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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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4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시행되었던 흑백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우월주의에 기반한 이런 차별적인 체재 하에서 살았던 백인들은 모두가 흑인과 섞이지 않아서 좋다, 하며 이 체제를 반겼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불편한 마음이 들지언정 개인적으로 힘이 없어서,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아서 또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서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포기한 백인들도 많을 것이다. 아니면 흑인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행동 등으로 윤리적 죄책감을 덜거나 하는 백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약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아모르’가 그런 백인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공고한 1986년, 열세 살 소녀 아모르는 엄마, 아빠, 오빠,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는 작품의 시작부터 시련이 닥친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아모르의 엄마는 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을 하다 결국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 마음껏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모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아빠 ‘마니’에게 확답을 받기도 전에 아모르는 흑인 하녀 살로메의 아들 ‘루카스’에게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만다. 아모르의 이 당당한 선언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 마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이 아플 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살로메에게 무언가 꼭 주고 싶다고. 그러니까 살로메가 지금 살고 있는 집-그래봤자 방 세 칸짜리의 허름한 양철 판잣집-을 꼭 그녀에게 주겠노라 ‘약속’해달라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간절히 부탁한 것이다. 마니는 알겠노라, 약속한다. 그런데 이 장면을 때마침 그 방 안에 있었던,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아모르는 가족 중에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 소녀가 목격한 것이다. 아모르는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한 그 약속을 아빠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또래인 루카스에게 장담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아모르는 이 집에서 가장 선하고 윤리적인 존재다. 그 선함은 가장 어리다는, 그러니까 세상의 때를 덜 탔다는 것에서 비롯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빠 ‘안톤’이나 언니 ‘아스트리드’에 비해 존재 자체가 희미한, ‘모든 사람의 시야 가장자리에 있는 하나의 얼룩으로 취급받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어리고 너무 철이 없는’ 그런 아이- 게다가 아모르는 오빠나 언니에 비해서 온전히 사랑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죽은 엄마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아빠인 마니는 막내딸을 늘 자기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오곤 했다. 이렇듯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는 ‘유령’ 같은 아모르였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살로메의 처지를 누구보다 공감하며, 그녀의 생활이 어떻게든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가 가여운 살로메에게 꼭 집을 주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아빠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니 꼭 엄마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순진한 아모르는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루카스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유언, 엄마의 부탁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약속>은 전혀 다른 스토리로 흘러가거나 단편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양철 판잣집을 부유한 백인 농장주가 까짓 줘버리면 그만 아닌가! 싶은데 마니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처음에는 법이 그를 돕는다. 그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이 땅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아내의 유언을 지키고자 살로메에게 집을 넘겨주려고 해도 법이 허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법은 둘째 치고 마니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다. 아모르가 엄마의 유언대로 살로메에게 집을 줘야 한다고, 아빠 약속 지킬 거죠? 내가 다 봤어요. 아무리 말해도 마니는 답을 피하거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딸을 쳐다볼 뿐이다. 그 소리를 들은 마니의 누나, 그러니까 아모르의 고모도 길길이 뛰기는 마찬가지이다. 쟤가 무슨 헛소리야! 쟤는 늘 저러더라! 얼룩처럼 희미한 이 어린 소녀의 주장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파급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마지막 부탁인 이 약속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약속>은 아모르가 십대 소녀에서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고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집을 다시 찾아와야만 했던 몇 번의 사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30여 년 간의 스와트 집안의 흥망성쇠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 변화 모습이 그려진다. 아모르가 커가는 그 사이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흑인인 만델라가 이끄는 정부가 들어서는 등 변화의 조짐은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유령 같은 존재인 살로메에게 그 다 쓰러져 가는 집 한 칸은 여전히 주어지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문득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본디 흑인들의 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느 날 그 땅에 나타난 백인들이야말로 무단으로 그 땅을 차지하고는 제멋대로 흑인과 생활 터전을 분리하고, 좋은 곳은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는 본래 흑인들의 땅이자 그들의 터전이었던 곳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런 중에도 아모르처럼 최소한의 양심, 최소한의 윤리, 최소한의 죄책감을 지닌 이들이 그 백인 사회 내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 지키고 싶었어도 한때는 지킬 수 없었던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아모르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현실 속의 아모르 같은 이들 그러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이런 작품을 쓴 백인 작가들-데이먼 갤것을 비롯해 나딘 고디머, 쿳시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이 체제가 부당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한번쯤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환멸을 느끼고, 가족들의 행동이, 백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떠난 아모르- 그녀는 탐욕으로 부패한 그 백인들의 농장을 떠났기에 그 선한 마음을 계속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모르의 삶의 이력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떠나는 것인 동시에 자기 집을 떠나는 것”(레일라 슬리마니, <한밤중의 꽃향기>, 73쪽)이라는 구절과도 통한다. 집에서의 안락한 삶을 벗어나 자기로서 존재했던 아모르, 희미한 얼룩 같았던 한 소녀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윤리와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싶어진다.


