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미셸 포르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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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책 읽기에 관한 짧지만 깊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생각들. 그녀의 작품 전반에 대해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준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 글쓰기가 ‘진정한 나만의 장소’라는 말 진심으로 멋진 말 아닌가. 이 인터뷰를 읽으니 그이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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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산 파블로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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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이 커피가 궁금해서 책을 주문했달까... 평소 만델링을 좋아하는 편인데, 만델링의 묵직함과 뒷맛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이 적절하게 뒤섞여 있다.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추천. 올 여름 아이스커피로 많이 마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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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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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슈테판 츠바이크. 그의 신간 <감정의 혼란>이 매우 아름다운 자태로 출간되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장바구니에 담다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왠지 이 익숙한 제목..... 분명 내가 읽었을 거 같은데? 검색해 보니 1996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으음, 그럼 그렇지, 이걸 내가 안 읽었을 리가 없어. 한때 츠바이크에 푹 빠져서 그의 소설 중 국내에 출판된 책은 거의 다 찾아서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이 책도 그랬으리라. 그런데 확신이 들지 않아 미리보기를 했는데, 왜 이토록 새롭지? 안 읽은 작품인가? 이상하다 싶어서 결국 주문했다. 책을 받아서 지난 일요일 늦은 밤에 펼쳤는데, 으음, 흥미진진하다. 그러는 한편으로 내가 왜 이 책을 안 읽었던 것일까? 궁금한 생각도 든다. 어쨌든, 정말 재미있네? 계속 책장을 넘긴다. 이미 밤 열두시가 넘었다. 내일은 월요일이야, 그만 자! 싶은데 어느덧 100쪽을 넘겼고 이제 한 100쪽만 읽으면 돼! 그러니까 그냥 다 읽자 싶어졌다. 결국 2시간 남짓해서 이 책을 끝냈다. 아마 <감정의 혼란>을 무심코 집어 들어서 조금이라도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멈추지 않고, 아니 멈추지 못하고 한 번에 읽기를 마칠 것이다.

이 작품은 30년 넘는 세월 동안 교수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늙은 학자 롤란트가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젊은 날의 기이한 경험을 고백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는 대학생이 된 첫 무렵에는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책과 학문을 매우 중요시하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에서 그는 도리어 학문을 멀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롤란트를 찾아온다. 방탕한 아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만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크게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뭐라 말할 수 없는 경멸 어린 시선과 침묵만이 아들과 마주한 방 안에 감돌뿐이다.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방문으로 롤란트는 몇 개월 동안 방탕으로 점철된 시간들이 무의미하고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모든 저속한 향락들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신적인 것, 학업에 온 힘을 쏟아 보고자 마음먹는다. 롤란트에게 어느덧 ‘진지함, 냉철, 훈육, 엄격함’에 대한 갈망이 싹튼다. 그리고 그는 우연한 기회에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고 문학과 시, 예술이라는 세계에 홀린 듯 빠져든다. 이때 그를 그토록 매료시킨 장본인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 강의를 압도적으로 이끌던 한 사람.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영문학 교수였다. 롤란트는 그 교수의 강의에 반해 그를 따르게 되고, 교수 또한 롤란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그와 함께 지적 교류를 해나간다.

그런데 이 교수에게는 좀 이상한 면이 있다. 어느 날은 강의가 굉장히 좋은데 또 어떤 날은 형편없기 짝이 없다. 어제 그토록 신들린 듯한 강의를 했던 사람이 오늘의 저 지루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교수에 대해 궁금해진 롤란트는 그가 쓴 책들을 찾아보기도 하는데, 저작 또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학문적으로 딱히 주목받지 못할 그런 저작들이 고작 몇 권 존재할 뿐이며 그나마 어떤 저서는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다. 학문적인 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수는 어느 땐 롤란트에게 한없이 다정다감하면서도 또 어떤 날은 차갑고 비정하기 짝이 없다. 롤란트가 언제나 그를 ‘언어의 전령이자 창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존재’로 생각하며 높이 받드는 것과 달리 교수에게 롤란트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인 것만 같다. 롤란트에게 교수는 ‘무의식중에 그를 뜨겁게 만들어 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이며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이기도 하며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사람’이다. 이런 교수에게 롤란트는 수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과 숭배로 그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교수와 아내의 관계 또한 기묘하다. 둘 사이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교수는 아내가 있을 때는 자신의 학문적 계획이나 연구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롤란트가 보기에 교수보다 한결 젊은 그의 아내는 책과 집안 형편 같은 것, 폐쇄적인 것, 조용한 것, 차분한 것에 대해서는 도통 감각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흥얼거리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춤을 추거나 수영을 할 때, 달리기를 할 때처럼 육체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몸을 움직일 때 가장 기분 좋아 보인다. 즉 그녀는 남편의 정신적인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며, 육체와 물질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싱그러운 에너지가 넘치고, 롤란트에게 친절한 그녀임에도, 남편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날이 서서 비꼬곤 한다. 그러나 롤란트는 그런 그녀가 싫지는 않다. 한때 방탕하게 지내면서 육체적인 것, 자연의 세계가 주는 쾌락에 탐닉했던 그였기에, 여전히 몸을 움직이며 자연을 누리는 행복을 무시하기 어렵다. 곧 롤란트는 교수 못지않게 그의 아내에게도 호감을 느끼게 되고,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교수의 아내는 롤란트에게 무언가,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멈칫하는 순간이 종종 일어난다. 롤란트는 이 두 사람의 삶에 조금씩 개입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몰아간다.

