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7년 전인가 문학동네에서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그걸 한 번에 다 읽어치웠다. 동생이 생일선물로 뭘 해줄까 물었을 때, 때마침 나왔던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을 몽땅 사달라고 했던 것 같다. 모두 다섯 권. 그때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한 권이 더 나왔다. 게다가 제목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란다. 7년 전과 달리 요즘 내 일상에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때는 고양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고양이가 만날 내 곁에서 자고 함께 일어나고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 사이 나는 집사가 되었다. 그저 집사가 되고 아니고의 차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7년 전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요즘의 나는 밖에 있다가도 문득 우리 고양이가 보고 싶어질 만큼, 길에서 만나는 길고양이들은 모두 귀엽고 불쌍할 만큼, SNS에서 팔로우하는 것은 거의 다 고양이일 만큼 고양이 환자가 되었다. 그런 내게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제목은 혹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하루키 에세이가 아닌가.


고백하건대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은지는 꽤 됐다. <1Q84>니 <기사단장 죽이기>니 모두 읽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장편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마지막이다. 아마 이 책을 덮으면서 으음, 이제 하루키의 소설, 적어도 장편은 그만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장편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그런 주제(!)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버스데이 걸>은 읽었는데 이것도 딱히 좋지 않았다. 영화 <버닝> 때문에 <반딧불이>에 수록된 ‘헛간을 태우다’까지는 다시 읽어볼까 했는데, 그것조차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읽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하루키가 쓴 소설을 읽는 날이 올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매우 드물기는 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는 제법 꾸준히 읽고 있다. 하루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일상의 소소한 재미랄까 대단하지는 않은 행복이랄까 이런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두부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하루키 에세이는 그 심심한 두부의 맛에 견줄 만하다. 별 것 아닌데 괜히 계속 집어 먹게 되는 그런 맛이랄까. 게다가 그의 소설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요소, 예를 들자면 온갖 여성 등장인물들이 별 매력도 없는 남주인공을 하나 같이 다 좋아하거나 그와 함께 자려고 드는, 결국 그래서 다 섹스하게 되는(나는 이걸 하루키 판타지라고 부른다), 그런 설정이 에세이에서는 없으니까(하루키도 에세이에선 그럴 수가 없겠지) 그런 점 때문에라도 그의 에세이를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하루키는 어떤 면에서는 본받을 만한 점도 꽤 많다. 달리면서 자신을 관리한다는 점이라든가(물론 그는 그걸 관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문단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점이라든가, 싫은 건 곧 죽어도 거절하고야 마는 외돌토리 같은 성격이라든가 등등. 이런 점은 한 작가, 아니 한 인간으로서 그를 돋보이게 만든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어쩌면 나는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설 속의 그 허황된 왕자병 기질 남주인공들보다 하루키라는 작가가 차라리 인간적으로는 더 매력이 있기에, 그의 에세이를 나오는 족족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는 그런 하루키가 오랜 시간 함께한 고양이 ‘뮤즈’와의 일화가 실려 있다고 하기에 더욱 솔깃해서 읽게 되었다. 책장을 몇 쪽 넘기지 않아도 곧 아, 이게 하루키 에세이지 하는 생각이 단박에 든다. 야구, 맥주, 음악, 달리기, 책, 글쓰기 등등 하루키하면 떠오르는 일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 그러나 그렇기에 익숙하고 친근감 있는 생활(‘삶’이 아니다 ‘생활’이다). 거기에 고양이와의 일상이 덧붙여졌다. ‘뮤즈’와 관련된 이야기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책장을 넘겨보니 거의 중반쯤에 가야 볼 수 있다. 이것부터 읽을까? 유혹을 느끼지만 맛있는 것은 나중에 먹으려는 심산으로 일단 참는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아무튼 하이라이트는 고양이 뮤즈와 얽힌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껴두자. 그러고는 읽어나간다. 큭큭, 낄낄 웃게 되는 이야기가 많은데, 몇몇 일화에서는 정말이지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특히 ‘필명을 쓸 걸 그랬나 싶지만’에서 빵 터졌다. 하필이면 피부과와 성병과를 함께 진료하는 병원에 간 하루키가 겪은 일화인데, 궁금한 분은 직접 읽어보시라-

