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비극 전집 中 어느 한 편
일개 병사들도 진급을 하려면 체력 검정을 통과해야 하는 선진 병영문화가 정착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체력 측정 날짜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무시로 팔을 굽혔다 펴느라, 눕힐 줄만 알았던 윗몸을 일으키느라, 하도 풀을 뽑아제껴 놔서 삭막하기 그지 없는 연병장을 휘휘 도느라, 전반적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syo의 경우 다른 아이들보다 진급의 허들이 좀 낮았는데, 연로한 이들을 대접하는 유교적 미풍양속이 잘 버무려진, 역시 선진 병영문화 덕분이었다. 팔굽혀펴기도 윗몸일으키기도 한 두어 개씩 선심 쓰듯 빼주더구만. 그러나 3km뜀걸음에는 양보가 없었다. 그건 아마 체력이 소진되면 정신력으로라도 다리를 질질 끌고 이어갈 수 있는 이 종목의 특성상, 노병이 체력에서 밀릴지언정 저 새파란 것들보다 정신력에 우위가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 깔린 것이 아닐까, 하고 늙은 syo는 혼자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그랬다. 젊은이들은 팔과 윗몸을 만드는 데 강철을 다 써버려서 하체와 폐는 아쉬운 대로 두부를 가지고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건지, 정말 기이하게 못 달렸다. syo는 어렵지 않게 2등으로 3km를 주파했고 1등 테이프를 끊은 아이는 취미가 복싱이었다. 3등 아이가 들어왔을 때 이미 syo의 호흡은 정돈이 되어 있었다. 뭐야, 이게 다야?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syo의 오만함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오만함은 언제나 단죄되는 법. 그런 이치를 우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로소 syo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수록될 비극, <무르피평생아프디푸스>의 막이 열린 것이다.
참 달리기 좋은 때, 철원에서는 “철원DMZ국제평화마라톤”이라는 행사가 열리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들어가면 안 되는 지옥의 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처음 부대에 마라톤 참가 신청서가 도달했을 때, 이건 나의 비범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운명같은 기회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동기들을 모두 불러 앉힌 syo가 말했다. half. 동기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건 개소리. 정답은 5. 격론이 오갔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불만을 잔뜩 안고서 10km로 합의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syo는 동기들에게 목숨을 빚졌다. 마라톤은 무슨, 평생 달리기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놈이 half를 탐내다가 인생 half만 살고 그렇게 갈 뻔했지.
하여간, 큰 무리는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완주하고 말리라는 몹쓸 자존심을 지켜내느라 죽을동 살동 10km를 달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하루를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부터 오금이 아파 도저히 계단을 내려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오르막은 문제없고 평지에서도 버틸 만한데, 내리막을 내려갈 수가 없으니 syo의 고도는 헬륨풍선 마냥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꾸자꾸 올라가기만 하는데......
다들 짐작하시다시피 군 병원은 쓰레기에 가깝고 일개 병사가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syo는 묵은지 묵히듯 무릎을 묵히게 되었다. 두어 달쯤 지나니 무릎이 아작아작 잘 익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4km 이상을 달리고 나면 다시 내리막지옥이 열렸다가 3일쯤 지나면 슬그머니 닫히는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평소에는 안 아프니까 문제다. 병원에 가려면 일단 아파야 되잖아. 그래서 아프려고 굳이 새벽같이 일어나 6km를 달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팠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싶어서 아침나절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뛰지 마세요. 걸으면 되잖아요.” 랬다. 아니, 이 양반아, 그래도 되면 내가 병원에 안 왔지. 내가 여기 올려고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이 동네를 몇 바퀴를 돌았는데 의료전문가가 돼서 아침부터 그게 할 소리세요...... 4년 전, 파주 어느 로터리 근처의 병원이었음을 고발합니다.
그렇지만 요즘도 syo는 가끔 달린다. 달리는 일은 즐겁다. 힘들 때까지 달리지 못하는 구조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재수가 좋으면 8km를 뛰어도 오금이 짱짱한데, 또 어떤 날은 3km 지점에서 벌써 신호가 오기도 한다. 그러면 축 늘어져 터덜터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서 씽씽 달리고 있을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연수 같은 이름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루지 못할 것들을 잔뜩 모은 버킷 리스트를 생각한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그리고 겸사겸사 버킷 리스트의 다른 항목들도 생각하곤 한다. 테헤란로에 빌딩 올리기, 유시민 선생님과 시민호프에서 헌팅하기,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 개최....... 저게 버킷 리스트인지 버킷 미라클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런 책을 읽는다. 표지부터 벌써 힘이 난다. 그리고 실패한 달리기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할 이름이 하나 늘었다.
-- 읽은 책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박균호, 『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
-- 읽는 책들 --






가쿠타 미쓰요,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모티머 J. 애들러,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최진열, 『헌법은 밥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