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4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시행되었던 흑백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우월주의에 기반한 이런 차별적인 체재 하에서 살았던 백인들은 모두가 흑인과 섞이지 않아서 좋다, 하며 이 체제를 반겼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불편한 마음이 들지언정 개인적으로 힘이 없어서,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아서 또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서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포기한 백인들도 많을 것이다. 아니면 흑인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행동 등으로 윤리적 죄책감을 덜거나 하는 백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약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아모르’가 그런 백인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공고한 1986년, 열세 살 소녀 아모르는 엄마, 아빠, 오빠,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는 작품의 시작부터 시련이 닥친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아모르의 엄마는 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을 하다 결국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 마음껏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모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아빠 ‘마니’에게 확답을 받기도 전에 아모르는 흑인 하녀 살로메의 아들 ‘루카스’에게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만다. 아모르의 이 당당한 선언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 마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이 아플 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살로메에게 무언가 꼭 주고 싶다고. 그러니까 살로메가 지금 살고 있는 집-그래봤자 방 세 칸짜리의 허름한 양철 판잣집-을 꼭 그녀에게 주겠노라 ‘약속’해달라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간절히 부탁한 것이다. 마니는 알겠노라, 약속한다. 그런데 이 장면을 때마침 그 방 안에 있었던,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아모르는 가족 중에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 소녀가 목격한 것이다. 아모르는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한 그 약속을 아빠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또래인 루카스에게 장담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아모르는 이 집에서 가장 선하고 윤리적인 존재다. 그 선함은 가장 어리다는, 그러니까 세상의 때를 덜 탔다는 것에서 비롯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빠 ‘안톤’이나 언니 ‘아스트리드’에 비해 존재 자체가 희미한, ‘모든 사람의 시야 가장자리에 있는 하나의 얼룩으로 취급받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어리고 너무 철이 없는’ 그런 아이- 게다가 아모르는 오빠나 언니에 비해서 온전히 사랑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죽은 엄마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아빠인 마니는 막내딸을 늘 자기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오곤 했다. 이렇듯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는 ‘유령’ 같은 아모르였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살로메의 처지를 누구보다 공감하며, 그녀의 생활이 어떻게든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가 가여운 살로메에게 꼭 집을 주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아빠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니 꼭 엄마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순진한 아모르는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루카스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유언, 엄마의 부탁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약속>은 전혀 다른 스토리로 흘러가거나 단편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양철 판잣집을 부유한 백인 농장주가 까짓 줘버리면 그만 아닌가! 싶은데 마니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처음에는 법이 그를 돕는다. 그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이 땅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아내의 유언을 지키고자 살로메에게 집을 넘겨주려고 해도 법이 허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법은 둘째 치고 마니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다. 아모르가 엄마의 유언대로 살로메에게 집을 줘야 한다고, 아빠 약속 지킬 거죠? 내가 다 봤어요. 아무리 말해도 마니는 답을 피하거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딸을 쳐다볼 뿐이다. 그 소리를 들은 마니의 누나, 그러니까 아모르의 고모도 길길이 뛰기는 마찬가지이다. 쟤가 무슨 헛소리야! 쟤는 늘 저러더라! 얼룩처럼 희미한 이 어린 소녀의 주장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파급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마지막 부탁인 이 약속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약속>은 아모르가 십대 소녀에서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고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집을 다시 찾아와야만 했던 몇 번의 사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30여 년 간의 스와트 집안의 흥망성쇠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 변화 모습이 그려진다. 아모르가 커가는 그 사이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흑인인 만델라가 이끄는 정부가 들어서는 등 변화의 조짐은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유령 같은 존재인 살로메에게 그 다 쓰러져 가는 집 한 칸은 여전히 주어지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문득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본디 흑인들의 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느 날 그 땅에 나타난 백인들이야말로 무단으로 그 땅을 차지하고는 제멋대로 흑인과 생활 터전을 분리하고, 좋은 곳은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는 본래 흑인들의 땅이자 그들의 터전이었던 곳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런 중에도 아모르처럼 최소한의 양심, 최소한의 윤리, 최소한의 죄책감을 지닌 이들이 그 백인 사회 내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 지키고 싶었어도 한때는 지킬 수 없었던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아모르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현실 속의 아모르 같은 이들 그러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이런 작품을 쓴 백인 작가들-데이먼 갤것을 비롯해 나딘 고디머, 쿳시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이 체제가 부당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한번쯤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환멸을 느끼고, 가족들의 행동이, 백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떠난 아모르- 그녀는 탐욕으로 부패한 그 백인들의 농장을 떠났기에 그 선한 마음을 계속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모르의 삶의 이력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떠나는 것인 동시에 자기 집을 떠나는 것”(레일라 슬리마니, <한밤중의 꽃향기>, 73쪽)이라는 구절과도 통한다. 집에서의 안락한 삶을 벗어나 자기로서 존재했던 아모르, 희미한 얼룩 같았던 한 소녀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윤리와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싶어진다.
“전 변호사에요.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모르가 말한다. (<약속>, 4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