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병을 만나면 고전한다. 뜻밖으로 지루한 책을 만나면 독서 자체에 슬럼프가 온다. <트러스트>가 내게 그런 책이 될 줄이야. 평소보다 조금 긴 휴일이 있기도 했고 여행을 다니느라 책을 좀 덜 읽게 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을 일주일 넘게 읽은 건 확실히 좀 이례적이긴 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이 책은 알라딘에 쓰여 있는 소개 내용만 보면 무척 흥미로워 보인다. “1920년대 월 스트리트를 주요 배경으로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대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경제, 금융, 돈, 권력, 계급 등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는 구절. 나도 이 내용에 혹해서 이 책을 읽을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대체 왜 기대보다 재미가 없었을까?
이 작품 내의 복병이라면 1부와 2부가 아닐까 싶다. 나름의 반전을 꾀해 깔아놓은 포석인 1부와 2부가 참 지루하고, 읽다 보면 1부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심정이 들다가 2부에서는 ‘아아 네네 대단하십니다’하는 약간의 반감까지 든다. 그래서 2부에서 그만 읽을까 싶어지는 유혹에 빠진다. 그래도 끝을 보는 사람과 그냥 덮는 사람이 이 지점에서 갈릴 듯한데 인내심을 가지고 3, 4부까지 읽어서 작가가 영리(??)하게 설정해 놓은 반전을 마주하면 와우! 하고 놀라는 동시에 1, 2부의 고난을 보상받으며 아, 재밌다 하고 책을 놓는 쪽과 3, 4부의 이 반전을 이미 예상했기에 에, 정말 이게 다야? 더 없어? 하고 허탈해하는 쪽으로 나뉠 것 같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아직도 허탈하네.........
1부는 <채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소설 속 소설인 셈이다. 해럴드 배너라는 작가가 쓴 <채권>에서 다루는 인물의 이름은 ‘벤저민 래스크’와 그의 아내 ‘헬렌 브레보트’- 이 두 사람이 곧 2부와 4부의 화자인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이다. 앤드루 베벨이 어떤 인물인가 하면 그가 쓴 자서전인 2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조상 대대로 부를 쌓는 데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닌, 그래서 그렇게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사람이다. 그런데 해럴드 배너는 왜 이 부부를 모델로 <채권>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베벨 가문의 이력과 앤드루 베벨이라는 인물 자체도 흥미가 있어 보이지만 그보다는 그의 아내인 헬렌, 즉 밀드레드 베벨의 일생이 좀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끌 것 같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주목과 선망을 동시에 받는 부부. 그런데 그중 아내가 정신병원에서 미쳐버려서 죽는다면?! 해럴드 배너의 소설은 그렇게 전개된다. 이것은 진실, 즉 믿을만한(Trust) 이야기일까? 소설이라는데?
2부에서는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인물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른바 자서전- 거물급의 미국 백인 남자가 그렇듯이 이 자서전 또한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자뻑으로 점철되어 있다.........하....... 그래서 더 읽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리한 포석을 깔아놓은 작가보다 더 영리한 독자는(내가 영리하단 뜻은 아니다 대개는 1부에서 유추할 수 있을 설정) 1~4부를 통틀어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화자의 말이 가장 믿기 어려운, 어쩐지 진실에서 가장 먼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자서전이라는 게 가장 그렇지 않은가? 소설이 허구(fiction)라는 외피를 쓰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듯이 1부와 2부만 읽고도 대부분의 독자는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보다는 해럴드 배너의 소설에 어쩐지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3부와 4부로 이야기는 건너가는데, 3부의 화자는 ‘아이다 파르텐자’라는 전혀 색다른 인물이다. 이 여자는 또 누구야? 싶은데 알고 보니 이 여성은 앤드루 베벨이 비서로 채용해 자신과 아내 밀드레드의 이야기를 쓰게 하는 사람으로, 처음에는 앤드루의 자서전을 대필하다가 나중에는 베벨 부부의 회고록을 작성하게 된다. 앤드루 베벨은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채권>이 ‘허구’에다가 진실을 교묘히 조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내 밀드레드가 정신병을 앓다가 죽은 것으로 그린 그 부분은 완벽하게 허구이기에 아이다에게 ‘진실’에 가까운 자서전을 쓰도록 종용한다. 아주 많은 돈을 주면서……. 그렇다면 아이다의 입을 통해 그려진 베벨의 모습, 그녀의 회고록은 또 믿을만한(Trust) 이야기일까?
소설도, 자서전도 회고록도 결국 헬렌 또는 밀드레드 본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이야기의 진실, 아니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은 4부인 밀드레드의 ‘일기’에 담겨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 일기에 드러나는 내용은 사실 1부와 2부 두 남성 화자들(헤럴드 배너와 엔드루 베벨)이 그린 밀드레드의 모습을 유추해 보건대, 영리한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듯이 어쩐지 그런 여성은 아닐 거 같은데 했던 의심이나 심증을 확인하게 해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반전이라고 내세웠지만 딱히 반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나 할까.
엔드루 베벨은 아이다에게 밀드레드를 묘사할 때 아름답고 영특하고 가정적이며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고 아이처럼 순진한 여성이었다고 말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내내 강조한다. 그녀가 자신을 구원했노라고. 그런데 끊임없이 이런 부분들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어쩐지 실제는 그렇지는 않았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배너가 그린 밀드레드의 모습은 지적으로 영특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해서 예술가들을 계속 후원한다. 앤드루와 배너의 서술에서 공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밀드레드는 지적으로 영특했으며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런 단체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거기서 안식을 구했던 여성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두 남성 화자의 의견이 달라지는 것일까? 소설 <채권>에서 묘사했듯이 헬렌, 또는 밀드레드가 정말로 미쳐서 죽어갔느냐 아니면 베벨의 주장대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병으로 죽어갔느냐 그 지점일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는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화자의 주장을 가장 믿을 수 없을 터이므로 밀드레드의 일기에 그려질 내용을 대충은 짐작하게 된다. 지적으로 그토록 영특하고 뛰어났던 여성이 왜 단지 음악 안에서 안식을 구하고 뒤로 물러나 예술을 후원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갔을까. 답은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온 독자라면....... 아내의 재능이나 재산을 이용하거나 시기하다가 결국 아내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거나 아니면 미친 여자로 만들어서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어 유폐해버리는 몇몇 유명한 작품들을 곧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트러스트>는 그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인물들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앤드루 베벨이야 애초부터 정이 가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소설을 쓴 해럴드 배너와 대필 작가였다가 나중에 참회(?)의 심정으로 회고록을 쓰는 아이다 파르텐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두 사람은 저마다 베벨 부부- 돈과 권력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뭘 얻고자 한 것일까? 배너는 밀드레드가 후원하며 가깝게 지냈던 예술가 무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밀드레드가 살아있을 때도 배너 부부의 돈에 일정 정도는 기생했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기생한다(작품으로 유명세를 타서), 자서전 대필 작가였던 아이다는 애초부터 앤드루가 제안한 물질적 보상의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양심에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서도 ‘현실을 구부리는’ 일에 일조한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참회의 심정으로 회고록을 쓰지만 그 글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그리고 이 밀드레드, ‘일기’의 작성자. ‘일기’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글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그녀 또한 앤드루와 일종의 연합(Trust) 관계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작품의 화자들과 결말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결혼이라는 ‘트러스트’- 인간관계에서 이익을 중심으로 연합했다가 수가 틀리면 재빨리 등을 돌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어내기 급급한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