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30대 아저씬데, 내 동년배들 다 인스타로 그림 보더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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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만치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만한 함량의 글을 쓰려면 대체 당신의 머릿속엔 뭐가 얼마나 들어 있어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cyrus님은 꼭 알고 쓰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글로 써내기까지 하려면 알긴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추가질문에는 또 그건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이건 뭐,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syo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cyrus님이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cyrus님은 늘 그렇다. 본인 칭찬을 하면 두루뭉수리권법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편이다. 구름 같은 사람.
이 글을 발견하면 그는, 저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쓰면서 많이 배웁니다, 저는 쓰려고 읽고 읽으려고 쓰는 과정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같은 교과서적인 댓글을 달겠지. 성격 같아선, 언젠간 한번 흥청망청 취하게 만들어서 그 속에 든 말들을 다 꺼내보리라는 식의 흉계를 꾸며볼 법도 하지만, 막상 syo는 소주 2잔이면 만취인 반면 cyrus님은 뜻밖에 말술이라 하니 이건 애당초 텄다. 우리 할아버지는 대포 주전자로 나발 불던데. 아, 내 간만 피해간 유서 깊은 상놈집안 친막걸리 유전자여…….
그나저나 우리 계획적으로 두 번, 우연히 두 번 만난 기묘한 인연에다 ‘동년배’(가벼운 양심마비)기까지 하니, 이 마당에 말까고 지내자……요?
대차게 까일 것 같다. 구름같이 교과서적으로 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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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님은 그런 반면 나는 왜 쓰는지가 늘상 고민이다. 왜 쓰는지를 모르니 어떻게 써야할지는 더욱 헷갈린다. 그러다보니 지나치게 더디다. 읽는 데 3분 내지 5분이면 너끈할 글을 한 시간 동안 쓰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심지어 퇴고도 안 하는데!
비결은 간단하다. 바로 한없이 무한에 가까운 백스페이스. 어떤 문장을 쓰건 가장 많이 두드리는 키는 백스페이스다. 그것은 내가 좀처럼 내 문장의 방향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고 싶은 욕심과 누구나 이해할 순 없는 문장을 쓰고 싶은 욕심이 나란히 있다. 백스페이스가 깔린 질척질척한 길을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문장 안에서 그 두개의 욕심은 치열하게 길항한다. 지금 이 문장만 해도 그렇다. 나는 ‘길항하다’라는 폼 나는 단어를 쿨한 일상어인 척 쓰고 싶은 허영과, 저런 단어를 아무런 고민 없이 남용하는 감각 둔한 인간만큼은 되고 싶지 않은 저항감 사이에 서서 한참동안 망설인다. 가끔 들어와 내 글을 읽지만 절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친구들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여친 옆에 앉아서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나 한참을 고민했고, 결국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직도 문장의 내장보다 골격과 피부를 걱정한다. 내용 없는 글은 내용 없는 인간에겐 타고난 신분 같은 것이라, 한 세월 그것과 더불어 살다 보면 슬그머니 체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형식은 다른 이야기라서, 돈 많이 번 상놈이 양반 상투 잡는 말세를 기약하며 계속 문장에 대한 고민을 저축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 지어 먹을 것 같은 신들린 문장을 만날 때마다 지독하게 상처받으면서.
요 며칠 상처 주는 놈들이 있었다.
요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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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너무 예뻤다. 에드워드 호퍼에 환장하는 syo에게 『청소부 매뉴얼』의 표지는 그야말로 구매절벽으로 사람을 떠미는 치명타였다. 물론 호퍼가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첨 봐. 웬만한 호퍼는 내가 다 봤는데. 그리고 저 하얀 그림은, 뭐랄까, 반전된 호퍼 같달지, 호퍼의 어둠이 저 그림의 빛 같달지, 그런 느낌이었다. 어둠이 빛이어도 외롭고 적막하다니, 호퍼 당신은 도대체…
호퍼가 그린 것도 아닌데 왜 호퍼를 칭송하고 있는가, 싶어 책날개를 열어보니 안소현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작가님의 작품이 책 표지로 쓰인 건 처음도 아니었고, 심지어 요놈들 내 책장에도 몇 권이 꽂혀 있다.
요놈들
안소현 작가님 인스타에서 한참을 구경하다 나왔다. 인스타 안하면 이런 것도 모르고 산다. 버티고 버텼는데, 결국 인스타든 뭐든 해야 할까봐. 이거 뭐, 내일부터는 신석기시대라는데 아직 변변한 돌도끼 하나 못 구한 빠삐꼬가 된 기분이다.
빠삐꼬 : 난 돌도끼 있거든?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렇지 ……바꿀래?
안소현 작가님 홈페이지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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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 페이퍼에 올리려고 읽을 때마다 기록해 놨던 파일이 사라졌다. 뒤지게 뒤졌는데 없다. 뒤지겠다. 다시 쓰려고 백지장을 모니터에 띄워 놓았지만 의욕도 기억도 뭣도 없다. 뒤지겠다. 살짝 눈물 그렁그렁 했던 건 비밀이다. 콧물도 비밀이다. 비밀이다…….
약속해요, 비밀이라고.
--- 읽은 ---
+ 여보, 나 좀 도와줘 / 노무현 : 50 ~ 238
+ 철학의 이단자들 / 스티븐 내들러, 밴 내들러 : ~ 191
--- 읽는 ---
= 낭만주의 / 박형서 : ~ 125
=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 ~ 54
=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 134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 108
= 현대미술의 여정 / 김현화 : ~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