“전 변호사에요.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모르가 말한다. (<약속>, 4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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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22 14: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겠다.. ‘30년간의 흥망성쇠‘라니 잠자냥님이 얘기하지 않은 스토리가 또 많을 것 같은데.. 자냥오별이야.. 안돼 이미 주디스헌이랑 도둑맞은집중력 샀는데.. 책 안 사려면 잠자냥님 팔로우를 끊어야 하나.. (중얼중얼)
이상 혼잣말이었습니다. 잠자냥님,리뷰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제 손꾸락이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에 얼른 도망갑니다!!

잠자냥 2023-06-22 14:22   좋아요 3 | URL
날 끊고 괭이 과연 살 수 있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담달에 사요. 이 작품이 주디스 헌 주정뱅이 이야기보다는 재밌습니다.

독서괭 2023-06-22 17:55   좋아요 3 | URL
내가 책을 끊지 잠자냥을 끊겠냐!! 북플을 하는 이상 자냥님을 팔로우 할 것이고 자냥님이 있는 이상 북플을 계속 할 것이옵니다..(아멘)

은오 2023-06-22 18:26   좋아요 2 | URL
동의합니다! (잠멘) 잠자냥님을 끊느니 밥을 끊으리....

독서괭 2023-06-22 18:31   좋아요 2 | URL
워워, 전 밥은 안 끊을 거예요!!!

은오 2023-06-22 18:39   좋아요 1 | URL
아니 저도 다시 생각해보니까 밥은 좀.... (괭님덕에 되찾은 이성)

다락방 2023-06-22 20:31   좋아요 3 | URL
밥은 좀 너무 갔는데?? 🤔🤔

잠자냥 2023-06-22 22:19   좋아요 0 | URL
잠멘이래 미쳐 ㅋㅋㅋㅋ 밥은 끊지 마요. 다들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3-07-10 23:10   좋아요 2 | URL
^^ 자냥오별...오! 자냥오별! 묘하게 어울리는 네글자네요. 괭님의 언어쏀스에 엄지척!!!

최소한의 양심, 지키고자 하는 의지...
어린 소녀였던 아모르가 어떻게 지켜내는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소녀의 사람됨에 작가가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과연 백인 작가들의 고발(?)이 어떤 파급력을 갖는지....좋은 책이겠어요

잠자냥님, 이달의 리뷰 축하드립니다!

은오 2023-06-22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모르야 니가 어른이다 ㅜㅜ

잠자냥 2023-06-22 22:22   좋아요 0 | URL
라딘에서 은오가 그런 젊은이가 되시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6-22 20: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약속은 여자의 모든것 이라 생각합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넘나 싫고요,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쓰며 기어코 지켜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사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마..)
알라딘에 잠자냥 님이 계셔서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밥을 더 좋아합니다.

그럼 이만.

잠자냥 2023-06-22 22:21   좋아요 0 | URL
역시 의리 다락방 ㅋㅋ
모름지기 사람은 밥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순댓국에 퐁덩 넣을 그 밥….!

이 인간 오늘 술 안 먹었다는데 왜 마신 거 같지?

달자 2023-06-2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장바구니에 넣어놨는데, 혹여 이야기가 소위 ‘피씨한 백인의 서사‘ 중심으로 흘러갈까봐 망설이고 아직 사지 않았거든요. 독서하시면서 그런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았나요?

