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12월 알라딘 굿즈 중 스누피 다이어리가 심히 눈에 밟히더라. 결국 그 다이어리 때문에 책을 샀다. 쓰지 않으려고 했던 다이어리면서도 빨강 파랑 모두 예뻐서 둘 다 갖겠다고 책을 최소 10만원은 넘게 샀다. 물론 한 권은 누군가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는 바람에 다이어리가 또 생겼다. 그 다이어리도 곧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갈 예정이다.
내가 그토록 탐이 나서 결국 갖고 만 빨간 다이어리에는 아직 이렇다 할, 어떤 글자가 적히지 않았다. 1월에 태어난 친구의 생일,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Nothing But Thieves의 내한 공연 정도가 메모되었을 뿐이다. 아주 오래 전,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던 시절에는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새해 계획’ 같은 걸 쓰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이어리에 이런 것, 그러니까 ‘새해 계획’ 또는 ‘결심’ 따위를 쓰지 않는다. 그런 결심 같은 걸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적지도 않는 것이다. 문득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새해 결심이나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아, 그래도 올해는 ‘책을 굿즈 때문에 사지 않는다.’는 결심을 했으니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 들어 버린 것은 아니려나.
2018년 1월도 어느덧 보름이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변화 없이 살아가고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새해라는 구분이 참 우습기도 하다. 시간은 연속으로 흐르는데 그걸 마치 선을 긋듯, 나누어서 여기서부터는 새해야, 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편리 아닌가.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가정을, 조직을, 사회를 리셋해서 다그쳐야 하는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 그러니 모두가 ‘새해’라는 실체 없는 기준을 마련하고 ‘새해 결심’ ‘새해 계획’ ‘올해 목표’ 등을 세우고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여전히 게으름을 피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문득 이런 구절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불쌍한 인류를 괴롭혀온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환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각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러한 정신적 이상상태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에 거룩한 후광을 씌웠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9쪽)
고대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교육을 후원했습니다. 노예라는 인간상품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똑똑한 부류에게 의학, 철학, 그리스 문학, 음악, 과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을 받은 노예는 시장가치가 올라갔습니다. 요리 전문가가 된 노예는 의사, 철학자, 문학가가 된 노예보다 값이 더 비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인문학 분야의 교수에게 지급하는 보수보다 부유한 자본가가 자신의 수석 요리사에게 지급하는 보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수가 학술원 회원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과 달리 오늘날의 자본가들은 오로지 지적 능력의 자격을 갖추려는 의도에서만 교육의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합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164쪽)
예전에 읽었던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마찬가지로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930년대에 쓰인 저자의 에세이들을 묶어 놓은 것이라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러셀이 살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끊임없이 회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현대 사회의 획일성/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유/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등의 에세이들로 묶여져 있다. 전체 에세이들은 각각의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큰 줄기는 결국, 인간이 ‘일’이라는 ‘강제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원래 갖고 있던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함을 촉구한다.
적당한 정도의 노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야하며, 부(富)가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나눠 쓸 수 있고- 그래서 많이 남는 여가 시간에는 ‘책을 쓰고’, ‘철학을 하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되게 다듬고’, ‘예술적인 창작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잃어버린 인간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 선전하는 일을 담당하는 계층의 태도는 세계의 지배 계층들이 소위 ‘정직한 무산자’들에게 늘 설교해 온 것과 거의 똑같다.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는 것까지.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맹목적으로 부지런하지는 않은가? 과연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 근면함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부지런함은 개인의 미덕이자 사회의 미덕이기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오히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서 게으르다고 질책하고 비난한다. 이 사회는 대체 뭘 위한 성장인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모두가 돈벌이에 조금만 덜 부지런하고 좀 더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덜 각박해지지 않을까.
새해 결심, 계획 목표 따위가 적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 거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없을수록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게으름 피우는 자의 변명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