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아주 인상 깊으면 도리어 원작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기도 한다. <일 포스티노>로 널리 알려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그런 책 중 하나였다. 그래도 완전히 외면은 못하고 언젠가 읽기는 읽어야 할 텐데, 영화에 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때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오다가 최근 드디어 읽었다. 영화에서는 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우정, 그리고 마리오의 사랑 등이 인상 깊었다면 책으로 읽을 때는 아무래도 이것이 ‘문자’의 힘인지 글쓰기의 힘, 말의 힘, 그리고 시(詩)가 지닌 위대함이 더 크게 와 닿는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어느 실패한 소설가, 아니 소설가를 꿈꾸지만 늘 소설 쓰기에 실패하고 마는 한 삼류 신문사 기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유명한 칠레의 작가들처럼 언젠가는 나도 멋진 작품으로 꼭 이름을 떨치리라! 야망은 크게 가졌지만 실제로 하는 일이라곤, 통속 극단 배우 인터뷰나 사립탐정들의 책에 관한 서평, 이웃집 자식 그 누구라도 쓸 수 있는 유랑 서커스단에 관한 기사, 그 주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터무니없는 예찬 기사 등등 그 자신이 보기에는 하나도 쓸모없는 권태로운 일 뿐이다. 그런 중에도 작가가 되고자 글을 써 보려고 애쓰지만 그런 그의 꿈은 ‘그 축축한 편집국 사무실’에서 매일 밤 사그라져 간다.
그러던 중 그는 드디어 기회를 얻는다.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온 세상이 칭송하는 시인 네루다를 취재하고 기사를 써 오라는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취재라는 게 이름만 거창하지 실은 네루다가 살고 있는 섬에 잠입하다시피 하여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관한 너절한 기사를 써오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지만 이 기회를 한껏 이용하기로 한다. 네루다를 만나 자신의 책 서문을 써달라고 하리라! 그리고 그 서문을 이용해, 그러니까 네루다의 명성을 이용해 소설가로서 화려하게 데뷔하리라! 그런데 잠깐, 그에게는 아직 책이라고 부를 만한 원고가 없는 상태이다. 그의 글쓰기는 늘 실패, 실패를 거듭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있지도 않은 자신의 책에 서문을 받을 요량으로 이슬라 네그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나이, 네루다의 전속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이 책, 그러니까 이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는 마리오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마리오도 네루다에게 자신의 시에 서문을! 써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던 철부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우편배달부는 시를 쓰게 되었고, 또 어쩌다 네루다에게 서문까지 써달라고 조를 만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세계적 대작가 네루다는 이 두 서문 스토커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글을 써주었을까? 그 과정이 흥미롭게, 또 때로는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도 네루다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모습에 반했던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도 마리오의 눈을 통해 네루다의 그러한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1970년대 초 칠레의 한 어촌마을, 십대 끝자락의 소년 마리오는 종일 빈둥거리는 한량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오직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때문에 네루다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다. 이 마을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읽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능력을 갖춘 셈이다. 네루다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편지들이 도착하고, 마리오는 큰 자루를 지고 매일 같이 그의 집을 드나든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에게는 네루다도, 그의 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목을 축이러 들른 동네 술집에서 시중을 들던 베아트리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 그는 그길로 네루다에게 달려가 소녀를 위한 시를 써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한다. 어린놈도 시의 위대함이랄까, 사랑에는 달콤한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이 네루다와 이토록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픈 일종의 허영, 허세도 깃들어 있다.
하지만 천하의 네루다가 알지도 못하는 여인, 단테의 베아트리체도 아닌 마리오의 베아트리체를 위해 시를 써줄 리 만무하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주면서 시를 직접 써보게끔 유도한다. 시 한 줄 써본 적 없는 사람에게 ‘메타포’ 운운부터가 황당한 일일 텐데, 소박한 네루다는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처럼 마리오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예로 들어 그가 시의 세계에 눈을 뜨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제 이 메타포의 왕자는 사랑의 언어를 발견하고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네루다에게 시를 써달라고 졸라대기 이전의 마리오는 베아트리스에게 반했어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언어가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 네루다의 시를 읽고, 메타포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능력, 비록 그것이 서투른 사랑의 언어일지라도 뜨거운 마음을 전할 방법을 알게 된다. 시인이 되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28쪽) 있으리라 외치는 마리오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배움이 짧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능력이 서툴렀을지라도 시의 언어를 익힌 마리오는 위험하다. 그 위험을 잘 아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 네루다의 시를 읽을 줄 아는 베아트리스의 엄마이다. 그는 마리오가 자신의 딸에게 시를 읊으며 추근대는 게 영 못마땅하다.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딸과 마리오 사이를 감시하며 딸이 마리오의 수작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쓴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 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 게 천만번 낫지.”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일 뿐이라고.”(63쪽)
베아트리스의 엄마는 시를 읽을 줄 알기에 시의 위험성, 언어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그 마음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때로는 위험한 일에도 기어이 몸을 던지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엄마가 예상했듯이 그녀의 강력한 경고에도, 감시에도 마리오가 빚어낸 사랑의 말들은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활짝 열어버린다. 마치 시가 마리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어,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알게 했고 어쩌면 사랑에 더 깊이 빠지게 한 것처럼..... 난생 처음 시를 읽고 멀미가 날 것 같던 한 소년은 처음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남의 시(네루다의 시)를 표절해 가며 시를 끼적이고, 그 언어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시인을 그리워하는 시를 직접 쓰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시를 쓴다. 그는 이제 우체부가 아닌 시인이고,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은 전과는 조금은 다르다. 평범했던 바닷가 소년 마리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네루다의 곁을 지키게 된 것은 단지 그와의 우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 때문이었을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이렇게 시와 말과 글, 언어의 힘을 칠레 한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굴곡진 칠레 현대사와 엮어 따뜻하고 해학적이면서도 결코 암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둡지 않은 어조로 풀어나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단지 실패로 끝난 네루다 취재 공세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자조 섞인 투로 글을 써내려간 기자는 “작가 여럿이 연이어 성공의 술잔을 들이켜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출판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라며 씁쓸히 말한다. 우편배달부 마리오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를 써서 어느 대회에 내보내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 진심 어린 글쓰기를 과연 실패로만 볼 수 있을까. 적어도 네루다는 이 두 사람에게, 한 줄도 쓸 수 없었던 이 두 남자에게 자기만의 작품을 남기게 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다.”는 네루다의 말은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