잠자냥 2023-06-22 22:18   좋아요 1 | URL
으음 제 리뷰에서 혹시 그런 느낌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에서 딱히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소녀 아모르가 읽다 보면 좀 흑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달자 2023-06-23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거 아니고 출판사의 책 소개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봤어요 혹시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아닐까..! 리뷰 감사합니다 덕분에 책을 읽고 싶어 졌어요...!

잠자냥 2023-06-23 17:04   좋아요 0 | URL
네~ 재미나게 읽으세요, 달자 님은 또 다른 시건으로 이 책을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3-06-23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잠자냥님의 별 다섯개 믿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딘 고디머, 쿠시 좋았기에 장바구니로!

잠자냥 2023-06-24 01:09   좋아요 1 | URL
네 그 작가들 작품을 좋아하셨다면 이 책도 재밌게 읽으실 거 같아요.

얄라알라 2023-07-10 23: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께서도, 괭님의 ˝자냥오별˝을 말씀하시네요 ㅎㅎㅎ
 
한밤중의 꽃향기 -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과 함께한 침묵의 고백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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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기 위해 떠난 곳에서 도리어 자유를 만나다-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글쓰기와 문학에 관한 깊고 진솔한 이야기- 미술보다 글쓰기에, 문학에 꽂힌 이들이라면 밑줄 긋고 여러 번 되새길 문장이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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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20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사기를 잘했군요! 후훗.

잠자냥 2023-06-20 11:0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살포시 별 넷 예상?

다락방 2023-06-20 11:21   좋아요 1 | URL
저도 어쩐지 읽기전부터 별 넷 예상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6-20 11:36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 작가 참 글을 잘 쓰긴 합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3-06-20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냥 오별, 저도 사기를 잘했군요 ㅎ

잠자냥 2023-06-20 13:13   좋아요 0 | URL
전 그림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과 글쓰기 이야기라 더 좋았어요.

그레이스 2023-06-2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괜찮나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망설이기만 하는데...

잠자냥 2023-06-24 01:09   좋아요 1 | URL
시리즈 전체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좋았습니다.
 
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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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했지만 지킬 수 없었던, 혹은 지키고 싶지 않았던 어떤 약속에 관한 이야기. 한 집안의 흥망성쇠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등 남아프리카공화국 현대사의 면면이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부커상을 믿게 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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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9 13: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휴
제가 이미 가진 책 중에서 좀 읽어주세요. 자꾸 새로 사게 만들지 마시고 ㅠㅠ