<감정의 혼란>은 츠바이크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교수와 그 아내의 비밀스러운 삶, 그리고 그 두 사람으로부터 크게 영향받는 젊은 대학생 롤란트- 이 세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신세계와 육체적인 세계, 즉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파장을 집요하고도 숨 가쁘게 그려 나간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교수의 정체(?)이다. 롤란트가 스탕달증후군을 느낄 지경으로 홀딱 반할만한 강의를 해놓고도 그다음 날은 거의 쓰레기와도 같은 무력한 강의를 하는 그. 젊은 학생들에 둘러싸여 강의할 때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으면서도 홀로 작업한 저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롤란트를 매우 아끼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제자가 거의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차갑게 구는 그. 어느 날 훌쩍, 예고도 없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그. 아내와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토록 서로 차갑고도 먼 사이로 지내는 것일까? 롤란트가 교수에 대해 궁금한 것 못지않게 독자 또한 그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지, 아니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책장은 멈추지 않고 넘어간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이 교수는 혼자서는 타오를 수 없는 촛불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공기든, 혹은 불꽃을 붙여줄 만한 작은 불씨든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타오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숭배하는, 자기의 학문적 열정과 거기서 비롯된 연구 결과를 높이 사는 한 젊은 청년, 그러니까 불꽃이 될 만한 존재가 나타나자 그는 다시 생기를 얻어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롤란트에게 교수가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교수의 아내는 육체와 감성, 자연의 세계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끊임없이 정신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롤란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는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말을 아끼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이 세 사람 모두에게 나름의 연민이 든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덧1) 아주 오래전 메모를 뒤져보니, 나는 2011년에 <감정의 혼란>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더라. 고작 8년 만에 이렇게 책 내용을 깡그리 잊고서 완전히 새로운 책처럼 읽다니..... 나란 인간의 기억이란 참.... 집에 책도 없고, 거기다가 리뷰도 남기지 않았으니 이 책에 대해 더 기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책은 사서(응?) 읽고, 리뷰나 짧은 평이라도 꼭 남겨둬야 한다. 물론 이렇게 두 번, 세 번 읽어도 좋은 책이 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지만 말이다.

덧2) <감정의 혼란>은 책 만듦새도 예쁘고 츠바이크 책이라 소장 가치도 충분히 있어, 이 책을 산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띄어쓰기가 조금 엉망이다. ‘~처럼’을 띄어 쓰질 않나. ‘~커녕’을 띄어 쓴 부분도 보인다. ‘세 들다’ ‘세들다’처럼 어느 부분은 띄어 쓰고 다른 부분은 붙여서 쓰기도 했다. ‘때 마다’처럼 ‘마다’를 띄어 쓴 부분도 보인다. 나는 띄어쓰기 같은 부분은 예민하지 않게 넘어가는 편인데도 너무 많이 눈에 들어와서 조금 짜증 나더라. <감정의 혼란>이 아니라 <교정의 혼란>이라고나 할까……. 이 출판사의 발자크 <미지의 걸작>도 사둔 채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도 그 모양이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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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6-0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1)은 절대 공감입니다.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새 책 읽는 느낌인지. 근데 이런 책 다시 읽을 때마다, 읽어가면서 생각이 날 거야, 라고 허튼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ㅋㅋㅋㅋ

잠자냥 2019-06-07 12: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렇죠? 저도 읽으면 다시 생각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생각 안 나더라고요! 나참 ㅋㅋㅋㅋ 심지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몇 년 뒤에 또 빌리고 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2019-06-11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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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가슴 시린 이야기. 놀랍도록 정교하게 짜인,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완벽한 스토리. 섬세하고 아름답고 먹먹하다... 다 읽고 나면 그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게 된다. 창밖에 비가 내리는지 내 마음에 비가 내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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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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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인가 문학동네에서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그걸 한 번에 다 읽어치웠다. 동생이 생일선물로 뭘 해줄까 물었을 때, 때마침 나왔던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을 몽땅 사달라고 했던 것 같다. 모두 다섯 권. 그때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한 권이 더 나왔다. 게다가 제목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란다. 7년 전과 달리 요즘 내 일상에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때는 고양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고양이가 만날 내 곁에서 자고 함께 일어나고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 사이 나는 집사가 되었다. 그저 집사가 되고 아니고의 차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7년 전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요즘의 나는 밖에 있다가도 문득 우리 고양이가 보고 싶어질 만큼, 길에서 만나는 길고양이들은 모두 귀엽고 불쌍할 만큼, SNS에서 팔로우하는 것은 거의 다 고양이일 만큼 고양이 환자가 되었다. 그런 내게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제목은 혹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하루키 에세이가 아닌가.