그렇다고 웃기기만 하느냐 하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문단의 병폐나 학교의 체벌 문제 등을 비판하기도 하고, 상처받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때로는 감동으로 뭉클해지는 순간도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받은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하나는 ‘뮤즈’와 얽힌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달리기와 얽힌 이야기인데, 그중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읽다가는 조금 울컥했다. 하루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마라톤 선수를 떠올리며 ‘그가 치렀던 고생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부분에서는 왠지 나도 울 것만 같았다. 하루키의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서……. 뮤즈가 출산할 때면 꼭 하루키 손을 붙잡고 새끼를 낳는 바람에 하루키 아내가 “걔들, 혹시 당신 아이 아니야?”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는 큭큭 웃음이 터지다가도, 뮤즈와 하루키만의 교감,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에서는 가슴 뭉클해진다. 그 느낌을 나 또한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출산은 아니지만 내가 우리 고양이들 중성화 수술을 하러 몇 번씩 병원을 오갈 때마다 느꼈던 녀석들과 나 사이의 믿음이랄까. 하루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를 느낀 것이다.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여행갈 때면 체호프 전집을 가져간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하루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단편소설 중심이라 끊어 읽기 쉽다. 어느 작품이나 완성도가 높아서 실망하는 일이 거의 없다. 문장이 읽기 쉽고 담박하면서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향취가 충만하다. 혹 누가 제목을 보더라도 ‘체호프를 읽는다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군’이라고 생각해준다. 몇 번씩 읽어도 질리지 않고 매번 새롭게 작은 발견을 한다.”(239쪽) 체호프 작품은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을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듯한 그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다는 이야기, 일본 편의점이나 상점에서 흔히 쓰는 이상한 표현 ‘맡아두겠습니다’라는 말이 싫다는 이야기(우리나라로 치면 ‘십만원이십니다’ 또는 ‘설렁탕되십니다’처럼 가격이나 음식에 경어를 붙이는 표현을 거북해하는 것쯤 될까?) 등등. 손님 없는 초밥집에서 초밥을 주문해 먹을 때의 그 어색하고도 긴장되는 분위기를 묘사한 구절에서는 ‘나도! 나도!’를 외치게 된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하루키이지만 한때는 3만 엔이 없어서 아내와 함께 거의 울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고(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탈모 때문에 걱정하기도 하며, 글 쓰라고 호텔방을 빌려줬는데, 방 안에 있던 어떤 물건 때문에 글을 통 쓰지 못한 이야기 등등은 인간 하루키를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게다가 그가 레이먼드 카버를 만난 일화는 꽤 부럽기도 하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이렇게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하루키의 에세이의 장점이 잘 드러난 책이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느긋한 기분으로 캔 맥주 하나를 따서 홀짝홀짝 마시며, 곁에서 잠든 고양이의 포근한 궁둥이를 쓰다듬으면서 읽으면 딱 좋을 그런 에세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뮤즈’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다. 뮤즈가 장수한 비밀 대공개! 이런 정도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밀도 딱히 없는 듯해서 조금 섭섭했습니다, 하루키 씨. 그래도 책을 덮을 즈음엔 내가 책을 읽을 때나 뭔가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거나 컴퓨터 자판을 탁탁 칠 때면 늘 훼방을 놓는 나의 막내 고양이를 조금은 더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으음.




집에 있던 하루키 에세이 윗부분에는 우리집 고양이들 털이 살포시 앉아 있군요.... 으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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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0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다보니 이미 다른 에세이집에서 읽었던 것들이 겹치는 것 같네요. 극장 자막 얘기 부분 다른 에세이에서도 읽었거든요. 그렇다고 안읽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사겠습니다! ㅋㅋㅋㅋ 아 그런데 좀 나중에.. (하아-)
저는 오늘도 예스에서 주문한 책이 왔어요 ㅠㅠ 단 한권이긴 하지만요..

잠자냥 2019-06-04 17: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책 사느라 숨가쁘신 이분 ㅋㅋㅋ 숨 좀 돌리세요!
이 책 보니까 <비밀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개정판이라고 하네요. 다락방 님이 이미 읽으신 책일지도? 전 이 책 말고 최근에 사서 읽은 츠바이크 <감정의 혼란> 알고 보니 아주 예전에 구판으로 읽은 책이더라고요. 물론 그럼에도 거의 새로운 책인 듯 읽었지만 말이에요. -_-;;; 책을 많이 읽으면 기억력이 참... ㅋㅋㅋㅋ 물론 많이 사도 기억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전 전자책으로 산 책(방이나 책꽂이에서 잘 안 보이니까 안 산 책인 줄 알고) 종이책으로 또 산 적 있어요....최근 일입니다;; -_-

다락방 2019-06-04 17:21   좋아요 0 | URL
역시 ㅋㅋ 비밀의 숲 읽었어요. 아 그러면 사지 않아도 되겠지만 ㅋㅋㅋ 새 책은 갖고싶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욕망이네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19-06-04 17:25   좋아요 0 | URL
술에 대한 욕망이 벌써 책으로 승화된 것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이 웃음이 왠지 벌써 금주로 인한 정신착란처럼 느껴지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4 1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보신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19-06-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달리기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읽고 제자신의 게으름에 반성까지 한걸보면 작가로서 또 마라토너로서의 하루키에겐 분명 배울점이 있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의 글은 절로 미소짓게 하구요. 저도 조만간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9-06-05 22: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하루키에겐 말씀하신 그런 부분이 본받을만하죠. 이 책도 괜찮고 그의 다른 에세이도 좋으니 조만간 읽게되시길 바랄게요~~