잠자냥 2023-06-19 14:09   좋아요 2 | URL
응? ㅋㅋㅋㅋㅋㅋㅋ 천천히 사! ㅋㅋㅋㅋㅋㅋ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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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면 살인과 자살이 치솟는다는 사실을 통계로 보여준다. 놀랍게도 공화당 집권 시기에 그 그래프는 치솟는데…. 실업과 불평등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결국 죽이거나 죽거나. 과연 한국이라고 다를지? 다만 결론을 정해놓고 논리를 펼친듯한 느낌이 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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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프, 바이 더 시 - 조이스 캐럴 오츠의 4가지 고딕 서스펜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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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에 이 책을 다 읽고 약간 기운이 빠져 있었더니 집사2가 무슨 책을 읽었기에 기분이 나쁘냐고 물었다. 오츠의 책인데 이러저러하다 말하다가 “아니, 왜 여자들은 쓰레기 만나서 그렇게 당하고 또 쓰레기를 만나는 거야?”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소설인데도 왜 이렇게 빡치는 것일까. 무슨 내용이냐고 묻기에 이 책에 실린 4개의 중편 중 쓰레기를 피해 또 다른 쓰레기에게로 자진해 걸어가는 여성이 등장하는 <환영처럼: 1972>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피해자 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집사2에게 ‘너니까 하는 말이지만…’ 하면서 정말 답답한 피해자를 탓하는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환영처럼: 1972>의 ‘앨리스’도 나를 빡치게 한 답답한 여성이다. 앨리스는 이제 스무 살 대학생이다. 똑똑하고 예쁘다. 그래서 그런지 당장 철학과 강사의 눈에 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수순으로 그놈은 앨리스에게 접근한다. 쏟아지는 온갖 칭찬- 너의 재능, 너의 미모, 너의 뛰어남, 너는 다른 학생과 다르다....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은데 차나 한잔? 이런 순서들- 열아홉에서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는 좀 지적이고 섬세한 거 같고 예민해 보이는 똑똑한 남자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더불어 외모를 칭찬해주면 대개는 귀가 번쩍, 눈이 번쩍 솔깃솔깃해져서 기분이 방방 뜨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그런 허영쯤은 누구나 갖고 있고 또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 간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속성을 잘 아는 놈들은 늘 그런 부분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런 강사 놈 같은 놈 말이다......지금도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강사와 교수가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나이로는 성년이지만 머릿속 관념이나 생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이 어린 학생 앨리스는 그의 추켜세움에 넘어가 그와 차를 마시려고 하고, 많은 카페와 음식점을 놔두고 차를 왜 집에서 마셔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에까지 가게 된다. 안 돼, 앨리스! 제발 돌아가! 내가 샤프롱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놈 집에서 단둘이만 남게 되니, 당연히 그놈은 본색을 드러낸다. 차를 마시자더니 왜 앨리스의 몸을 왜 쓰다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놈의 손길은 바빠진다. 당혹한 앨리스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며 뒤로 물러나자 그놈은 기분이 잡친 듯 말한다. 내숭 떨지 말라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건 너도 동의한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 비웃고 조롱한다. 야, 이놈아. 뭘 동의해! 차 마시겠다고 했지 몸 섞는다고 동의했니! 그러나 앨리스는  어린 여성- 그 앞의 남자는 자신을 가르치는 강사- 학점도 그놈 손에서 나오겠지. 결국 일은 그렇게 벌어지고 만다. 그놈은 몇 번 더 앨리스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런 쓰레기들이 늘 그렇듯이 이제 앨리스를 모른 체한다.

에휴.......... 답답해. 그런데 이런 사이에서 수정은 또 얼마나 잘 되는지. 앨리스는 덜컥 임신을 하고 만다. 이 작품의 제목은 <환영처럼: 1972>- 1972년이 배경이다. 낙태가 불법인 시절- 앨리스는 끊긴 생리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제발 자고 일어났을 때 침대에 피가 묻어있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 헛된 기대의 나날을 보내는 사이 몸은 점점 불어나고, 앨리스는 전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절로 생각난다). 그래도 학교를 아예 안 나갈 수는 없어서 힘겹게 수업을 듣는 중 영문학 시간이었나, 한 시인의 강의를 듣다가 또 일이 벌어지고 만다. 시인이자 늙은 교수의 질문에 영특한 앨리스는 남들과 좀 다른 대답을 하게 되고 그러는 바람에 이 늙은이의 눈에 또 띄고 만다. 휴... 이 장면에서 샤프롱 본능이 발동한 나는 앨리스에게 대답하지 말거나 평범하게 답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앨리스는 말을 해버렸어.


아니나 다를까 이 늙은이는 앨리스의 답변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벌어지는 일들은 젊은 강사놈의 비열한 시즌2 또는 늙은 교수의 변주곡이다. 늙은이는 앨리스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그놈의 집, 그놈의 차! 아니 제발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라고!!! 아니면 학교 매점이나 카페 없어?!) 시와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영특한 그녀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환심을 산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강사놈처럼 다짜고짜 몸부터 덮치려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을 들인다(나이가 들어서 그건 좀 무리겠지....). 너는 재능이 있으니 내 일을 도와다오. 보수는 넉넉히 주마. 우리는 문학과 시에 관해 지적으로 충만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등한 친구 사이다 운운.... 아니 교수님 근데 왜 느닷없이 앨리스 입에 혀를 넣으시나요? 친구끼리 누가 혀를 넣는다고.