고백하건대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은지는 꽤 됐다. <1Q84>니 <기사단장 죽이기>니 모두 읽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장편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마지막이다. 아마 이 책을 덮으면서 으음, 이제 하루키의 소설, 적어도 장편은 그만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장편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그런 주제(!)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버스데이 걸>은 읽었는데 이것도 딱히 좋지 않았다. 영화 <버닝> 때문에 <반딧불이>에 수록된 ‘헛간을 태우다’까지는 다시 읽어볼까 했는데, 그것조차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읽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하루키가 쓴 소설을 읽는 날이 올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매우 드물기는 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는 제법 꾸준히 읽고 있다. 하루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일상의 소소한 재미랄까 대단하지는 않은 행복이랄까 이런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두부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하루키 에세이는 그 심심한 두부의 맛에 견줄 만하다. 별 것 아닌데 괜히 계속 집어 먹게 되는 그런 맛이랄까. 게다가 그의 소설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요소, 예를 들자면 온갖 여성 등장인물들이 별 매력도 없는 남주인공을 하나 같이 다 좋아하거나 그와 함께 자려고 드는, 결국 그래서 다 섹스하게 되는(나는 이걸 하루키 판타지라고 부른다), 그런 설정이 에세이에서는 없으니까(하루키도 에세이에선 그럴 수가 없겠지) 그런 점 때문에라도 그의 에세이를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하루키는 어떤 면에서는 본받을 만한 점도 꽤 많다. 달리면서 자신을 관리한다는 점이라든가(물론 그는 그걸 관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문단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점이라든가, 싫은 건 곧 죽어도 거절하고야 마는 외돌토리 같은 성격이라든가 등등. 이런 점은 한 작가, 아니 한 인간으로서 그를 돋보이게 만든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어쩌면 나는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설 속의 그 허황된 왕자병 기질 남주인공들보다 하루키라는 작가가 차라리 인간적으로는 더 매력이 있기에, 그의 에세이를 나오는 족족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는 그런 하루키가 오랜 시간 함께한 고양이 ‘뮤즈’와의 일화가 실려 있다고 하기에 더욱 솔깃해서 읽게 되었다. 책장을 몇 쪽 넘기지 않아도 곧 아, 이게 하루키 에세이지 하는 생각이 단박에 든다. 야구, 맥주, 음악, 달리기, 책, 글쓰기 등등 하루키하면 떠오르는 일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 그러나 그렇기에 익숙하고 친근감 있는 생활(‘삶’이 아니다 ‘생활’이다). 거기에 고양이와의 일상이 덧붙여졌다. ‘뮤즈’와 관련된 이야기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책장을 넘겨보니 거의 중반쯤에 가야 볼 수 있다. 이것부터 읽을까? 유혹을 느끼지만 맛있는 것은 나중에 먹으려는 심산으로 일단 참는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아무튼 하이라이트는 고양이 뮤즈와 얽힌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껴두자. 그러고는 읽어나간다. 큭큭, 낄낄 웃게 되는 이야기가 많은데, 몇몇 일화에서는 정말이지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특히 ‘필명을 쓸 걸 그랬나 싶지만’에서 빵 터졌다. 하필이면 피부과와 성병과를 함께 진료하는 병원에 간 하루키가 겪은 일화인데, 궁금한 분은 직접 읽어보시라-

