면 좋겠네요. 화이팅!! 두고 갑니다^^

syo 2020-03-01 22:00   좋아요 2 | URL
어, 여기 화이팅이 있네?
두고 가신 거 늦게나마 잘 주웠습니다! ㅎㅎ

stella.K 2020-02-25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생존보고로군요.ㅠ
근데 양복 입고 다니시나요?
쫌 딴 얘기긴한데, 요즘엔 다리는 옷 잘 없는 것 같던데. 있더라도 귀찮아서 안 사 입구요.
저는 뭐 옷을 잘 사지도 않지만 다리는 옷은 아무리 맘에 들어도 눈물을 머금고 안 삽니다.
진짜 다리미질 못하겠더군요.ㅠ
스요님 친구 얘기하니까 저 최영은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ㅎㅎ

syo 2020-03-01 22:01   좋아요 1 | URL
풀정장은 당연히 아닌데요.
그래도 세탁하고나면 어쩐지 꾸글꾸글해서 다리고 싶어지잖아요?
근데 다렸더니 옷감만 ㅂ버리고 손목이나 데고......

스텔라님, 건강 조심하세요 ㅎ

공쟝쟝 2020-03-01 2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고서의 신... 엑셀바이블... ... 🥺🥺🥺

고양이라디오 2020-03-02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엑셀 바이블 저 책 좋나요? 전 엑셀 문외한이라ㅎ

새로운 생활 적응 잘하시길^^

syo 2020-03-07 23:07   좋아요 1 | URL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저도 엑셀 거의 문외한급이라.
고라님도 건강 조심하시구요!

가넷 2020-03-05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금 여유 있을때면 남들 공문 생산한거 보고 괜찮은 것들은 참고하기는 한답니다. 공부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심심풀이로 찾아본다는 생각으로. 지금도 영 못쓰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도움이 되네요.

syo 2020-03-07 23:07   좋아요 0 | URL
공문쪽 글쓰기도 잘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어쩐지 하나가 늘면 하나가 후져지는 느낌이라 어렵네요.
저도 열심히 들여다보고는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