그런 중에도 앨리스의 몸은 불어가기 시작하고 늙은이는 세상살이에 이미 만랩이라 앨리스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쉽게 짐작한다. 그래서 그 약점을 공략한다. 경제적인 지원, 그리고 결혼해서 그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울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 1972년, 낙태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비혼모로 살아가기는 더 쉽지 않은 상황- 궁지에 몰린 앨리스에게 그의 제안은 쉽사리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다. 저런 불량식품인데.... 먹지 마. 앨리스 아니야, 그 이상한 나라에서 도망쳐! 소리쳐 보지만 이 책 밖의 샤프롱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리가 없다. 드디어 이 앨리스가 자기의 손아귀에 넘어왔다고 생각하여 흥분한 영감탱이는 욕실에 들어가서 무슨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산스러운데 그 틈바구니에 넘나 흥분했는지 안 그래도 고장 났던 심장이 덜커덕 문제를 일으킨다. 아이고야, 이 앨리스의 앞날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카디프, 바이 더 시》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대부분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상태는 대학 강사, 교수의 그루밍에 의해 성폭력 희생자가 되는 앨리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가정’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 남성들은 모두 이 작품 속 여성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다. 힘이나 나이 등 물리적 상황 및 심리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답답한 작품을 읽은 후에 <정희진의 공부> 6월호를 듣는데 때마침 ‘학습된 무기력일까? 희망일까?’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정폭력이든 학교폭력이든 데이트폭력이든 우리는 대부분 피해자가 무기력에 빠져서 그러니까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희진은 도리어 그런 상황 속의 피해자들은 ‘학습된 희망’ 때문에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 사람이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술을 마셨을 때만 저러는 거야, 원래는 착한 사람이야.’ ‘내가 바꿀 수 있을 거야’ ‘나 아니면 저 사람을 바꿀 수 없어’ ‘저러다 말 거야’ ‘좋은 사람이니까 달라질 거야, 바뀔 거야’ 이런 희망고문 같은 것들- 가정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자신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언젠가는 바뀔 거라는, 자신(만)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못해서 결국 더 큰 희생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카디프, 바이 더 시》의 대부분의 여성들도 그렇다. 운 좋게 벗어난다 한들 그 트라우마와 불안 공포는 평생 그녀들을 따라다닌다. 살아있어도 삶은 지옥이다.

여자들아,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면 도망쳐라....... 당신은 그를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그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당신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언젠가는 그가 바뀔 거라는 희망은 결국 당신을 무덤으로 이끌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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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3 15: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 제가 너무나 싫어하는 이야기네요. ㅠㅠ 리뷰만 읽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젊은 교수도 그렇지만 저 늙은 교수도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데 너무 짜증납니다. 그 상황에 넘어가는 여자도 너무 답답하고, 저는 그렇게 자신의 힘을 인지하고 그걸 성착취에 써먹는 놈들에게 너무 침뱉어주고 싶습니다. 교수라서, 직장 상사라서 휘두를 수 있는 그 힘. 아 세상 싫으네요 진짜. 환멸 … ㅠㅠ

잠자냥 2023-06-13 15:54   좋아요 2 | URL
다락방 님이 안 좋아하실 거라고 그랬잖아요. ㅎ
저 단편 말고도 다른 단편에서는 의붓아버지가 어린 딸 성착취하려고 하고.....
가족 살해 후 자살하는 애비에.. 난리도 아닙니다. -_-
대학에서 저런 일 일어나는 거 지금도 여전히 ing라 진짜 답답해요........

건수하 2023-06-13 15: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우, 저 조이스 캐롤 오츠 안 읽어봤는데... 읽고 싶지 않으면서도 읽고 싶네요.

정말 <사건> 생각나고.. 저런 남자들 어찌나 많은지.. 특히 대학교, 대학원에서 말이죠.
교수 직업 윤리에 <섹스할 권리>의 챕터 제목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포함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대학생이 성인이라고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겠죠? 흥.. 누가 누굴 생각해 주나.