그렇다고 웃기기만 하느냐 하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문단의 병폐나 학교의 체벌 문제 등을 비판하기도 하고, 상처받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때로는 감동으로 뭉클해지는 순간도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받은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하나는 ‘뮤즈’와 얽힌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달리기와 얽힌 이야기인데, 그중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읽다가는 조금 울컥했다. 하루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마라톤 선수를 떠올리며 ‘그가 치렀던 고생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부분에서는 왠지 나도 울 것만 같았다. 하루키의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서……. 뮤즈가 출산할 때면 꼭 하루키 손을 붙잡고 새끼를 낳는 바람에 하루키 아내가 “걔들, 혹시 당신 아이 아니야?”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는 큭큭 웃음이 터지다가도, 뮤즈와 하루키만의 교감,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에서는 가슴 뭉클해진다. 그 느낌을 나 또한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출산은 아니지만 내가 우리 고양이들 중성화 수술을 하러 몇 번씩 병원을 오갈 때마다 느꼈던 녀석들과 나 사이의 믿음이랄까. 하루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를 느낀 것이다.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여행갈 때면 체호프 전집을 가져간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하루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단편소설 중심이라 끊어 읽기 쉽다. 어느 작품이나 완성도가 높아서 실망하는 일이 거의 없다. 문장이 읽기 쉽고 담박하면서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향취가 충만하다. 혹 누가 제목을 보더라도 ‘체호프를 읽는다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군’이라고 생각해준다. 몇 번씩 읽어도 질리지 않고 매번 새롭게 작은 발견을 한다.”(239쪽) 체호프 작품은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을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듯한 그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다는 이야기, 일본 편의점이나 상점에서 흔히 쓰는 이상한 표현 ‘맡아두겠습니다’라는 말이 싫다는 이야기(우리나라로 치면 ‘십만원이십니다’ 또는 ‘설렁탕되십니다’처럼 가격이나 음식에 경어를 붙이는 표현을 거북해하는 것쯤 될까?) 등등. 손님 없는 초밥집에서 초밥을 주문해 먹을 때의 그 어색하고도 긴장되는 분위기를 묘사한 구절에서는 ‘나도! 나도!’를 외치게 된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하루키이지만 한때는 3만 엔이 없어서 아내와 함께 거의 울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고(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탈모 때문에 걱정하기도 하며, 글 쓰라고 호텔방을 빌려줬는데, 방 안에 있던 어떤 물건 때문에 글을 통 쓰지 못한 이야기 등등은 인간 하루키를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게다가 그가 레이먼드 카버를 만난 일화는 꽤 부럽기도 하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이렇게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하루키의 에세이의 장점이 잘 드러난 책이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느긋한 기분으로 캔 맥주 하나를 따서 홀짝홀짝 마시며, 곁에서 잠든 고양이의 포근한 궁둥이를 쓰다듬으면서 읽으면 딱 좋을 그런 에세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뮤즈’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다. 뮤즈가 장수한 비밀 대공개! 이런 정도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밀도 딱히 없는 듯해서 조금 섭섭했습니다, 하루키 씨. 그래도 책을 덮을 즈음엔 내가 책을 읽을 때나 뭔가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거나 컴퓨터 자판을 탁탁 칠 때면 늘 훼방을 놓는 나의 막내 고양이를 조금은 더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으음.




집에 있던 하루키 에세이 윗부분에는 우리집 고양이들 털이 살포시 앉아 있군요.... 으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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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0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다보니 이미 다른 에세이집에서 읽었던 것들이 겹치는 것 같네요. 극장 자막 얘기 부분 다른 에세이에서도 읽었거든요. 그렇다고 안읽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사겠습니다! ㅋㅋㅋㅋ 아 그런데 좀 나중에.. (하아-)
저는 오늘도 예스에서 주문한 책이 왔어요 ㅠㅠ 단 한권이긴 하지만요..

잠자냥 2019-06-04 17: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책 사느라 숨가쁘신 이분 ㅋㅋㅋ 숨 좀 돌리세요!
이 책 보니까 <비밀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개정판이라고 하네요. 다락방 님이 이미 읽으신 책일지도? 전 이 책 말고 최근에 사서 읽은 츠바이크 <감정의 혼란> 알고 보니 아주 예전에 구판으로 읽은 책이더라고요. 물론 그럼에도 거의 새로운 책인 듯 읽었지만 말이에요. -_-;;; 책을 많이 읽으면 기억력이 참... ㅋㅋㅋㅋ 물론 많이 사도 기억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전 전자책으로 산 책(방이나 책꽂이에서 잘 안 보이니까 안 산 책인 줄 알고) 종이책으로 또 산 적 있어요....최근 일입니다;; -_-

다락방 2019-06-04 17:21   좋아요 0 | URL
역시 ㅋㅋ 비밀의 숲 읽었어요. 아 그러면 사지 않아도 되겠지만 ㅋㅋㅋ 새 책은 갖고싶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욕망이네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19-06-04 17:25   좋아요 0 | URL
술에 대한 욕망이 벌써 책으로 승화된 것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이 웃음이 왠지 벌써 금주로 인한 정신착란처럼 느껴지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4 1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보신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19-06-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달리기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읽고 제자신의 게으름에 반성까지 한걸보면 작가로서 또 마라토너로서의 하루키에겐 분명 배울점이 있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의 글은 절로 미소짓게 하구요. 저도 조만간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9-06-05 22: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하루키에겐 말씀하신 그런 부분이 본받을만하죠. 이 책도 괜찮고 그의 다른 에세이도 좋으니 조만간 읽게되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