잠자냥 2023-06-13 15:57   좋아요 1 | URL
읽고 싶지 않으면서도 읽고 싶은 그 기분이 딱이네요. ㅎ 저는 이미 읽어버렸고-
저 대학 다닐 때도 저희 과 전공 강사와 학생 사이에 저런 일이 있었어서 더 빡쳤던 거 같아요..... ㅠㅠ
학생들아, 젊은 강사나 늙은 교수나 제발 피해....... 학교 안에서만 만나..... feat. 샤프롱 자냥

Falstaff 2023-06-13 16:10   좋아요 3 | URL
캐롤 오츠,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대중 소설 작가입니다. 근데 괜찮은 작가라서 저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대중소설도 좋아합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잘 쓰는 작가인데 유독 애매한 부분이 돌출된다는... 뭐 그런 겁니다. 학생들하고 지퍼 터지는 섹스하는 건 사실 필립 로스하고 존 쿳시가 더 한 거 같습니다. 뭐 굳이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쿳시의 <추락>도 마찬가지고요.

잠자냥 2023-06-13 16:21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 님이 제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데 오츠를 계속 읽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셨네요!

다락방 2023-06-13 16:33   좋아요 3 | URL
추락은 그래서 다시 읽고 싶은데 다시 읽기 싫은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되게 노골적이잖아요. 교수였을 때는 여대생 성착취 가능하지만 교수란 직함을 잃고 나면 나이든 육체노동자 여성과 섹스를 하는. 저 오래전에 되게 좋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저 존 쿳시 좋아했었는데 …

망고 2023-06-1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조이스 캐롤 오츠 좋아하는 작가라 이 책 샀는데(읽진않음^^)역시나 오츠여사 스타일의 소설이군요 꽉 막힌 답답한 상황 묘사를 너무나 숨막히게 잘 하는 작가라 읽고나면 한동안 기 빠지게 만들죠 그래서 중독성 있어요ㅎㅎㅎ저도 얼른 읽어봐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3-06-13 22:20   좋아요 1 | URL
오츠 팬 당연히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망고 님 말씀처럼 중독성도 있고요. 그러니까 계속 읽게 되는…. 망고 님도 얼른 읽으세요!

moonnight 2023-06-13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배송되어 온 책이에요. 이런 내용이었군요ㅠㅠ 오츠 여사님 책은 읽고 나면 멘붕 오는데도 꼭 사게 됩니다ㅠㅠ

잠자냥 2023-06-13 22:41   좋아요 2 | URL
음 이 단편은 세 번째 이야기고요. 다른 단편들은 또 분위기가 많이 다르니 재미나게 읽으세요. 이 작품도 끝은 어찌되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은오 2023-06-14 0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버 짝사랑러 은오 1승

잠자냥 2023-06-14 09:56   좋아요 1 | URL
은오야 땡투 또 잘 받았니?
페이퍼에 건 거라 무슨 책인지 모를 터인데 ㅋㅋㅋㅋㅋ 책 사는 데 보태렴!

은오 2023-06-14 06:2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굿모닝!! 😘 210원 들어왔던데 그렇다면 20,700원짜리 인정투쟁이 아닐까요? ㅋㅋㅋㅋ 가격으로 추측 가능 키키키킥
안그래도 아까 급박해져서 적립금 마일리지 긁어긁어모아서 책 살때 보탰습니다! 🙆‍♀️

잠자냥 2023-06-14 08:45   좋아요 2 | URL
역시 영특하도다

페넬로페 2023-06-1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글을 잘 써도 이제 이런 책을 읽기가 좀 힘들어요 ㅠㅠ

잠자냥 2023-06-14 22:10   좋아요 0 | URL
네 심정적으로 참 힘든 작품입니다…

구단씨 2023-06-15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드라마나 소설, 티비 고발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쓰레기 만나서 인생 힘들어졌는데, 또 쓰레기를 만나네. 어떻게 그러지?
그런데요. 가까운 사람이 자기 가족의 보이스피싱을 막아주고 그 가족을 나무랐는데,
세상에나 그 사람이 보이스피싱 당해서 돈 날릴 뻔한 걸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알았어요.
그 낌새가 조금 이상해도 마음이 향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요.
물론 우리는 언제나! 그 낌새를 알아채고 조심해야 합니다!!!

잠자냥 2023-06-15 20:4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나는 아닐 거라고 장담 못할 세상! 경계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살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